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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민기 목사]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자
    알베르 카뮈가 쓴 페스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도시가 전염병으로 셧다운 되는 배경으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등장 인물 중 파늘루 신부는 이 모든 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외칩니다. 그 공포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다하기 위해 싸우는 의사 리외, 외면하다 결국 자원보건대에 참여하게 되는 랑베르, 가족을 잃은 슬픔을 봉사로 대신하는 그랑등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절망하고 아파하지만 소설은 테스트의 끝을 등장시키며 끝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죄로 어그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과 아픔은 코로나를 통해 더욱 세상을 힘들게 했습니다. 사회가 나뉘어지고 교회가 흔들리고 사람들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는 이웃과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며 소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제 백신을 바라보며 코로나에서 해방될 날을 소망하는 시간에 더욱 이웃을 돌보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널려 있습니다. 삶이라는 여정 속에 고통이라는 계단을 매번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정 속에 아픔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로마 시대에 전염병이 널리 퍼졌을 때 종교인들이 심판이라 하며 떠날 때도 그리스도인들이 병자들과 함께하고 살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기에 더욱 능력을 발하여 아픈 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먹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할 일은 힘들고 지쳐서 더 이상 일어날 소망이 없는 이웃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함께 흘리는 진정한 눈물이 그들의 아픔을 씻기는 작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 중에 우리가 도움이 될 수가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함께하는 것. 그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진심은 언제든지 통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저주로 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선한 능력을 베푸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질병과 아픔 속에 있는 이웃을 가슴으로 품는 것 영적으로 아픈 이웃을 가슴으로 품고 복음을 전하는 것 아픔이 우리를 쓰러지지 않게 하려면 서로의 허리를 붙잡는 것 그래서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쉽게 비난하지 말고 가슴으로 끌어안아 봅시다. 기억나는 이웃을 품고 전화하고 밥을 사고 사랑을 베풉니다. 용기를 주고 사랑을 거저 베풉니다. 주님의 사람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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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5-07
  • [김정환 사무총장]창조 질서의 회복-지구의 시간을 회복시키는 일
    인간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지구의 시간을 단축하고 있다. 폭염과 혹한, 폭우 등 자연재해와 특히 작년부터 올해까지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버린 코로나19의 경험은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모든 시작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와 무절제가 가져온 기후 위기에 기인한 것임을 모두가 공감하면서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기후 위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인간의 중심의 탐욕과 무한경쟁의 결과이며 개발과 성장만을 추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최근 일본에서는 방사능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결정하였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태로 인한 방사능 물질의 축척과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과 혹서, 장마 등의 피해는 어린이와 여성으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고농도의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것은 일본 국민과 주변국의 현재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며, 세대를 거쳐 인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분별한 개발과 성장이 아닌 다르게 살기를 통해 인종과 세대, 빈부와 성별의 차별 없이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좋더라’ 하셨던 세상에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받은 우리들의 무책임과 방조는 창조의 질서를 파괴시키고 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생존권을 위협받지 않는 지구를 미래세대에서 물려주기 위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하신 세상을 잘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태 정의를 실현하고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어 내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매년 4월 22일은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특별한 날 중 하루이다.