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다음세대

실시간 다음세대 기사

  • [다음세대칼럼] 은혜의 집(1)
    판문점에 가면 평화의 집이 있습니다. 남북간 민간 차원의 평화 회담을 위한 장소입니다.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1965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1989년 리모델링하였습니다. 평화의 집은 고위급 회담장으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국민들도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통일을 기대하면서 감격하였습니다. 평화의 집에서 회담이 이루어지고 실제로 평화통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장소입니다. ‘봄이 찾아온 평화의 집’이라는 기사도 게재가 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두 정상이 만나서 오랜만에 평화의 집이 평화의 집의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평화의 집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은혜의 집’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 2절에 베데스다 연못의 위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위치는 양문 곁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는데 성벽에 여러 개의 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 양문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될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은 성전과 아주 가까이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집’을 의미하는 ‘베이트’와 ‘은혜’를 의미하는 ‘헤세드’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자비의 집’ 혹은 ‘은혜의 집’입니다. 은혜의 집은 베데스다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집이 두 정상을 만나서 ‘봄이 찾아온 평화의 집’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과 38년된 병자가 만남으로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 제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요한복음 5장 2절에서 ‘행각’이란 지붕 달린 정자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환자들이 머물던 장소를 말합니다. 그 행각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왜 거기에 와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중한 병들을 고침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전설은 요한복음 5장 4절에 나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 연못의 이름이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이라고 불러졌습니다. 이곳에는 항상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들어가서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이름만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지 정작 은혜나 자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극한 경쟁만 있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 그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이 낫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2등이나 3등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1등만 고침을 받습니다. 이곳의 분위기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롭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병자들은 늘 긴장해 있을 것입니다. 배타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을 것입니다. 이곳 이름은 은혜의 집이지만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경쟁의 집, 기회의 집 혹은 눈치의 집이었습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07-21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2
    여기 한 소년이 있습니다. 이 9살짜리 소년은 형들이 휘발유를 뿌려가면서 불붙이는 걸 구경하다가 너무 신나고 좋아 보여서 집에 가서 자기도 이것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집에 와서 골판지에 불을 붙이고 휘발유를 붓는데, 안 부어지니까 그 통에 불을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꽝!’ 하고 폭발했습니다.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고 그 아이는 그 창고 반대편 벽에 가서 부딪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온 집안이 큰불에 타버렸고 이 불로 이 아이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서 무려 5개월 동안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죽을 확률이 109%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이미 이 아이는 죽었다고 할 정도의 그런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수차례 수술 끝에 5개월 만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이 아이의 열 손가락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 녹아내려서 전부 잘라냈습니다. “아무도 내 손을 잡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이 아이는 이때부터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게다가 “내가 우리 집을 태워 먹었어.” 라는 죄책감이 들고, “나는 이제 모두 망가져 버렸어.”라며 깊은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엄마가 참 희한한 행동을 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아이를 데리고 “너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그랬지?” 피아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아이는 손가락이 없어서 피아노를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때부터 선생님을 보내주었고, 이 피아노 선생님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자, 시작해 볼까?” 악보를 꺼내고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아니, 손가락이 없는데 무슨 피아노를 배우고, 악보를 보고... “이게 뭐야?” 