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소강석칼럼]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이 지치고 위축될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을 때/ 나 그 눈물을 닦아 줄게요/ 난 당신의 편이에요/ 오, 세상이 거칠어지고 친구들이 그저 당신을 찾지 않을 때도 말이에요/ 마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서/ 난 당신을 받쳐 줄게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부른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의 가사다. 1970년 발표한 노래인데 당시 빌보드 팝 싱글 차트에서 6주간 1위를 차지했고, 이듬해 그래미상에서 총 5개 부문 트로피를 받은 팝 음악 역사상 가장 훌륭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가 얼마나 험하고 각박하고 삭막한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험한 세상에 다리가 돼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마 5:13~15)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빛과 소금을 오늘의 언어로 적용하면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험한 세상에 다리 역할을 하며 우리 민족과 사회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첫째 기독교는 봉건주의 사회를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개항 이전까지 봉건사회였다. 신분과 남녀 차별이 확연했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 신분 차별을 타파하고 문맹을 퇴치하며 진정한 인권 자유 박애 정신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간 사람들이 신문물과 신문명을 받아들여 교회에서부터 신분을 타파하고 봉건주의 사상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둘째 기독교는 독립 주권국가를 이루는 데 앞장섰다. 역사적으로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거의 기독교인이었다. 훗날 독립 이후에도 건국위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건국의 모토로 삼은 정신이 바로 기독교 정신이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우리나라가 독립 주권국가를 이뤄 건국하는 데 다리 역할을 했다. 셋째 기독교는 이 땅에 공산 전체주의를 막아내는 데 앞장섰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절대 존재와 영혼의 가치를 존중하는 종교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절대 같이할 수 없고 충돌하게 돼 있다. 공산주의가 들어가는 곳마다 교회를 폐쇄하고 교회당을 공장으로 만들고 목회자를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6·25전쟁 때도 가장 피해를 본 종교가 기독교였다. 그중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호남의 영광 영암 신안 지역이다. 영광 염산교회는 77명, 야월교회는 66명, 영암 지역 교회도 89명의 기독교인이 순교당했다. 최근 나는 몇 분의 호남 지역 목사님과 함께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님께 면담을 요청해 만났다. 국가 차원에서 학살당하고 순교를 당한 교회와 지역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조사를 하고 진실 규명을 해 달라고 말이다. 김 위원장님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잘 추진해 보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을 했는가. 이 사안에 대한 진실한 조사와 규명, 명예 회복이 이루어질 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더 확고하게 세워지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7년째 해오고 있다. 보은(報恩)이 한 인격의 품격이라면 보훈(報勳)은 한 국가의 품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윤석열 대통령께서 축사를 보내줬고, 김진표 국회의장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도 참석해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했다. 한국교회는 과거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험한 세상에 다리가 돼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고 있다. 물론 비판에는 자성하고 개혁해야 한다. 동시에 어떤 일이나 역할을 통해서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돼야 한다. 지치고 위축된 세상을 향해 눈물이 고여 있는 사람들에게 다리가 되자.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3-07-21
  • [성서연구] 안식,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한순간도 아까워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는 <마차를 기다리느라고 10분을 영원히 상실했다. 오. 이 상실을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바쁘게 사는 사람의 말입니다. 현대 생활은 매우 분주하고 피곤합니다. 그러다 보니 휴가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고, 그것은 평소 생활이 그만큼 피곤하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다 모처럼 휴식이 오면 나사 풀린 기계처럼 됩니다. 사고와 범죄가 급증하고, 문란해집니다. 성경은 안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곱째 날에 끝났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합니다. 창조가 여섯째 날에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에도 계속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렇다면 일곱째 날에 창조된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11세기의 유명한 랍비였던 <이챠크>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메누하, 혹은 사바 쓰>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메누하는 안식입니다. 안식일을 사바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 맨 마지막으로 안식을 만드시고, 안식을 누리셨습니다. 엿새 동안 만드신 만물에 안식이 첨가되자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안식은 창조의 마침표요, 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휴식은 목적이 아니며, 노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노동이 최고이고, 휴식은 노동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안식 자체가 목적입니다. 노동을 위한 안식이 아니라, 안식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입니다. 제7일은 나머지 6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엿새가 제7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이나 거룩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들은 매주 중요한 것들인데,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성전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먼저 거룩하게 하신 것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안식 없는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안식 없는 성공은 불쌍합니다. 그런데 안식 없는 가정이 많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부모님께 가장 원하는 것을 조사했더니, 50% 이상이 <싸우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수도원 규율은 엄격했습니다. 새벽에 기상해서 여덟 번 기도하고, 몇 시간의 성경 읽는 시간이 있고, 각자의 특기대로 노동했습니다. 