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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4)
    독일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냉철하고 끈질기게 파헤치고, 또 과오에 대해서 처절하게 반성하는 예는 드물 것이다. 어느 나라나 자랑스러운 역사뿐 아니라,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역사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강대국인 경우 분명 근대사에서 다른 민족을 약탈하고, 이웃 나라들을 괴롭힌 흑역사들이 많이 있다. 때로 양심적인 학자들이 그것을 파헤치고 드러내지만, 국가가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고, 국가 내에서도 서로 상반된 정치이념들로 인해 역사가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독일은 이점에서 확실히 달랐다.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반인륜적인 사건들을 숨기지 않고 낱낱이 파헤쳐서 전시하였고, 이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극우세력이 발을 붙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청산의 가장 핵심인 인적청산을 철저히 했다. 전후 수많은 나치전범과 그 동조자들을 찾아내어 재판하였는데,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은 지속되고 있다. 올해 2월 독일 검찰은 나치 수용소에서 비서로 일했던 여성과 경비원이었던 남성을 기소했는데, 둘의 나이는 각각 94세, 100세였다. 아무리 고령자라해도 재판정에 세울 정도의 건강이면 반드시 세웠고, 수용소에서 직접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어도 방조한 책임을 물어 낮은 직급의 관리자·경비원·비서 등도 사법처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집요하게 과거를 청산하려고 하는지 그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독일은 국가지도자가 매년 반복되는 홀로코스트나 전쟁 기념일마다 참석하여 사과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빌리 브란트 수상이었다. 동방정책을 통해 동서의 화해를 이루려했던 그는 1970년 폴란드 방문 시 과거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두어 살게 했던 게토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세운 기념비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그가 결단하고 행한 이 ‘바르샤바에서의 무릎 꿇음’ (Warschauer Kniefall)은 이후 독일의 진정한 참회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뼈아픈 과거청산의 용기와 진정성은 주변국가들 속에서 신뢰를 회복하게 하였고, 이것이 훗날 독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통일 이후에도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경제, 군사, 외교면에서 다시금 강대국의 지위를 확고하게 누리게 되었다. 이와 대비되는 나라가 스위스이다. 나치가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금괴를 거래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나치에게 전비를 마련해준 스위스는,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하고 참회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면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스위스의 저술가 아돌프 무쉬그가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지에 이런 글을 썼다. “(과거를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마치 마취가 풀릴 때처럼 먼저 고통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시인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는 종종 아픔이 따르지만,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그런 자에게 또한 바른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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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7-23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3)
    2000년 경 독일 남부의 대도시인 뮌헨을 방문했을 때에 근교에 있는 다카우 수용소를 찾았다. 이곳은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만들었고, 유대인 뿐 아니라 나치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로 여기 수용된 약 20만 명 중 정식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이 41,500여명에 이르렀다. 이 수용소는 나치가 독일 전역에 만든 수용소 중에 가장 먼저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미군들이 처음 도착했을 당시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이곳으로 보낸 ‘죽음의 기차’에 2300여구의 시신이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후 이 시신들을 비롯해서 다카우 수용소의 비참한 장면들이 공개되면서 나치의 끔찍한 만행이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되었다. 독일에는 다카우나 부헨발트 수용소와 같은 나치시대의 수용소들이 박물관처럼 보존되고 전시되어 있다. 