이 아이는 얼마나 그 마음속에 좌절감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열 손가락이 다 문드러져서 건반을 칠 수도 없는 이 소년에게 선생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줄을 가져와서 붕대로 감싼 그 손에 연필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의 건반을 하나하나 “도, 레, 미, 파” 그걸 찍는 걸 가르쳤습니다. 정말 그 인생 가장 긴 시간 너무너무 답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못하겠어요!”라고 하는 이 소년에게 그다음 날 선생님이 또 왔습니다. 그다음 날 또 왔어요. 그다음 날 또 왔어요. 이렇게 5년을 찾아왔어요. 그렇게 5년을 마치 장애가 없는 평범한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이 아이가 멀쩡한 것처럼 확신에 차서 가르치는 선생님 덕분에 5년 만에 이 아이는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을 두려움 없이 해내는 법을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란 소년의 이름은 ‘존 오리어리’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세계적인 작가요, 연사요, 동기부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온몸은 3도 화상에 다 불타버렸고, 또 온 손가락은 다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그의 손을 거의 찢다시피 해서 저렇게 물갈퀴 같은 손가락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강연을 하고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나는 이들에게 “왜 당신은 행복하지 않습니까? 과연 무엇이 당신의 행복을 막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러한 내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당신은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해서 묻습니다.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어떤 상황입니까? 당신은 왜 좌절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우리와 다른 게 뭘까요? 이분이 두 권의 책을 썼는데 첫 번째 책은 「On Fire」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대단하죠. 우리 같으면 이 사고가 죽기보다 떠올리기 싫을 텐데 정말 자기가 잊고 싶은 그 불 속에서 자기가 어떤 시간을 보냈고 그 이후에 어떻게 이 시련을 극복했는지를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책이 더 재밌습니다. 바로 「다시 인생을 아이처럼 살 수 있다면」이라는 책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어른의 눈으로 자기를 봤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모든 게 끝나버렸겠죠? 그 아홉 살 인생 때 자기 인생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를 바라봤던 어머니의 눈빛, 자기를 바라봤던 피아노 선생님의 눈빛은 정말 너무너무 아이 같았다는 거예요. 너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마치 갓난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이 아이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희망차게 바라보고, 기대감으로 바라보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아이처럼 대해줬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9살로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두 번째 책에서 아이의 시선을 강조합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살아가자’ 여러분,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요. 아이의 시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쉽게 그 무엇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손가락이 없어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이 아이에게는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어!’라고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너무너무 기가 막히지 않아요? 여러분,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를 잘 살피고 관찰하는 힘이 있습니다. 뭐든지 궁금해 합니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살펴보는 힘이 있습니다. 게다가 계속 시도를 합니다. 더 나은 방법이 없는지 계속 시도해보고, 더 나은 길을 찾아서 셀 수 없이 도전하는 마음이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우리도 다음세대를 바라봅시다. 그들의 가능성을 찾아봅시다. 우리의 시선이 달라질 때 아이들은 가능성덩어리가 되고 변화를 주도하는 하나님의 복된 씨앗이 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6-30
  • [다음세대칼럼] 죽고 싶으니 제발 살려주세요
    그날 따라 유독 스산한 날씨였다. 잿빛 하늘에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듯이 흐렸다. 정은이의 인스타그램엔 “이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글과 함께 어느 아파트 옥상에서 찍은듯한 사진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정은이는 평소 밝게 잘 웃다가도 어느 순간 우울해지는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편이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었는데.... 오늘 따라 학교 수업을 마친 후 귀가가 늦어 그렇잖아도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결국 일이 터져 버렸다. 정은이 어머니는 정은이를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아버지와 헤어졌다고 한다. 이후 고민 끝에 정은이를 낳았지만 홀로 키우기 힘들어서 정은이가 5살 때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재혼을 했다. 정은이를 위해 자신을 위해 최상의 선택일 것 같았던 이 결혼은 두 모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외형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던 이 새 아빠는 정은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8살 때부터 중학교 1학년 14살이 될 때까지 5년간 지속적인 성추행과 성폭행을 상습적으로 가해왔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정은이는 뿌리치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만약 엄마에게 말하면 모두 죽는다. 너만 조용히 하면 다 해결된다”는 그 말에 속아 그 오랜 세월을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버텨왔다. 결국 마음의 병이 되어 중학교 1학년 때 잦은 문제를 일으켰고, 이를 상담하던 교사에 의해 정은이가 당해 왔던 모든 일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일은 남편과의 관계가 힘들어도 아이들을 위해 버텨왔던 엄마에게도, 엄마와 가족을 위해 비참한 일을 당하면서도 참아왔던 정은이에게도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몹쓸 일을 저지른 새 아빠는 재판을 받아 교도소에 갔지만, 남은 가족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고통을 온 몸으로 부딪혀야 했다. 