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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대주재 하나님
    누구나 요즘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각 교단에서 발표하는 교인이 줄고, 신학교 입학생이 줄고, 분규를 겪는 교회가 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사회적 영향력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정부를 비롯한 여러 사회 단위들이 기독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나 사학법 개정과 관련한 우리의 호소를 무시합니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교인은 적었지만, 민족의 견인차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교회가 감당하던 교육, 봉사 등의 모든 영역을 정부와 기타 사회단체에 넘겨준 채,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의 자부심도 위축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하고 얼버무립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시시한 신이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이 가진 신앙을 보여줍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은 정말 놀라운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전체 주민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지만, 성령이 임하신 후에 그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권능이란 뒤나미스, 즉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겉으로는 계란처럼 약해 보여도, 속에는 폭탄을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와 말씀 선포 앞에서 예루살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와중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장애인을 일으키는 엄청난 이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들은 놀라서 모인 사람들에게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했습니다. 자신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두었고, 이튿날 이들은 공회 앞에 끌려갔습니다.그러나 공회원들도 이들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워낙 담대하게 외쳤을 뿐만 아니라, 걷게 된 사람이 사도들 옆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회원들은 할 수 없이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여 풀어주었습니다. 풀려난 사도들은 동료들에게 갔고, 이들은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첫 부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시여>라고 시작하지 않고, <대주재여>라고 시작했습니다. 여기 <대주재>로 번역된 단어는 <데스포테스>로서 주인, 소유자, 통치자를 의미하며, 그보다 더 큰 이를 상상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절대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대주재를 창조주로 고백했습니다. 24절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우리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알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만물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 입의 침 한 모금에 무려 5억 이상의 미생물이 있고, 우리 몸에는 3킬로 이상의 미생물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미생물들을 평생 몸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김응빈 교수님은 이들을 <반려 미생물>이라고 우습게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주 미세한 것부터 광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으신 가장 위대한 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대주재여>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한 배경은 아무리 예루살렘에 빌라도 총독과 헤롯 왕과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연합하여 주님을 대적하더라도,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실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시한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당당해야 합니다. 현재의 한국교회 상황이 어렵더라도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뒤에는 대주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당당합시다. 우리는 대주재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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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시사칼럼] 명태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 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이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양명문 시). 작고한 성악가 오현명 씨가 자주 부르던 <명태>라는 가곡입니다. 이 노래는 6. 25 전쟁 기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젊은 오현명은 대구에서 공군정훈음악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UN 제 7군단의 연락장교로 복무하고 있던 변 훈이라는 작곡가가 건네준 종이뭉치에 이상한 노래가 한 곡 있더랍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죠? “악보를 보니 그게 아무래도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야, 이거 무슨 노래가 이래?’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멜로디 같지도 않은 멜로디가 그 가사와 함께 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정겹게 느껴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현명은 부산의 해군정훈음악대로 옮기게 되었고, 당시 임시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한 극장에서 이 노래를 초연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응은 혹독했습니다. 평론가들도 대중들도 이게 무슨 가곡이냐며 ‘노래 같지도 않은 엉터리’라는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노래 부른 사람도 사람이지만 정작 충격을 받은 이는 작곡가 변 훈이었고, 그 길로 그는 음악계를 은퇴하고 다른 인생(외교관)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현명은 이상하게도 애착이 가는 이 노래를 포기하지 않고 기회 닿는 대로 소개하다가 마침내 1964년 청년들을 대상으로 음악회를 열었을 때 엄청난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탄생한 <명태>는 어떤 노래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한국을 넘어 마침내 세계를 향해서도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명태는 한국에서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한국 근해에서 명태가 실종된 지 어언 30년이 흘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환경 문제 특히 기후 변화가 연관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명태가 제일 많이 잡히는 바다가 바로 일본의 후쿠시마 앞바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명태를 그리 잘 먹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으로 수출한다고 하고,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생태는 거의 모두 일본산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수산물을 조사해 보았더니 유독 명태에서 방사능 검출 확률이 높았다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말린 명태도 시원한 생태탕도 마음 놓고 먹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얼마 