당시 나치들이 반유대 감정을 조장하는데 사용했던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문서들, 생체 실험 등의 만행들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고, 수용소 내부를 공개하여 당시 수용자들의 비참했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 이곳 수용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곳에서 자행된 유대인들 집단학살에 관한 내용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사실 그 가해자들은 다른 누가 아닌 한 세대 전의 독일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나치와 그에 동조하여 이런 범행에 직접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고, 이런 수용소내의 끔찍한 일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그런 일을 자행한 나치정권을 선택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고, 침묵하면서 소극적으로 방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버드대의 골드버그는 ‘집단범죄’(collective sin)라는 개념을 적용하면서 그 시대의 독일국민들은 반인륜적인 나치범죄의 공범자라고 말했다. 이처럼 분명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부끄러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이 모든 것을 객관화시켜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숨기지 않고 다 발가벗겨 보이고 있다. 마치 그들의 자녀들과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이처럼 잔인하고 못된 민족이었소 하고 전시하는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TV에서는 자주 미국에서 만든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을 방영해주고 있다. 그 영화에서 당연히 독일군이 양민을 괴롭히는 악한 놈들로 묘사되고 미국군은 의로운 군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저녁 메인뉴스에서 나치의 만행과 홀로코스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독일이 과거 역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진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진정한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과거 나치 독일과 지금의 독일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독일인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세계인들의 비난을 담담히 받을 뿐 아니라, 자신도 함께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정당이나 몇몇 정치인들의 정치이념이 아니다. 사회전반에 두터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나아가 학교에서 나치가 보여준 독재, 인종차별,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철저히 교육함으로 건강한 시민의식이 세대를 이어가게 하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정직한 회개를 통해 지난 날 지은 죄의 굴레에서 자유케 되는 신앙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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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7-09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2)
    독일의 역사의식을 본받자고 하지만, 그들이 과거에도 항상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은 이미 1914년에 발발된 1차 세계대전의 주범이기도 했다.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한 사건이 이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였지만, 유럽은 이미 제국주의간의 세력다툼으로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었고, 특별히 독일의 빌헬름 2세의 무모한 팽창정책이 전쟁의 근본원인이었다. 그리고 전쟁을 앞두고 독일의 당대 유명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포함한 93인의 지성인 그룹은 황제의 전쟁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이 전쟁은 결국 3,6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이미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쫓아낸 독일은 종전을 위해 모인 베르사이유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은 많은 영토를 잃고 전쟁배상금을 물게 되었으나, 연합군이 자국영토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항복하므로 인해 국가 인프라가 유지되는 등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완전히 망하지 않은 독일은 이 참혹한 결과를 이룬 전쟁의 원인자로서 참회할 줄을 몰랐고 역사를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국력이 점차 회복되자, 전승국 영국과 프랑스가 가하는 억압과 고립정책에 반감을 갖게 되고 또한 과도한 전쟁 배상금에 대한 불만도 커졌다. 아울러 권위주의적인 구시대에 익숙했던 보수적인 사람들은 전승국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바이마르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전승국들에 의해 독일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과거 독일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강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앞장 선 것은 개신교회였다. 