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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다시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모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교회 안에 다음세대나 새 가족들이 유입되는 것도 너무나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던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는 한국교회 안에 오래도록 고착화된 예배와 설교 형태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바탕에서 현대설교의 변화를 강조하는 장신대 총장이자 설교학 교수인 김운용은 그의 저서 『새롭게 설교하기』(Rethinking Preaching)에서 이제 지금까지의 설교학적 전통과 이슈들에 대한 “재숙고”(re-thinking)와 설교 사역의 재구성(re-forming)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새 가족의 초청과 정착을 위해서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설교와 예배의 형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때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필자는 부산 성민교회에 부임하여 7년여의 사역을 해오면서 코로나19 이후 주일 설교형태를 ‘이미지 전개형 설교’로 바꾸고 예배에 ‘이미지 전개형 광고’를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세대와 함께 교회를 찾는 젊은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가족단위의 새 가족 등록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때도 전세대가 함께 예배하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예배와 설교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그럼 필자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미지 전개형 설교와 광고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이미지 전개형 설교란? 이미지 전개형 설교란, 설교자가 영상매체 등을 이용해서 회중에게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마치 책을 넘기듯이 한 장씩 전개해 나가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는 방식의 설교이다. 이 설교는 청중의 내적 심상으로서의 이미지의 활용을 강조하는 현대의 설교학적 흐름에서 출발하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미 많은 설교학자들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고, 호소력이 있기 위해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위해 눈에 그려볼 수 있는 다채롭고 풍요로운 언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언어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서 설교에 시각적 요소를 가미하거나 강조하는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단순히 언어 사용에 있어서 이미지적 요소를 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회중들의 눈앞에 계속해서 펼쳐나가듯 제시하면서 동시에 설교자의 언어로 이미지를 해석하면서 설교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기존의 설교 전달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예전에도 설교를 시작하면서 한 두 장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회중들을 주목시키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단순히 몇 장의 이미지를 서두에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론에서 결론까지 계속해서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설교의 내용을 이미지로 제시하고 이미지와 함께 고민하고 이미지를 통해서 풀어가는 형태의 설교이다. 이 이미지 속에는 문자 텍스트나 변형된 이미지, 영상과 소리도 포함된다. 이러한 설교 방식의 필요성은 교회를 처음 나온 다음세대들이나 새 신자들이 부담 없이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새 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고 기독교적 용어에도 익숙하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성령이나 성막, 제사장, 사마리아인, 도피성 등의 설교 용어는 독해가 불가능한 외국어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구성된 화면을 통해서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메시지를 납득할 수 있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온라인예배가 많이 드려지면서 가정에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예배하는 가정들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앉아서 예배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 때 어린 자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며 인내해야 하는데, 특히나 30여 분간의 시간 동안 화면으로 설교자 얼굴만 바라보며 듣는 설교는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쉽다. 이럴 때 이미지를 잘 활용해서 설교를 전달하면 어린 자녀들도 설교 내용에 호기심을 가지고 끝까지 설교를 듣고 말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물론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설교의 부담이 크고 돌아서면 설교라고 할 정도로 해야 할 설교도 많다. 그래서 구두로만 설교해도 원고작성에 시간이 많이 들고 준비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듣고 싶은 설교, 찾게 되는 설교는 비교적 적은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더욱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정성과 준비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도입해서 새 가족들과 다음세대를 배려하는 설교를 준비해 보자. 당장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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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11-04
  • [다음세대칼럼] 참된 영적 스승
    필자는 5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중3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내가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은 스승들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스승이라고 말할 때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이 스승이십니다. 성도들의 존경과 신임으로 임직을 한 중직자들도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사들도 스승이십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양육해 주시던 부모님께서도 엄격하게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필자에게는 수많은 스승들이 계셔서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스승들이 기독교계에 많을 때 교회 안에서 다음세대가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스승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무엇일까요? 먼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서 ‘아들 디모데야’라고 편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다음세대를 바라보는 스승의 태도는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없는 교육은 헛수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있습니다.