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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이야기] “성탄절에 울리는 평화의 소리”
    독일에 가서 늘 궁금했던 것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베네룩스3국등 6개 국가에서 출발해서 지금은 27개국으로 확대된 유럽연합(EC)이라는 체제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한 나라 안에도 민족과 언어가 달라 갈등하고 싸우는 나라도 있는데 말이다. 네덜란드로 가기 위해 처음 독일 밖으로 나갈 때에 국경에 초소도 없고 통제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 신기했다. 이미 1985년에 생켄조약을 따라 국경을 완전 개방한 것이다. 그리고 1999년 화폐도 유로화로 통일되면서 EC는 경제통합공동체가 되었다. 그 전에는 국경만 넘으려 해도 환전에 신경 써야 했는데, 모두 유로화를 쓰니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정말 하나의 느슨한 연방국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1945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고, 수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통합을 이룬 것이다. 얼마 전 영국이 탈퇴하는 등 EC 붕괴설이 나돌기도 하지만, 그리 쉽게 무너질 체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민족이고, 저마다의 역사와 전통과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이렇게까지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오랜 세월을 공유한 기독교문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토대가 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에 대한 갈망이다. 두 차례의 야만적인 세계 대전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본 유럽인들은 평화보다 귀한 것이 없음을 체득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화에 대한 열망이 훗날 독일통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쟁 한 가운데서 평화를 꽃 피운 크리스마스 휴전은 유럽평화의 밑거름으로 회자되는 실화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독일과 연합군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참호전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었다. 그해 12월 24일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독일 군인들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했고, 그 소리가 영국군진지까지 울려 퍼지면서 이를 듣던 영국 군인들도 이 찬송을 함께 불렀다. 한낮까지만 해도 총과 포탄소리로 진동하던 전선은 양쪽 젊은이들의 크리스마스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찬송들은 미움과 증오로 얼어붙고 피폐해졌던 군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크리스마스의 동이 터올 때에 한 독일군 병사가 작은 나무에 초를 단 크리스마스트리를 손에 들고 영국진지 쪽으로 걸어갔고 이를 본 영국군인 하나가 참호에서 나와 서로 평화의 악수를 나누었다. 뒤이어 양쪽 병사들이 하나 둘씩 나와 서로 악수를 하며 성탄 인사를 나누면서 크리스마스 휴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변에 널려진 동료의 시신들을 땅에 묻을 수 있었고, 심지어 서로 축구를 하면서 샬롬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비록 짧은 휴전이 끝나고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후 유럽에서 평화를 말할 때에 즐겨 회자되는 감동적인 일화가 된 것이다. 이 성탄절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높이고 찬송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미움과 증오 그리고 싸우려는 욕망은 힘을 잃게 된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 주님의 평화가 온 세상 속에, 특별히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 찬 곳에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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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독일이야기] “통일을 이룬 나라”
    내가 독일에 간 1992년은 독일 통일 2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 경제대국이고 문화강국이었던 독일에 부러운 것이 많았지만,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들이 일궈낸 이 통일이었다. 세계에서 외세에 의해 분단된 단 두 나라 가운데 독일이 먼저 통일을 이루면서 우리만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게 된 것이다. 1994년 종교개혁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과거 동독지역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루터유적지가 옛 동독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동독으로 넘어가면서 옛 서독과 동독 국경휴게소에 들렀다. 당시의 동독초소 하나만 남아있을 뿐 다 철거되어 5년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고 긴장된 국경이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동서독을 가로막았던 담장이 무너진 터에 서서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나라도 속히 통일을 이루어주십시오. 동독과 동유럽이 와해된 것처럼 북한정권도 와해되고, 그래서 독일처럼 자연스럽게 흡수통일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이다. 1989년부터 시작된 동유럽의 붕괴, 소련연방의 해체 등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 은 북한의 붕괴와 아울러 그렇게도 염원하던 통일이 곧 올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벌써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통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독일은 되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것일까? 독일과 우리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 대내외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은 통일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우리는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통일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동유럽공산권의 갑작스런 붕괴 가운데 동독정권이 붕괴되고 그래서 서독이 날로 동독을 흡수하면서 통일을 이뤘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독에서 미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가운데 갑자기 통일이 됨으로 말미암아 통일 이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평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판단이다. 