특히 과거 황제의 권위적인 통치에 안주하면서 교권주의에 익숙해 있었던 교회 지도자들은, 전쟁 후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고 자유주의라는 명분하에 이런 체제가 흔들리는 것에 불안하면서 민주정권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독일의 민족주의가 루터주의와 맞물리면서 교회는 쉽게 민족주의에 함몰되어갔다. 1917년 종교개혁 400주년을 계기로 루터주의 신학자 ‘칼 홀’(Karl Holl)로부터 발화된 루터 르네상스는, 점차로 ‘루터와 정치’, ‘루터와 술’, ‘루터와 가정, 연애, 여인, 교육’ 등 사회 각 방면을 루터와 연결시키면서 루터에 열광하게 했다. R. 오이켄이 ‘루터와 우리’ 라는 책에서 루터를 ‘참된 독일인의 형상이자 심볼’로 규정했듯이, 루터는 순전한 신앙의 교부이전에 가장 자랑스러운 독일의 영웅으로 간주되면서 민족주의의 중심에 놓여졌다. 이런 민족주의 열풍은 극우정당인 나치에게 길을 열어주어 마침내 1933년 집권당이 되게 했고,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이 참혹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서 이미 민족주의와 극우정치로 정치화된 개신교회는 누구보다도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가장 커다란 전쟁의 공범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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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6-25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1)”
    오늘날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과 많은 갈등관계에 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 마이니치 한국특파원이었던 사와다 가쓰미는 ‘한국과 일본은 왜?’라는 책에서 일본인들의 태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였고 80년대까지도 한참 발아래 있어서 늘 내려다 본 한국이었다. 그런데 그 한국이 어느 새 쾌속 성장하여 이제 자신과 어깨를 같이 하려고 한다. 과거 압도적인 우위의 한일관계에서 지금의 수평적인 관계로 전환되는 이 현실이,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익숙한 일본인들에게는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뿌리 깊은 것은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이다. 패전 이후 그들은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80년대에 버블붕괴와 장기 경기침체, 특별히 B. 글로서먼이 지적한 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참사로 자신감을 상실한 일본은 더더욱 역사적 사실을 대할 용기를 잃어가고 있다. 자신들의 과거를 사실 그대로 마주하고 극복하기보다는 그런 것들을 은폐하고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심지어 여전히 영웅적인 신화이야기들에 매달리고 있다. 도리어 아베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이런 역사왜곡을 통해 민족주의를 부활시키고 강한 일본을 표방해왔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국민들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기려 하고 약한 자들은 숨어버리려고 한다.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약 1백만 명의 히키코모리(은둔형외토리)가 있고, 향후 1천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는 국민들 속에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배타심을 키워왔다. 독일 언론들도 이러한 것들이 일본 사회를 더욱 더 활기 없이 침체되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2차 대전에서 일본과 함께 주축국이 되어 패전을 경험했고, 전후에 일본 다음으로 세계경제 대국이 된 독일은 일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 다름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서 시작되었다. 패전이후 독일은 과거의 수치스러워 잊고 싶은 자신들의 흑역사와 마주했다. 그것을 덮거나 미화하지 않고 처절할 만큼 파헤치고 인정하고 사죄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에 대한 독일의 태도는 ‘우리가 할 만큼 했다’라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파헤치고 사죄를 반복하는 현재진행형이다. 그 결과 독일은 주변나라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했다. 그 신뢰는 독일을 다시금 유럽의 리더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유럽국가에서 민족주의 극우주의 정당이 득세하는 와중에서도 독일은 이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해가고 있다. 물론 독일도 난민문제를 계기로 AfD라는 극우정당이 커지고 있지만, 정치적인 주류가 될 수 없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런 역사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있느냐는 과거사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가는 뒤돌아보는 예언자’라는 슐레겔의 말처럼,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 그런 점에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독일의 역사의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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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6-11
  • [독일이야기]친환경의 나라(3)