엄마는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술을 마시다 정은이에게 폭언을 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고, 정은이는 엄마에게 채워지지 않는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에 방황하며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따따이가 정은이가 있는 아파트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희정 선생님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희정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상담을 전공하고 있는데 둥지아이들의 친구같이 엄마같이 함께 하고 있는 고마운 분이다. 따따이는 조용히 정은이가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곳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희정 선생님이 맨 위층 복도창문이 여전히 열려있는 아파트 라인으로 올라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희정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정은이 만났어요. 손에 자해를 해서 피가 나고 있어요’ 따따이는 조용히 데리고 내려 올 것을 당부한 후 한숨 돌렸다. 조금 뒤 아파트 입구 자동문이 열리고 창백해진 얼굴의 정은이가 희정 선생님과 함께 나타났다. 정은이는 따따이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며 안겼다. “죄송해요! 갑자기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죄송해요” “그래. 이제 괜찮아” “죽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 집으로 가자” 순간의 위급함은 넘겼지만 앞으로 정은이가 감당해 가야할 시간을 생각하니 따따이는 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둥지에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지난 주 병원에 가서 2주간의 약을 처방받아 왔는데, 둥지센터에 오고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이 되자 스스로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복용하던 약을 먹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넌 며칠 동안 밥을 안 먹고 왜 배가 고프지? 라는 것과 똑같다.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잖아. 밥을 먹지 않고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왜 기운이 빠지지라고 하는 것처럼, 약을 먹지 않고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들지라는 것과 같다. 이 녀석아!” “죄송해요. 이젠 안 그럴게요”라며 정은이의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따따이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정은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 손에는 지난 자해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둥지로 돌아와서 얼마지났을까.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뭐하는데??” “빨리 나와라” “왜 그러니?” “정아가 좀 이상해요. 혼자 화장실 들어가서 30분 째 안나오잖아요” 아이들의 끊임 없는 성화에 하는 수 없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정아는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정아를 살피던 따따이는 다리를 자꾸 의자 밑으로 숨겨넣은 것 같은 정아가 의심스러웠다. 정아의 바지를 들어올리자 종아리 전체에 커터칼로 수 없이 그어놓은 자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죄..송,,해..요...” 아무 말 없이 연고를 발라주는 따따이에게 그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정말 죽고 싶어요”라는 말이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로 들려온다. “저 내버려 두세요. 내 맘대로 할거예요”라는 반항은 “저 좀 관심가져주세요”라는 애교로 들려온다. 잔뜩 흐렸던 날씨에 가려졌던 태양도 구름 사이로 마지막 햇살을 비추며 예쁜 석양과 함께 하루가 저물어간다. 오늘도 살려내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아파하고 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06-30
  • [신앙교육나침반] 자녀세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교회와 가정의 핵심전략1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세대를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의 세대로 세울 수 있을까요? 학교교육은 연령별 수준에 맞게 교육하기 위해서, 당연히 세대를 연령별로 분리합니다. 학습자의 인지발달, 다중지능 등을 고려하여 세밀하게 분리할수록, 그 교육은 수준 높은 교육이 된다고 평가받습니다. 세상 교육의 프레임은 당연히 세대분리구조 안에서 진행됩니다. 이러한 세대분리 구조 안에서, 자녀세대의 정체성은 ‘교육의 대상’, ‘학생’입니다. 교회도 세대분리구조를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옳은 방향일까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에베소서 1장 23절 -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몸’으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세대, 민족, 직업, 성별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한 신앙고백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된 공동체입니다. 다양한 지체가 모여,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성경적인 방향으로 간다면, 교회에는 그 어떤 소외자도, 낙오자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의 몸이니까요. 반대로, 성경적인 방향이 아니라면, 교회에는 끊임없이 잃어버리는 양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세대분리 구조를 예배와 목양, 교육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세대분리 구조는 본질상 자녀세대를 목양의 대상이 아닌, 교육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 구조입니다. 학교와 학원과 가정에서 교육의 대상인 아이들이, 교회에서의 정체성 또한 ‘학생’입니다. 이 아이들은 세상에서 ‘OO 학교의 학생’이며, 교회에서도 ‘OO 부서의 학생’입니다. 다르게 표현해보면, 이 아이들이 속한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는 온통 자신들을 가르치려는 선생님들만 가득합니다. 그 어디에서도, 이 아이들을 향한 목표는 ‘교육’입니다. 이 아이들을 향한 목표가 사랑과 관계와 소통인 곳은 없습니다. 구조가 그러하니까요. 