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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기자수첩 기사

  • 그렇게도 시끄러운가요? 청빙문제로
    부산에 있는 K교단 B교회는 담임목사 후임문제로 내홍을 앓고 있다. 결국 몇몇 권사와 은퇴장로들이 노회에 고발장을 최근 제출하고 말았다. 내용인즉 후임자 후보로 들어 온 34명 가운데 1차 심사를 거쳐 11명으로 압축하고, 2차 심사를 통해 5명의 후보자를 가려냈다. 그런데 그 중 J목사가 2차 합격자 5명 안에 든 것이다. 문제는 J목사는 1차 합격자인 11명 중에 없었는데, 2차 합격자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이다. 청빙위원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올라있었다. J목사는 정규 박사학위도 아니고, 교단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에 태클을 걸고 청빙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 내용이다. 한편 고발장 내용은 청빙 이외 개척교회를 하다가 목회자가 다른 곳으로 가는 차제에 그 교회를 1억원에 매매하였다고 부동산 중개비 800만원을 포함한 1천만원 가량이 입금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밝혀달라는 내용이었다. 교단 총회장을 배출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가 시끌시끌한 가운데 공은 노회재판국에 넘어가게 된 것을 노회 안 중진들은 공석 중인 교회에 사탄이 시험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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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4-07
  • 재정 어려움 호소
    부활절연합예배 헌금이 1천 3백여만원이 거둬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작년 1천 9백여만원보다 6백만원이 적은 것이다. 문제는 광고수입인데, 작년에 비해 2천7백여만원이 덜 거둬졌다고 모 관계자는 말했다. 부기총 모 관계자는 “예년에 비해 약 3천만원 정도 적자가 났다. 사람들이 예년에 비해 참석률이 좋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 “다음 회기 넘겨줄 돈이 부족할 것 같다”며 걱정했다. 교계 모 인사는 “일련의 부기총 문제들 때문에 지역 성도들이 외면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시끄러운 모습만 보여주니, 찾고 싶겠느냐?”며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부산의 대표기관이기 때문에 하루속히 위상을 회복하기를 바란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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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4-07
  • 성산 장기려 장로의 신앙 사상과 그의 역사 의식 (1)
    ■복음병원과 인연 복음진료소가 영도 제3영도교회 천막과 교회 창고에서 시작 되었다. 그 당시는 전시 중이라 무료진료한다는 소식에 부산의 수많은 피난민들 속에서 화제가 되어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가 1951년 6월 21일 부산 남항동2가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복음진료소를 세운 당시 직원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 전영찬 선생이 모금 한 돈5천 달러로 수술 용구를 구입해 겨우 진료할 수가 있었고 전영찬 선생은 미군 하야리아부대에 가서 박영훈 학생을 동행하여 크리스마스 실과 그림엽서를 직접 제작하여 미군들에게 판매, 모금을 계속 할 수가 있었다. 장 박사가 그 해 7월 1일 복음진료소를 개원한 후 그의 명성을 듣고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로 도저히 진료를 감당하지 못해 1개월 후 영도 영선동 180번지 약 210평의 공지에 천막 3개를 치고 진료를 이어 나갔다. 그때 함께 도왔던 서울 의전 출신의 차봉덕 의사와 후배의사 전종휘 박사가 내과를 진료하는데 합류했다. 그 후 외과 담당 이상기 선생과 경북의대 학생이었던 박영훈 학생은 방학기간동안만이라도 심부름도하고 장 박사를 옆에서 도왔다. 복음진료소는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병원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을 진 그 사랑을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나눠주는 참으로 병원 같은 병원 바로 기독병원의 역할을 다하는 복음 그 자체이었다. 한국전쟁의 소식을 듣고 어려운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모금한 5천 달러의 거금으로 병원 기초를 놓았던 전영찬 선생은 병원 총무일을 보는 중 해외 및 국내 모금에 사소한 잡음으로 의심받는 일이 생겼다. 전 선생은 더 이상 의심받아가면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잠시 접어 두었던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출국을 하고 말았다. 고신 대한기독교경남 구제회는 사람을 부려먹고는 의심과 의혹으로 전영찬 선생을 섭섭하게 한 것과 그가 세상을 뜨기까지 교단 차원에서 그 분을 불려다가 사과하거나 감사장을 준 적이 없다며, 훗날 그의 아들 전 교장이 교육협력위원장이 됐을 때 법인이 관선회복을 위해 찾아 간 교단 인사들에게 그런 말을 실토한 일이 있었다. ■복음병원 부지 확보의 공로자는 복음병원의 부지를 확보한 이면에는 부산남교회를 시무했던 한명동 목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것이다. 