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해상 원유 유출 사고를 계기로 시작된 이후 2009년부터 우리나라도 ‘지구의 날’을 맞아 소등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도 지구의 날을 맞이하여 세계적으로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부산에서도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원년의 해’로 망가져 가는 지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일들을 진행할 것이다. “탄소중립(Net Zero)” 이란 화석연료 등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최대한 줄이고 불가피하게 배출된 탄소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나무를 심거나 청정에너지 전환 등)를 통해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이 0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2018년 UN 산하의 지구온난화 1.5C〫 특별보고서에 지구의 온도 상승을 인류의 생존한계선인 평균 1.5C〫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 상태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과감한 온실 감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부산YWCA에서도 지역사회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여 기후위기 대응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일을 계속해 나갈 뿐 아니라 매월 회원과 함께하는 생활 속 실천 운동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하며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활동을 해 나가고 있다. 교회도 교인들과 함께 화석연료의 안락함을 위해 선택했던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덜 경쟁하고 덜 먹고 덜 쓰는 삶의 방식과 이를 위한 불편함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실생활에서 탄소제로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 미세먼지 걱정 없는 푸른 하늘과 사계절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일에 목소리를 함께 내도록 교인들을 독려해야 한다. 이와 함께 에너지를 만드는 전 과정이 탄소를 발생시키는 핵발전에너지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태양과 바람과 물을 이용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제도화하도록 정부에 촉구하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정책을 요구하는 일에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조금이라도 행하는 길이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시간을 다시 돌이키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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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4-26
  • [탁지일 교수]담대하게 거침없이 정면승부
    다종교 한국사회의 사이비종교 검증시스템은 긍정적으로 작동해왔다. 종교간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내전(內戰)으로까지 치닫는 국가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다수의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토양이 오래전부터 조성되어 왔다. 특히 신흥종교의 경우, 사회적 역기능이 노출될 때는 스스로 소멸해 나아가도록 통제하거나 유도하고, 순기능적 역할을 할 경우에는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지켜보는 지혜를 발휘해왔다. 신천지와 같이 거짓말과 위장에 능한 사이비 집단들이 이 땅에 발붙이기 어려운 이유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즉 검증된 종교에게는 관용과 지속가능한 여건이 제공되지만, 역기능적 행태를 노출하는 경우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소멸하곤 했다. 천부교, 동방교, 영생교, JMS, 구원파, 신천지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종교적 역할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개성과 투명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단사이비 집단들은, 정체와 교리를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노출하기보다는, 오히려 거짓말과 위장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운다. 신천지는 그들의 거짓말을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여, 교회와 사회를 교란시켜왔다. 신천지가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공개적이고 투명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 지를 명료하게 선언한다. 신실한 기독교인은 언제어디서나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숨긴 적이 없다. 세상이 기독교를 수용하면, 선한 영향력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고, 만약 세상이 기독교를 거부하면, 박해와 순교를 무릅쓰고 신앙을 지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기독교인임을 숨긴 적이 없다. 기독교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롬1:16). 로마군인의 감시 하에 낯선 환경 속에 지내야만 했던 바울이었지만, 복음에 대해 궁금한 이들이 찾아오면, 눈치를 보거나 위축됨 없이 “담대하게 거침없이”(행 28:31)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교회 안으로는, 마음 편히 예배할 수도 없고, 교제할 수도 없는 환경이 주어졌고, 밖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선들로 인해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이단사이비들의 행태는 기독교의 사회적 이미지를 더욱 추락시키고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역병으로 인한 신앙공동체의 고난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역사에 나타난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은, 역병과 고난 속에서도 말씀(케리그마)과 교제(코이노니아)와 봉사(디아코니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감춘 적이 없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불확실한 위기의 시대에 더욱 빛났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가는 곳마다 공개적인 복음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들이 신앙고백을 이어갔다. 콜레라 역병으로 고통 받던 구한말의 선교사들과 신앙인들은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세상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할수록, 기독교인들은 담대하고 거침없는 정면승부는 빛이 난다. 