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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만 교수]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하자
    나이 들고 은퇴가 가까워지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시간 생각하면 아쉽고 후회스러운 점 있지만 감사할 일들이 더 많다. 많이 모자란 사람이 그저 은혜로 여기까지 왔구나 싶다. 아울러 남은 시간 더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다짐 한다. 그 가운데 요즘 들어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큐로스를 곧잘 생각한다. 에피큐로스(BC 341-BC 270)의 가르침은 대단히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곧 쾌락은 좋은 것이고, 삶의 목표는 가능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기쁨과 쾌락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우리 삶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가령 신들이 있고 그들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신들의 심판과 저주를 생각하며 살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조언한다.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설혹 있어도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당신에게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들 생각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각자 알아서 행복의 길을 찾으라.’ 더 나아가 그는 영혼도 내세도 부인한다. 이들은 몸이 죽으면 영혼(정신작용)도 끝나고 그것으로 끝이니 영혼이니 내세니 하는 데 골몰하여 지금 눈앞의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에피큐로스의 이런 주장 때문에 그의 사유는 보통 쾌락주의(Hedonism)로 간주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쾌락주의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들이 말하는 쾌락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 쾌락이었다. 그는 귀족이나 부자 남성 같은 특권층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권한이 있으며 사회 역시 이처럼 그 구성원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쾌락에도 등급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이 볼 때 맛있는 것을 먹고, 원하는 물건을 소유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 역시 쾌락을 주지만 이런 종류의 쾌락은 일시적이고 열등한 쾌락이며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쾌락이다. 곧 이들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정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쾌락이며 삶은 이런 높은 차원의 쾌락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도 없고 내세도 없다는 에피큐로스의 주장은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있고, 행복에는 등급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누구도 차별 없이 모두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실상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긍지있고 행복하게 살게 하려 하심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최근 들어 좀 더 행복하게 지낼 길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취미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기타를 다시 손에 잡았고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고 친교를 나누니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설교, 행복한 강의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스스로 먼저 행복하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분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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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8-18
  • [최현범목사] 정치화의 위기에 서 있는 한국교회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칼 트루먼은 동성애나 낙태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면서도 공평과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진보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쓴 ‘진보 보수 기독교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일차적인 이유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보수적 정당 정치와 기독교적 충성을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험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나의 확신 때문이다.” 그가 지적하는바 오늘날 미국교회가 당면한 이런 문제는, 항상 미국교회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하는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특정 정당의 정치를 기독교적인 것과 동일시하게 된다면, 그는 그 정당에 대한 지지를 주님께 대한 충성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를 말하고 정치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정치가 아니라, 신앙 행위를 하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그가 목회자라면 설교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하면서 교인들을 바른 신앙으로 일깨우고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처럼 하지 않는 사람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정치를 종교화하는 것인데, 이런 정치의 종교화는 교회의 정치화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동안 정교분리를 강조하면서 정치를 신앙과 무관하게 여겼던 한국교회는 오늘날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작년에 만났던 한 선교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그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몇 년 전만 해도 그가 한국을 방문하면 만나는 목회자마다 주로 목회나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 놀란 것은 그 목회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정치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정치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임목사들이 목회에 관해 정보를 나누는 단톡방에 어떤 목사가 정치 이야기를 자꾸 올렸다. 