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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나침반] generation to generation
    교회(ἐκκλη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신분, 성별, 연령을 초월하여 하나 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입니다. 16세기 개혁교회 주일학교는 교회의 이러한 본질을 회복하는 세대통합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유아,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이 모두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우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매 주일, 복음을 ‘함께’ 듣고, ‘함께’ 은혜 받으며, ‘함께’ 결단하였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면, 자연스럽게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의 신앙전수가 활발해집니다. 존 웨스터호프3세는 신앙 전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 세대가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복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자녀세대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는지에 대한 정체성이 수립됩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예배와 프로그램은 세대와 계층과 문화를 뛰어넘고,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 되는 신비와 기쁨을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예배와 프로그램을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마련한다면, 자녀세대들은 교회와 한 가족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세대들은 ‘함께함’의 경험 속에서, 자신이 ‘교육부서의 학생’이 아닌, ‘교회의 참된 성도, 참된 지체’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100년의 역사가 넘는 시골의 어느 교회를 만났습니다. 그 교회는 수많은 세월 속에,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300여명 모였던 교회가 현재는 60명 남짓 남게 되었습니다. 남은 성도들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하여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후회와 원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향기나무 사역팀을 보내셨습니다. 처음에는 주일학교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겨울성경학교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은 저희 사역의 본질인 ‘세대통합’의 가치를 들으시고, 방향을 완전히 바꾸셔서 세대통합 겨울성경학교를 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은 저희 팀과 함께 준비 기도회 중, 간절히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향기나무 집회와 성경놀이를 통해서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한 말씀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복음집회와 복음 성경놀이터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강하게 임재하셔서, 서로를 마주보게 하시고, 서로에게 미소를 짓게 하시고, 서로를 감싸 안게 하셨습니다. 그 날 참 추웠던 날씨였지만, 교회 예배당 안은 유아, 아동,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모든 세대가 복음 안에서 기쁨으로 하나 되니, 그 온기로 인하여 참 많이도 따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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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3-06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다원주의를 넘어 예수님을 전합시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나 다음세대가 “왜 예수님만 믿어야 해요?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고 여러 신앙들이 있는데 왜 예수님만 우리를 구원하시죠?”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원주의의 도전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란 예수님만 구세주가 아니라 어느 종교나 어느 대상이나 하나님이 될 수 있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다원주의는 신은 마치 산 정상에 있는 것과 같은데 인간이 어떤 길로든 올라가기만 하면 결국에는 다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다르지만 결국은 신에게 다다를 수 있으니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라고 하는 게 다원주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다원주의 논리에서는 누구를 믿느냐 하는 신앙의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중요하지 않고 도리어 믿는 인간의 열심히 중요해집니다. 얼마나 열심히 믿냐, 얼마나 열심히 산에 올라가느냐, 얼마나 열심히 정성을 드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분들을 여러분들 아시잖습니까?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그 새벽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서 그 물을 뜨고 그 깨끗한 물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하는데 그 기도를 누가 듣는지를 모릅니다. 그걸 누구한테 비는 겁니까? 달님한테 비는 겁니까? 별님입니까? 구름입니까? 하늘이 듣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 기도를 열심히 드립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직장 다니는 분들 보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개업하면서 돼지머리 놓고 그 코에 돈을 꽂아 넣으면서 고사를 지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 정성을 누가 받는 건지 아냐고 물어보셨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정성은 갸륵하지만, 그 정성이 누구에게 가는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위안을 받는 겁니다. “난 열심히는 했어. 나는 그냥 최선을 다했어. 정성껏 했어. 그러니까 내가 정성을 드렸으니까 좋은 결과가 날 거야.” 그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다원주의는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기독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모든 다원주의를 부숴버립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 모든 다원주의, 모든 실용주의를 부숴버리는 게 기독교입니다. 다원주의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만약에 산 위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이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올라가면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정상의 자리를 박차고 우리에게 내려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높은 곳에 가만히 앉아서 “야! 