지금의 서구 암남동 34번지에 위치 한 1만3천평 중 병원 부지 5천평, 신학교용 교사부지 8천평의 땅 구입은 남교회를 시무하던 천사당 주인인 박봉화 장로와 삼일교회 주영문 장로, 주태화 장로, 이성태 집사, 김선애 집사의 헌금이 큰 몫을 작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1951년 6월 영도에서 개원한 복음의원이 만 6년만인 1957년 6월 1일 송도로 옮기게 되고 천막병원에서 콘크리트 벽돌 병원으로 단장한 종합병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대표 박손혁 목사)가 주체가 된 복음의원이 비영리 의료법인으로 병원 개설 허가를 받았고 직원은 도합 39명이었다. 그리고 1965년 9월 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재단에 재산을 편입시켜 명실 공히 교단 병원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복음간호학교 설립, 장 박사 초대교장이 되어 병원에는 절대적인 간호사가 필요하여 1968년 3월 3년 과정으로 복음병원 부속 간호학교로 설립 허가를 문교부로부터 받았다. 그때 초대 교장이 장기려 박사였다. 병원은 거듭 발전하여 1966년 7월 2일 보건의료기간으로 지정 받았고 67년 12월에는 레지던트 수련병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 송상석 목사는 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가 퀘이커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와 국내에는 김교신, 함석헌 선생을 불러다가 한달에 한번씩 강연하는 등 고신교단의 개혁주의와는 정반대의 신앙노선으로 가는 장 박사를 자진 사임케 하려고 했다. 그 방법으로 병원 경영이 어려우니 곧 병원 부도가 날 판국인데 어찌 하겠는가로 압박하자 장 박사는 미련 없이 병원장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때 제일영도교회 출석하는 장 박사의 제자 박영훈 의사를 후계자인 제2대 병원장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복음병원 분규 사태, 부산의대와 경북의대간의 대결 미국 하버드에서 간연구로 수학하던 박영훈 의사를 귀국하도록 장 박사가 지시 하는 바람에 서둘러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1973년 병원 안에는 부산대 출신 의사 채종묵, 김훈, 박영식, 김재만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이 의국을 중심하여 진료를 거부하고 경북의대 출신 박영훈 제일외과 과장은 물러가라며 스승을 배신한 제자라고 주장했다. 소위 의료진료 거부 사태에 이르자 당시 부산지검에 첫 부임한 박철언 검사가 이들을 선도한 의사들을 모조리 구속하게 되었다. 그 배후 세력에 대해서도 몇몇 시니어급 의사들을 입건하게 되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박영훈 의사는 침례병원 외과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겨우 진정이 되었다. 1976년 1월 병원 경영에 어려움이 있자 침례병원에 있는 박 과장을 불러 제2대 원장으로 임명한 것이 당시 법인 이사장 이경석 목사이다. 장기려 박사는 명예원장으로 추대하고 박 원장이 1976년 6월 25일 제2대 병원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25년간을 오로지 병원 일에만 전념 한 인간 장기려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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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현장
    2016-04-07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부산 교계 중견 교회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어느 성도가 안타까워 본보에 전화로 제보를 해 왔다. 사연인즉 A 목사가 부임한지 3년이 됐고 B교회 당회는 작년 연말 A 목사가 3년이 되면 더 이상 연임하지 않기로 9명의 시무장로 중 6명이 찬성, 1명이 반대, 1명은 기권, 1명은 불참해 결의했다. A 목사가 4월 노회에 연임이 보류가 된 상태에서 B교회 제직회는 3월 20일 제직회를 속회하고 노회 규칙부에 당회에서 담임목사 연임문제가 나왔을 때 담임목사 당사자는 불참한 가운데 대리당회장을 세우지 않고 투표한 것이 불법인지 적법인지 여부를 노회 규칙부에 질의하자고 대다수 제직들이 찬성하고 나섰다. 이 때,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자 당회 서기가 나와 다음 당회시 재논의하기로 하고 다시 정회를 선포하고 말았다고 한다. 노회에 가면 노회가 개입하게 되고 더 시끄럽게 되니 당회에서 재논의하는 방안을 강구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담임목사가 나갈 곳도 없이 사임하는 것은 반대 여론이 많아지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내가 왜 나가야 되느냐”고 항변한 담임목사는 “그동안 100여명의 교인을 증가시켰는데 왜 나가야 됩니까?”라고 제직회에서 항변한 것이 불씨의 도화선이 된 것이라고 어느 성도는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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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3-24