한 분이 참다못해 ‘이 방은 정치가 아니라 목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입니다’라고 하자, 이어서 올라온 답글은 ‘나는 정치가 아니라 신앙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였다. 이런 사고에서 더 이상 대화가 가능할까? 나는 단톡방에 정치 이야기를 올린 것보다 이런 사고방식이 더 심각한 문제라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 이런 왜곡된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모인 다양한 기독교 연합회는 선거철만 되면 아무런 가책이나 문제의식 없이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신문에 올린다. 본인들은 이것을 기독교를 위한 사명이라 여길지 모르나, 실상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행위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한 국가 안에 살고 있기에 정치와 무관할 수 없고, 무관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국가에 대해서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가르치고 있고, 정치적인 책임과 아울러 예언자적인 사명도 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국가와 교회의 관계, 공적 신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 역사에서 국가와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는 일들은 항상 반복되었다. 중세 가톨릭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유럽제국의 개신교회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특별히 독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극우 정당인 나치가 집권했을 때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적극 환영했고, 히틀러를 하나님이 독일교회를 위해 보낸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며 지지했다. “나치즘은 실증적인 기독교이고, 히틀러(나치)는 이제 하나님의 영과 의지가 독일 민족의 교회를 향하는 길이다.”(‘독일 신앙인의 고백’ 중) 이들은 정치를 기독교화하면서 정당에 대한 지지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간주한 것이다. 독일교회가 보여준 이런 왜곡된 현상은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다. 트루먼은 미국교회의 문제 역시 정치를 너무 종교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고 말한다. 정치는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다. 아직 죄가 관영하는 세상에서 어떤 정치이념도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시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진리 앞에서 다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좀 더 나은 정치와 좀 더 나쁜 정치가 있고 좀 더 나은 정치이념과 좀 더 못한 것이 있을 뿐이다. 민주 진영을 대표할만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나쁜 체제이지만 지금까지 시도해본 다른 어떤 체제보다 낫다고 했다. 그런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현실 정치에서 조금 물러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의거해 모든 정당을 초월한 사회비판적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기독교 진리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이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 양식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이런 교회의 정치화는 결국에 가서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면서 교회를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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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7-21
  • [김태영 목사] 노동의 가치
    고려와 조선은 1,000년 이상 신분제도가 정착되어서 하층민이 상층의 신분을 갖는다는 것은 운명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사회 진출마저 막혀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파가 득세하고 나라가 무너졌으니 관직이 삭탈 당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하면서 서서히 신분제도가 허물어졌고, 6·25 전쟁으로 강토가 폐허가 되자 신분과 빈부격차라는 것은 해체되다시피 했다. 더구나 대한민국, 민(民)이 주인인 세상이 됐으니 신분제도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국가재건과 함께 일자리 기회와 자식들 공부를 위하여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판잣집, 행상, 공사판 일용직, 파출부를 하면서도 도시로 몰려들었다. 땀, 노동, 노력, 공부를 하면 누구든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경쟁의 시대를 만들었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인간을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정의하였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도구를 개발함으로 문화를 창조하며 발전시켰다는 뜻이다. 도구는 인간을 ‘노동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동물에게는 노동이 있겠지만 생존을 위한 노동이지 사람과 같은 보람과 의미, 재화 축적과 즐거움의 노동은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노동을 하나님의 징벌 혹은 인간의 죄의 댓가라고 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물론 선악과를 먹은 후에 창세기 3:16-19에 의하면 땅이 저주를 받아서 엉겅퀴와 가시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리고 해산의 고통이 따랐다. 