전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고,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한국 전문가들의 현장시찰단 파견에 합의했다”는 발표 내용에 따라 5월 하순에 21명의 시찰단이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하고 있지만,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절대 아닙니다. 2011년 3월 11일 진도 9.0의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후쿠시마 원전의 복구를 위해 걸리는 시간을 전문가들은 1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녹아버린 핵연료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겠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지만, 일각의 주장대로 이 모든 우려가 단지 기우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제는 세슘이니 플로토늄이나 스트론튬과 같은 듣도 보도 못한 물질들의 위험 아래 살아가야만 하는 당사자인 명태의 고충 말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롬 8:21)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냥은 생태로, 말려서 명태로, 얼려서 동태로, 어린 대로 노가리로, 아낌없이 다 주었던 명태들의 헛헛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명태(허허허) 명태라고(음하하하)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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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은혜의말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막 4:1-9)
    한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없으므로 해가 돋은 후 말라버렸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에 떨어져 자라긴 자랐으나 가시가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였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무성하게 자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씨, 하나는 밭, 하나는 열매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말씀이 뿌려질 때 하늘나라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똑같은 씨가 밭에 떨어졌는데, 어떤 밭에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어떤 밭에서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밭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밭은 바로 우리의 ‘마음의 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네 종류의 밭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 마음의 밭은 어디에 속할지 점검해 보겠습니다. 1. 길가입니다. (15절) 길가는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딱딱하게 굳어진 땅입니다. 마음이 길가와 같다는 말은 늘 세상일에 바쁘고 분주하기 때문에, 마음이 거기에 다 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나와 있지만, 말씀에 대한 열정도 없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에 사탄은 우리를 뚫어지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이 그 사람의 심령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즉시로 와서 말씀을 빼앗습니다. 왜 이렇게 사탄이 즉시 움직일까요? 말씀의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마음 문을 꽁꽁 닫아버리고, 냉담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반응을 하십시오. 2. 돌밭입니다. (16,17절) 돌밭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금방 틔우는데 오래가지를 못하고,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돌밭은 뿌리가 깊지 못하다는 게 문제이지요. 말씀을 듣기는 아주 잘 듣습니다. ‘아멘’하고 반응도 합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방 식어버립니다. 말씀이 그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없으니 신앙이 감정으로 흐릅니다. 여러분, 신앙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뿌리는 무엇입니까? 말씀에 대한 지식과 훈련을 통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장의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뿌리가 약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견디지만, 잠깐 견디는 것입니다. 외부적 상황에 금방 영향을 받습니다. 뿌리가 깊으면 어려움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3. 가시떨기입니다. (18,19절)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도 어느 정도 내려서 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이 더 커요.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욕심이 너무 많아서,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요일 2:15) 세상 염려, 돈, 자식, 건강, 이런 단어들에 매여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잡초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잡초 때문에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런 잡초는 뽑아버려야 합니다. 4. 좋은 땅입니다. (20절) 무슨 말씀을 받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세상 어떤 것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눅 8:15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받았다는 단어 대신에 어떤 단어를 쓰고 있습니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내 생활에 옮겼는가? 내가 들은 바 이 말씀을 붙들고 사는가? 순종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말씀을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나를 보내시는 그 삶의 한 복판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좋은 밭이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쟁기로 갈고, 거름을 주고, 부드럽게 했기 때문에 옥토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좋은 밭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잡초, 가시, 돌들을 걷어 내십시오. 좋은 밭이 되도록 사모하십시오. 모든 성도님들이,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날마다 말씀의 능력 속에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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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5