이러한 구조 안에서 우리의 자녀세대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시들어갑니다. 아이들은 늘 지식을 배우고, 점검받고, 평가받습니다. ‘믿음’ 역시 ‘신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교육의 프레임 안에서, 배우고 점검받고 평가받습니다. 자녀세대를 어떻게 하면 믿음의 세대로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정답은 간단합니다. 기본 프레임부터 성경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교회를 보면, 세대를 분리하는 예배와 교육이 기초를 이루고, 세대를 통합하는 예배와 교육은 보완책입니다. 성경적인 모양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대를 통합하는 예배와 교육이 기초를 이루고, 세대를 분리하는 예배와 교육이 보완책이 되어야 합니다. 온 세대를 하나 되게 하는 예배와 교육구조 안에서, 우리의 자녀세대들은 “나는 OO부서의 학생이구나!”가 아니라, “나는 우리 교회의 성도구나!”라는 성경적인 정체성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세대의 회복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향상교회 세대통합 예배 모습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6-30
  • [양육칼럼] 환영 받는 아이로 키우자
    최근 뉴스나 일간지에 사건사고로 자주 보도되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아동‧청소년 문제 중 하나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거나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안하무인 후안무치(眼下無人 厚顔無恥)형의 아동‧청소년들이다. 이런 유형의 아동들은 대부분 정서‧행동문제를 가지고 있어 아동기나 청소년기에도 또래는 물론 학교 교사나 교회 교인들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하며, 문제가 되는 행동들이 일상화되면 청년기는 물론 성인기 아니 일평생 주변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부를 당하게 된다. 아동‧청소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정서‧행동문제를 보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유아기부터 양육되어 오는 과정에 매 성장기에 적합한 정서적 요구와 신체적 요구가 충분히 수용되지 못하고 거부당하거나 따뜻한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동이 존중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서‧행동문제로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되었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아동‧청소년들을 직접 만나 성장과정을 확인해 보면 폭력의 가해자 이전에 그 아이들 역시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이다. 자녀양육은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연령에 적합한 과제를 배워가고 그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피고 교육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말한다. 개개 부모의 양육형태는 그들이 속해 있는 국가와 사회의 가치와 관습 및 요구, 그리고 부모가 개인적으로 갖는 특성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양육에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동의 정서적 요구와 신체적 요구를 잘 살피고 민감하게 그 요구에 반응해 주는 것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아동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요구에 적합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말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수 없는 영아기에는 울음으로 요구를 표현한다. 똑같은 울음 같지만 민감하게 그 요구를 읽어보면 잠이 와서 우는 울음, 배가 고파 우는 울음, 안아달라고 우는 울음은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언어 대신 울음으로 자신의 요구나 의사를 표현하는 영아기에 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계속 젖병만 물리거나 무시해 버리거나 울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면 아동은 자신의 요구가 무시되어 더 크게 울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하려 하거나 겁에 질려 울음을 멈출 수도 있다. 더 크게 우는 아이들은 이후에 반항적인 아동으로, 겁에 질리는 아이들은 위축되는 아동으로 각각 다른 유형의 정서‧행동문제를 가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양육환경과 양육방식이 아동‧청소년기의 다양한 행동문제와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정서‧행동문제 없는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자녀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우선 세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자녀의 말이나 행동, 선택이나 결정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공감을 받아본 아이들은 타인을 더 잘 공감하게 된다. 공감능력은 환영받는 아이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다음은 자녀의 정서적, 신체적 요구를 잘 살피고 그 요구에 적합하게 반응해야 한다. 자신의 요구에 적합한 반응을 받을 때 아동은 자신이 존중받고 배려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며 존중과 배려와 사랑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고 스스로 타인에게도 실천하게 된다. 끝으로 자주 격려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성장해가는 과정에 가정에서는 동생과 부모를 통해 또는 유치원, 학교에서는 또래들과 선생님을 통해 상처를 받거나 위축될 때가 있으며 종종 실수나 실패를 할 때도 있다. 이럴 때마다 다그치지 말고 따뜻하게 격려를 하자. 격려는 정서적 지지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정서적 안전기지가 있음을 확신하며 힘을 얻게 된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양육칼럼
    2023-06-30
  • [신앙교육나침반] 자녀세대의 마음을 치료하는 자리, 가족 성경학교