독일은 통일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왔고, 그런 가운데 기회가 찾아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기회를 붙잡아 통일을 이루는 것도 어찌 보면 실력인데 그것이 독일에게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해해서 안 되는 것은 동독은 붕괴된 것이 아니고 독일통일도 흡수통일이 아니다. 만약 정말 동독정권이 붕괴되고 흡수통일이 되는 것이었다면 훨씬 엄청난 혼란과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동서독국경선에서 가졌던 생각처럼, 또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염원하는 바처럼, 만약 북한 정권이 붕괴가 된다면 과연 어떤 시나리오가 전개될까? 북한이 순순히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까? 혹 우리 손에 들어온다고 해도 북한 주민이 순순히 우리의 통치에 순응하려고 할까? 북한 주민 2천5백만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통일에 대한 환상과 나이브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이루어진 독일통일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바라고 기도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독일통일과 그 속에서 독일교회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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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독일이야기] “난민의 나라(3)”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내전은 전 국민의 1/3이 넘는 90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을 만들었고, 그 불똥이 유럽으로 튀면서 유럽의 정치지형도까지 바꾸었다. 시리아 난민들 중 일부는 우선 레바논과 요르단 등 중동지역의 난민촌에 수용되었지만 더 많은 이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터키와 그리스로 몰리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를 넘어 동유럽을 통과해서 서유럽으로 가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동유럽제국들은 국경을 통제하면서 이들을 거부하고 냉대했다. 유럽연합 내에서도 난민을 놓고 각 나라 간의 긴장과 갈등이 커지는 등 시리아 난민문제는 유럽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2015년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난민 100만 명을 수용하겠다고 전격선언하면서 ‘우리가 해낸다!’(Wir schaffen da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유럽연합의 수장격인 독일이 총대를 메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메르켈의 이 선언은 우선 독일 내에서 큰 찬반을 불러일으켰다. 난민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이 통 큰 정책을 두 손 들고 환영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녀가 인기영합의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며 비판했고 이것은 지지율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런 메르켈 정책에 부담을 느낀 주변국에서도 충분한 논의과정이 없었음을 인해 독일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충분한 논의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서로 뒤로 빠지려는 상황에서 그녀는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 것이다. 결국 독일은 메르켈의 선언대로 2015년~2016년에만 약 12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고, 유럽의 제국들도 뒤따라 난민 수용을 선언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또한 결과적으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난민반대정책을 앞세운 극우정당들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8월 독일국영방송(ZDF)은 메인뉴스에서 이들 난민을 추적한 결과 2015년 이후 다른 나라로 간 30만 명을 제외한 남은 난민들은 독일 사회에 잘 정착했고 이들 중 50%가 이미 산업전선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우리가 해낸다!’라는 메르켈의 구호가 결실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난민으로 인한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들이 잘 정착하도록 국가가 체계적으로 교육하였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도우면서, 결과적으로는 부족한 노동인력을 채우는 등 난민과의 상생이 가능함을 독일 사회는 보여준 것이다. 유엔난민기구에 의하면 지난해 말 기준 세계난민은 8,240만 명으로, 지구촌 인구 100명 중 1명이 난민인 셈이다. 오늘날 한국인들 모두가 영화와 드라마 K-pop과 음식 등 우리 고유의 문화가 세계 속에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되기를 원하듯, 우리 역시 세계가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고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9)고 명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근본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가르치고 있다.(히11:13) 예수님도 태어나면서부터 애굽으로 난민의 길을 떠났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족과 고향을 잃고 타지로 떠도는 이 난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긍휼함을 갖고 끌어안고 돌보는 데 앞장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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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독일이야기]난민의 나라(2)