    사실 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며칠이면 되는 거리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이란 긴 세월을 광야에서 수많은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그 땅을 밟지도 못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만행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분노하였을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인도하심을 직접적으로 보고 경험하였음에도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하면서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서고금을 다 통틀어서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그것이 때로는 옳은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기적인 판단으로 결론을 내려서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우리는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가볍고 단순하게 판단해 버릴 그런 사안이 아니다.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보라. 말씀을 따라 구원받은 백성답게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긴 시간 광야를 맴돌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중요한 한 가지가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싫어하신다. 교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중심적인 이기심과 욕심, 아집 등을 포함한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으로 포장하여 자신과 이웃을 혹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기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 받길 원치 않으신다. 성경에 엄청난 제물과 멋진 모양으로 난리를 치며 제사를 드려도 교만한 자들의 예배는 받으시지 않는다고 했다. 전에 한번 언급하였지만 멋진 성전과 화려한 예복 그리고 숙련된 전문가들이 준비하여 드리는 그럴듯한 예배를 그치게 하라고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명령하셨다.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분이 원하시는 예배(찬양)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겸손한 예배,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바라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번 씩 옛날 신앙 생활했던 때를 떠올리며 많이 변하고 달라진 거 같다. 문제는 좋은 쪽으로 보다 반대의 경우로 흘러가고 있는 모습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다시 한 번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 주셔서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함으로 회복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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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신앙교육나침반] 자녀세대의 마음을 치료하는 자리, 가족 성경학교
    120세의 노련한 리더인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하여 다음 세대의 양육을 책임져야 함을 절절히 외친다. 모세는 자녀세대들을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기 위한 핵심전략을 간명하게 밝힌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그는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그는 부모세대들이 생활양식이나 관습이 아닌, 내적인 차원의 ‘마음’을 놓고 싸워야 함을 명령한다. 즉, 그는 부모세대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이 아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는 존재로 달라져야함을 명령한다. 뜨거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큰 영향력은 없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부모는, 자녀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 소통하려고 한다. 자녀와의 끈끈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복음이 되어 자녀의 영혼을 일으켜 세운다. 사랑의 테두리 밖에서 전해지는 율법과 진리는 공허한 종교가 되어, 자녀세대들의 삶에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녀세대의 마음을 보듬는 “관계”속에서 신앙이 전수된다면, 그것은 다음세대의 삶에 생명의 영향력을 미치는 “복음”이 될 것이다.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규율, 관습, 진리는 껍데기뿐인 종교가 되어,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다. 수많은 자녀세대들이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다쳐 있다. 현재 전국 176개의 모든 교육청에 청소년 자살사건이 보고되어 있다고 한다. 수많은 자녀세대들이 마음이 멍들고 찢어진 채로 쓰러져 있는데, 누구하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쓰다듬어주는 이가 없다. 마음이 다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마음이 다치면, 생명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음이 다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교회는 이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는가? 마음에 피가 나고 상처가 난 아이들을 모아두고, 사랑이 없이 성경지식과 교리만 열심히 가르치고 주입하고 있는가? 자녀세대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그 무엇도 배울 수 없다. 자녀세대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복음을 받을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온 세대가 함께 생명의 복음을 받고, 자녀세대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따스한 사랑 없이, 성경지식과 교리만 가르치는 일을 지금 당장 멈추어라! 지금은 온 세대가 아이들과 복음을 함께 받고, 모두 함께 천진난만한 아이로 돌아가 복음으로 함께 놀아야 할 때이다. 놀이는 자녀세대에게 생기이다. 소통이다. 밥이다. 언어이다. 놀이는 자녀세대에게 목숨이다. 온 세대가 복음으로 놀이하라.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벽이 허물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놀라운 소통이 경험될 것이다. 그러한 소통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복음은, 자녀세대의 마음을 치료하는 보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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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6-09
  • [다음세대칼럼]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라
    우리가 원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현대 교회에는 다양한 예배가 존재합니다. 먼저,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는 것이 개인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두 번째는 공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고 교회의 예배는 공적인 예배입니다. 셋째는 생활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성도의 삶 전체는 모두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구분은 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상하고 우아한 성도들과 함께 전문적인 합창단과 맞먹는 찬양대가 있고,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의 설교를 조용히 듣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토크쇼의 진행자 같은 목회자가 헤드셋 마이크를 끼고 강단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토크쇼 같은 설교를 합니다. 찬양 팀의 공연 같은 찬양이 있는 예배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는 짧고, 대신에 드라마나 영상이 있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멘’ 소리조차 내지 않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예배를 선호합니다. 이런 예배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이유, 목회자의 성향, 성도들의 선호도 등에 의해서 오늘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어떤 예배를 선호하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는 예배는 어떤 것이냐”라는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종류를 나누는 것이 신학적으로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사람이 원하는 예배라는 말이 가능한가?’라는 바로 이 두 가지 질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사전은 예배를 “경배, 고백, 기도, 감사를 통해 초월자를 향한 존경, 숭배,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예배를 “아베다”라는 단어로 가장 먼저 설명합니다. 