  • 고려학원 이사회 정회, 일부 이사들 퇴장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가 지난 22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이사회를 열고 감사보고를 받았다. 이영욱, 박철용 감사는 재단국장과 복음병원 행정처장에 대해 징계요구를 하였고, 이사회는 감사보고를 받은 이유 때문에 징계위원회를 구성했다. 재단국장의 경우 이사회가 결의하지 않은 부칙조항 삽입 문제로 징계위원회(박윤배, 옥재부, 변성규 이사)에 회부되었는데, 서면경고나 견책 정도의 말이 흘러나올 정도로 경징계가 예상되고 있다. 반면 병원행정처장의 경우 이사장과 이사들의 의견이 크게 달랐다. 감사보고에서는 행정처장의 임기가 종료됨을 확인했고, 이에 따라 일부 이사들은 새 처장을 뽑기 전까지 대행체제로 가자고 주장했지만, 강영안 이사장은 임기종료를 선언하고, 이사장 직권으로 복음병원장에게 행정처장 임기종료 사실을 통보했다. 또한 새 행정처장을 총장과 협의하여 이사회에 제청할 것으로 요구했다. 징계위 회부에 대한 말들도 무성하다. 감사보고는 분명 징계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지만, 이영욱 감사는 ‘감사 추가 의견’을 통해 행정처장이 그럴만한 행동을 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고려학원 관계자는 “징계위 구성이 죄가 있다고 확정하는 건 아니다. 검사가 기소했다고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통해 확정하듯이 징계위원회에서 감사보고를 기초로 이 문제를 철저히 조사해서 징계수위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감사보고 내용 중에는 처장이 각 부장들에게 골프채를 선물로 준 것이 정관 52조 3항(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을 위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직원들 중에서는 징계를 너무 포괄적으로 적용했다는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병원 관계자도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선물을 준 것이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앞으로 상사가 부하직원을 강압적으로만 대하라는 것이냐”며 “기독교 기관답지 않은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행정처장 직무대행 논란으로 일부 이사들이 퇴장하는 등 고려학원 이사회가 다시 파행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임학 병원장이 현 처장을 다시 제청할지, 아니면 새로운 인물을 제청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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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3-24
  • 기독당 50만표 넘을까?
    지난 3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기독자유당(대표 손영구, 이하 기독당)이 창당됐다. 기독당은 앞선 두 번 선거에서 비례대표가 주어지는 50만표를 얻지 못했다. 4년 전에는 45만표에 그쳐 아깝게 비례대표 당선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내 진입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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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내가 본 인간 장기려 박사 (2)
    아래 편지는 미국에 있는 조카(장혜원)가 이북에 가서 직접 살아있는 아내 김봉숙 여사(80대)가 친필로 조카를 통해 보내 온 육필 서신이 바로 순애보를 연상케 하는 편지내용이다. 김봉숙 사모의 답장>>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 꿈속의 당신이 무의촌에 갔다 오면서 주머니 속에서 쌀 봉투를 꺼내 주시면 저는 하루 종일 기뻤습니다. 당신이 거기에서도 당신답게 사신다는 것을 혜원의 편지를 받기 전부터 저는 알았습니다. 이산 가족들과의 만남이 하루 빨리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팔십이 넘도록 살아 있음이 어쩐지 우리가 만나게 될 약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일구월심 나의 맘에 그대 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암만 말하여도 안타깝지만 하여 이만하고 당신과 기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 될 그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 평양에서 김봉숙 올림 - ▲춘원 이광수씨의 ‘사랑’ 모델로 삼아 장기려 선생은 평양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1909년 7월15일에 유복한 믿음 좋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고 송도 고보 3학년 때부터 자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삶을 살겠다며 그 때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 후 경성의전에 입학하여 졸업시는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과학에 명성이 높은 백인제 선생의 조수와 제자가 되었다. 이때 춘원 이광수가 의전병원에 입원하여 신장 절제수술을 백인제 선생의 집도로 수술을 받고 장기려 선생이 이때 춘원을 도와주면서 인술을 사랑으로 섬기는 헌신을 보고 춘원이 훗날 ‘사랑’이란 소설의 주인공 모델을 장기려 선생을 ‘안민’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그 후 장 선생은 일본인 기리하라 교수가 나고야 의과대학교수로 전근되어 간 계기로 나고야 의과대학에서 1940년 학위를 받았다. 