올라와 봐! 실력껏 올라와! 올라오는 사람만 내가 만날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갈 능력이 없는 우리, 하나님을 만날 능력이 없는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뒤집어엎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열심히 믿어라! 잘 믿어라! 최선을 다해라! 너희가 잘하면 하나님이 너를 만나 줄 수도 있다. 천국 갈지도 몰라!”그게 신앙이었다면 이제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끌어안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시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과 정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고 누구를 부르러 찾아가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가 중요해집니다. 그분은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 이름난 사람만 품어 안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찾아와서 만나 주십니까? 주님은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여기에 대한 기준을 마가복음 2장 17절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2:1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의사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병든 자에게라야.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병이 들어 죽게 생겼는데 이게 난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겁니다. 난 어떻게 이 병을 치유할 수도 없고 이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의사에게 목을 메고 매일매일 찾아와서 나 좀 고쳐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 그 미천한 사람, 그 막막한 사람, 그 병든 자, 그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쓸 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영혼의 치료자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다음세대가 믿고 따를 진리가 되십니다. 우리, 다원주의의 도전을 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모와 교사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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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2-10
  • [다음세대칼럼] 평범하게 살아봤어야 평범하게 살지
    희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누가 책임지고 키울 수 없어 보육원에 맡겨졌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보육원 생활에 답답함을 느껴 순간적으로 가출하였는데 그때 나쁜 오빠들을 만나 성폭행과 성매매로까지 이어져 한 번의 가출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희진이는 성매매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제가 이 사건의 국선보조인이 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줄곤 자신의 비행을 부인하던 희진이가 재판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제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 이제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요. 저 사실은 가출 기간 동안 오빠들이 시켜서 성매매를 했었어요. 오빠들이 잡히면 안된다며 울산, 대전, 인천, 수원까지 데리고 다니며 시켰어요” “이제 왜 사실을 말하는거니?” “사실대로 말하면 소년원 갈까봐 겁나서 거짓말 한거예요. 처분을 잘 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데, 이젠 처분이 어찌 되든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받고 싶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생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잡히게 되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털어놓은 희진이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동안 성매매를 너무 많이 해서 횟수도 모르겠어요. 어떤 오빠는 하루 2~3회 정도 시켰고, 또 다른 오빠는 4~5회 정도 시켰어요. 가출한 7개월 중 5~6개월 정도 그렇게 성매매를 한 것 같아요” “가출한 후 도움받기 위해 갈 곳도 찾아갈 사람이 없었어요. 어떤 날은 정말 하기 싫어서 아무리 사정을 해도 계속 시켰어요. 딱 하루 제 생일날만이라도 안하게 해달라고 부탁부탁하여 겨우 그 날은 하지 않았어요”라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 이제부터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교복 입고 학교 다니고 싶어요”라며 희진이는 울부짖었습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아픔과 고통을 누르느라 끄억끄억거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희진이는 힘들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저 이제 10호 소년원 보내도 갈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 그동안 잘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라는 희진이의 인사를 뒤로 하고 저는 소년원의 철문을 나왔습니다. 돌아와서 판사님에게 제출할 의견서를 정리하는 내내 희진이의 ‘이제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울부짖던 그 울음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렸습니다. 드디어 재판 날. 판사님은 희진이의 진심어린 반성하는 태도를 보시고 둥지센터에서 지내도록 선처해 주셨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판결이었습니다. 소년원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희진이도 저와 함께 둥지에서 지낼 수 있다는 말에 너무 좋아 몇 번이고 판사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희진이는 둥지에서 지내면서 중졸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희진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2개월 정도 일한 월급을 들고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몇 번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희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희진아! 너 왜 이러니?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잖아? 교복 입고 학교 가고 싶어했잖아?” 한참 뒤에 답장이 왔습니다. 씨X. 평범하게 살아봤어야 내가 평범하게 살지. 평범하게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 뭘 더 원하는거야? 