그러나 인간 타락 이전에 인간을 지으신 후 창조주가 처음으로 주신 말씀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는 것이었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사명)을 주셨고,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며’라고 하였다. ‘경작’은 히브리어로 「아바드」(일하다, 봉사하다, 섬기다, 노동하다), ‘지키다’는 히브리어로 「샤마르」(보호하다, 지키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범죄하기 전에 이미 인간에게 노동을 명하셨다. 범죄 이후에 그 노동이 괴롭고 힘들게 됐을 뿐이다. 현대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주중에 열심히 일하고 주일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하는 기쁨, 일터가 있음에 감사, 노동의 가치와 신성, 나아가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직업소명론(천직)을 깨달아 단순히 재화를 얻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말씀처럼, 노동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인생으로, 땀 흘리는 기쁨, 봉사하는 삶으로 살아가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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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6-30
  • [최병학 목사] ‘신화적 폭력’에 맞서는 ‘신적 폭력’
    “권력은 1, 2, 3차원으로 분류되는데, ‘직접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권력’인 1차원적 권력과 ‘법이라는 간접적 힘’으로 통치하는 2차원적 권력, 그리고 ‘설득과 영향력으로 부지불식간에 작용’하는 3차원적 권력이 그것이다.” 『3차원적 권력론』(나남, 1992)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정치 이론가인 스티븐 룩스 교수의 권력에 관한 정의이다. 사실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며,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으로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 ‘다양하게/극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우리는 ‘군부독재’와 ‘검찰 지배’, 그리고 ‘언론의 편향성’으로 이 3가지 권력을 맛보았고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권력이 오용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불의한 권력의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을 구분하며 신적 폭력을 지지하는데, “신적 폭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신화적 폭력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가리키고, 신적 폭력의 ‘신’은 유대교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먼저 신화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베냐민은 그리스 신화 속의 ‘니오베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딸 각각 일곱 명을 두었고 그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따라서 니오베는 자신이 레토(Leto) 여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낸 불경죄를 저질렀다.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 한 명씩밖에 없었던 레토는 화가 나서 두 자녀로 하여금 니오베의 아들,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결국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는 신화인데, 여기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이다. 법 정립적이고 경계 설정의 폭력이다. 반면, 베냐민이 예를 든 신적 폭력의 사례는 구약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이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으나,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모세가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것이 반기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같은 레위 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숨어 있었다. 이것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따라서 모세가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여호와는 땅을 가르고 불길을 솟아 오르게 해 고라의 무리를 한꺼번에 소멸했다(민 16:32-35).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냐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라고 말한다. 곧,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법 정립적이고 경계 설정의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인 것이다. 따라서 베냐민은 이 신적 폭력을 ‘순수한 폭력’이라고 옹호하였다. 신화적 폭력이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 자족하지만, 신적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신화적 폭력으로 변질된 1, 2, 3차원 권력의 폭력에 맞서 그리스도인의 신적 폭력을 묻는 우리 시대가 참 비극적이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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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6-09
  • [송길원 목사] 내면의 배고픔, ‘외로움과 고립’
    6월 23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과부(寡婦)의 날’이다. 국제 과부의 날은 2010년 유엔이 정했다. 인도 펀잡 지방 출신 기업인 라즈 룸바(Raj Loomba, 1943~)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려 만들었다. 과부였던 어머니는 자신을 비롯 7남매를 길러냈다. 그가 설립한 ‘룸바 재단’에 따르면 설립 당시인 2015년 기준, 전 세계 과부가 2억 5,900만 명이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5억 8,500만 명의 자녀들이 양육을 받았다. 그들 과부 중 1억 1,500만 명이 가난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당한다. 이들 과부를 넘어서 지구촌은 또 다른 가난, ‘내면의 배고픔(외로움과 고립)’을 겪고 있다. 고령층이 그들이다. 거기에다 1인 가구도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30% 가까운 사람들이 항상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는 통계가 여럿이다. 