    120세의 노련한 리더인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하여 다음 세대의 양육을 책임져야 함을 절절히 외친다. 모세는 자녀세대들을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기 위한 핵심전략을 간명하게 밝힌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그는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그는 부모세대들이 생활양식이나 관습이 아닌, 내적인 차원의 ‘마음’을 놓고 싸워야 함을 명령한다. 즉, 그는 부모세대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이 아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는 존재로 달라져야함을 명령한다. 뜨거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큰 영향력은 없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부모는, 자녀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 소통하려고 한다. 자녀와의 끈끈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복음이 되어 자녀의 영혼을 일으켜 세운다. 사랑의 테두리 밖에서 전해지는 율법과 진리는 공허한 종교가 되어, 자녀세대들의 삶에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녀세대의 마음을 보듬는 “관계”속에서 신앙이 전수된다면, 그것은 다음세대의 삶에 생명의 영향력을 미치는 “복음”이 될 것이다.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규율, 관습, 진리는 껍데기뿐인 종교가 되어,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다. 수많은 자녀세대들이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다쳐 있다. 현재 전국 176개의 모든 교육청에 청소년 자살사건이 보고되어 있다고 한다. 수많은 자녀세대들이 마음이 멍들고 찢어진 채로 쓰러져 있는데, 누구하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쓰다듬어주는 이가 없다. 마음이 다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마음이 다치면, 생명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음이 다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교회는 이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는가? 마음에 피가 나고 상처가 난 아이들을 모아두고, 사랑이 없이 성경지식과 교리만 열심히 가르치고 주입하고 있는가? 자녀세대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그 무엇도 배울 수 없다. 자녀세대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복음을 받을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온 세대가 함께 생명의 복음을 받고, 자녀세대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따스한 사랑 없이, 성경지식과 교리만 가르치는 일을 지금 당장 멈추어라! 지금은 온 세대가 아이들과 복음을 함께 받고, 모두 함께 천진난만한 아이로 돌아가 복음으로 함께 놀아야 할 때이다. 놀이는 자녀세대에게 생기이다. 소통이다. 밥이다. 언어이다. 놀이는 자녀세대에게 목숨이다. 온 세대가 복음으로 놀이하라.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벽이 허물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놀라운 소통이 경험될 것이다. 그러한 소통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복음은, 자녀세대의 마음을 치료하는 보약이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6-09
  • [다음세대칼럼]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라
    우리가 원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현대 교회에는 다양한 예배가 존재합니다. 먼저,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는 것이 개인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두 번째는 공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고 교회의 예배는 공적인 예배입니다. 셋째는 생활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성도의 삶 전체는 모두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구분은 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상하고 우아한 성도들과 함께 전문적인 합창단과 맞먹는 찬양대가 있고,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의 설교를 조용히 듣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토크쇼의 진행자 같은 목회자가 헤드셋 마이크를 끼고 강단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토크쇼 같은 설교를 합니다. 찬양 팀의 공연 같은 찬양이 있는 예배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는 짧고, 대신에 드라마나 영상이 있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멘’ 소리조차 내지 않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예배를 선호합니다. 이런 예배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이유, 목회자의 성향, 성도들의 선호도 등에 의해서 오늘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어떤 예배를 선호하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는 예배는 어떤 것이냐”라는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종류를 나누는 것이 신학적으로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사람이 원하는 예배라는 말이 가능한가?’라는 바로 이 두 가지 질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사전은 예배를 “경배, 고백, 기도, 감사를 통해 초월자를 향한 존경, 숭배,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예배를 “아베다”라는 단어로 가장 먼저 설명합니다. 이 “아베다”라는 단어는 ‘종, 노예’라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자가 ‘종’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역시 ‘엎드려 고개 숙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우리의 생각, 의지,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종처럼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의식의 의미는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신명기 12장 1절 말씀은 예배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1)” 드릴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거기서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잘못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예배이고 가나안의 예배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온 이집트는 수천수만의 신이 있었습니다. 각 신들마다 예배하는 신전이나 장소가 따로 있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도 신들이 많았습니다. 신명기 12장 2절 말씀에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2).” 