그렇게 희진이는 둥지를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보호관찰위반으로 구인장이 발부된 상태에 서울에서 불심검문으로 붙잡혀 재판을 받고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10호 처분을 받아 소년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때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아껴주시고 믿어주시고 보살펴 주셨는데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게 고작 이것 뿐이라서 죄송해요. 감사해요. 도와주셔서. 미안해요. 이런 모습 밖에 보여드리지 못해서. .... 도와주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딸이라 불러주시고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 많이 못나고 부족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고 또 주고 또 주셔서 감사해요. 한 없이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보듬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감사할게 많은데 어리석은 모습만 보여드렸네요. 후회. 당연히 되죠. 제가 늘 그랬죠.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구요. 바로 이거였네요. 제가 갚지도 용서받지도 못할 잘못. 기회는 여러 번 있었고 제 발로 그 기회들을 차버렸네요. 제가 왜 그랬던 걸까요. 도대체 왜. 어떻게 해야 저를 멈출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저는 행복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행복들을 피해 도망치려고만 할까요. 왜 저는 늘 이런 식일까요. 모르겠어요. 저도 저를 모르겠어요. 잘하려고 해봐도 그게 잘 안되요. 왜 안될까요.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서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목말라하고 필요해 했는데 너무 오랜 기간 마르고 굳어 갈라져서 걷잡을 수 없을만큼 작아지고 작아졌어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행복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건지. 사랑과 관심을 어디에 담아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늘 힘들었던게 이거일까요.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나도 나를 모르겠어요.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나오는데 무엇을 위해 우는 것까요.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린걸까요. 견딜 수가 없어 미치겠어요. 정말 진짜 너무 힘들어요. 저는 왜 구제불능일까요. 이렇게 못되쳐 먹은 걸까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을까요. 뭐가 필요한건지 무슨 방법을 써야 하는지 하나도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너무 아프고 망가지고 힘들어서 정말 죽고만 싶어요.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요.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아픈데 아무리 생각하고 쥐어짜 내봐도 모르겠어요. 정말 죽고 싶을만큼 아파요 마음이. 원래 이렇게 쓰려던게 아니었는데 말이 변해버렸네요. 저는 감사하다고 할랬어요. 감사하다고. 너무 고마웠어요. 진심이예요. 아빠. 사랑해요. 딸 희진이가” 평범하게 산다는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김종환이라는 가수가 그의 딸 리아킴에게 만들어 준 노래 가사 한 절 한 절이 와 닿습니다.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 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그대가 아플 때도 약속한대로 그대 곁에 남아서 끝까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에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가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 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며 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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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신앙교육나침반]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신앙교육 프로그램 ‘All generation 성경놀이학교’
    2006년,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의 리처드 로스 교수는 이러한 예견을 했습니다. “교회는 세대 분리 교육을 위해 새 건물을 아주 잘 지을 것입니다. 건물의 외형적인 매력과 부서별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을 자신의 또래들과만 어울리게 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녀들을 축복하는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며, 청년들은 장년들과의 관계로 인해 얻게 되는 풍성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가족들은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견은 놀랍도록 정확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은 자신이 맡은 교회학교 부서의 사역을 성공시키기 위해 다양한 훈련과정과 프로그램을 준비합니다.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환경 등의 모든 면에서 세대 간의 분리가 정교하여 전문화될수록, 우리는 교회교육의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착각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처럼 세대 간의 분리를 추구하면서도 가정이 신앙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올해 귀 교회의 어린이, 청소년 부서의 사역비전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제자 양육’, ‘신앙고백의 회복’, ‘사랑의 공동체’, ‘믿음성장과 회복’, ‘섬김’을 비전으로 삼고 달려갈 것입니다. 어찌하면 다음세대를 잘 훈련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 세울지 고심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사역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세웁니다. 혹시 ‘부모와 자녀를 어떻게 함께 믿음의 양육을 경험하게 하는가?’, ‘부모를 통한 신앙전수를 활성화하기 위해, 부모들을 어떻게 훈련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비전에 넣고 있나요? 아마도 많은 경우에 이 내용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학교 부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신앙양육의 책임을 빼앗아가는 구조입니다. 부모들 역시 이러한 구조 안에서, 자녀의 영적발달에 대한 책임을 주일학교 사역자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신앙교육에 대한 일차적 책임자를 누구라고 정하셨을까요? 성경에 분명한 정답이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라기 4:6)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시편 78:5-6) 하나님이 지목하신 자녀의 신앙에 대한 일차적 책임자는 부모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음세대 사역자들의 사역의 방향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그들은 부모의 신앙전수가 활성화되도록 하는 방향을 사역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중등부에서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까?’