    이전에 쾰른에 있는 한 한인교회에서 큰 행사가 있어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교회 역시 아주 오래된 독일교회당을 빌려서 쓰고 있었기에 함께 간 분들이 교회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뒷마당으로 갔더니 좀 역한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인가 물으니 친교실 지하에 몇 분의 난민들이 기거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기나라 음식을 만들다보니 자주 나는 냄새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은 독일의 많은 교회들이 난민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엄격한 정부당국에서 난민 허락이 나지 않음으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교회 안에 숨겨주는 난민들도 있었다. 아무나 그런 것은 아니고, 교회가 오랫동안 상담하고 관찰하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 난민이라 확신한 경우이다. 당국의 강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쉽게 내주지 않음으로 인해 국가와 교회 간에 난민으로 인해 종종 긴장관계가 만들어진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독일 목사와 인사를 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당신 독일인들은 깨끔한 것을 좋아하는데 이런 냄새가 역겹지 않냐고 하니, 정색을 하면서 아무 문제없다고 했다. 이처럼 난민을 보호해 주는 일은 우선 이런 의식이 있는 목사들이 앞장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독일교회에서 교인들의 동의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교인들 중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는 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동의하고 뒷받침해주는 이들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독일교회는 이런 난민 뿐 아니라, 외국인이나 소외된 이웃들의 문제와 관련해 꾸준히 설교하고 교육할 뿐 아니라, 이와 연관된 행사를 적극 개최함으로 교인들의 사고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나의 논문을 지도해주신 링크(C. Link)교수 부부도 교회에서 이런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분들이었다. 이들은 아직 거처지를 구하지 못한 아프리카 난민가족을 자기 집 지하에 데리고 살기도 했다. 종교개혁 499주년 때에 나를 포함해 교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한국으로 모셨다. 서울에서 여러 차례 세미나를 갖고 부산에도 내려와 우리 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했다. 본래는 교수님 부부를 초청했는데, 사모님이 당시 시리아에서 온 난민들이 많아 그들 돌보기 바쁘다면서 정중히 거절하셨다. 이전에 한번 방문했던 우리나라를 그리워하며 아직 건강할 때에 꼭 다시 오고 싶어 했던 사모님은, 난민들 돌볼 손이 부족하다며 그들 곁에 있기로 한 것이다. 이런 소개의 말에 우리 교인들은 감동하였고, 사회선교위원회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난민 돕는 일에 동참하겠다면서 교수님에게 100만원을 전달했다. 교수님은 감격해서 받아가셨고, 이것을 그 도시의 난민단체에 전달해서 난민 지위 취득에 필요한 변호사비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교수님은 이 사실을 자기교회에 자랑했더니 이 말에 감동한 몇몇 사람들이 기부에 동참했다는 소식도 전해주셨다. 지난 2019년에 교수님댁을 방문했을 때에도 두 부부는 거듭 그 일에 사례했고, 지금도 교회에서 매주일 오후에 난민을 위한 카페를 열고 있는데, 그 일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독일개신교회는 점점 신앙적인 열정을 잃고 늙어가는 것이 분명하나,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며 살려고 하는 자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로 인해 교회는 여전히 독일 사회에서 신망을 얻고 있고, 보이지 않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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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독일이야기]난민의 나라(1)
    2018년 500명이 넘는 낯선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해서 난민 신청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난민수용에 대한 찬반토론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등 때 아닌 난민문제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컸지만, 특별히 이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기독교인들 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읽으면서 올해 미라클 작전으로 아프칸에서 구출된 391명에게 정부는 난민보다는 특별공로자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난민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두루의 김진 변호사는 외교부나 법무부가 국민을 의식하여 난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피하고 있어 우려된다면서 “아프간인들이 국내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부분 등에서 난민에 준하거나, 난민 지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정식 선진국 지위를 얻은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그에 걸맞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만큼, 난민문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야 한다. 난민을 반가워하고 좋아할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많은 세금을 써야한다는 재정적인 문제뿐 아니라,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문화적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염려와 아울러 외국인 범죄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는 난민문제가 피할 수 없는 과제임을 직시하고 오래전부터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공존하는 것을 배워왔다. 독일생활 초기에 내가 다닌 사설 어학원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우리 반에 서글서글해 보이는 터키인 두 명과 친하게 지내면서 집으로 식사초대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터키인이 아니라, 터키 내의 박해받는 쿠르드족이고, 그중 하나는 전쟁터에서 직접 터키군인을 죽인 전사임을 알았다. 망명자로 받아들여진 이들의 어학공부를 위해 독일정부가 그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또 친하게 지낸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고내전 때에 애인과 함께 난민으로 온 안나였다. 안나는 크로아티아계이고 그녀의 애인 사올은 보스니아계였는데, 두 사람 다 착하고 정이 많아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우리 교회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처럼 독일에는 이미 많은 난민들, 망명자들이 살고 있었다. 본래 독일은 외국인에게 친절한 민족이 아니고 외국인이 발붙이고 살기 어려운 나라임을 히틀러 나치가 증명해주었다. 19세기 후반에서야 뒤늦게 얻은 식민지들도 1차 대전의 패전으로 다 상실했기에,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식민지인들의 유입도 적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폭발적인 경제부흥의 과정에서 터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불렀고 이들이 정착하면서 외국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유의 외국인 유입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난민이었다. 