복음의 정면승부, 교회와 이단을 분별하고,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시금석이며, 오늘 한국교회에 주어진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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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송길원 목사] 철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사시사철’의 한자어는 ‘四時四철’이다. ‘철’만 순우리말이다. 사람들은 ‘철’을 모르는 사람들을 ‘철부지(철不知)’라고 한다. ‘철모르는 사람’ ‘철없는 사람’이라 하면 때를 모르는 사람을 이른다. 나이가 들었다고 철드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이 값을 못하는 이를 ‘철딱서니 없다’고 한다. 교회 안에도 철없는 사람들로 수두룩하다. 24절기를 모르고 사는 이들을 ‘철모르는 사람’이라 하듯 교회 절기를 모르는 교인들도 철없는 교인들이 맞다. 절기를 지칭하는 모헤드는 ‘정한 날’, ‘정한 시간’, ‘정한 절기’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시간’이다. ‘하나님과 만나는 신성한 약속’이 절기다. 절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폰 알멘은 「예배- 그 신학과 실천」에서 “교회력을 준수하는 것은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의 시금석이고, 자신의 믿음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는 절기교육이 없다. 철없는 교인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교회력은 ‘그리스도 중심의 절기’로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회복시킨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은 메시아를 갈망하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천천히 그분이 온 세상의 왕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다.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시험,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 고난,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성령의 오심과 교회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최근 <메멘토모리 기독시민연대>는 ‘유쾌한 반란’으로 메멘토모리 커피(Coffee)를 내놓았다. 뚱딴지같지만 흥미를 넘어선 깊은 신학이 담겨 있다. 신약학자 벤 워더링턴(Ben Witherington)은 커피 문화를 창조한 것이 스타벅스가 아닌 교회라고 지적한다. 처음 커피를 발명한 사람은 에디오피아의 수도승이었다. 카푸치노(cappuccino)라는 단어는 이탈리아 카푸친(Capuchin) 수도승들의 의복에 사용되었던 갈색의 색조를 지칭한다.(티시 해리슨 워런의 <오늘이라는 예배> 참고) 카푸친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작은 형제회의 독립된 분파 중 하나였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더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세상과 결별한다. 기도와 가난 겸손을 지향한다. 전염병자들을 돕는데 상상할 수 없는 용기를 보인다. 무엇이 이런 용기를 주었을까? 카푸친 수도회의 본원을 들어서면 지하 납골당이 있다. 십자가도 전등도 테이블도 죄다 해골로 꾸며져 있다. 1599년부터 1920년대까지의 카푸친 출신 수도사들의 유골 4000여구가 동원된다. 수도사들은 서로 마주치면 ‘메멘토 모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죽음을 묵상하라’는 의미였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로 출발한다. 이날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ashes)를 이마에 바르며 선언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 인간은 본질적으로 흙이다. 인류의 첫 사람이 ‘붉은 흙’의 아담이다. 라틴어 ‘호모(homo)’는 ‘흙’이란 의미를 지닌 ‘후무스(humus)’에서 왔다. 흙을 실감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뜻밖에도 커피다. 커피는 결국 흙의 맛이어서다. 입으로 느껴지는 쓰고 달고 신 맛의 감각이 아니다. 커피가 자라난 흙의 맛이 난다. 그 때 커피를 제대로 즐긴다고 말한다. 어디 그 뿐인가? Coffee를 한자어를 파자(破字)하듯 풀이하면 ‘Christ offers forgiveness for everyone everywhere.’(그리스도께서는 어느 곳의 누구라도 용서하십니다)가 된다. 이미 전 세계인의 필수품이 되어 하루에 80억 잔이 소모된다는 커피, 커피와 함께 죽음을 성찰하며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새길 수는 없을까?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도와 금식, 참회의 시간을 보내는데 이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을 듯하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성탄을 온 세상에 퍼뜨렸듯이 커피로 사순절의 소중한 절기와 의미를 알릴 수 없을까? 철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메멘토모리 커피>가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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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3-26
  • [천종호 장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인정은 올바른 신앙의 출발점
    인간에게는 두 가지 근본 전제가 주어져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인간이 피창조적 존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피창조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는 뜻이고,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타자와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전제는 인간 정체성의 근본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 정체성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근본을 부정한다.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올바르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먼저, 무신론자들이 있다. 진화론을 필두로 하는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주만물은 ‘우연’과 ‘필연(우연에서 비롯된 자연법칙)’의 조합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다고 한다. 