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5절 말씀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라고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녀를 낳는 심정으로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필자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위기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이 청소년들을 지도하다보면 지독히 말을 듣지 않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바로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영적 스승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스승입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마음으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은 하나님 말씀만이 모든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육의 교재는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다음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에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좋은 대학 진학과 연봉이 높은 곳에 취업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학교의 성적보다는 생명의 말씀이 더 소중함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대학 진학보다 믿음의 비전을 키우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중요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모, 교사,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세대에게 말씀을 읽는 모습, 묵상하는 모습,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영적 스승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참 스승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참 제자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참 스승,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다음세대가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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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신앙교육나침반] 코로나 키즈와 함께 하는 추수감사절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걸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뒤바뀐 세상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세대는 우리의 생각 그 이상으로,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여 성장하는 다음세대들에게, 코로나 펜데믹은 그들에게 큰 구멍을 남겼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한 깊은 두려움과 불안감은 이 아이들의 몸과 영혼에 고스란히 흡수되어, 자해와 자살과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우울감과 무기력 같이 침습력 강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다음세대는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고,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가학적인 것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다음세대가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한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아이들의 작은 한숨은 불안과 두려움을 삼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내뱉는 소심한 외침, ‘힘들어요. 도와주세요!’입니다. 지금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 ‘환경을 초월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교회의 다음 세대에게 전혀 감흥이 없는 절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힘들고 두려운 터널 속에서 무엇을 감사하라는 거지?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지?’ 교회는 추수감사절 예배와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 아이들에게 분명히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터널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평소보다 더욱 강하게 자신의 양을 붙잡고 지키시는 목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란다.” 교회의 모든 세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와 놀이시간을 마련해보십시오. 불안하여 떠는 다음세대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감사의 능력을 받아서 힘차게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온 세대가 가을 열매를 이용해서 즐겁게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송축 놀이 세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❶ 앗싸! 감사!: 밤이나 도토리를 높이 던지면서 “앗싸!”라고 외치고, 종이컵으로 “감사!”라고 말하며 받습니다. 혼자 받기 또는 두 사람이 주고받기를 할 수 있습니다. ❷ 감사의 파워: 불평을 상징하는 종이컵을 세웁니다. 이때 종이컵 안쪽에 1-10까지 점수를 적습니다. 감사의 가을열매를 던져서 넘어뜨리거나, 테이블 위에서 진행할 경우 손가락으로 열매를 튕겨서 불평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❸ 송축해: 빈 계란박스 안에 감사이름, 감사장소, 감사물건, 감사추억, 감사음식과 같은 주제를 적습니다. 박스 안에 작은 도토리나 콩을 넣고 흔든 후에, 뚜껑을 열어서 감사열매가 들어간 곳의 내용을 보고 감사를 고백해봅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음세대와 함께, 감사와 송축을 통한 치료와 회복을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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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트리축제는 역사속으로....(?)
    부산지역 겨울철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했던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최근 경찰청이 업무상횡령과 지방재정법위반 혐의로 부산기독교총연합회 관계자 3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문제는 이들 3명은 2017년 트리축제에 관련된 혐의로 송치되었는데, 경찰청에 사건을 진정한 관계자들은 “2018년 이후 사건이 더 크다”고 진술 하고 있어 추가 송치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금년 트리축제는 부산중구청이 직접 주관한다. 그런데 중구청은 최근 입찰공고를 통해 ‘2022년 광복로 빛 축제(가칭) 빛 시설물 설치운영 용역’ 입찰공고를 발표했는데, 비록 가칭이지만 ‘트리축제’가 아닌 ‘빛 축제’로 명칭을 변경한 것. 여기에 종교색체를 띄지 말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구청 트리축제 담당자는 ‘내년에도 중구청이 직접 주관하는가’ 질문에 “내년 축제는 검토된 것이 없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해 왔지만, 사실상 기독교계와 선을 긋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교계 일부에서는 “힘들게 얻은 트리축제인데, 관리를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며 “교계안에서도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분명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부산기독교총연합회 관계자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이 아니다. 경찰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검찰조사도 남아있다”며 혐의를 강하게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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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11-04