가나안 사람들은 성전을 세우는 등 예배처를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서든지, 높은 산이든지, 낮은 언덕이든지, 무성한 나무 아래든지, 커다란 바위 밑이든지, 어디든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상을 세우고 숭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 제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석상이나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나 가나안에 예배처소가 많았던 것은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이어지면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비를 오게 만드는 신을 섬겼습니다. 가뭄을 지배하는 신, 농사를 지배하는 신, 밤이나 어둠을 지배하는 신, 건강을 주관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모두 그들이 원해서 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처소도 본인들의 생각과 필요에 맞는 곳이면 어디든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우상을 섬기는 곳을 다 허물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허물뿐 아니라, ‘석상을 부수고, 목상을 불태우고, 신상들을 부수고, 그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지워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나안 우상들은 가나안의 ‘문화’입니다. 그들의 ‘역사’이고, ‘삶의 흔적’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문화유적’으로 잘 보존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철저히 없애라고 하셨습니까? 가나안의 우상들이나 제단들을 그대로 두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2장 30절 말씀에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가나안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보다 안정되고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가나안을 볼 때, ‘이 민족들이 자기의 신들을 어떻게 섬겼을까?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상숭배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우상들과 그 예배 방법을 없애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31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의식을 싫어하시고 역겨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나안의 신들과 예배처소를 철저히 없애는 대신에 신명기 12장 5절 말씀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예배의 중심은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거기서만 예배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아무데서나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는 ‘유일중앙성소’라는 말입니다. 그 택하신 곳은 가나안 초기 ‘실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자신이 사는 곳에서 물이라도 한 사발 떠놓고 손 모아 빌면 되는데, 여유 있는 사람들은 소나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 되는데, 하나님은 굳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명기 12장에서 말씀하는 예배에 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구별하시는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정된 장소에 있는 성막과 성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장소와 건물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예배가 완성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예배를 드릴 장소와 건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장소와 건물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12장에서 예배 장소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있는 곳은 어디나 예배 처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구별된 예배처소는 주 안에서 구별된 성도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고, 또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우리의 가정이 거룩하고, 우리의 학교와 직장이 거룩하게 구별된 예배처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예배처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 세대가 이런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기성 세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06-0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갔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예수님의 천국비유장인 마태복음 13장의 핵심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천국은 저 하늘나라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이 보이지 않는, 그냥 머릿속에 추상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데 천국이 우리 가운데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는 겁니다. 겨자씨 한 알이 어때요?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이게 누구의 시선입니까? 어른들의 시선입니다. 어른들의 시선, 배웠다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겨자씨 한 알로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건 작은 씨앗에 불과해.” 그런데 아이들의 시선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관찰하고 계속 심습니다. 이걸 자기 밭에 갖다 심고 계속 관찰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됩니다. 여러분, 겨자는 1년 생 풀입니다. 봄에 싹이 트면 여름에 자라서 가을에 추수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는 풀보다 커서 마치 나무처럼 커진다는 겁니다. 나무는 1년을 넘어 2년, 3년 계속 살잖아요. 마치 그럴 것처럼 크게 자란다는 거에요. 이렇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어 보이는 가장 작은 겨자씨에서 풀보다 큰 나무가 나오는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공중의 새들이 누굽니까? 마태복음 13장 처음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아시죠? 거기서 길가 밭에 떨어진 씨를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즉, 새는 누구냐? 씨앗을 먹어버리는 존재. 씨의 세계에서는 천적과 같은 존재. 무서운 존재. 