두 번째로, 신(神)의 내재성만 인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들을 우리는 범신론자(汎神論者)라고 하는데, 범신론자는 우주만물을 초월해 있는 신은 없고 우주만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신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이 산과 바위와 강과 바다와 나무와 풀과 동물과 인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철학, 불교, 힌두교, 현대 포스터모더니즘시대의 영성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세 번째로,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이들은 신이 우주만물과 인간과 자연법칙을 만드신 다음에는 더 이상 인간이나 우주만물의 질서에 개입하시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이들 중에는 이데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여 이데아 세계만이 진실한 세계라는 플라톤주의자,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여 영의 세계만이 선하다는 영지주의자, 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였으나 그 이후의 우주만물에 대한 인격적인 섭리는 인정하지 않고 자연법칙과 인간의 이성을 통해 우주만물의 운행을 맡겨 버렸다는 이신론자(理神論者),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 하나님이 우주대폭발(big bang)을 일으키시고 진화의 법칙을 제정하신 이후 140억 년 동안 우주만물의 질서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진화적 창조론자가 있다. 우리는 우주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초월하실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에 내재하시는 존재이심을 고백한다. 초월적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말한다. 초월적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특성은 ‘거룩성’이고, 거룩성에는 심판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한편, 내재적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 세상에 사랑으로 섭리를 펼치시는 존재를 말한다. 내재적 하나님의 가장 선명한 형태는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땅에 오신 것이다. 이를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내재적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필연이다. 심판을 통과한 피조물들에게는 탕자를 얼싸안고 가락지까지 끼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근대 계몽주의사상과 ‘우주와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권이 저자인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포스터모더니즘사상에 의해 기독교신앙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기독교 신학과 삶의 태도에 있어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는 인간에 대한 악으로, 죄의 결과는 인간 본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로운 질병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추구는 인간의 자아에 대한 지향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율로, 성도의 인격은 인간으로서의 성격(개성)으로, 기도는 명상으로, 죄사함을 통한 인간 본성의 회복을 구하는 기독교적 영성은 인간의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현대적 영성으로, 신학은 심리학이나 상담학으로 대체해 버리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심리’ 속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내재성마저도 부정하는 것이 되고, 결국에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사태를 계속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무너진 주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여 닥쳐 올 위기의 세대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올바른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그리고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바탕으로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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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한석문 목사] 교회음악과 성(聖) 시간
    교회음악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 인간이 자기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는 간구와 영육 간에 필요한 모든 은혜의 간청은 음악으로 더욱 아름답고 애절하게 표현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포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제112조는 “음악은 기도를 감미롭게 표현하거나 일치를 도모하며 거룩한 의식을 더 성대하게 감싸준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성화(聖化)를 지향하는 것이 성가(聖歌)의 목적”이라고도 했다. 음악, 범위를 좁혀서 성가가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계량화해서 분석할 수 없지만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다. 젖소나 닭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우유나 계란이 더 많이 만들어진다는 학자들의 임상실험 결과도 있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야 말로 더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 가사와 선율이 일치된 좋은 성가들을 들을 때 인간의 마음은 천사의 마음처럼 순수하고 경건해질 수 있다. 음악은 예배를 엄숙하고 경건하도록 도와주며,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된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구약시대 사울 왕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소년 다윗이 하프 선율로 그를 안정시켜주었다든지, 성 아우구스티노가 청년 시절 밀라노 성당 예배에 참여했을 때 성가에 감동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들은 교회음악이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쳐주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하지만 교회음악이 대중화 되면서 다소 무분별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 354-430)는 성가를 정의하면서 세 가지 요건을 제시한 바 있다. 