  • 복음병원 노동조합 쟁의행위 83.9%로 가결
    민주노총 복음병원 지부가 10일 총파업을 예고한 가운데, 조합원들의 대상으로 한 ‘2022년 임단협 쟁의행위 찬/반 투표’가 10월 31일(월)부터 11월 2일(수)까지 진행됐다. 여기서 조합원들의 반대가 많았을 경우 사실상 10일 총파업은 철회되지만, 투표결과 조합원 83.9%의 찬성으로 쟁의행위가 가결됐다. 이번 투표는 전체 조합원 1,457명(휴직자, 한국노총 조합원 포함)가운데 1,146명(78.7%)이 투표에 참석했으며, 이중 962명(83.9%)이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반면 180명(15.7%)이 반대했고, 무효는 4표로 집계됐다. 현재 복음병원은 ‘의료기관 인증평가’와 ‘상급종합병원 재진입 평가’를 앞두고 있어, 이번 총파업이 진행될 경우 병원에 회복하기 힘든 막대한 손해가 예상된다. 때문에 학교법인 이사회(이사장 김종철 목사) 중심으로 파업만은 막아보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복음병원 노동조합은 오는 9일 오후 6시 병원 6동 로비에서 전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파업전야제를 개최하고, 다음날 10일 오전 6시 30분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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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11-04
  • [목회자칼럼] 확증 편향(선택적 사고)
    “한국교회, 분열과 함께 확증 편향 회개해야…” 지난 달, 우연히 본 기독교 신문의 헤드라인입니다. 저 한 문장 중 ‘확증 편향’이라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신’ ‘나와 너를 넘어 우리라는 공동체성’ 등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확증 편향과 같이 있을 수 없는데, 한국교회가 확증 편향 속에 있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나, 막막함이 차올랐습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 가치, 판단과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에는 다 무시하는 ‘선택적 심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그 외에 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몇 해 전부터 현대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로 ‘확증 편향’이 등장했고,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확증 편향을 꼽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취합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해버리는 현상이 일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니, 확증 편향의 시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를 보면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를 취합해 자녀에게 강요하고, 자녀 또한 부모의 말을 들어 고치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입장을 타당하게 해 줄 근거 찾기에 급급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이기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확증 편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갈등 구조인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는 진보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오로지 보수쪽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더 많이 취합하므로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시킵니다. 진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에게 유리한 내용들만 골라 골라 자신들의 신념의 탑을 쌓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는 확증 편향의 정확한 사례로, 이들을 보면 절대 하나 될 수 없고, 끝까지 자신의 길이 진리인 것 마냥 목소리를 낼 것이 확실합니다. 사회가 이럴 때,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확증 편향과는 거리가 멀게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하려고 애쓸까요? 같은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며 같이 소그룹 나눔을 하는 교인들도 몇몇 성도들은 “말씀이 최고이기 때문에 무조건 말씀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느 성도들은 “봉사를 통해 섬기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식당봉사, 성가대 봉사 등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나는 기도원파이다. 나는 성령파이다. 나는 직통계시파이다” 등으로 확증 편향을 가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자신이 믿는 방법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다른 방법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인 확증 편향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성도가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선택적 사고에 붙잡혀 있는 체계 속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짐으로 너도 나도 자기가 가진 정보는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너가 잘못됐어”라고 지적하면,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항상 잘못될 수 있습니다. 어제 내가 알던 것이 오늘 잘못된 사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만이나 독선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 편향 속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나의 잘못을 고치려는 결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가질 때 확증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참된 교제가 있을까요? 자기 신념만이 진리라고 우기는 정치 집단 속에 합의와 타협은 있을까요? 내가 가진 신앙만이 참된 믿음이라 고집하는 성도에게 성령의 하나됨이 있을까요? 이처럼 확증 편향적 자세는 고립, 대립, 경쟁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반대로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세상이 말하는 확증 편향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예수님이 원하는 가치고 돌아가야 합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다른 이들을 향한 환대의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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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현대교회 임직식 이대로 괜찮은가?