인생의 방해꾼입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겁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씨인데 아이의 눈으로 보면 자란 후에는 오히려 그 천적들을 품고 그들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결국은 씨가 승리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지금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구원과 은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아이들을 봐줄 때 아이들의 꿈이 보이고 아이들의 미래가 보이고 아이들의 비전이 보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봐줄 때 우리는 천국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보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지금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명품으로 휘감고 정말 번쩍번쩍 나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게 내가 지금 보여주는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 하나님이 바꿔 주시는 나, 하나님이 변화시키는 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선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어른들도요, 어른이라도 우리가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한 아이, 부지런한 아이, 성실한 아이, 매력 있는 아이들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을 봐도 마찬가지죠.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의 기대가 되는 미래는 바뀔 것입니다. 너무너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요? 이건 전국에서 분홍 목사에게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분홍 목사님!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분들이 기대하는 답은 뭐냐면 예산이나 프로그램입니다. “과연 성민교회는 아이들에게 예산을 얼마나 줍니까? 과연 얼마나 돈을 씁니까? 아니 어떤 프로그램을 합니까?” 다 거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교회 예산? 다른 교회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프로그램? 특별히 대단한 내용들 굳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미래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미래의 그 아이들이 공중에 새들이 와서 깃들 어마어마한 나무가 될 것을 믿는 겨자씨 한 알이라고 믿고, 그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알아보는 눈! 그 시선을 가진 교사들입니다. 바로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들이 자녀에게는 가장 필요한 그들의 선물이고, 또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6-09
  • [양육칼럼]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부모가 된다는 건 준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간에 수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자녀의 신체발달, 인지발달, 언어발달, 정서발달, 사회성발달, 영양, 질병,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또한 부모의 자녀 양육방식은 자녀의 발달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부모가 되기 전 ‘부모 되기’ 교육을 받고 부모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오늘날 아동・청소년기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는 가정 내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양육과 교육의 출발지인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 양육을 무엇에 중점을 두고 하였으며, 부모가 자녀와 어떻게 상호작용하였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급변하는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점적으로 길러주어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self-esteem)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로부터 비롯되며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자신 스스로를 가치를 갖춘 존재로 여기고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 감정을 의미한다. 자존심과 비슷하지만 용법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존심은 타인이 자신을 존중하거나 받들어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감정을 의미하지만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감정의 의미로 주로 쓰인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들에게는 많은 도전과 경험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어떠한 상황에 닥쳤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해’, ‘이거 하다 실패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는 반면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문제가 어려워 보여 걱정은 되지만 상관없어. 일단 한번 해보자’로 시작한다. 또한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이 충분히 존중받고 지지받는 아이이기 때문에 친구나 주변 사람들도 소중하게 대한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는 질 것 같거나 못할 것 같으면 쉽게 포기해 버리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루며, 자신감이 없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거나 대인관계를 기피하기도 하고,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이 스스로 존중받는 대상이라고 느낄 수 있게 도와줘야 하고, 부모는 아이가 하는 자기표현을 수용하고 경청하는 태도로 들어 주어야 한다. 아이의 의견이나 요구가 수용 받을 때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낀다. 아이의 의견이나 요구, 감정을 무시하거나, 어린아이의 의견이나 표현이라고 가볍게 여긴다면 아이는 자신의 요구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훈육할 때 아이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아이를 무시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훈육 상황에서 부모들은 화가 나있는 상태로 무심코 던진 말들에서 아이들은 난 할 수 없는 아이, 혹은 난 실수만 하는 아이 등의 부정적인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며 자존감이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부모가 아이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자주 스킨십을 하며, 아이 스스로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수용하고 경청한다면 자존감이 높아지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책임질 줄 하는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양육칼럼