즉 음악을 받을 대상이 하나님(Deus)이어야 하고, 수단은 입으로 하는 노래(Cantus)이어야 하며, 내용은 찬미(Laus)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정의가 다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교회음악의 요체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따라서 근래에 유행되는 CCM 류의 음악들은 공교회적인 검증을 받지 않은 다분히 종교적 감정에 호소한 것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성가의 요건에 맞추어 세심히 분별해 부르는 것이 좋겠다. 어느덧 주현절기가 다 지나고 사순절이 다가왔다. 성서 속 악마의 유혹이 쟁쟁하게 들려오는 이 계절은, 종교적 허영을 벗고, 이마에 재를 칠하고,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기억하며,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순례를 시작하는 성(聖) 시간이다. 이 즈음 가장 어울리는 성가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아닐까 싶다. 마태수난곡 (St. Matthew Passion BWV 244) 전 78곡 중 47번째 곡인 “아, 나의 하느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Erbarme Dich)”를 가슴으로 듣고, 온 심장으로 공명하며 이 성스러운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 한석문목사 | 해운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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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송시섭 교수] 그래도 상관없다
    원산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부산이 고향인 어머니를 둔 한 소녀는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힘겨운 현지 적응과정을 거쳐 뉴욕 브롱스 과학고를 나와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조지타운 로스쿨을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병으로 변호사 일을 그만 둔 뒤 그녀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작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17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뿐 아니라, 2019년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 작가의 최신작을 추천하면서 유명해진 그녀의 이름은 이민진(Lee, Min Jin), 그녀의 최근 작품의 제목은 ‘파친코’(PACHINKO)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4대를 걸쳐 살아온 한국인들(在日朝鮮人, ざいにち)의 이야기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20세기 초 부산 영도의 한 끝자락에서 지독한 가난 속에 살던 '양진'과 세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얻은 그녀의 딸 ‘선자’, 선자가 젊은 목사인 남편 ‘백이삭’과 결혼하여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낳은 아들 ‘노아’와 ‘모자수’(모세), 모자수가 낳은 아들 ‘솔로몬’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눈물, 고통과 환희를 그려낸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난 해 이 작품이 국내 유명배우를 캐스팅하여 애플TV에서 8부작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 새해 벽두부터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20세기 초반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 ‘이카이노’에서 벌이는 재일 조선인들의 힘겨운 삶이,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의 위협 속에서 힘겹게 살아나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책장을 넘기면서도 답답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예배가 중단되고, 모임이 폐해지는 지금 현 상황 속에서 그 시대 소설속 등장인물들이 지녔던 신앙의 자세와 믿음의 삶이 다가왔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앙인들은 신사참배에 죽음으로 맞서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성경의 가치를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의심하기도 한다. 작품 속 백이삭 목사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릴 당혹케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우리는 그 분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죠, 때로는 그 분이 행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죠.” 소설 곳곳에서 등장하는 성경구절에 대한 작가의 묵상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풍겨내는 세속적인 텁텁함 속에서 퍼지는 신선한 향기와 같았다. 이렇듯 교회는 그리고 신앙인들은 각 시대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믿음, 그리고 용기를 갖고 넘기 어려운 산, 건너기 힘든 강을 인도한 동반자였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결코 질수 없는 그리하여 반드시 이길 시련을 극복하고 있다. 작가는 신문이나 방송 인터뷰, 그리고 강연을 통해, 두 가지를 늘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장로교 목사의 손녀라는 점, 그리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그녀의 당당한 모습 속에서 그리고 그녀의 글과 대화 속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의 자세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가 MIT에서 행한 강연 중에서 청중을 향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성구(聖句)를 이야기 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창 50:20) 아마도 그녀는 ‘인간은 역사 속에서 악(evil)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선(good)을 보신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녀는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낙관주의이고, 크리스천은 본질적으로 지독한 낙천주의자들이라고 선언한다. 아직도 코로나의 긴 터널은 쉽게 그 끝을 보여주기 않고 있다. 책을 덮으며 소설의 첫 장을 다시 펼쳐보았다.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필자에겐 이 말이 이렇게 읽혔다. “코로나는 우리를 망쳐났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린 이겨낼 것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2-08
  • [최병학 목사] 브라질 민주주의 위기에서 배우자