    2019년 UN총회에서 스웨덴의 툰베리가 기후변화로 인한 전 지구적 재앙을 경고하는 연설을 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우리나라 고1에 해당되는 16세였다. 그녀는 15세에 스웨덴 의회 앞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파업’ 1인 시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에 뛰어들었고, 지금은 세계 10대 환경운동가 중 하나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청소년 환경운동가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어릴 때부터 환경교육을 시키고 환경의식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시민들 속에서 꾸준히 성장하면서 형성된 높은 환경의식 때문이고 그것이 또한 활발하게 활동하는 다양한 환경단체들과 함께 정치나 경제 그리고 교육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독일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중 한 독일어 교사와 독일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은 친환경정책을 펼치는 녹색당의 확고한 지지자라고 해서 처음으로 녹색당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일은 오랫동안 우파 기독교당(기민당과 기사당연합)과 좌파 사회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거대정당이 번갈아가며 자유민주당이라는 소수정당과 연정을 이루어왔다. 1979년에 창당되어 당시 15년 밖에 안 된 녹색당은 이 오래된 세 개의 정당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정당이었다. 그랬던 녹색당이 점점 커지더니 최근 여론조사의 정당지지도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특별히 20대~40대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 금년 9월 총선에서 독일 최초로 녹색당의 여성총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가 증폭되고 있다. 그동안 녹색당이 책임 있는 정당으로서 친환경적이면서도 경제성장에 부합한 환경정책을 꾸준히 제시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독일국민들의 환경의식이 높이지고 환경에 대한 위기감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2011년 3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독일의 환경운동과 정책에 큰 전환이 되었다. 일본 같이 세계경제대국이면서 꼼꼼한 나라가 이런 참사를 겪었다면, 우리도 겪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결국 보수당 총리였던 메르켈은 정책을 변경시켜 2022년에 독일내의 원전들을 완전폐쇄 하도록 결정했다. 과연 이 탈원전정책이 성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독일은 이후 재생에너지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현재 총에너지 생산에서 재생에너지의 비율이 40%에 이르고 있다. 현재 6.5%정도 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재생에너지에 대한 독일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정말로 녹색당이 집권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광폭의 환경정책을 펼칠지 궁금해진다. 독일 역시 통치자나 집권정당에 의해 환경정책이 좌우되기도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강한 힘은 민초들에게 있다. 환경의 가치를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그것이 일상의 삶과 의식 속에 배어가고 실천되면서 그렇게 성장해가는 시민들이 여론을 주도하여 정치지형을 바꾸고 그래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지만 결국은 보다 친환경의 나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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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5-21
  • [독일이야기]친환경의 나라(2)
    오늘 환경문제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바로 쓰레기 문제이다. 인류가 매일 매일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은 땅과 바다를 오염시킬 뿐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그럴듯한 광고에 매료되어 물건을 구매한 사람은, 아직 쓸 수 있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일을 고민하게 된다. 배달음식을 주문해서 한 끼의 배를 채우면, 남은 음식쓰레기와 더불어 스티로폼과 비닐, 플라스틱 등 다양한 종류의 쓰레기를 처분해야 한다. 가급적 쓰레기로 나올 것을 줄이고, 쓰레기 중에 재활용이 가능한 것을 분리해서, 버리는 양을 최소화하는 것이 친환경적인 삶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전국적으로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하였고, 지금 세계에서도 쓰레기분리를 잘 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독일은 오래전부터 시작해서 1993년에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생활화되어 있었다. 동네 곳곳에 재활용 쓰레기 수거함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특이한 것은 빈병수거함이 그 재료의 차이에 따라 흰색, 녹색, 갈색 병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독일의 환경정책은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을 늘리는 것이고, 국민들 역시 그런 것이 생활화 되어 있다. 가급적 1회용 용기를 줄이기 위해 음료수 용기에 ‘저당’이라는 뜻의 ‘판트’(Pfand) 제도를 도입했다. 가령 음료를 담은 병, 플라스틱, 또는 종이팩의 경우 한번 쓰고 재활용수거함에 버리는 일회용이 있는가하면, 판트용으로 여러 회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있다. 