그리고는 밤늦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들은 육체를 피곤하게 할수록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가장 조용하고 쉼이 있을 것 같은 수도 생활에도 안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안식의 나라입니다. 안식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필요 없는 사람은 지옥에나 갈 사람인 셈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사랑하여 안식일을 잘 지키면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안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칠 일에는 쉬셨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신명기 5장 15절의 말씀처럼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지 않으셨다면 안식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할 때 참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없는 안식은 저주일 뿐입니다. 세상 안식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방종과 쾌락의 추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영원과 연결되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참 평안으로 인도합니다. 올 여름 휴가철을 맞이하여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맛보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3-07-21
  • [시사칼럼] 대기의 강
    최근에 하늘에도 강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하늘에 흐르는 ‘대기(大氣)의 강’이 최근 물난리의 원인” 같은 기사를 부쩍 많이 대합니다. 여기서 “대기의 강”(Atmosphere River)이 바로 하늘에 생긴 강입니다. 열대 지방에서 발생한 수증기가 좁고 길게 마치 강을 이룬 것처럼 상공에 모여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좁고 길게”라고 했지만 사실은 길이만 해도 2,000km 이상이고 너비도 수백km에 이를 때가 많습니다. 미국 하와이부터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대기의 강이 대표적입니다. 떠다니는 강이나 마찬가지라 상공의 강한 기류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엄청난 비를 쏟아냅니다. 대기의 강의 길이와 수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기상관측위성에서 포착한 것들 중에는 중국 대륙 동부에서 북미 대륙 서부까지 10,000km 이상 길게 형성된 경우도 있었습니다.(나일 강 6,650km) 또한 웬만한 대기의 강 하나가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들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과학자들이 측정한 바에 따르면 아마존 강의 2배, 미시시피 강의 15배나 되는 양의 물을 품은 대기의 강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려주는 사건이 작년 8월에 발생했습니다. 미국 텍사스 일대에 대기의 강으로 인해 하루 동안 2,300mm 가량의 비가 내려 데스벨리(Death Valley) 지역까지 천 년 만에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여름과 비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올해 초에는 캘리포니아를 3개월 동안 총 서른 번 이상이나 대기의 강이 덮쳐서 폭우와 함께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2020년 여름에 관측 사상 최장(54일)의 비가 내려 섬진강이 범람하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기의 강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동일한 원리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벌써 기록적인 강수량 수치가 속속 나타났습니다. 전북 익산에 하루 388mm, 충남 청양에 누적 강수량 580mm, 그리고 전국 누적 강수량(16일 현재 511.7mm) 역시 기상청이 집계를 시작한 1973년 이래로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집중적으로 내린 엄청난 양의 빗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충북 괴산댐에서는 ‘월류(越流)’가 발생해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피하기도 했습니다. 수문을 통해 강물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이 댐 위로 흘러서 넘쳤다는 뜻입니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급격하게 불어난 물로 인해 인근의 미호 제방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침수되어 십여 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오송의 지하차도 사고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기후 위기로 “대기의 강” 현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난 40년 간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난 세기와 비교할 때 1.09도가 올랐는데, 지금 추이대로 간다면 21세기 말까지 4도 이상이 되리라고 추정합니다. 기후변화학회에 따르면 온도가 1도 오르면 대기 중 수증기량이 약 7% 늘어난다고 합니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생길 대기의 강의 위력은 어떠하겠습니까? 한국의 경우에도 전술한 기간 동안 전체 평균 기온이 1.8도가 올랐고, 수도권의 경우에는 2.8도나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갈수록 비가 내리는 기간이나 강수량이 지금보다 더 증가하지 않겠습니까? 2015년 12월 12일에 채택된 파리기후협정은 이런 현상들과 관련하여 지구의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2도 이상 올라가면 안 되고 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18년 10월 6일 한국에서 <지구온난화 1.5도>라는 특별보고서를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각국의 입장과 자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앞길이 험난해 보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 율법 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신 28:15, 61). 다시는 물로 인류를 심판하진 않는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래도 이제는 창조주의 준엄한 경고를 모두 함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3-07-21
  • [은혜의말씀]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막 5:25-34)
    열두 해를 혈류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혈류증이란 하혈을 하는 부인병입니다. 12년 동안 치료라는 치료는 다 받아 보았지만, 차도는 없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갑니다. 이제는 병원비도 다 떨어지고, 병은 더 심해져가고, 그럴 때 그 절망감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당시 그런 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무언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은 성 밖으로 쫓겨나서, 혼자 머물러야 했습니다. 사회(가족)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를 당하는 것입니다.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얻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끝난 줄 알았는데,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여인 어떻게 이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포기하지 믿음 때문입니다. (27절) 나사렛 예수가 ‘능력과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아온 것입니다. 이 ‘듣고’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들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는 자마다 삶이 바뀔 것입니다. 