    지금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특징은 검찰과 사법부의 법 기술자들이 법적 수단과 장치를 동원하여, 보이지도 않고 의식할 수 없는 가운데 야금야금 민주적 제도와 규범을 침식하여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사법쿠데타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브라질의 사법쿠데타를 주도한 법 기술자는 세르지우 모루라는 브라질의 엘리트 연방판사였습니다. 브라질의 경우 우리 검찰이 가진 권한을 판사가 갖고 있죠? 아무튼 모루는 ‘라바 자투’ 곧 ‘세차작전(Operation Car Wash)’이라는 작전명으로 사법 쿠데타를 달성합니다. 과정을 볼까요? 모루 판사는 이탈리아의 정치부패를 소탕한 ‘깨끗한 손(Mani Pulite)’을 참고하여 2014년 세차작전의 수석 판사가 되어 브라질 정치인들과 고위공직자들을 수사합니다. 돈세탁, 반부패 스캔들, 뇌물과 공금유용 등을 지휘하여 선출직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를 구속시키고 사법처리하였습니다. 국민들의 인기도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故 노무현 대통령 때 경험했지만, 모루는 예비구금제도를 이용하여 구속을 유도하고,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용의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언론플레이를 통해 정치인들과 고위공직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고려대 정외과 명예교수인 임혁백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루는 세차작전을 통해 브라질 집권당인 노동당(PT)과 정부 인사들을 구속시켰고, 모루와 야당은 2016년 5월13일 룰라 대통령의 후임인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를 ‘예산작성 규칙 위반’이라는 정책적 실수 혐의로 탄핵시켜, 노동당 정권을 붕괴시켰다. 모루는 사법쿠데타를 멈추지 않고, 차기 민선정부로 표적을 옮겼다. 사법쿠데타 세력인 호드리구 자노트 검찰총장은 호세프를 계승한 미셰우 테메르 대통령을 2017년 6월26일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하였으나, 테메르는 하원의장인 호드리구 마이아의 도움으로 탄핵 소추는 면할 뿐, 식물 대통령으로 남은 임기를 마치고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모루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세계적 민주화 지도자이자 브라질을 경제 위기에서 구하고 발전시킨 룰라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루는 당시 지지율 80%의 룰라에 대한 사법 공격에 들어갔고, 2017년 돈세탁과 간접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시킴으로써, 룰라의 2018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루의 사법쿠데타로 2018년 과거 군부독재 시절 대령 출신인 우익 포퓰리스트 보우소나루(아마존 산불 방치로 유명하죠?)가 룰라가 지명한 후임자 페르난두 아다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또한 모루는 사법쿠데타의 공으로 2018년 법무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지금 모루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요? 자기가 대통령에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2020년 보우소나루가 연방경찰청장을 해임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법무장관직을 사임한 뒤,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부패한 우익 포퓰리스트라고 공격하면서, 2022년 보우소나루에 대항해서 대통령 선거에 나설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혁백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브라질의 신흥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 권력과 법률지식을 동원한 검찰과 언론에 소리 없이 스텔스적인 방식(레이더에 의한 탐지를 어렵게 하는 기술)으로 전복되고 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보이는 거악’이 아니라, 법에 기초한 ‘평범한 악’의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의 ‘거악(巨惡)은 물론이고, ‘이명박근혜’의 ‘쪼잔 한 악’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대신 사법 권력과 법률 지식을 동원한 검찰과 사법부, 그리고 언론의 교활한 악에 맞서야 합니다. 그들은 법과 상식을 표방하기에 더 무섭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오피니언
    • 정론
    2021-01-20
  • [이선복 교수] 크리스천 CEO 유형과 일본 복음화
    1549년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처음으로 일본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며 1872년 요코하마에 개신교 최초 일본기독성공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개신교 복음화율은 0.4%로 매우 낮다. 일본 특유의 종교인 신도와 천황제, 기타 집단성향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독교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해 코로나19 정국가운데도 4편의 논문 중 일본 관련으로 2편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90년부터 2017년까지 OECD가 제공한 28년간의 한일 거시경제 통계자료를 분석, 선교에 미치는 함의를 살펴보았다. 1990년 일본의 8.9%이었던 GDP가 2017년말 현재 31.4%로 변화하였다. 또 25.68%이던 1인당국민소득은 77.40%로 상승되고,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일본 1.16%, 한국 5.19%로 양국의 격차가 감소하였음을 제시하며, 선교 협력에 필요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두 번째는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일본의 크리스천 경영자 연구’로 10명의 CEO를 조사하였다. 즉 일본 크리스천 CEO 10명을 선정하여 유형별로 (1)신앙과 경영이 일치된 모델, (2)신앙과 경영이 분리된 모델, (3)경영을 선교의 도구로 보는 모델 3개로 나누어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파이오니아사의 마츠모토(松本望)는 사명을 복음전기제작소로 할 정도로 철저히 성경적 관점의 경영을 한 점에서 경영과 신앙이 하나된 (1)유형의 CEO로 분류하였다. 모리나가제과의 모리나가(森永太一郎)와 야마자키제빵의 이이지마(飯島延浩)는 (3)유형의 CEO로 분류하였다. 그들은 리어카에 제빵을 팔러 다니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간판을 만들어 복음을 전할 정도로 전도에 열정적이었다. (2)유형은 소니사의 이부카(井深大), 야마토운수의 오구라(小倉昌男), 시세이도의 이케다(池田守男), 모리빌딩의 모리(森泰吉郎), 라이온의 고바야시(小林富次郎), 일본정책투자은행의 하시모토(橋本徹), 무라사키 스포츠의 가나야마(金山良雄)를 들 수 있다. 복음환경이 척박한 일본 땅에도 이처럼 신실한 CEO들이 있었던가? 논문을 쓰며 많은 도전을 받았다. 