이런 음료수에는 판트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다 사용한 뒤 가게로 가져가면, 그 판트 비용을 돌려받게 된다. 병은 모르겠는데, 주스를 담은 종이팩을 재사용하는 것이 특이하게 생각되었다. 보통 병은 50회 정도를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고, 플라스틱은 잘 세척하면 25회 정도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병이 무거우므로 차량운반 중 CO2가 더 많이 배출되는 것을 이유로 플라스틱이 더 환경적이라고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내가 있을 때에 비해 지금 이 판트제도는 훨씬 더 광범위해지고 일상화가 되어서 이제 마트에서 파는 음료용기 중 일회용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아울러 독일은 벼룩시장이 일상의 문화처럼 되어있다. 지역마다 주간으로 나오는 벼룩신문은 값이 비싼 편인데도 많은 독자들을 갖고 있다. 이 안의 정보를 갖고 직접 연락해서 서로 만나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벼룩시장이 온라인상에서 점점 발달해 가고 있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여기서도 정기적으로 열리는 큰 벼룩시장은 상업화되어 있어 새 물건을 가져다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동네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은 주로 동네 사람들이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사고판다. 가끔 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애들이 자기가 쓰던 물건을 직접 흥정하는 것을 보곤 했다. 환경과 경제를 교육하는 장이 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벼룩시장이 발달하다보니 남이 입던 옷을 입고, 쓰던 물건을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심지어 아이 물건도 새로 사지 않고 남이 쓰던 것을 잘 세척해서 사용한다. 절약이라는 관점 이전에, 쓰레기를 줄이고 자원을 아낀다는 점에서 본받을 좋은 문화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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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5-07
  • [독일이야기]친환경의 나라(1)
    요즘 우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길들을 돌아보고 있다. 그 중에 무엇보다도 아무 생각 없이 자행한 환경파괴적인 삶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인수전염 바이러스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야생동물서식지를 파괴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환경을 도외시한 편의위주의 삶이 결국은 커다란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특별히 최근 일본에서 2011년 후쿠시마 원전참사 이후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겠다는 발표함으로, 해양 오염과 그 결과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처럼 땅과 하늘과 바다 전방위적에 걸쳐서 진행되는 환경오염이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숙고하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계가 ‘자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물’ 임을 고백하면서, 이 창조세계를 잘 보존해가는 것을 우리의 중요한 신앙적인 책무로 여겨야 한다. 나는 독일인들이 매우 높은 환경의식을 갖고 있고, 환경이슈가 정치, 경제, 교육이나 일상의 삶에서 항상 우선이 되고 있음을 보았다. 지금은 우리도 환경의식이 많이 높아졌지만, 1990년대 당시는 아직 그러지를 못했다. 나 역시 환경의식이 빈약한 가운데 독일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도전과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서 독일에서 체험한 환경문제를 나누어보려고 한다. 제일 먼저 2년 전 독일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 부부는 환경탐방 차 남부독일에 있는 프라이부르그라는 도시를 찾아갔다. 독일에서 가장 기후가 좋고 친환경도시로 소문난 이 도시에는 세계적인 환경마을로 알려진 보봉(Vaubong)마을이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사흘 동안 보봉과 프라이부르그를 돌아보았다. 보봉은 미래 친환경주거지가 어떠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전거도로가 잘 발달되어 자전거가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어있었고, 트램(전차)이 지역 중앙을 관통하여 가장 애용하는 대중교통이었다. 물론 큰 도로에는 차도 많이 다니고 있지만, 주택가로 들어가면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길이 많이 있어 자동차를 억제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보봉의 공기가 참 청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아파트나 공공건물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많은 개인 집들도 지붕에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여 많은 자연에너지를 생산해내고 있었고, 새로 건축하는 집은 파시프하우스로 만들고 있었다. 통영 앞바다 연대도의 에코체험관에서도 파시브하우스를 체험할 수 있는데, 첨단단열공법으로 외부 열과 차단하면서 지하에서 공기를 끌어올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서 선선함을 유지하는 저에너지 건물이다. 말로만 들었던 보봉과 프라이부르그를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환경을 보존하려는 노력의 아름다움 그리고 친환경정책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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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4-26