백인제 스승의 추천으로 대전 도립병원 원장으로 가게 되었으나 가지 않고 기독교 병원인 평양에 있는 기홀병원 외과과장으로 갔다. 해방이 되자 평남 인민위원회 위생과장을 거쳐 제1인민병원 원장 겸 외과과장이 되었다. ▲간첩 누명 쓴 일 훗날 월남 한 후에 남한 특공대로부터 간첩 누명으로 일주간 조사와 취조를 받았을 때 한상동 목사와 미국인 마두원 선교사가 선처를 호소함으로서 두 분의 신변보증과 신변인수를 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1951년 6.25가 발발하자 국군이 북진하자 국군이 평양에 들어오고 국군을 야전 병원에서 군의관과 함께 진료하였다. 마침 수요일 오후 교회에 가서 장기려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함께 예배 드리던 미군 군의관이 같이 남하하자고 권유하여 짚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1950년 12월 3일 오후 집에 남아있는 둘째아들 가용이만 데리고 차에 탔다. 개성을 거쳐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한 날이 바로 12월 18일이었다. 장 선생은 부산에 있는 제3육군병원에서 진료를 돕고 있었다. 제3육군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던 장 박사를 만나러 온 한상동 목사와 전영찬 선생이 찾아왔다. 전영찬 선생은 자기가 미국에서 공부 도중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금운동과 유엔미사원호처,<uncac>에서 병원을 지으면 약품을 제공하겠다는 말과 함께 장 박사를 설득하게 되었다. 불우한 사람들을 진료한다는 말에 장 박사는 하나님 앞에 서약할 때 불쌍한 내 민족을 위해 헌신 하겠다는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즉석에서 허락한 것이 복음병원과 깊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복음병원의 시작이 그때부터였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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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내가 본 인간 장기려 박사 (1)
    “왜 중혼을 안 하십니까?” “이북에 있는 처자식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네” 필자가 부산교계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는 1975~2000년으로 약 25년간이었다. 1975년 8월 초순 어느 날, 기독사회관이 있는 서구 토성동에 소재한 ‘장미회’란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간질환자들을 치료하는 목요일 오후 시간에 필자가 그곳을 방문했다. 장 박사가 진료하는 장미회 멤버 의사와 함께 예고 없이 찾았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어느 환자가 많이 아파하는 표정으로 장 박사한테 진찰을 받고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막간을 이용한 시간에 장 박사에게 찾아 온 용건을 얘기하고 차 나누는 시간을 빌렸다. 물론 양해를 구하고 난 뒤에야 만날 수 있었다. “장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방금 나간 환자는 몹시 아픈 표정을 짓습니다. 큰 병원에 안가고 여기 왔습니까? “글쎄요. 중한 암환자인데 별 처방이 없이 소화제를 처방하고 편안히 쉬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웃으며 살아가라고 일러 주었습니다만” 장 박사는 이렇게 중한 환자든 아니든 마음이 편해야 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꼭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그런지 몰라도 장 박사한테 진료를 받고 난 환자들은 장 박사가 처방해 준대로 ‘소화제라도’ 먹고 편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단순하게 생활하는 것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면 반드시 병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장 박사만의 영적 치유의 안심 처방으로 여겨지는 모습을 그에게 피부로 느꼈다. ▲환자에게 안심처방을... 필자는 그때 좀 짓궂은 질문을 한 번씩 던져 당황하는 상대방을 보고 속으로는 쾌유를 느끼는 질문을 이따금씩 했다. 그때 찾아가서 질문한 내용은 “왜 이 젊은 청춘의 나이에 중혼을 안하십니까?” 재혼은 아내가 사별할 때이고 중혼은 이북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있지만 그때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그 당시로는 대개 월남해서 이남에서 살고 있는 목회자들도 이곳에서 중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장 박사 곁에는 예쁜 간호사와 신학생이었던 김OO 여학생이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살림을 도와 준 것 때문에 이상한 루머가 돌고 돌아서 그만 중혼하면 그런데서 해방될 것으로 알고 불쑥 물어본 첫 화두가 중혼이었다. “여보게 신기자! 보다시피 나는 처자식을 이북에 두고 홀로 나만 살겠다고 아들 가용이와 함께 내려왔다네.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과 아내 그리고 두고 온 자식 앞에 죄가 되어 한시라도 그런 뜻을 생각도 못하고 쥐 죽은 듯이 정신없이 살아 온 것이라네. 