이 “아베다”라는 단어는 ‘종, 노예’라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자가 ‘종’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역시 ‘엎드려 고개 숙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우리의 생각, 의지,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종처럼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의식의 의미는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신명기 12장 1절 말씀은 예배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1)” 드릴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거기서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잘못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예배이고 가나안의 예배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온 이집트는 수천수만의 신이 있었습니다. 각 신들마다 예배하는 신전이나 장소가 따로 있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도 신들이 많았습니다. 신명기 12장 2절 말씀에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2).” 가나안 사람들은 성전을 세우는 등 예배처를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서든지, 높은 산이든지, 낮은 언덕이든지, 무성한 나무 아래든지, 커다란 바위 밑이든지, 어디든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상을 세우고 숭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 제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석상이나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나 가나안에 예배처소가 많았던 것은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이어지면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비를 오게 만드는 신을 섬겼습니다. 가뭄을 지배하는 신, 농사를 지배하는 신, 밤이나 어둠을 지배하는 신, 건강을 주관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모두 그들이 원해서 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처소도 본인들의 생각과 필요에 맞는 곳이면 어디든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우상을 섬기는 곳을 다 허물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허물뿐 아니라, ‘석상을 부수고, 목상을 불태우고, 신상들을 부수고, 그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지워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나안 우상들은 가나안의 ‘문화’입니다. 그들의 ‘역사’이고, ‘삶의 흔적’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문화유적’으로 잘 보존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철저히 없애라고 하셨습니까? 가나안의 우상들이나 제단들을 그대로 두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2장 30절 말씀에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가나안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보다 안정되고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가나안을 볼 때, ‘이 민족들이 자기의 신들을 어떻게 섬겼을까?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상숭배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우상들과 그 예배 방법을 없애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31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의식을 싫어하시고 역겨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나안의 신들과 예배처소를 철저히 없애는 대신에 신명기 12장 5절 말씀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예배의 중심은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거기서만 예배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아무데서나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는 ‘유일중앙성소’라는 말입니다. 그 택하신 곳은 가나안 초기 ‘실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자신이 사는 곳에서 물이라도 한 사발 떠놓고 손 모아 빌면 되는데, 여유 있는 사람들은 소나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 되는데, 하나님은 굳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명기 12장에서 말씀하는 예배에 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구별하시는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정된 장소에 있는 성막과 성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장소와 건물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예배가 완성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예배를 드릴 장소와 건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장소와 건물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12장에서 예배 장소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있는 곳은 어디나 예배 처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구별된 예배처소는 주 안에서 구별된 성도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고, 또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우리의 가정이 거룩하고, 우리의 학교와 직장이 거룩하게 구별된 예배처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예배처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 세대가 이런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기성 세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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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갔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예수님의 천국비유장인 마태복음 13장의 핵심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천국은 저 하늘나라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이 보이지 않는, 그냥 머릿속에 추상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데 천국이 우리 가운데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는 겁니다. 겨자씨 한 알이 어때요?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이게 누구의 시선입니까? 어른들의 시선입니다. 어른들의 시선, 배웠다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겨자씨 한 알로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건 작은 씨앗에 불과해.” 그런데 아이들의 시선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관찰하고 계속 심습니다. 이걸 자기 밭에 갖다 심고 계속 관찰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됩니다. 여러분, 겨자는 1년 생 풀입니다. 봄에 싹이 트면 여름에 자라서 가을에 추수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는 풀보다 커서 마치 나무처럼 커진다는 겁니다. 나무는 1년을 넘어 2년, 3년 계속 살잖아요. 마치 그럴 것처럼 크게 자란다는 거에요. 이렇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어 보이는 가장 작은 겨자씨에서 풀보다 큰 나무가 나오는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공중의 새들이 누굽니까? 마태복음 13장 처음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아시죠? 거기서 길가 밭에 떨어진 씨를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즉, 새는 누구냐? 씨앗을 먹어버리는 존재. 