  • [독일이야기] “자유교회”
    나는 8년 반 정도 한인교회를 섬긴 뒤 논문 마무리를 위해 교회를 사임했고, 그 이후부터 귀국할 때까지 내가 사는 보쿰의 랑엔드레아라는 지역의 자유교회를 1년 반 정도 다녔다. 이 교회는 자유복음교회교단(FeG)에 속하였고 약 50명 정도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작은 공동체였다. 우리 가족은 이 교회를 통해서 많은 은혜와 위로와 사랑을 받았고, 또 독일의 주류교회가 아닌 자유교회(free church)를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자유교회 안에는 다양한 교단들이 있는데, 그 중 침례교회와 오순절교회 그리고 경건주의전통을 이어오는 복음주의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다닌 자유교회는 예배 형식이 참 자유로운 등 예전이나 직제는 한국교회와 다르지만, 지향하는 신앙은 유사했다. 교인들도 따뜻하고 가족적이고 사랑이 넘쳤으며 열정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3주 정도를 다닌 뒤 등록을 하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장로는 아니 벌써 등록을 하느냐고 놀라면서 먼저 심방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약속한 시간에 방문한 담임목사와 장로는 식사교제 후, 여러 문항이 빼곡히 담긴 등록 양식지를 나와 아내에게 나누어주었다. 목사는 먼저 한국교회와 달리 교회등록 절차가 까다로움에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고, 또 예수에 대해서 어떤 신앙고백을 하느냐 라고 했다. 내가 바로 옆 도시의 한인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한 목사임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딸은 각자 신앙 간증을 들려주고 몇 가지 신앙고백과 관련된 질문에 대답을 했다. 함께 신앙적인 교제를 나눈 뒤 그들은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로 교회에 등록할 자격이 있다면서, 이후 교인으로서의 헌금과 봉사 등에 관한 의무조항과 권리를 세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와 아내가 서명하고 그들도 서명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우리가 목사가정이기에 이 정도로 단순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에 장로가 이런 절차에 대해 이해를 구하듯이 “저희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같은 신앙으로 섬기는 이들이 함께 하는 교회를 원합니다.” 라는 뼈있는 말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다음 주일 예배 시간에서 우리가족을 멤버로 영접하는 환영식을 성대하게 해주었다. 나중에 연말공동의회에 참석해보니 신기하게도 단 25석만 준비되어 있었고, 빈자리 없이 채워졌다. 50명 정도가 예배드리고 활동하고 교제하고 있었지만, 정식 등록교인은 25명에 불과했고, 그게 누구인지를 비로소 그 자리에서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은 등록하는데 신중했고, 또 등록을 강요하지 않았다. 교회등록은 계약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었고 이것은 대부분의 서구교회가 비슷했다. 등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가운데 너무 쉽게 등록하고 너무 쉽게 그것을 저버리며, 교회회원이 되었음에도 아무런 책임의식이 없는 교인이 많은 한국교회의 문화가 떠오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또한 이후 이곳에서의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 오피니언
    • 독일이야기
    2021-04-09
  • [독일 이야기] “독일교회의 저력-키르헨탁”
    나는 독일개신교회의 저력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 하려고 한다. 2년 전인 2019년 안식년을 갖게 되었고, 5월 말경에 아내와 함께 독일로 가서 한 달 반 정도를 머물렀다. 그런데 마침 6월19일(수)부터 닷새간 내가 과거에 목회했었던 도르트문트에서 키르헨탁(Kirchentag)이 열렸다. 과거에 독일에 거주하는 동안에도 이것이 여러 차례 개최되었지만, 다른 도시에서 열리다 보니 한 번도 참여하지를 못했는데, 마침 이번 안식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키르헨탁은 2년에 한 번씩 독일 내 대도시를 돌아가면서 열리는 개신교 행사이다. 주교회(란데스키르헤)가 중심이 되어 준비하고 개최하지만, 많은 자유교회들도 참여해서 그야말로 독일내의 개신교회들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대한 축제이다. 여기에는 각종 주제에 따른 전시회가 있고, 강연과 토론회가 있으며, 또한 다양한 음악회도 있다. 이번 축제는 부산의 벡스코와 같은 도르트문트의 베스트팔렌홀을 센터로 해서, 이 도시의 여러 교회에서 이러한 것들이 진행되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의 숙소들도 미리 준비되고 대중교통도 연계되는 등 마치 도르트문트도시 전체가 키르헨탁 행사장이 된 것 같았다. 이번에 약 2천여 개의 전시와 프로그램이 있었고, 여기에 4천명의 자원봉사자가 동원되었으며 118,000명이 참가했고, 사용된 비용은 약 270억원에 이르렀다. 이 정도의 규모이다 보니 단순히 개신교회 내의 행사가 아니라, 국가 전체가 관심을 갖는 행사가 되어 수상과 정치인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개신교도인 메르켈총리가 참석하여 연설했다. 키르헨탁은 매번 열릴 때마다 그 시대의 이슈를 고려하면서 성구를 중심으로 주제설정을 한다. 이번에는 우리 시대 각 분야에서 신뢰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지적하면서 (왕하 18:19) “네가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Was für ein Vertrauen)를 설정하였다. 