왜요? 예수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그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희망을 붙드는 것이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2. 믿음의 손으로 주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28절) 소문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붙들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실 여기에서 드러난 이 여인은 믿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소극적이고, 아주 작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34절) 중요한 것은, 이런 허물투성이인 여인에게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여인을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시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접촉이 일어났다고 모든 사람에게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믿음이지만 나아갈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간절함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영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오지만, 어떤 모습, 어떤 마음으로 찾아왔는지를 다 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독과 슬픔 속에 얼마든지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더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보면, 혈루증 여인이 주님에게로 다가간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 다가가고 계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12년 동안 고통과 절망 속에 눈물 흘려야 했던 한 영혼을 향해 주님은 사랑의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힘든 인생 한가운데로 걸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절대 무시하지 않으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자 하는 심정으로 나아온다면 주님은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던 선포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길 바랍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3-07-21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6
    어김없이 올해도 장마철을 지나고 있다. 원하진 않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된다. 반갑지 않고 피하고 싶은 일들이 해마다 반복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모습을 날마다 확인할 뿐이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이러한 재난이 일어날 때 마다 요란을 떨며 대책을 강구하고 다시는 반복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처럼 다짐을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너무 쉬이 잊어버리고 또다시 옛 이야기처럼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마치 고난 중에 열심히 기도하며 찾았던 주님을 시간이 지나며 간절함도 열정도 식어져버리는 우리의 비겁함을 보는 듯, 실로 출애굽 하여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딱히 다를 바 없음에 민망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런 형편없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아니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때 유명가수요 작곡가였던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고난 중에 있을 때, 그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히 사역하며 결국 목사안수까지 받았는데 그 시기에 찾아온 너무도 힘든 상황을 맞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받은 질문은 오히려 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냐? 였다고 한다. 깊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그러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연히 목사님의 신앙과 사역의 페러다임은 바뀌었고 늘 이 원초적인 질문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극한고난을 통하여서라도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간섭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감사하며 노래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와 자연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어찌 우매한 인생들이 일일이 알아서 준비하고, 대비하여 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간의 영혼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파괴되어져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물론 주변을 돌아보며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우리 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계명인 “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날마다 기억하며 진실 된 예배자로 살아갈 필요가 절실한 시간이다. 사랑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강력하게 선포되기를 원한다. 살아있는 예배와 진실 된 찬송이 끊임없이 생명력 있게 드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7-21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충분히 괜찮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경제적인 자본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자본이 필요합니다. 부모에게는 자녀 양육에 있어서 충분히 여유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한데 그건 바로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를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이해지능입니다. 나의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자녀의 연약한 부분들을 공감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부모는 자녀의 좋은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랑 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녀를 보면 부모는 “야! 같이 놀자고 그래! 왜 말을 못 해?”라고 다그치기보다 그냥 자녀의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면 됩니다. “내 아이 성격이 내성적이구나! 수줍음이 많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주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자꾸만 아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지적하고 닦달하고 다그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부모 본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실은 내가 소심한 성격인데 그래서 내가 못나 보이고 외톨이 같은데 그게 내 문제다 보니까 그걸 또 바로 그렇다고 인정할 수는 없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인정할 수 없는 그 안 좋은 감정을 딸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그걸 바로 심리학 용어로 ‘투사(投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속 그 문제로 아파하는 아이에게 안 좋은 말이 나옵니다. “너 왜 이렇게 못나게 굴어? 