그동안도 꾸준히 정치 망명자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난민의 시작은 유고내전부터였다. 1991년부터 시작된 유고내전은 120여만 명의 난민을 만들었는데, 그 중 32만 명을 독일이 수용했다. 안나와 사올도 그들 중 하나였다. 1990년 이후 독일도 통일로 인해 많은 재정적인 부담을 겪고 있었지만, 국제적인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부만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국민들의 합의가 뒷받침 되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독일개신교회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교회는 삶의 터전을 잃고 오갈 데 없었던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실천하는데 앞장 선 것이다. 난민문제를 앞으로 좀 더 다루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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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독일이야기]정의를 위한 시민의식
    2006년 일본 오사카행 특급열차 안에서 한 치한이 옆 자리에 앉은 20대 여성을 성추행하다가 화장실에 끌고 가 30분 간 성폭행을 했다. 그런데 이 차량에 함께 있던 40여 명의 승객은 울면서 끌려가는 여성을 뻔히 보고서도 “뭘 쳐다보고 있어!”라는 치한의 고함소리에 위협을 느끼며 제지는커녕 승무원에게 신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사회 일각에서 불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로 인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도 그건 나와 무관하다면서 침묵하든지, 몸을 사리는 보신주의로 흘러가기 쉽다. 인권운동가 스탠리 코언은 세상에서 인권 침해와 그 고통의 더욱 늘어나는 이유는 불의한 가해자뿐 아니라 방관자의 완고한 ‘부인’의 태도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독일인들 속에서 이런 부분에서의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느꼈다. 어쩌면 과거 불의한 권력에 맹종하면서 그 속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웃에게 무관심한 결과, 말로 다할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한 역사가 준 교육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 교통사고가 나면 양쪽 보험회사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것이 일반화되어있지만 과거에는 양쪽 차주들이 나와 서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싸우기 일쑤였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통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주변에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라 해도 괜히 끼어들어 낭패를 보거나 불편한 일이 생기는 것이 싫어 말없이 지나쳐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이런 경우 목격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려 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재판으로 가는 경우는 증인으로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은, 억울하게 손해를 입는 일이 옳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별히 약자가 억울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 더더욱 나서려고 하는 시민의식이 강하다. 우리 교회의 전도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한번은 주차를 하다가 앞에 서있는 차에 접촉사고를 내었다. 그러자 그가 독일어에 서툰 외국인인 것을 안 차 주인이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한몫 잡을 심산으로 이전에 찌그러지고 흠이 난 곳을 가리키며 이게 다 당신 잘못이니 당신이 물어내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말이 짧아 반박하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 지나가던 할머니가 나서서 차 주인에게 따졌다. ‘내가 다 봤는데, 이 젊은이가 흠집 낸 것은 여기 한 곳 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외국인이라고 해서 덤터기 씌우려는 거냐? 재판하면 내가 이 사람의 증인을 서주겠다’ 이 말에 차 주인은 기가 죽어서 접촉사고로 흠집 난 부분만을 보상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그 할머니가 세웠던 자전거가 넘어져서 전도사의 차에 부딪히며 미세한 상처를 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잘못이니 보상하겠다며 돈을 주려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간신히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사회의 정의가 데모나 선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시민의식이 그 사회를 보다 정의롭게 세워나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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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독일이야기]정리와 질서의 나라
    독일인들이 즐겨하는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정리는 삶의 반이다.” (Ordnung ist das halbe Leben) 여기 오르드눙(Ordnung)이라는 말은 규칙, 질서, 정리정돈 등을 뜻하는 말이다. 독일에 살다보면 왜 이들이 이 말을 자주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이 단어에서 나온 ‘오르드너’라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바인더인데, 대부분의 가정이 이것을 서너 개 갖고 여기에 영수증을 비롯해서 온갖 서류들을 차곡차곡 정돈해놓는다. 보통은 3공 링 바인더인데 그 구멍 간격이 전국적으로 꼭 같다. 애들용이나 어른용이나 모든 문구류의 규격이 꼭 같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는 방식이 꼭 같아, 어려서부터 배운 정리하는 법을 평생 사용하게 된다. 사회의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고 반듯하고 이것이 그들에게는 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독일인들의 질서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 아마도 도로위일 것이다. 나 역시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운전을 했지만, 기본적인 교통법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다녔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이 교통법규들을 조목조목 잘 인지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경우는 사거리를 지날 때에 어느 도로가 우선인지 잘 알 수 없기에 조심해서 좌우를 살피게 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어느 도로나 우선순위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는 우선도로 표지판을 유의해야 하고,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우측도로에 우선권이 있다. 