우리 부부는 베스트팔렌홀을 중심으로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홀 밖의 마당에서는 브라스 밴드팀이 복음송을 계속 연주하고, 중창팀이 찬양을 부르고 있었고, 여기 저기 간이음식점과 카페들에도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운동장 같이 넓은 홀 안에는 백 개는 족히 넘을 부스들이 주제별로 전시되고 있었다. 그 주제들은 설교와 목양, 차세대 신앙교육, 세계선교, 박해받는 교회실상 등 교회와 관련된 것들 뿐 아니라, 환경, 지구온난화, 탈핵, 전쟁과 평화, 기아와 난민, 인권과 성차별 등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 이 지역의 한인교회들도 한 부스를 만들어 거기에 작은 소녀상을 세우고 이와 관련된 사진들을 전시하면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서명을 받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독일교회의 저력이라 생각했다.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연합할 수 있는 힘, 교회 안이나 밖의 다양한 이슈들을 끌어안아 답을 찾고 제시하려는 힘, 그리고 꾸준히 이런 거대한 행사를 해나갈 수 있는 힘, 이런 힘이 독일통일의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로 나타났고, 또한 지금의 독일사회를 뒷받침하고 이끌어나가는 개신교회의 저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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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2021-03-29
  • [독일이야기] “독일교회의 저력-디아코니”
    독일의 주류가 되는 주교회(란데스키르헤)는 오랜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저녁교회(늙은 교회)로 생각하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회는 아침교회(젊은 교회)로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의 특징이 무엇인가? 열정이 있고 생동감이 있다.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변화를 좋아하지만, 아직 경험과 안정감이 부족하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은 경륜이 많아 한 발짝을 내밀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다보니 변화에 둔감하고 열정이 부족하나 신중하면서도 균형을 중시하게 된다. 독일교회는 오랜 역사 속에서 한마디로 사회와 분리된 교회가 아닌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발전해왔다. 신앙의 공공성과 사회윤리를 중요시 여기고 올바른 믿음은 곧 사회에 대한 책임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주일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얼마나 참여하느냐보다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인 가치를 어떻게 실천하고 실현해 가는냐를 중시한다. 교인 개개인에게도 이것이 강조되지만, 교회 자체의 사역도 여기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이 바로 디아코니(Diakonie)라는 것이다. 섬김을 뜻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에서 나온 말로 19세기 뷔허른(J.H.Wichern)은 이것을 “가난한 자들을 향한 사랑의 돌봄사역”으로 정의했다. 이미 우리 개신교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때부터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제사역을 신앙의 핵심으로 여겼지만, 특별히 독일은 18세기 경건주의에서 이 사역이 꽃을 피웠다. 경건주의의 창시자 프랑케는 이웃 섬김 사역을 조직화하는데 앞장섰고, 그 뒤로 영적인 각성과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국내선교(Innere Mission)라는 기치로 더욱 발전해갔다. 그러던 중 다양한 기관과 사역들이 1957년에 디아코니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독일교회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 디아코니에서는 병원이나 장애인기관, 양로원등 기관운영과 노숙자사역, 노인요양, 유치원과 어린이 돌봄 등등 광범위한 사회봉사 사역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전쟁이나 난민, 자연재해 등이 일어날 때마다 가톨릭의 카리타스와 함께 앞장서서 구제금을 모으고 전달하고 있다. 아울러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가를 지원하는 일과 그곳 유학생들을 불러서 교육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살았던 보쿰에도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전문학교(Oekumenische Studienwerk)가 있어서 많은 가난한 나라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대학갈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 학교에 또한 대학이 인증하는 어학시험을 보는 언어코스가 있어서 많은 외국인들이 저렴한 학비로 어학공부를 했고, 나 역시 이곳에서 시험을 치르고 대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각 기관들은 교회재정만이 아니라, 국가재정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독일사회의 복지의 출발과 기초는 개신교의 디아코니 가톨릭의 카리타스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독일에서 교회는 정부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이처럼 이웃을 섬기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독일교회는 우리에게 도전과 귀감이 되고 있다.
    • 오피니언
    • 독일이야기
    20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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