    지난 9월 25일 주일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에 위치한 D교회 권사, 집사, 장로 임직 예식에 초청받아 참석하고 왔다. 이때까지 임직식을 수없이 참여하고 보았지만 14쪽 순서지에 담겨 있는 예식 내용이 놀라웠다. 아마 순서 맡은 목사들도 놀랍고 얼떨떨했을 것이고 참여한 초청인들도 처음보는 광경에 신기해 하는 모습이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였지 담임목사의 이름 한자도 없었다. 오로지 임직 예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정함을 입은 이들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세우는 경건하고 거룩한 의식’이라고 표현하는 듯했다. 이 예식은 그야말로 구약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전통으로 내려오다가 신약시대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 직제의 근원이 형성되었다고 소개하는 글만 담겨 있었다. 따라서 성경적 근거와 교회 전통과 믿음의 결단에 따라서 이렇게 임직 예식을 거행한다는 간단한 소개글이 첫 장에 실려 있었다. 예배의 부름에서 부터 기원, 참회기도, 용서 확인 다음이 영광송이 오르간 반주로 울려 퍼질 때 참석한 성도는 물론 임직 받는 분들의 경건함과 거룩함이 십자가 앞에 서 있는 듯 경건 그 자체였다. 찬송은 연달아 두 번씩이나 부르고 공동기도는 회중 전체가 올리고 난 다음에야 맡은 순서자가 다시 기도한 다음에 다시 기도를 다같이 했다. 이 때까지는 “무슨 기도를 두번씩이나 연달아 하는가. 아! 시간 오래 걸리겠구나”하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엄숙한 모습에 거룩하고 경건함이 더하여지는 분위기였다. 사회를 맡은 분은 아예 다음 순서자 소개 없이 순서대로 진행하니 시간도 절약되었고 말씀선포는 6분으로 짧게 하라는 사전 양해를 주어 간단히 했다. 문제의 특이한 사항이 발생한 것이 임직자들의 서약이 끝나자마자, 안수 및 축복기도를 하는데 담임목사는 임직자들의 머리에 일일이 기름을 붓고 순서 맡은 분들이 단상에서 내려와 임직자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는데 왠만하면 장로임직자부터 시작되기 일반인데 이 전통을 깨고 교회에서 가장 헌신과 심방 많이 하는 권사부터 안수집사 다음에 장로가 제일 꼴찌로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또 가운 착의를 장로들과 담임이 손수 입혀 주는 것이 가장 돋보였다. 그리고 또 놀라운 점은 임직예식순서에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성찬식’에 초대하는 순서에 임하고는 분병, 분잔을 하고 감사기도, 찬송하고 교회 소식을 선임 시무장로가 하고 나서는 또 찬송을 부르는 찬송이 무려 임직전체 6번씩이나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Soli Deo Gloria) 모습이었다. 이렇게 임직 받은 임직자들은 교회 성도는 물론 담임목사에게 순종을 성도들은 세워진 임직자들에게 존경과 순종을 이어갈 때 교회는 저절로 부흥과 약진이 거듭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로교 임직예식이 이렇게 변화를 시도 했으면 어떨까 한번 이런 모델을 소개해 보았다. 특히 임직자들의 약력이나 이력은 생략하고 사진과 함께 교회를 어떻게 섬기겠다는 소신만 소개하는 이 임직예식이 통합측뿐만 아니라 장로교 전체 교회들이 이같은 변화를 시도 해봤으면 제안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한편 김해에 있는 128년의 역사를 가진 김해교회 임직식을 지난 10월 23일 주일 다녀왔다.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장로교의 규례에 때라 원로장로 추대가 가장 먼저 순서에 넣고 노회를 초월하여 평북노회 원로를 세워 설교를 했다. 부산노회 장로원로회 회장인 필자가 축사를 했다. 이 예식은 그 다음이 장로 임직이고, 다음은 안수집사이고, 다음은 권사를 안수했다. 과연 장로임직순서가 제일 마직막에 넣는 것이 옳은 것인지 축하하러 온 성도들이나 임직자 입장에서 보면 교회에서 가장 많이 헌신하고 병든 성도들은 돌아보고 기도하고 섬기는 쪽이 권사라고 볼 때 권사임직이 제일 무게가 있고 뜻이 있었다. 장로들은 꼴찌라도 교회 어른들 지도자 장로들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요즘 형태를 무너뜨리게 하고 가장 겸손해서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어느 쪽이 먼저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임직은 어떻게 했을까? 권사 임직은 성경에도 없을 정도로 여성을 낮추게 되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판 한국교회는 너무 비대하여 지도자가 되면 일반 성도들 위에 군림하듯 어깨 힘을 주고 교회 주인인양 좌우해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방과 이웃을 돌보고 그들의 친구가 되고 가까이 한 예수는 그들의 편이었고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고는 권사 취임을 먼저 세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요즘 여성들의 파워가 강해 여전도회연합회나 교회 안의 권사들 모임에는 보이지 않게 교회에 영향권 행사를 주도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임직할 때 권사 서약선서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교회 권사들을 볼 때 여성파워 행사를 주도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지 의문이 든다. 권사 임직 순서를 가장 먼저 세워준다면 더욱 활개칠 것이 눈에 선하다. 물론 남여 평등사상을 가지고 교회 헌신해야지 직분이 무슨 세상 권력인양 실세를 도모 한다면 임직 정신을 저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에 여성들은 조용하라고 했던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란 당한 자를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디모데전서 5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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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3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복무 중이던 밀턴 로젠 랍비는 1950년 11월 5일 주일 이른 아침 제너럴 하세(General Hasse)호로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 배에는 미군 1천명 이상의 장교와 사병이 타고 있었다. 