만이 아닌, ‘이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어떻게 복음을 전수받게 할 수 있을까?’도 함께 고민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귀 교회에 부모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나요?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나요? 그렇다면.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정기적인 프로그램이 있나요? 그러한 리듬을 시급히 마련해야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복음의 대대로 수직전수는 곧 끊어질 것입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모든 세대가 복음을 놀이하며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프로그램, ‘All generation 성경놀이학교’가 있습니다. 향기나무가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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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 사역과 성령의 임재
    우리는 다음세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비전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은 다음세대 사역을 하면서 우리가 표어로도 내걸고 사역의 목표로도 삼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육 현장에서 보면 성령의 임재와 이에 따른 권능에 대해서 아직도 오해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이 임했다고 하면 열광하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결과를 기대합니다. 겨울수련회를 하면서 우리가 신경 쓰는 부분은 아이들이 저녁집회 시간에 얼마나 열광적으로 찬양을 했는가? 얼마나 눈물을 많이 쏟고 큰 소리로 기도했는가? 얼마나 손을 높이 들고 발을 열심히 굴렀는가? 얼마나 기운을 빼면서 밤을 새도록 기도했는가? 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것을 기준으로 성령의 임재를 재려고 하고 평가하려고 할까요? 그건 바로 이런 것들이 학생들의 삶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변화보다 훨씬 쉽고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눈물 한 번 쏟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찬양 한 번 뜨겁게 하고 기분을 풀어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과 회개는 눈물의 기도와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선 후의 삶의 변화로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 받고 난 후의 삶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시험에 들어 그렇게 간절하게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도 겨울성경학교나 수련회에서 잔뜩 은혜 받고 집에 돌아왔는데 밀린 공부는 언제 할 거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와 한 판 거하게 붙고 나서(?) 수련회에서 은혜 받아봤자 아무 소용없다며 다시는 수련회 안 갈 거라고 은혜 무용론을 외쳐대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찬양하고 결단하고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될 줄 믿는다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은 내 주변 환경을 전혀 달라지게 해주시지 않으셨냐고, 하나님이 과연 정말 계시는 게 맞느냐고 원망하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너무하신다고 낙망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수련회에서 받은 은혜를 떨어뜨리려는 사단의 시험일까요? 많은 경우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가 정말 올바른 성령의 역사인지 확인시켜주는 아주 감사한 기회입니다. 내가 정말 은혜를 바르게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만 계시다면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고 견뎌내고 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증거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받은 은혜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정말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면 권능을 받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하고, 바뀌어야 할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정작 수련회에 가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았다는 나는 바뀌지 않으면서 왜 우리 엄마는 바뀌지 않았냐고, 왜 내 형제 자매나 친구들은 예전 그대로냐고, 그래서 시험에 들었다고, 다 때려치우겠다고 하면 그건 말씀을 잘 못 이해한 것이고 은혜도 이상하게 받은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차기 왕으로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는 얼마나 가슴이 뛰고 벅찼을까요? 하지만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골리앗이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다윗 자신이지 골리앗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믿음과 숙련된 기술로 골리앗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또한 다윗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요?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사울 왕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일로 시험에 들어 ‘기름부음 받아도 아무 소용없네!’ 하면서 포기했다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사울 왕을 피해서 동굴에서 전전할 때에도 꾸준히 기도하고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도 그를 몇 번이나 살려주면서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의 권위와 의미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악하고 완악한 내가 변화되는 이 유일한 권능은 성령님이 임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다음세대들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아이들이 될 수 있도록 바르게 가르치고 양육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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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1-20