세상은 초연결사회로 치닫고 있지만 여전히 모든 인간은 ‘외딴섬’처럼 살아가고 있다. 알베르 코엔은 장편소설〈내 어머니의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고, 남의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저마다의 괴로움은 황량하고 쓸쓸한 섬과도 같다.” 미국 공중보건 서비스단의 보고에 의하면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리는 이들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29% 더 높다. 뇌졸중은 32%, 치매는 50% 더 크다. 노화 속도는 1년 8개월 더 빨랐고 인지능력은 20% 더 빨리 저하됐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비벡 머시 단장은 외로움이 하루 담배 15개비만큼 해롭다며 외로움과 고립을 공중보건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외로움과 고립으로 인한 ‘내면의 배고픔’은 개인의 몫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외로움으로 인한 치매 등 건강 문제가 증가되었다. 업무 효율 저하를 넘어서 자살 및 고독사가 증가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국가 차원의 국민 돌봄이 필요해졌다. 영국은 2018년 1월,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직을 신설했다. 인간이 가진 고독과 소외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을 줄이는 일이 의료비는 물론 교통사고와 범죄를 줄인다. 자살 예방의 최선책이 된다. 2021년 일본은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총리관저 내각관방에 고독·고립 대책실을 출범시켰다. 외로움 시장이 커지면서 반려 로봇 상용화도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궁극의 공감기계’라 불리는 VR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한마디로 하면 세상은 ‘외로움’과 전쟁 중이다. 반려동물이 늘고 있다. 위로에 대한 갈망이다. 위로를 준 반려동물도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느냐는 질문과 상담이 늘었다고 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외로움과 고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믿음 없는 소리라고만 치부하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3대 약자’가 자주 언급된다. ‘고아’, ‘과부’, ‘나그네’가 그들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고 돌봐야 할 것을 강조한다. 율법서만이 아니다. 예언자들 메시지에도 이런 정신은 자주 언급된다. 4계명의 안식일 법은 대표적인 약자 보호법이나 다를 바 없다. 요즘 말로 하면 ‘약자와의 동행’이다. 신약성경으로 눈길을 돌리면 과부들에게도 적극적인 주문을 한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딤전 5:5)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외로움을 ‘몸과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질병’으로 정의했다. 하나님은 이 질병에 대해 어떤 처방을 가지고 계신 걸까? “하나님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가정을 이루시고 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풀어 주신다.”(시 68:6, 우리말) 개역개정은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로 번역했다. 가정의 달이다.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이 헛구호가 되지 않도록 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저들의 요구는 딱 하나다. “외로운 영혼을 품어다오.” 오늘따라 시편 기자의 간구가 가슴을 울린다. “주님, 나를 돌아다보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 원수가 내 마음에 고통을 더하니, 나를 이 아픔에서 건져 주십시오. 내 괴로움과 근심을 살펴 주십시오.”(시 25:16~22, 표준새번역)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부부 주일... 교회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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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전영헌 목사] 엄마, 나 오늘 행복했어
    “엄마, 나 오늘 하루 행복했어.” 학교의 3월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새로운 아이들과의 적응,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학사 업무들까지 여러 업무들이 복잡하게 얽혀가다보니 3월이 길기도 하고, 빨리 지치기도 한다. 작년 가을부터 고신대 겸임교수 업무까지 겹치다보니 평상시보다 더 버거운 학기초의 시간이었다. 4년 만에 재개된 학부모 대상 학교설명회까지 교목실이 주관해야 하다 보니 여유없는 일상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수업, 채플, 행정 등 여러 학교 업무들이 아무리 바빠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게 있는데 학생, 학부모 상담이다. 3월 중순 종교수업을 마치고 교목실로 왔더니 제자 하나가 나를 급히 따라왔다. “목사님 지금 상담이 가능할까요?” “ㅇㅇ야, 오늘 학교행사(학교 설명회) 준비 때문에 지금 시간이 안되는데 내일 1교시에 보자.내일 아침에 무조건 너 먼저 만날게.” 직감적으로 미루어도 되는 상담인지 즉시 필요한 상담인지는 이젠 빠르게 판단할 경험치가 쌓인지라 이 제자는 급히 봐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하지마자 제자를 찾았다. 교목실에 들어오는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상담의 내용은 중학교 때까지 왕따를 당한 상처로 인해서 친구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거절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심이 입학 후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웃는데 웃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충분히 들어주고,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드디어 얼굴에 머금은 눈물과 함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마무리 지으며 결론을 내려줬다. “ㅇㅇ야, 네가 다녔던 중학교 때까지는 지금 네 담임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안 계셨고, 그리고 목사님이 그 학교에 없었어. 근데 지금 이 학교에는 네 담임선생님도 계시고 나도 있어. 그럼 된거야” 그러자 환하게 웃었다. 그날 하루를 잘 지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날 ㅇㅇ는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엄마 나 오늘 행복한 하루 보냈어.” 