    2023-05-1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축구와 다음세대 부흥의 공통점
    요즘 한국축구를 보면 세계적인 축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많이 발전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느낄 정도입니다. 오래 전 한국축구의 패스는 주로 뒤로 했습니다. 아니면 옆으로 횡패스를 해왔습니다. 그동안 뒤로 아니면 옆으로 패스했던 이유가 뭘까요? 이것이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축구는 그동안 욕먹는 게 두려워서 계속 뒤로, 때로 옆으로 패스했습니다. 실패할 확률도 적었고 그래서 욕도 덜 먹었습니다. 그런데 손흥민이 나타났어요. 이강인이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패스를 앞으로 합니다. 그래서 실패할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앞쪽에는 적들이 많으니까 수비수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골도 들어가고 좋은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실제로 골도 더 많이 들어갑니다. 자,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그동안 한국축구는 뒤로, 옆으로 해왔는데 손흥민, 이강인은 앞으로 패스를 합니다. 차이가 뭘까요? 무엇이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변화가 왔을까요? 이 변화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바꾸어 놨을까요? 손흥민과 이강인은 과연 뭐가 다른 걸까요? 그동안의 한국축구와 이 새로운 개념의 축구는 과연 차이가 뭘까요? 우선은 “목표를 정확히 본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들은 목표 중심입니다. 그동안은 목표가 아니라 우리 편을 보고 축구를 한 것입니다. 우리 편을 보고 우리 편이 어디 있나를 살펴서 가능하면 안전한 패스를 주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목표를 향해서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생각의 전환”입니다. 중요한 것은 축구를 왜 하느냐는 것이죠. 욕 안 먹으려고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욕 안 먹고 내 플레이에 실수가 없었다는 걸로 만족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골도 넣고 그래서 결국은 승리하기 위해 하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하면 선수들의 플레이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 이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경기를 즐깁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욕을 먹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 경기를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껏 이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골을 넣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계적인 선수들이 지금 이 플레이를 하고 있는, 그리고 수많은 연봉을 받으며 지금 전 세계의 카메라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골을 넣기 위해서. 그래서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고 만족을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아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이런 차이들은 궁극적으로는 어디서 나오는 차이일까요? “실력” 자기의 실력을 쌓았고, 오랫동안 연습한 실력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감독과 코치의 사고 전환” 입니다. 감독과 코치가 만약에 한 번 실수했다고 혼내고 주눅 들게 했으면 아마 그렇게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선수들이 주로 해외에서 뛰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뛰는 지도자들은 주로 몇 번 실수했느냐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인 플레이를 했느냐? 얼마나 창의적인 플레이를 했느냐? 네가 얼마나 너 스스로의 장점을 살렸느냐?를 주목하고 지도하니까 선수들이 마음껏 플레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잘하는 축구, 공을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점유하고, 이 공을 가지고 뭔가 플레이를 하는 그런 축구가 아니라 앞으로 한 발이라도 나가는 축구, 상대방을 향해서 전진하는 축구, 그리고 공을 만들어 내는, 기회를 만들어 내는 축구입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그동안의 한국 교육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교육은 어떤 교육이었습니까? ‘안전하게, 가만히 있어라.’ 교육이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 교육도 애들에게 우리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애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모든 것은 교사와 교역자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시간에는 아무도 떠들면 안 됐습니다. 공과 시간에 입을 열면 혼났습니다. 안전하게 교육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강인이나 손흥민이 우리 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가만히 듣고 있었을까요? 창의적인 생각을 하며 계속 질문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질문을 잘 받아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교역자와 교사들의 자세가 새 시대의 아이들을 길러내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이룬 마틴 루터는 카톨릭에 대한 질문에서 종교개혁의 씨앗을 틔워냈습니다. 질문과 저항, 그리고 이를 통한 소통이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정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학교에서 질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소통이 막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축구계의 변화처럼 교회교육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신앙교육의 세계에서도 손흥민, 이강인이 등장할 환경을 만들어줄 변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5-1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