  • [다음세대칼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우리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보다 더욱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웃이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에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시끄럽다고 신고를 하고 서로 싸웁니다. 주차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집 앞에 옆 집사람이 주차하면 반드시 욕을 하며 싸우게 됩니다. 더 이상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눅10:29 말씀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율법교사는 눅10:27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개념상 이웃에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교사는 아마도 그의 친족과 같은 동료 유대인들에게는 선을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좁은 의미로는 같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마을에서든 성읍에서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사는 낯선 자도 모두 ‘이웃’이어서, ‘이웃’은 ‘같은 사람’을 뜻했습니다. 레위기 19장 34절 말씀에는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에서 이 거류민은 타국인, 객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에서 신앙을 바르게 보존하고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를 두고 격렬히 다투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시기 전 200년 동안에는 ‘이웃’ 개념이 아주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실제로 ‘신앙의 동지’ 또는 ‘같은 당원’이라는 정도의 뜻만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율법에서 본래 뜻하고 요구했던 ‘같은 사람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 불리는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들려주시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웃의 개념에 자신의 친족이나 가까운 동지 유대인들만을 포함시킨 율법교사의 위선과 편협한 사고를 이 비유를 통해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유대사람이 한적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그 강도가 그냥 깔끔하게 돈만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그 강도는 아마도 그 유대인을 죽일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죽을 정도로 폭행을 당한 유대인은 길가에 그냥 버려졌습니다. 그 유대인에게 당연히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모른 척 지나칩니다. 그런데, 천대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친절을 베푸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당연히 누가 이웃인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이 강도당한 유대인의 이웃입니까? 누구나 아시겠지만 사마리아인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나는 율법을 잘 지킵니다.’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답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 같은 동네의 사람, 아는 사람, 등등이 그 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답이라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들려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나 친분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증오와 미움의 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이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사랑을 베푸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을 회복했고, 신앙을 지키며 산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이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편의에 맞게 이웃의 범위를 각자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만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부자의 이웃은 부자만 되고, 가난한 자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젊은 사람의 이웃은 젊은 사람만 되고, 나이든 사람의 이웃은 나이든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람의 이웃은 한국 사람만 되고, 외국인의 이웃은 외국인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만드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이웃이 아니었던 사람을 이웃이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이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하면 서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알게 모르게 기독교인이라고 경계를 그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경계를 그어놓고 그 안에서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경계를 그어놓고 사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가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필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이웃이 누구인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나는 위기 청소년들, 그의 가족들, 저의 도움이 필요한 모두가 저의 이웃입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니까 복음 안에서 회복이 일어납니다. 이번 주에 어떤 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아이는 선생님 만나서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과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 비유 속에서 이웃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실천하는 2023년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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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신앙교육나침반] 복음을 놀이하다!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지난 3년 동안 쉼 없이 ‘우리집 성경놀이터’를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인지적인 방법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놀잇감을 이용해서 복음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컨텐츠입니다. 지금까지 향기나무가 개발한 놀이는 약 100여개가 넘으며, 그 중에서 복음 놀이 50개를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50주 과정의 복음놀이 책이 발간되면, 누구나 손쉽고 저렴하게 복음놀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놀이터는 저 멀리 땅 끝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과 한인교회 사역자들에게는 귀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사역하는 현장은 한국보다 훨씬 더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장벽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세대의 장벽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복음 도구는 안타깝게도 인지적인 방법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향기나무교육개발원에서 개발한 복음 놀이는 언어와 문화와 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차별화된 복음도구가 될 것입니다. 