지난 10년 동안 학교를 다녀도 끌려가듯 갔던 학교여서 엄마 아빠는 늘 기도했었는데, 처음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하니 어머니는 울면서 감사 인사 전화를 주셨다. 여전히 이 아이는 고비 고비를 계속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젠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돌파를 위한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아이들의 행복. 이것은 나의 행복이기도 하다. 매일 사라지는 초코파이를 또 채워야 하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작은 것 하나에 행복해하니 은퇴 때까지 퍼먹이는 일을 어찌 멈추겠는가. 올 한해도 이러한 행복의 시간이 많아지길 기대하며 3월, 4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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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탁지일교수] 사이비 신들의 세상
    최근 이단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관심을 끌면서, 교회에 대한 사회적 오해와 불신과 냉소도 함께 깊어지는 양상이다. 교회는 교리적 이유로 정통과 이단을 비교적 명료하게 분류하지만, 사회는 아직도 이단 시비를 ‘교회 안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평가하는 경향성이 여전히 짙다. “나는 신이다”의 후폭풍이 불고 있다. 긍정적인 면은, 넷플릭스 방영 이후,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과 관심이 높아졌고, 정부의 법적 대응도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나타나고 있다. 즉 사회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오해와 외면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인제공자이자 가해자인 이단이 문제인데, 엉뚱하게도 교회가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이단들이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일반인들이 이름만으로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특히 문화행사나 사회봉사 등으로 ‘위장’하고, 자신들의 소속이나 교리에 대해서는 ‘거짓말’로 일관하는 이단들을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조차 분별하기 쉽지 않다. 한국교회는 “나는 신이다”로 인해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직면하고 있다. 이단의 위험성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공감과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만약 교회가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노출한다면, 교회나 이단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너나 잘하세요!’라는 냉소적 비난을 받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교회의 자정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순전하고 정결한 교회가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단의 범죄는 엄벌하고, 동일한 교회의 잘못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면, 이는 불공평하다. 정통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비상식적·반사회적 범죄는 엄격한 잣대로 가중 처벌해야 한다. “나는 신이다”를 통해 그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이비 신’들에게 효과적으로 응전하기 위해서, 교회의 정결함은 필수요건이다. 한편 이단대처의 중심축이 되어야 할 기독교연합기관들이 난립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사리사욕이나 자리다툼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적 이단대처 활동이 필요하다. 또한 전국 단위의 이벤트성, 언론 홍보성, 이단대처 퍼포먼스보다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실제적이고 실효성 있는 이단예방과 대처 활동이 필요하다. 아베신조 전 총리 피격살해 사건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 운영 중인 ‘피해자신고센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단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원스톱 이단피해 지원 및 신고센터’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신중히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 사이비종교 피해자가 신고를 해 오면,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형사적, 법률적, 심리적, 신앙적 지원을 필요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이단사이비 문제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한국사회를 뒤흔든 사건들 중에서, 사이비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사건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단사이비에 대처하는 교회의 노력은, 이제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이 되었다. ‘사이비 신들의 세상’을 와해시킬 수 있는, 교회의 강력한 한 수가 필요하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3-20
  • [김정환 사무총장] 하나님 주신 세상, 그 안에서 안전한 살 우리의 권리
    2015년 부산 시민은 힘을 합하여 30년 수명 후 10년을 더 사용한 뒤 다시 10년의 수명을 더 연장하여 사용하려고 했던 고리1호기를 마침내 폐로하였습니다. 수명이 다한 원전은 폐로가 답임을 믿고 있었던 약속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정권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시 바뀌었고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40년의 수명을 다한 고리 2호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리원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을 확정했으며 이는 부산을 영구적인 핵폐기장으로 만들 수 있는 발전소 부지 내 건식 임시저장시설이 추진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울·경 지역은 세계 제1의 원전 밀집도뿐 아니라 노후원전 및 영구적인 핵폐기장까지 떠안게 되는 상황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후쿠시만 방사능오염수를 해양으로 흘려보내려고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시민들에게 정확히 공개하고 있지 않으며 대상 지역의 주민들에게만 거듭된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리에서 반경 20km 이내에 해운대가 있고 30km이내에 서면이 있습니다. 