이틀 후 7일에는 일본 남부의 나가사키현의 사세보(世保, Sasebo)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1천명이 탑승하여 한국으로 향해 11월 10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로젠이 Der Morgen Zhornal (Jewish Morning Herald)에 기고한 보고에 의하면 인천에 도착한 새벽 3시부터 낮 11시까지 8시간 동안 작은 선박으로 병사들의 상륙을 도왔다고 한다. 한국의 겨울이지만 이날은 맑고 따뜻했으나 큰 건물은 파괴되어 있었고 여기 저기 벽돌들이 흩어져 있고 거리는 정비되지 않은 어설픈 상태였다고 했다. 이날 처음 만난 한국인들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난과 배고픔이 베여 있는 슬픈 눈빛이었다고 기록했다. 인천항에서 군 기지로 이동은 기차를 이용했는데, 군인들은 손을 흔드는 한국인들에게 창문으로 캔디와 담배를 던져 주었다. 기지에 도착했으나 허름한 건물이었고 침대가 없어 한국인들이 짚으로 만든 침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주었고 거기서 군용 리쿠사쿠로 휴식을 취했다. 숙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DDT로 소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식사를 못해 극도로 배가 고팠는데, 돼지고기가 나와 유대인이었던 밀턴 로젠은 채소와 과일, 그리고 커피만 마셨다고 한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인 남녀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힘을 모아 캠프를 급조했다고 한다. 로젠과 미군병사들은 일단 인천항으로 입항했는데, 알몬드 장군(General Almond) 휘하의 원산의 10군단으로 배속되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장비와 무기 이동이 우선순위였다. 그래서 예정된 날에 원산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군사기밀이었는데 실제로는 목적지가 원산이 아니라 부산이었다고 한다. 로젠이 신문에 쓴 보고를 보면, 부산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게 되는데, 기차는 더럽고 성한 곳 없이 지저분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피난민들로 들끓었는데, 미군이 음식을 준비하면 어린 아이들이 몰려와 빈 캉통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경쟁했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지치고 고통스런 아픔이 서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는 350마일, 곧 560km인데 주야로 며칠이 걸렸다. 문제는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게릴라의 공격 또한 염려되어 두려웠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잠을 자는 것인데, 쉬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병사들 가운데서는 이미 북쪽에서 전선에서 싸웠던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는 상처를 보여주었고 상처난 전투당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전선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중 기차가 정차하면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잡다한 물건을 가지고 차에 올라 팔아달라고 조르는데, 로젠 군목은 “나는 나의 생애에서 이처럼 열정적이고 도전적으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13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돈을 가지고 미국 담배, 캔디, 껌을 사고자 했다. 담배 한 갑은 1200원(약 3달라), 껌은 한통이 6백원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동하는 동안 일본어를 아는 한국인과 어렵게 대화했는데, 북한의 집은 파괴되고 재산을 강탈당하여 대구로 내려 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서 신기했고, 한국인들은 유대인들은 다 부자인 줄로 착가하고 있다고 썼다. 유대인 군목 밀턴 로젠 랍비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2월이었다. 부산은 인민군의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이었고, 철도도 무사했다고 기록했다. 부산역에서 군 캠프로 이동하는데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자기들 보다 세배 이상 무거운 짐을 나르고, 날씬한 여자들도 머리에 짐을 이고 두 손으로 가방을 들고 어깨에도 가방을 두르고 짐을 나르는데 놀라울 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군목은 일단 부산으로 왔으나 약 일 주일 후 원산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부산 거리를 다니며 부산 사람들을 보았는데, 부산은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 도시라고 생각했다. 지게를 지고 다니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현대적인 복장이나 물품들이 유통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로젠의 눈에 비친 부산은 도둑들이 설치는 도시였다. 군용품이 가게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또 미국 영국 인도 캐나다인 등 여러 종족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인도군인들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잘 다려진 군복이 흥미로웠다고 기록했다. 로젠은 8일간 부산 생활을 경험하고 9일째 되는 날 부산을 떠나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는 LST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가 다른 병사들과 무기 탱크 트럭 등 장비를 싣고 출발을 준비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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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11-04
  • [탁지일 교수] ‘하이브리드 이단’과 ‘K 이단’의 시대