아래는 이번 복음놀이 50주 과정의 놀이시연에 참여한 인원입니다. 4세 어린이 1명, 5세 어린이 1명, 7세 어린이 1명, 9세 어린이 2명, 10세 어린이 4명, 11세 어린이 1명, 12세 어린이 1명, 12세 어린이 1명, 14세 청소년 1명, 40대 장년 5명, 50대 장년 2명 다양한 연령의 영아, 유아, 아동, 청소년, 장년이 3일 동안 동일한 놀잇감과 내용으로 복음놀이를 경험하였습니다. 복음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세대의 수준 격차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뛰고 놀고 웃으면서, 우리는 어느 새 나이와 성별과 모습을 초월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놀이의 힘입니다. 복음을 인지적,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복음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요? 복음놀이가 마친 둘째 날, 이들 중 세 명의 아동들이 목욕탕에서 만난 할머니께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을 능숙하게 잘 하지 못하는 유아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의 스토리를 떠올려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온 몸으로 경험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놀이하다 50」(가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앞으로도 많은 과정이 있으며, 무엇보다 많은 분들의 후원과 기도가 절실합니다. 예수님 손에 올려진 오병이어처럼, 주님 손에 올려져 열방의 많은 영혼을 배불리는 데에 쓰임 받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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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무엇보다 강력한 교사를 세웁시다
    2023년이 밝았습니다. 새 시대, 새 마음으로 한 해를 출발하는 사랑하는 한국교회와 다음세대 사역자들, 교사들, 부모님들을 축복합니다. 많은 이들이 한국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교회사역도 함께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기에는 새 해의 소망이 너무나도 선명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는 많은 역사 속에서 위기를 이기며 성장해 왔습니다. 특히나 우리 교회학교의 역사를 보면 그동안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70년도 우리나라 전체 출산 인원은 약 100만이었습니다. 한해 100만 명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때는 동네마다 아이들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냥 북치며 전도하고 인형극만 보여줘도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 왔습니다. 간식 주면 아이들이 오고, 축구하면, 합창대회하면 아이들이 교회로 교회로 몰려오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도로 들어서 한국 사회의 출산 인원은 연 63만 명으로 줄어듭니다.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점점 아이들을 낳지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2010년도에는 연 47만 명으로 줄었고, 최근에 2020년도에는 무려 연 27만 명으로 떨어졌습니다. 50년 동안 아이들을 낳는 숫자가 4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20년 동안은 3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저출산을 넘어서 초저출산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이는 교회학교의 규모 자체를 줄어들게 하는 상황을 가져왔습니다. 출산율의 저하 외에도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격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교회학교에 타격을 준 것은 주 5일제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에 가고 출근을 하던 시절에는 주일 하루만 쉬기 때문에 그 하루 쉬는 주일은 반드시 구별하여 주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주일 성수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금요일 오후부터 퇴근하고 하교하고 들로 산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2박 3일로 주말여행을 떠나는 가정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토요일과 주일의 구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일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놀러가느라 교회를 안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건강의 위협은 결정적으로 더 한국교회를 코너로 몰아갔습니다.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2017년 황사를 뛰어넘는 미세먼지, 그리고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사태까지. 이 모든 우리 삶의 급변하는 상황들은 이제는 교인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제 상황이 어려워졌으니 교회를 안 나와도 좋다고 하는 공식적인 양해를 해 주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을 양해 받게 된 세대. 지금의 교인들과 아이들은 그런 공식적 허락을 받은 첫 세대입니다. 지금까지 초대교회 이후로 주일날 교회에 안 와도 좋다고 허락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상황을 피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교회학교 학생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현장예배의 중요성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야외에서도, 어디서나 메타버스로 예배하는 시대, 함께 모이는 가치를 이야기하면 구시대 사람처럼 취급받는 시대에 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럴수록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책무를 지닌 교육의 주체가 바로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아무리 교회학교의 상황이 어려워진다 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친히 지켜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구로 쓰임받는 교사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위기를 넘어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은 바로 파도처럼 몰려오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도 교회학교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켜낸 교사들의 무릎 꿇는 기도와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사들에게 똑같이 선포되고 들려질 주의 음성입니다.