보통 우리 생각에는 직진도로나 큰 도로가 우선일 것 같은데 독일에서는 아무리 작은 도로라도 우측에서 나오는 차량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진다. 이런 규칙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자칫 사고를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교통규칙들을 잘 지키기에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있으면 상대방이 으레 서겠거니 생각하면서 좌우를 보지 않고 몰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 사거리에서 아무도 없다 해도 빨간 불이면 정차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보행자 역시 빨간불에서는 건너지 않는다.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에 사람들이 빨간불에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너가는 모습이 특이해보였다. 유럽인들 속에 팽배한 개인주의로 인해 이번 코로나 방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독일이 나름 선방하고 또 어떤 나라보다도 쓰레기 분리를 잘 실행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정리정돈을 중시하고 규칙과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반듯한 사회를 보통은 동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좀 차갑고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구나 법과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적응이 쉽지 않은 사회이다. 독일에 오랫동안 살다가 직장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된 한 교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생활에 익숙했던 그는 처음에는 파리의 무질서함이 너무나 적응이 안 되어 힘들었다. 특히 교통규칙이 독일처럼 엄격하지 않고 잘 안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차를 갖고 나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이제는 프랑스의 자유로운(?) 삶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도리어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과거 독일을 생각해보니 숨이 막혀왔다. 그 법과 규칙에 꽉 매여 있는 갑갑한 사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고, 이제 다시 돌아가라면 죽어도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리와 질서의 나라의 명암이 아니겠는가!
    • 오피니언
    2021-09-03
  • [독일이야기]차별의 문제
    아시아인으로 유럽이나 미국에 살다보면 누구나 크건 작건 인종차별을 겪게 된다. 인종차별을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기에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게는 못하지만, 일상 속에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차별의 태도를 드러낸다. 하는 사람은 의식하지 못해도 당하는 사람은 그것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는데, 나 역시 독일에 살면서 종종 그런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또 교민이나 학생들 중에는 직장이나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인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인들에게는 자신들의 탁월한 문화가 세계를 주도해왔다는 자만심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고, 그런 우월감은 다른 인종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게 만든다. 2009년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깊은 감회를 말하면서도 미국 사회에서 진정한 인종차별의 치유는 앞으로 100년 안에는 불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그만큼 아직도 인종차별의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종차별은 서양의 백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도처에 인종차별의 흑역사들이 있고, 우리민족도 과거 일본에 의해 심한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 아니 우리들 역시 오늘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에서 자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과거 역사를 보면 이 차별의 선두에 기독교회나 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주의를 앞세우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큰 죄를 범했지만, 이것은 그들만의 죄가 아니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인들 속에 뿌리 깊이 내린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였다. 초대교회 시대에 기독교를 박해했던 유대교인들은, 밀라노칙령 이후부터는 기독교인들의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 중심의 단일사회였던 중세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끝까지 개종을 거부하고 자신들끼리 모여 게토를 이루며 살았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조소와 증오는 문학작품들에도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글에도 담겨있다. 이후 유럽이 근대화되고 다원화사회로 변모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게토에서 나와 사회로 진출했고, 과학과 학문, 예술과 경제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또 다시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천년을 이어온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폭발한 것이 인류사에 가장 커다란 오점으로 남겨질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그것이 독일의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은, 당시 이 나라가 시민정치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해서 선동정치가 가능한 정치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과거 유대인뿐 아니라 흑인이나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그에 따른 증오와 폭력에 앞장선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차별의 근거를 성경 속에서 찾으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자신의 신앙 속에는 그런 그릇된 면이 없는가를 돌아보도록 가르치고 있다.