    코로나 팬데믹은 국내외 이단 문제의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면 포교가 일반적이었지만, 코로나 발생 이후에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단들의 미혹이 본격화되었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대면 포교와 온라인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형태로 진화되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미혹의 시대, 즉 ‘하이브리드 이단’의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이단은 한류의 날개를 단 ‘K 이단’의 모습으로 진화하며 세계 곳곳으로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이단 대처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이단 예방교육과 함께, 온라인 대응도 시급하다. 이단들의 고퀄리티, 즉 고화질과 고음질의 동영상이 유튜브를 뒤덮고 있고, 심지어 콘텐츠 구성과 완성도까지 높아 청소년과 청년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게다가 정체를 감추고 위장해 접근하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확산하는 추세이다. 신천지는 전통적인 모략 포교를 진행하는 한편, 온라인으로 포교, 교리 교육, 신도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거짓말의 끈을 놓지 않는 동시에, 노골적인 커밍아웃을 통해, 오히려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언론매체에서는 '신천지자원봉사단’을 ‘SCJ 자원봉사단’이라고 눈가림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나저나 한때는 신천지 비판에 열을 올리며 실리를 챙기던 주요 언론들이, 이제는 신천지 선전을 통해 다시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하나님의교회도 전통적인 거리 포교와 함께 온라인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요즘 ‘어머니 하나님’을 선전하는 30~40대 여성 신도들이 곳곳을 누비고 있다. 거리청소는 물론이고 자연재해 지역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활발한 구제 활동을 벌이며, ‘선한 이웃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교회는 온라인 홍보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한편, 실시간 업데이트를 통해 곳곳에 세련된 미혹의 덫을 설치하면서 가장 파급력 높은 K 이단으로 등장했다. 박옥수 구원파 경우도 국내외 활동이 활발하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월드캠프를 올해부터 다시 대면으로 진행했고, 마인드교육을 내세워 국내외 공교육 현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해외 교육 관련 정부 기관들과 활발한 MOU 체결을 맺고 있다. IYF의 경우, 국내 캠퍼스 활동으로부터 해외 자원봉사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K 이단으로 국내외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온라인 홍보를 통한 포교 활동이 대면 만남과 집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이브리드 홍보와 포교도 나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단들은 시대적 트렌드에 민감하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신속하게 벤치마킹하고 스스로에 맞게 업그레이드한다. 문화적 키워드를 선점한 후, 정보기술력을 앞세워 포교 대상자를 공략한다. 교회의 선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후약방문식의 수동적 대처로는 이단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걸음 앞선 응전이 필요하다. 복음의 전래와 정착 시기에, 교회는 가장 선진적인 문화 도입과 선도적인 정보 제공으로 사회적 순기능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의 정보기술은 물론이고 이단들의 콘텐츠조차 따라가기 벅찬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사회를 걱정하던 교회가, 역으로 사회의 염려를 한 몸에 받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경제력, 정보력, 기술력을 앞세운 하이브리드 이단의 시대, 한류를 이용해 세계화를 시도하는 K 이단의 시대, 교회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오히려 ‘복음의 순전함’ 즉 ‘신앙적 기본과 상식’으로 돌아가는 역발상적 접근이 필요하다. 세상의 방법으로 이단과 경쟁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복음의 순전함을 소유하고, 복음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온 시대를 초월한 교회의 생존전략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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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서임중칼럼] 지도자의 언행
    일찍이 나의 목회철학은 언행일치(言行一致) 학행일치(學行一致),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통해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이었다. 걸어 나온 길을 돌아보면 이 삶을 살기 위해 가히 몸부림을 친듯한데 원하는 만큼 살지만은 못한 것 같아 古稀의 중반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목사로서 오늘도 전국에 산재한 작은 교회를 향해 말씀사역 길을 행보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육신의 아픔도 하나 더 품었기에 운전도 더 벅차고 잠자리도 불편하며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쇠진하는 것을 느끼지만 오늘도 감사로 절차탁마의 삶을 다듬는다. 작금에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으로 세간이 시끄럽다. 범인들의 말이었다면 관심도 없을 일이지만 지도자의 언행이라 주목을 받는다. ‘비속어를 사용했느냐 안 했느냐? 언론사가 짜깁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결국 고소 고발에 이르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마땅히 국민들이 들어야할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 성과에 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다. 본질과 비본질이 뒤틀린 논쟁으로 국격은 걸레가 된 듯하다. 