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여러분 같이 얻은 백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은총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한 현재의 은총으로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돕는 방패요 영광의 칼이 되어 주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과 창이 날아와도 방패만 든든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방패이십니다. 또한 어떠한 적도 물리칠 수 있는 영광이 칼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에게 주어질 미래의 은총은 바로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고 여러분이 그들의 높은 곳을 밟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루실 승리이지만 여러분도 그 동역자로 초대되었습니다. 교회학교의 승리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기뻐하며 찬양할 영적 싸움의 마지막 영광입니다. 올 한 해 교회교육의 현장에서 물러서지 말고 최선을 다합시다.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교사들이 세워질 때 우리 한국교회는 다시금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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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1-02
  • [다음세대칼럼] 명절이라 더 슬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손에 용돈까지 받아든 둥지의 아이들은 잔뜩 신나서 온 골목이 시끄러울 정도로 목소리 높여 인사를 하고 몰려 나갔다. 아이들이 다 떠나간 뒤 시끌벅적하던 둥지는 너무도 조용했다. 따따이와 별님은 이렇게 조용해진 둥지가 어색한듯 물끄러미 아이들의 방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조금 뒤 정아가 둥지에 들어오다 따따이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했다. “왜? 다시 왔어?” “아뇨. 뭘 깜빡하고 안 들고 가서..... 챙겨갈려구요” “그래. 며칠 있을건데 잘 챙기거라” 한참을 자신의 서랍장 앞에서 주섬주섬 챙기던 정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별님. 저 이번 명절에 그냥 둥지에 있으면 안돼요?” “왜 무슨 일 있니?” “아뇨. 그냥 몸이 안 좋아서요” 그리고 가만히 떨구는 얼굴에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한 것을 눈치챈 별님이었다. “왜 아빠랑 뭔 일이 있어?” “바쁘데요. 그래서 이번에 만나기 어렵다고.......” 사실 정아는 아빠를 제외하면 찾아갈 집도 부모도 친척도 없었다. 그 아빠마저 교도소에서 3년간 복역을 하다가 2개월 전 가석방되어 나왔는데 서너번의 전화통화 외엔 찾아오지도 않았기에 만나지도 못했다.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안 찾아올 수가 있어요? 우리 아빠 진짜 너무 하지 않아요?” “아마 바빠서 그럴거예요. 요즘 직장 알아본다고 바쁘다고 했어요” “다음 주에는 오겠죠?” 그리고 이번 설날 때 몇 년 만에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 그 기대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몇 번을 전화했으나 받지 않자 당장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 30분이 넘게 골목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아빠에게 계속 전화를 했다. 겨우 연결된 전화였는데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하기에 바빠서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온 몸에 힘이 빠진 채로 다시 둥지로 들어온 것이었다. 별님은 정아를 위해 명절 음식을 담은 점심식탁을 차리며 물었다. “정아야! 너 전에 사상에 할머니 사신다고 하지 않았니?” “예. 근데 아빠 교도소 가신 후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연락도 못했고” “그럼 지금 전화해 볼래? 그래서 명절인데 잠시 인사라도 하고 오는건 어때?” “그럴까요? 제가 가는 것 별로 안 좋아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냐. 그건 네 생각이고... 당연히 할머니가 손녀 오는데 반가워하시지. 한번 연락해보자” “그럴까요?” “할머니! 오늘 뭐해요?” “그냥요.... 좀 있다가 인사하러 갈게요” “예. 알겠어요” 아까보다 더 밝은 모습을 전화를 마친 정아에게 나나이가 물었다. “뭐라고 하셔?” “알았다고 오래요” 저 멀리 할머니집이 보이자 정아의 가슴은 꽁닥꽁닥 뛰었다. ‘오랜만에 나를 보면 뭐라 하실까?’ ‘혹시 사촌이나 조카들도 와 있는건 아닐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허벅지와 팔뚝에 있는 문신은 왠지 싫어하실 것 같아 옷을 애써 당겨 입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너무 긴장되어 바로 옆 골목에서 숨을 고르며 담배를 한 개피 물었다. 그리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연기 너머로 점점 뚜렷하게 보이는 얼굴로 인해 숨이 멈추는 듯 했다. 아빠였다. “아...빠.... 여기 어쩐 일이야?” “그냥. 너는?” “나는 할머니께 잠시 인사라도 할려고 왔지? 아빠 오늘 바쁘다면서?” “아빠도 급하게 와서 인사만 하고 지금 가던 길이다” 정아는 아빠를 만나면 그렇게 보고 싶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변해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너 허벅지와 팔에 그 문신은 뭐냐?” “이거... 뭐 .... 그냥....” “야~~ 이 가시나 봐라. 어깨에도 그림이 있네” “아니... 곧 다 지울거야” “돈 들여서 새기고 뭐 할려고 또 돈 들여서 지우냐. 그냥 놔둬라. 이쁘네” “어.. 어... 그럼 그냥 놔둘까” “그래. 들어가봐라. 할머니 기다리시겠다,. 아빠 간다” 그리곤 아빠는 말 없이 사라져 갔다. 정아는 아빠의 익숙한 뒷모습에 괜히 서러움이 북받쳤다. 정아는 늘 자신을 놔두고 떠나가기만 하던 아빠의 뒷모습이 너무 싫었다. ‘잘 지내냐고 한번 물어봐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쁘게 컸네라며 한번 안아주면 지금까지 나에게 잘못한거 다 용서해 줄 수 있는데...’ 할머니를 만나 잠시 인사만 하고 도망치던 빠져나온 정아는 길거리에서 가족들끼리 오손도손 손 잡고 가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지하철 안에서도 다른 가족들의 다정한 모습이 보기 싫어 눈을 감은 채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둥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따따이와 별님에게 자랑했다. “저 오늘 할머니집에 가서 인사 잘하고 왔어요. 가길 잘 한 것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집 앞에서 아빠도 만났어요. 정말 오랜만에 만나 너무 반가웠어요. 아빠랑 곧 면회 오기로 약속도 했어요. 용돈도 주시는데 제가 안 받았어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어서 배도 안 고파요” 그렇게 잔뜩 자신의 희망사항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 혼자서 라면 2개를 끓여서 김치와 최대한 맛있게 먹어치우면서 속으로 울었다. ‘다음 명절에는 괜찮아질거야’ 이번 새해와 명절에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 가지시고, 소외된 외로운 이웃들에게도 작은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따뜻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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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신앙교육나침반]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에 더욱 절실한 우리집 성경놀이터!