방사선 비상계획구역 내에 부산·울산·경남 시민 380만명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대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적용될 동시 대비 계획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수원은 고리2호기 수명연장을 위해 방사선환경영향평가 공람과 공청회를 지역을 돌면서 진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한수원의 모습은 많은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였고 공청회 과정에서 보여야 할 시민과의 소통과 교감은 갈등과 대결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리2호기에 이어 후속으로 3호기, 4호기 등 원전이 계속 설계 수명이 만료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일원으로 부산 시민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며 꼼꼼히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크고 작은 원전 사고는 엄청난 인명과 재산, 자연을 순식간에 훼손시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명확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연장 해도 문제없고 안전하다고만 하는 한수원의 말을 우리는 신뢰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를 위해서, 또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 우리는 용기를 내어 참여하고 말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지 12년이 되었지만 그 피해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 어떤 정치적 견해도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미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이미 발생했고 진행 중인 경험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 안전이 도시 부산을 위해 고리2호기 수명연장과 영구화될 고준위 핵폐기장 계획은 함께 힘을 모아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생명을 더 이상 망가뜨리는 우리가 아니라 생명이 숨쉬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가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권리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함께 참여하고 행동해 주기를 소망해 봅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3-06
  • [김기현 목사]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동아시아 사람에게는 익숙한 선문답 같다. 깊이 들여다보면 아둔한 사람이 ‘퍽’ ‘확’ ‘쾅’ 깨치는 천둥 같은 가르침이지만, 설렁설렁 보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 같달까. 종잡기 어렵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골이 깊다. 어리석은 제자들과 지혜로운 예수 사이의 대화는 어리숙한 신자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좋은 교육이다. 우리 주님 말씀, 참, 맥락 없다, 제자들에게. 기껏 드실 양식 구하느라 온 동네 돌아다니며 탁발을 했건만, 스승이 한술 떠야 제자도 먹는데, 얌체처럼 혼자 드셨다는 건가, 뭔가. 드실 것이 있으면 나눠 먹어야지. 제자 수준에서는 알아먹지 못할 말씀만 하는 예수님이 멀면서도 오묘해 보인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론으로 풀면 되지 싶다. 인간이란 무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동물과 천사의 두 얼굴을 지녔다. 동물이란 본능, 욕망, 야수적 폭력과 악을 말하고, 천사는 동물적 제약을 뛰어넘은 인간, 곧 철학에서 말하는 성찰적 인간일 테고, 신학에서는 초월적 관점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이다.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와 타인을 보기, 그리고 사랑하기. 그러니까 여기서 양식은 제자들에게 동물적 차원, 예수에게는 천사적 맥락인 게다. 분명히 말하지만, 피곤해서 우물가 기대고 누운 예수에게 주린 배를 채울 양식이 필요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되고 만다. 몸이 없는 영은 없다. 영이 육이 되었고, 변화된 몸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풀 스토리에서 보면, 영과 육은 하나다. 말씀 없이 살 수 없고, 밥 없이도 못 산다. 인간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닌 것을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인간은 신(神)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이유를 소크라테스와 톨스토이는 ‘생각’에서 찾는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은 기계적, 산수적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행위를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본능적,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단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가른다. 바로 ‘의미’이다. ‘가치’라고 해도 된다. 먹기만 하고, 배만 부르면 끝인 것이 동물과 인간의 공통점이지만, 아니, 인간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먹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추구한다. 그것이 없으면 동물이 되고 만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동물이 자살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게 있다는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데, 하여간에 인간만 자살을 한다. 하긴, 대량 학살을 하는 것도 인간이지. 그것은 공허해서 그렇다. 살 이유와 의미를 모르면 죽음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살 이유와 의미를 찾으면 그걸 위해 죽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전에 도를 듣고 깨치기만 한다면,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신 말씀은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장삼이사의 희로애락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겠으며, 오병이어 표적을 일으킬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 없이는, 그러니까 육체적 주림을 해결해야 영적인 것도 찾는다. 아니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동시적이라고 해도 되고. 