기업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이윤추구 조직을 넘어, 선교의 장(BAM: Mission as Business)이란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 2021년 새해가 출발을 하였다. 오늘 우리는 각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한번 더 자신에 물어볼 수 있음 좋겠다. 일본과 비교해 기독교 선진국이다, 자화자찬하며 우쭐해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무늬만 크리스천, 철저하게 신앙과 경영이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한해는 특별히 코로나19로 교회와 예배에 대해 논쟁이 많았으며, 기업들 또한 고생이 많았다. 영업이익이 급감하고, 특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모두가 희망찬 새해와 비전을 바라보며 달려갈 수 있음 좋겠다. 복음화율 0.4%의 환경가운데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기술개발을 하고 자신의 일터를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세운 크리스천 CEO들이 있다. 국경을 넘어, 귀한 CEO들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마음으로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2021년 새해 모두가 기업도, 가정도, 교회도, 또 국가도 독수리 날개 쳐 오름과 같이 비상(飛翔)하고 도약(跳躍)하는 한 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하며 기도드린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1-07
  • [김영일 목사] 주님 오신 성탄에 철회되어야 할 일
    코로나 전염병의 재확산으로 인하여 주님오신 성탄이 우울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해마다 이 맘 때면 거리마다 캐롤이 넘쳐 흘러나고, 가판대의 음향에도 독특한 음성과 멜로디의 음악들이 빙그레 미소를 짓게 하곤 했었다.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라는 생각을, 알면서도 한 번쯤은 하면서 거리를 지나치곤 한다. 아무리 상황이 우리를 허탈한 웃음을 짓게 해도, 여전히 성탄절은 우리 앞에 다가오고, 또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기쁨의 소식, 평화의 소식으로 이 세상에 임재하여 계심을 우리는 믿는다. 이번 성탄에도 주님의 은혜로운 소식이 모든 사람, 특별히 힘들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풍성한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가끔 ‘성탄뒤집기’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필자는 종종 해 본다.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금은 머쓱해진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생각에 필자의 이 개구짖은 논리를 동원하여, 이 일만은 꼭 이 성탄에 철회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해 듣고, 깜짝 놀란 마리아는 깊은 산속에 살고 있었던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갓 잉태된 예수님에 대해, 어떤 표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소위 ‘내로라’ 는 인간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잉태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갓 잉태되신 예수님의 잉태사실을 알았던 것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육 개월 정도 된 아이, 세례요한이었다. 그는 당시 칠흑같은 영적 암흑기 시대, 온 세상을 밝히기 위해 아기 예수님으로 오실 메시야, 그 메시야를 가장 먼저 알아본 자는, 요즈음 ‘낙태법제정’ 의 중심에 있었던 바로 아기들이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칼 하지 않은가? 얼마나 감격적으로 반응을 하였던지, 산모였던 엘리사벳까지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이었지 않은가! 예수님의 잉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난 잉태소식, 그 소식에 대해 처녀로서 놀라서 멘토와 같았던 엘리세벳에게 찾아간 사실은, 아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요즈음 낙태법제정의 논의의 중심에 있는, 낙태허용기간을 ‘임신 14주 내외’ 로 할 것에 의하면,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잉태 즉시 생명체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었던 육 개월 정도내외로 추정되는 세례요한의 상황 역시, 모든 인지기능이 완전했던 것으로, 인간이 자기의 의도대로 처리해도 되는 그런 존재는 분명 아니다. 즉 그런 아이를 해치는 낙태죄는 결국 살인이며, 성탄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일에 정면적인 도전이 되는 것이 되고 마는 행위이다. 필자는 여기서 조금 더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예수님 당시 이런 법이 제정되었고, 실시되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인류의 참담한 불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까? 이 성탄을 즈음한 지금의 분위기에 이런 법안제정에 대한 논의들은 더욱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에서만 이 일을 평가한다고 가정하고 또 다른 논의를 해 보자. 예수님 당시 낙태죄가 폐지되었다면, 가장 먼저 그 낙태죄 폐지의 피해자가 예수님이 되지는 않았을까를 생각해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분명히 동정녀이다. 그는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던 것과 요셉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낙태죄가 폐지된다면 예수님은 태중에서 제거되어야 할 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편할 수 있지 않았을 것인가? 필자의 생각이나 논조에 모두 동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주님오신 성탄을 앞 둔 지금 시점에서 낙태죄의 폐지법안 제정의 논의는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고, 우리와 똑같은 생각, 말,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 어떤 항의조차도 박탈된 태아들의 죽음은 주님의 평화가 분명 아닐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순간, 예수님은 독립적인 존재였고, 메시야였었다. 그 사실을 태중에 잉태된 육 개월의 어린 아기 세례요한은 알았고, 기뻐하였고, 어머니까지 움직여서라도 찬양하게 하는 독립적인 존재였다. 주님 오신 성탄에 이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모든 이에게 주님의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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