    베트남 호치민 하늘꿈 교회는 30여명의 한인들이 예배하며,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는 한인 교회입니다. 하늘꿈 교회 담임목사님인 김형진 목사님은 올해 초에 교회에 부임하셨고, 특별히 다음세대 전도와 신앙전수에 많은 열정과 관심을 지닌 분입니다. 담임목사님은 부임 후 코로나에 확진되셨고, 격리하는 기간 동안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이 운영하는 [향기나무 우리집성경놀이터] 유튜브채널의 경건한 가정클래스 강의를 밤새 보셨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향기나무 강의를 들으며, 코로나 시대에 다음세대를 잃지 않기 위한 방향을 찾으셨고, 저희 팀에게 바로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으시기에, 향기나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베트남 호치민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저희는 계획에 없던 사역이기에 짧은 3일 일정으로 호치민에 가게 되었고, 이틀 동안 세대통합 성경놀이터, 말씀집회, 부모충전세미나, 한글학교 한-베 가정 자녀 대상 성경놀이터 사역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세대통합 성경놀이터 시간, 유아부터 10대에 이르는 자녀들과 부모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자리가 처음이라서, 부모님들은 처음에는 뒤로 물러서서 구경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자녀들 곁으로 와서 함께 깔깔 웃으며 놀았습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이 말은, 한국말에 서툰 6학년아들이 교회와 가정이 함께 웃으며 놀았던 성경놀이터를 마친 후에, 엄마에게 성경놀이터에 대한 소감으로 남긴 말입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이 한마디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갑자기 이 먼 곳 호치민에 오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하는 다음세대의 귀한 응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상기된 표정과 억양으로, 아들이 이렇게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신다며 좋아하셨습니다. 그 날 성경놀이터에는 얼마 전 엄마를 먼저 천국 보낸 일곱 살 여자아이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어둡게 앉아있던 그 아이가 성경놀이터 안에서 빛나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그 작은 소녀의 미소에 눈시울이 붉어지셨습니다. 성경놀이터는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한국-베트남 가정에서 태어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더욱 빚을 발하였습니다. 한글학교 아이들은 복음색깔 스카프 놀이를 통해 온 몸으로 ‘놀다보니 하나님! 놀다보니 예수님! 놀다보니 성령님!’을 경험하며 복음에 스며들었습니다. 모든 세대가 다양한 각자의 모습과 나이와 장애와 성향과 상황을 초월하여 복음 안에서 함께 감사하고 감탄하며 하나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먼 타국에 이주하여 바쁘게 살아가는 부모님들, 그리고 부모와 여유로운 소통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성경놀이터를 통한 ‘마주함’은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한 부모충전 세미나는 20대에 호치민에 와서 40-50대 엄마의 자리에 서기까지 온갖 힘든 터널을 지나오신 믿음의 어머니들의 여정에 함께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충전을 경험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3일의 일정동안 감당하기 벅찬 사역임에도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향기나무 사역에 집중해주며 귀히 여기시는 눈빛과 감동과 눈물 섞인 간증으로 환대해주심에 새 힘과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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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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