너 바보야?”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자꾸 이런 말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나의 문제인데 그것을 나의 문제로 인정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자녀의 문제로 바꾸고 그 자녀를 문제아로 몰아가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완벽한데 너는 왜 이래?”라고 하는 염려로 시작되었지만, 이 말이 점차 짜증으로 바뀌고 그것은 날카로운 분노가 되고 마침내 공격하는 말이 돼서 아이를 점점 쓰러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완벽한데 자녀는 왜 이 모양이지?’ 하는 부모들이 특히 교회 안에 많습니다. “나는 너무 멀쩡하고 신앙이 좋은데 자녀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분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럴 때마다 한 번쯤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할 때, 이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요? 점점 이 아이는 그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자라게 됩니다. 엄마의 심한 말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 그대로 못난 아이로 자랍니다. 그럼 결국 나의 못난 모습을 아이가 그대로 가진 채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부모의 못남을 물려주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심리적인 자본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능력 말입니다. ‘나는 이러한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다. 나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이런 약한 면도 있지만 이렇게 좋은 면도 있어. 내 안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이것이 통합적인 자기 이해입니다. 나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자기를 올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자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합니다. 내 안에는 너무나 많은 내가 있는데 그게 다 나라는 걸 인정한다는 겁니다. 좋아 보이는 나, 약한 나, 반면에 또 부족하고 답답한 나를 다 인정하고 나면, ‘아! 하나님이 그러한 나를 통해 하시는 그 구원과 역사가 너무너무 기이하다’는 것을 내 영혼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께 감사하는 것이고 또한 주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나 자신을 바로 알 수 있고 나를 나답게 지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져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녀와도 올바른 관계를 맺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에게 부모이기 이전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의지할 때,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자녀를 알아주게 되고 공감하는 충분히 괜찮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는 맨날 1등만 했는데, 나는 멀쩡했는데, 나는 친구도 많고 난 너무너무 완벽했는데 넌 왜 이러니?”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항상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충분히 좋은 부모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완벽한 부모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좋은 부모요, 그거면 족합니다. 여러분, 그런 모습을 가질 때 우리 아이들이 부모님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겁니다. 완벽한 부모가 존경받는 게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때로는 사과하고, 때로는 고백하고, 때로는 화해를 청하는 부모가 진정 존경받는 부모입니다. 그렇게 충분히 좋은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닮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살리며 믿음으로 견고케 하는 또 한 세대로 굳건하게 설 줄로 믿습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7-21
  • [신앙교육나침반] 온가족이 회복되고, 온가족을 구원으로 이끄는 성경학교
    2023년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이 개발한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주제의 여름성경학교 컨텐츠는 기존의 다른 성경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한 특별함이 있습니다. 향기나무 성경학교는 “가정”이 대상입니다. 찬양과 설교말씀과 성경놀이 등 모든 내용의 대상이 다음세대만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가정입니다. 향기나무 여름성경학교에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 가족이 함께 복음을 받고, 함께 복음을 경험합니다. 온 가족 성경학교가 열리는 자리마다, 놀랍게도 불신 부모님들이 참여하십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자리이기에, 교회를 나오지 않던 부모님들도 큰 용기를 내어 나아오십니다. 그러니 온가족성경학교는 불신가족을 향한 전도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모두 함께 가정을 향한 복음을 듣고,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을 가지며, 함께 웃고 함께 감동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향기나무 성경학교에는 강력한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올해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을 통해 주신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이라는 주제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을 향한 강력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12장 23절 말씀을 주제말씀으로 선포하며 나아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가정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교회로 일어서게 하는 생명과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자리이기에, 주제 찬양과 말씀과 성경놀이가 진행되는 자리에서,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아픈 가정을 치료하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향기나무 성경학교는 “놀이” 중심입니다. 가정이 모이는 자리에는 여러 세대가 모이게 됩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세대가 어떻게 복음을 함께 받고, 함께 경험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성경놀이’가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자녀세대들에게 놀이는 언어입니다. 그러하기에 놀이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이어주는 공통언어가 됩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부모님들의 얼굴이,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환한 얼굴로 바뀝니다. 부모세대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자녀세대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복음이 담긴 놀이는 전혀 다른 세대들을 어느새 한 가족이 되게 만듭니다. 