우리 사회의 한켠에는 여전히 먹을 것의 문제로 고달픈 이들이 많다. 다른 한쪽에는 의미의 부재로 인한 영적 공허와 허기로 방황하고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이들이 많다. 앞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마가복음의 이적 또는 요한복음의 표적이 필요하다. 뒤의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필요하다. 그걸 먹지 못하니까, 진짜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니까 별 짓 다 하는 거다. C. S. 루이스가 생각나는구나. 그는 일평생 ‘기쁨’(Joy)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뒤에는 어땠을까?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대략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기쁨이었다. 그 기쁨의 근원과 실체를 만난 다음에는 기쁨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다. 그게 인간이다. 의미, 가치를 발견하면 산다. 나는 예수가 좋다. 배가 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맘이 고픈 자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예수가 좋다오. 오늘도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열심히 글을 짓고, 가족들의 먹을 것을 위해, 교우들의 영적 양식을 위해 일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2-10
  • [김성철목사] 가상공간(VR)이 만들 1평의 기적 시대를 준비하자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 많은 부분이 이전 일상으로 회복되고 있다. 변화된 것은 코로나시기에 경험했던 재택근무나 온라인 대면 문화인 온택트(ontact) 문화가 새로운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2022년 2학기 컴퓨터 강의를 진행하면서 현장과 온택트 이원 체계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현장에 온 학생들은 직접 노트북을 가지고 예전처럼 컴퓨터를 배웠다. 반면 온택트에 참여한 학생들은 집에 있는 컴퓨터 앞에서 현장과 연결된 화상을 통해 강의를 듣고 공유된 화면을 보면서 컴퓨터를 배웠다. 현장과 온택트 구분 없이 질문하고 소통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온택트 문화는 거리라는 공간적 난관을 극복하고 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실습을 요하는 컴퓨터 강의에 큰 어려움이 없다면 성경공부나 기도회 등의 교회 모임도 더 쉽게 이원 체계를 통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거리 때문에 참석이 어려운 성도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현장과 온택트 서비스를 함께 진행하는 것도 고려하면 좋겠다. 머지않아 새로운 일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올 또 하나의 문화가 VR 문화이다. VR은 가상현실을 뜻하는 Virtual Reality의 약자이다. VR은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VR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머지않아 또 하나의 일상문화가 될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2021년 11월에 다시 만난 VR문화는 우리 부부의 일상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VR문화는 우리 부부에게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서로 다른 가상공간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나는 VR탁구장에서 탁구경기를 즐기고 아내는 가상 공간에 펼쳐진 큰 체육관에서 강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다양한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탁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취미를 실천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1시간 운동을 위하여 준비하고 이동하고 샤워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은 바쁜 일상 속에서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VR은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가로 세로 1평의 공간만 있다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VR만 착용하면 1평의 공간은 가상공간 안에 완벽한 탁구장을 제공한다. 그곳에는 언제나 함께 운동할 전 세계의 탁구인들이 모여 있다. 실제 탁구장에서 운동하는 것과 90% 이상의 만족감을 느낀다.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주변 목회자들에게 이야기해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얼마 전 자주 만나는 분들과 내가 사용하는 VR기기로 체험의 시간을 가졌다. 한 목회자는 가상현실에 펼쳐진 탁구대가 실제 있는 줄 알고 손을 짚었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일이 생길 정도로 실제처럼 보인다. 앞으로 공간을 찾아서 움직이는 일은 급격하게 줄어 들것이다. 사이버 공간이 제공하는 1평의 기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1평의 공간만 있으면 프라이빗 영화관이 되기도 하고, 체육관이 되기도 한다. 멋진 풍경과 함께하는 회의장과 업무공간을 열 수 있다. VR문화는 이동하지 않고 필요한 공간에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든다. VR문화가 일반화되면 지금까지의 교회의 활동에 더하여 평일에도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실질적인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가능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 평일에 이동에 필요한 시간과 재정을 절약하고 가상공간에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취미가 같은 성도들이 평일 교제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 청년 모임 중 하나로 사이버 공간에 함께 모여 같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나눔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특히 미래세대를 고민하는 교역자들은 앞서 그들의 일상이 될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준비하여 그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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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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