무슨 나만 좋아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도 맞지 않고 기독교에 대한 배교와 같이 배반으로 치부할 수 있다네. 그러니까 그런 말(질문)은 그만하고 다른 용건이나 하게나”라고 그만 질문을 이어 갈 수 가 없이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사랑과 영혼의 대화 장 박사는 늘 이북에 처자식을 두고 내려온 일에 대한 죄책고백을 한 사실이 있다. 그가 어느 날 공중 예배 기도시간에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처자식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내려온 죄인 중에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어느 부산산정현교회 주일 예배시간에 한반도 통일을 위하여 3.1절 기념예배 시간 공중기도회에서 그렇게 기도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홀로 지내면서 아내의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영적 대화를 속삭이고 왔던 것이 장 박사의 첫일과에서 부인과 대화하는 ‘사랑과 영혼의 대화’시간이다. “여보, 오늘도 날씨가 맑구려. 그쪽은 어때요? 송도 바다 지평선 넘어서 3.8선을 지나면 당신도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겠지요. 나를 위해서 말이요. 나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너무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꼭 살아계셔서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요? 설혹 못 만나면 저 하늘에서 영원히 만나서 못다한 얘기를 꽃을 피웁시다. 사랑해요. 여보!” 장 박사의 하루가 눈을 뜨면 이런 사랑과 영혼의 기도를 하고 일과를 시작한다. 지금은 3.8선 없이 하늘나라에서 만나서 사랑스럽게 지낼 수 있겠지요. (…다음호에 계속)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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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0
  • 주일에 문 닫는 교회
    인천의 ㅂ교회가 13일 주일 교회 문을 닫았다. 교회 출석 교인이 1천명이 넘는 교회로 형편이 어려운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문을 닫는 이유는 교회에 교인이 늘면 안 된다는 것, 지역교회의 어렵고 힘든 미자립교회를 돕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교인들을 지역의 10여개의 작은교회로 보냈다. 이 교회 담임인 ㅂ목사도 한 장애인선교단체에서 예배를 드렸다. ㅂ교회는 올해부터 10주에 한 번씩, 1년에 다섯 번 교회 문을 닫기로 했다. 좋은 취지로 시작된 일이지만 교인들의 다른 교회 정착문제, 교회 재정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다. ㅂ교회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완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이다. 최근 ㅂ교회에서 분리 개척한 ㄱ목사는 “ㅂ교회가 하는 일은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정착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면서 교회를 내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해나 왜곡이 없도록 교회와 목회자 실명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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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0
  • 의도는 좋지만 거친 어투 때문에
    최근에 열린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사로 나선 한 선교사는 말했다. “한국교회 교인 수가 반토막이 났다. 이것은 교인들의 탓이 아닌 목회자와 장로들 탓”이라면서 성도들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故 하용조 목사는 설교 시간에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강요한 적 없지만 성도들이 은혜 받으니 스스로 나가서 전도하더라”면서 “목회자들이 설교시간에 전도하라고 자꾸 강요하니까 교인들이 오히려 하기 싫어한다”며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 거세게 비판했다. 또 목회자들에게 “주일예배에 은혜가 없다면 찬양인도자부터 바꿔라. 신학교에서 조용히 기도에 매진하는 전도사를 찾던지 A선교단체나 B선교단체 출신 전도사들을 찾아라.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기타를 잘 치는 것보다 목사의 설교와 같은 영적 흐름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영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지만, 특유의 거친 어투가 오히려 참석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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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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