서울 세곡교회 영아, 유치부를 맡고 계신 정재연 전도사님은 성경놀이 중심으로 진행되는 향기나무 온가족 성경학교를 처음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정과 함께하는 성경학교의 결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다음은 전도사님의 온가족성경학교 후기입니다. “15일 16일 이틀간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 주제로 진행하였어요. 할 수 있을까 많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역대 최고의 여름성경학교였다는 평가와 하나님이 하신다는 놀라운 은혜를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복음놀이는 은혜와 기쁨을 주는 놀라운 놀이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저희는 환경을 나일강가로 만들고 예배실을 집으로 꾸미고 문설주를 만들어 양의 피를 바르는 이벤트를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것보다 더 집중하였답니다. 너무도 귀한 시간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복음놀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제공해주신 향기나무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낌없이 조언해주시고 자료를 제공해 주신 향기나무 박미화전도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7-21
  • [다음세대칼럼] 은혜의 집(1)
    판문점에 가면 평화의 집이 있습니다. 남북간 민간 차원의 평화 회담을 위한 장소입니다.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1965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1989년 리모델링하였습니다. 평화의 집은 고위급 회담장으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국민들도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통일을 기대하면서 감격하였습니다. 평화의 집에서 회담이 이루어지고 실제로 평화통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장소입니다. ‘봄이 찾아온 평화의 집’이라는 기사도 게재가 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두 정상이 만나서 오랜만에 평화의 집이 평화의 집의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평화의 집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은혜의 집’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 2절에 베데스다 연못의 위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위치는 양문 곁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는데 성벽에 여러 개의 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 양문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될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은 성전과 아주 가까이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집’을 의미하는 ‘베이트’와 ‘은혜’를 의미하는 ‘헤세드’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자비의 집’ 혹은 ‘은혜의 집’입니다. 은혜의 집은 베데스다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집이 두 정상을 만나서 ‘봄이 찾아온 평화의 집’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과 38년된 병자가 만남으로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 제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요한복음 5장 2절에서 ‘행각’이란 지붕 달린 정자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환자들이 머물던 장소를 말합니다. 그 행각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왜 거기에 와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중한 병들을 고침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전설은 요한복음 5장 4절에 나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 연못의 이름이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이라고 불러졌습니다. 이곳에는 항상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들어가서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이름만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지 정작 은혜나 자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극한 경쟁만 있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 그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이 낫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2등이나 3등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1등만 고침을 받습니다. 이곳의 분위기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롭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병자들은 늘 긴장해 있을 것입니다. 배타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을 것입니다. 이곳 이름은 은혜의 집이지만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경쟁의 집, 기회의 집 혹은 눈치의 집이었습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07-21
  • 복음병원 임단협 잠정 합의안 도출
    고신대 복음병원(오경승 원장)과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노조 고신대복음병원지부(지부장 노귀영)가 10일 임단협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 노사양측은 임금동결과 13일 산별총파업에 근무 오프자만 참여하는 쪽으로 잠정 합의했다. 그동안 노사양측은 큰 의견차이를 보여왔다. 사측(병원측)은 임금삭감 7%를 주장했고, 노조측은 임금인상 10.73%를 주장해 왔다. 또 노조는 산별총파업을 위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통해 13일 총파업을 예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사양측은 현재 병원이 힘든 상황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서로 양보하는 통 큰 결단을 내리면서 임금동결과 13일 산별총파업에 근무 오프자만 참석하는 것으로 공감하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병원관계자는 “합의서는 쓰지 못했지만, 두 사안(임금, 산별총파업)에 대해 서로 공감하는 자리였다”며 “노동조합이 많이 양보했고, 통 큰 결단을 내려주었다”고 전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3-07-21
  • 각 교단 폭우피해 파악 주력
    장마로 인한 전국적인 피해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각 교단도 교단산하 피해교회들을 파악하고, 지원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예장통합(총회장 이순창 목사)은 18일 현재 6곳의 피해 상황을 접수하고 지원책 마련에 나섰다. 기감(감독회장 이철 목사)도 목회서신을 통해 “호우 피해 복구와 수재민을 위해 기도하자”며 18일 충북 괴산 신성교회(정원준 목사) 피해현장을 방문해 수해복구 활동을 펼치고 교인들을 위로했다. 기침총회(총회장 김인환 목사)도 총회 위기관리위원회와 사회부를 통해 폭우 피해 복구를 위한 구호헌금 모금에 들어갔다. 현재 총 4개 교회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총회는 총 2차례의 구호헌금을 모금할 계획으로 알려졌는데, 1차 헌금은 피해교회를 위해 2차 헌금은 폭우 피해 지역을 돕기 위해 정부에 기금을 내는 방향으로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봉사단(대표단장 김태영 목사)도 집중호우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중심으로 구호활동을 시작한다. 한교봉은 우선 가장 피해가 심한 경북 예천 지역을 먼저 방문해 수해 상황을 살피고 피해가 있는 각 지역의 기독교연합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3-07-2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