요즘 들어 더더욱 살기 힘든 백성들을 좁쌀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마지막 보루라는 언론의 행태와 당리당략에 허우적거리는 정치권을 향해 분노를 넘어 허탈한 마음이다. 소망조차 보이지를 않는다. 전직 대통령 중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분이 계셨다. 그 분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이 알려져 있다. 어느 날 한 도시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시를 유명한 강간(관광)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을 수행했던 외무장관이 깜짝 놀라 용어 수정을 말씀 드렸다. “대통령님! 강간 도시가 아니라 관광 도시입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자존심 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 하셨단다. “애무(외무)장관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애무(외무)나 잘 하세요.” 사실관계를 떠나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그냥 파안대소하고 너나없이 대통령의 말에 대하여 달리 마음을 두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탄핵하라고 소란을 피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리더는 말과 행동이 명확해야 하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웃기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사건 이야기가 생각난다. 2004년 11월 18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웃지 못 할 기사가 실렸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출판한 저자 차모 씨가 구속 수감 된 이야기다. 차 씨는 경영컨설팅을 하는 사람인데, 요리조리 둘러대며 남의 돈 18억을 빌려 쓰고 중국으로 도주를 했다. 그런 그가 아내가 암으로 입원을 하게 되자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된 건이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고 책을 쓰고 자기가 그 말대로 행한 웃기는 언행일치 사건인데, 이런 경우를 두고 당시 네티즌들은 “진짜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댓글을 달았던 유명한 에피소드다. 갈라디아서 2:14절에는 우리가 주목할 말씀이 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사도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목사가, 장로가, 목사답게 장로답게 살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하느냐?”로 문장을 바꾸어 읽으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다. 지도자의 언행을 다시금 일깨우는 교훈이다. 「왜 부모의 권위는 소중한가?」를 출간한 제임스 돕슨(James C Dobson)의 <Bringing Up Boys>가 있다. 이 책에서 돕슨은 “미국은 아버지의 몰락으로 무너졌다”고 역설했다. 이유는 지난 30~40년간 페미니스트(feminist)가 남녀가 똑같다는 논리아래 남성성(男姓性)과 여성성(女姓性)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남자아이용 완구와 여자아이용 완구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그 결과 가정에서 남자의 모델이 없다 보니 아버지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가정도 무너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흐름은 이미 한국에서도 정착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생태학적 심리학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성 호르몬이 분명히 다르다. 진정한 남성은 희생할 줄 알며 책임성이 있고 가족을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할 줄 알며 그래서 가장(家長)의 책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위치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중심으로 뜻있는 기관 단체는 그 단초가 되는 성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교회를 들여다보자.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 당회장의 위치가 모호해 지고 있다고 우려를 한다. 당회장의 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슨 말인가?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지도자다운 말을 해야 하며 지도자다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할 때 그 공동체가 힘이 있고 공동체 전체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기능과 권위와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은 그 원인행위가 지도자 자신에게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야옹거리며 우는 고양이는 쥐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말이 많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말도 쓸모 있는 말이어야 하고 가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살다보면 한 마디 더 말할 시간은 있어도, 그 한 마디를 취소할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말이 말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말 한마디로 복도 부르고 화도 불러온다. 생각 없이 욱하는 감정으로 불쑥 내뱉은 말은 평생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아름다운 말이 아름다운 삶을 이끈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하다고 야고보 사도가 가르쳤다. 지도자의 언행은 그 무게가 그래서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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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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