    • 오피니언
    2021-08-13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4)
    독일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냉철하고 끈질기게 파헤치고, 또 과오에 대해서 처절하게 반성하는 예는 드물 것이다. 어느 나라나 자랑스러운 역사뿐 아니라,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역사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강대국인 경우 분명 근대사에서 다른 민족을 약탈하고, 이웃 나라들을 괴롭힌 흑역사들이 많이 있다. 때로 양심적인 학자들이 그것을 파헤치고 드러내지만, 국가가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고, 국가 내에서도 서로 상반된 정치이념들로 인해 역사가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독일은 이점에서 확실히 달랐다.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반인륜적인 사건들을 숨기지 않고 낱낱이 파헤쳐서 전시하였고, 이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극우세력이 발을 붙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청산의 가장 핵심인 인적청산을 철저히 했다. 전후 수많은 나치전범과 그 동조자들을 찾아내어 재판하였는데,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은 지속되고 있다. 올해 2월 독일 검찰은 나치 수용소에서 비서로 일했던 여성과 경비원이었던 남성을 기소했는데, 둘의 나이는 각각 94세, 100세였다. 아무리 고령자라해도 재판정에 세울 정도의 건강이면 반드시 세웠고, 수용소에서 직접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어도 방조한 책임을 물어 낮은 직급의 관리자·경비원·비서 등도 사법처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집요하게 과거를 청산하려고 하는지 그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독일은 국가지도자가 매년 반복되는 홀로코스트나 전쟁 기념일마다 참석하여 사과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빌리 브란트 수상이었다. 동방정책을 통해 동서의 화해를 이루려했던 그는 1970년 폴란드 방문 시 과거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두어 살게 했던 게토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세운 기념비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그가 결단하고 행한 이 ‘바르샤바에서의 무릎 꿇음’ (Warschauer Kniefall)은 이후 독일의 진정한 참회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뼈아픈 과거청산의 용기와 진정성은 주변국가들 속에서 신뢰를 회복하게 하였고, 이것이 훗날 독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통일 이후에도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경제, 군사, 외교면에서 다시금 강대국의 지위를 확고하게 누리게 되었다. 이와 대비되는 나라가 스위스이다. 나치가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금괴를 거래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나치에게 전비를 마련해준 스위스는,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하고 참회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면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스위스의 저술가 아돌프 무쉬그가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지에 이런 글을 썼다. “(과거를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마치 마취가 풀릴 때처럼 먼저 고통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시인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는 종종 아픔이 따르지만,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그런 자에게 또한 바른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 오피니언
    2021-07-23
  • [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3)
    2000년 경 독일 남부의 대도시인 뮌헨을 방문했을 때에 근교에 있는 다카우 수용소를 찾았다. 이곳은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만들었고, 유대인 뿐 아니라 나치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로 여기 수용된 약 20만 명 중 정식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이 41,500여명에 이르렀다. 이 수용소는 나치가 독일 전역에 만든 수용소 중에 가장 먼저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미군들이 처음 도착했을 당시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이곳으로 보낸 ‘죽음의 기차’에 2300여구의 시신이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후 이 시신들을 비롯해서 다카우 수용소의 비참한 장면들이 공개되면서 나치의 끔찍한 만행이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되었다. 독일에는 다카우나 부헨발트 수용소와 같은 나치시대의 수용소들이 박물관처럼 보존되고 전시되어 있다. 당시 나치들이 반유대 감정을 조장하는데 사용했던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문서들, 생체 실험 등의 만행들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고, 수용소 내부를 공개하여 당시 수용자들의 비참했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 이곳 수용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곳에서 자행된 유대인들 집단학살에 관한 내용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사실 그 가해자들은 다른 누가 아닌 한 세대 전의 독일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나치와 그에 동조하여 이런 범행에 직접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고, 이런 수용소내의 끔찍한 일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그런 일을 자행한 나치정권을 선택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고, 침묵하면서 소극적으로 방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버드대의 골드버그는 ‘집단범죄’(collective sin)라는 개념을 적용하면서 그 시대의 독일국민들은 반인륜적인 나치범죄의 공범자라고 말했다. 이처럼 분명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부끄러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이 모든 것을 객관화시켜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숨기지 않고 다 발가벗겨 보이고 있다. 마치 그들의 자녀들과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이처럼 잔인하고 못된 민족이었소 하고 전시하는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TV에서는 자주 미국에서 만든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을 방영해주고 있다. 그 영화에서 당연히 독일군이 양민을 괴롭히는 악한 놈들로 묘사되고 미국군은 의로운 군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저녁 메인뉴스에서 나치의 만행과 홀로코스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독일이 과거 역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진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진정한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과거 나치 독일과 지금의 독일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독일인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세계인들의 비난을 담담히 받을 뿐 아니라, 자신도 함께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정당이나 몇몇 정치인들의 정치이념이 아니다. 사회전반에 두터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나아가 학교에서 나치가 보여준 독재, 인종차별,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철저히 교육함으로 건강한 시민의식이 세대를 이어가게 하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정직한 회개를 통해 지난 날 지은 죄의 굴레에서 자유케 되는 신앙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 오피니언
    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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