씨의 세계에서는 천적과 같은 존재. 무서운 존재. 인생의 방해꾼입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겁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씨인데 아이의 눈으로 보면 자란 후에는 오히려 그 천적들을 품고 그들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결국은 씨가 승리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지금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구원과 은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아이들을 봐줄 때 아이들의 꿈이 보이고 아이들의 미래가 보이고 아이들의 비전이 보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봐줄 때 우리는 천국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보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지금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명품으로 휘감고 정말 번쩍번쩍 나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게 내가 지금 보여주는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 하나님이 바꿔 주시는 나, 하나님이 변화시키는 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선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어른들도요, 어른이라도 우리가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한 아이, 부지런한 아이, 성실한 아이, 매력 있는 아이들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을 봐도 마찬가지죠.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의 기대가 되는 미래는 바뀔 것입니다. 너무너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요? 이건 전국에서 분홍 목사에게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분홍 목사님!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분들이 기대하는 답은 뭐냐면 예산이나 프로그램입니다. “과연 성민교회는 아이들에게 예산을 얼마나 줍니까? 과연 얼마나 돈을 씁니까? 아니 어떤 프로그램을 합니까?” 다 거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교회 예산? 다른 교회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프로그램? 특별히 대단한 내용들 굳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미래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미래의 그 아이들이 공중에 새들이 와서 깃들 어마어마한 나무가 될 것을 믿는 겨자씨 한 알이라고 믿고, 그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알아보는 눈! 그 시선을 가진 교사들입니다. 바로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들이 자녀에게는 가장 필요한 그들의 선물이고, 또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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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6-09
  • “18년 만의 경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이하 기성) 117년차 총회장에 추대된 임석웅 목사가 지난 6월 4일 대연교회에서 취임감사예배를 드렸다. 부산과 영남지역 기성 총회장을 배출한 것은 이재완 목사(영도성결교회 원로) 이후 18년 만이다. 임 총회장은 당선 인사를 통해 “(총회장으로)취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전하면서 “부산서지방회와 대연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와 응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감사했다. 또 “영혼구원과 복음전도, 교단 부흥과 발전을 위해 총회장의 직임과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겠다”고 각오도 밝혔다. 이날 취임식에는 부산성시화운동본부장 박남규 목사와 국회의원 박수영 집사(대연교회)가 차례로 축사했다. 부산서지방회장 양희식 목사는 임석웅 총회장에게 축하패를 전달하고 축하하고, 대연주니어합창단 어린이들이 축가를 부른 후 전 총회장 이재완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이날 취임감사예배에는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이철 목사, 박형준 부산시장, 오은택 남구청장 등이 영상축사를 통해 임석웅 총회장 취임을 축하했고,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박남규 목사, 국회의원 박수영 집사(대연교회) 등 교단과 지역 기독교지도자 약 500여명이 참석해 임 총회장 취임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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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6-09
  • 이단들 여론전 강화하나?
    이단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이하 하나님의 교회)가 지난 5월 30일 본보에 한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과거 본보가 보도한 내용 중 부적절한 부분이 있으니 그것을 수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과거 2017년 6월 21일 번영로교회에서 있었던 제2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에서 이단 전문가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의 강의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탁 교수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라는 강의문을 발표했는데, 하나님의 교회측은 최근 판례(서울남부지방법원 2020카합 20183)를 제기하면서 “채권자가 과거에 시한부 종말론을 제시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현재도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부분은 수정해 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본보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방침이다. 지난 6월 1일에는 JMS(기독교복음선교회, 이하 JMS)측이 한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발언의 기회를 찾고 싶다’며 “공정한 시각에서 JMS측의 이야기도 들어주시기 바라며, 향후 관련 보도를 하실 때 JMS측에도 사실 확인을 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첨부파일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JMS 관련 오보’와 ‘누가 JMS를 이단 사이비로 만들었나’, ‘JMS 녹취파일 증거훼손 조작’ 등의 보도자료 등을 담고 있다. 이단 전문가들은 “사회적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여론을 바꿔보려는 측면에서 최근 언론사들을 상대로 활발하게 여론전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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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6-09
  • 담을 허물고 이웃에게 다가간 대연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부산노회 산하 가장 전통을 중요히 여기던 대연교회(담임 전승만 목사)가 이웃주민들 속으로 다가가고 있는 새로운 교회변화로 탈바꿈하여 주위로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1907년 설립된 대연교회는 100년이 넘는 오랜 전통과 역사 속에서 높은 담을 쌓고 있는 이미지였다. 한때는 고지식한 교회로 소문이 났었지만 지금은 높은 담을 허물고 교회가 지역 이웃들의 친구가 되고 있었다. 이것은 한 젊은 목회자가 7년 전에 부임하고 난 이후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회 주변 변두리에 온통 붉은 벽돌로 담을 쌓아서 이웃 주민이 감히 교회 안을 기웃거리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젊은 목사는 어느 초등학생 둘이 교회 정문 앞 건널목에서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어느 한 학생이 말하기를 교회 벽 사이로 해서 지나가면 빨리 학교에 갈 수 있으니 이쪽 교회 벽 사이로 건널목 길로 건너가자고 친구한데 제의하자, 옆에 있던 한 친구 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교회 사이로 지나가면 재수가 없데. 마귀가 해코지 한다던데? 그러니 교회 앞 건널목 쪽으로 가지 말고 다른 쪽으로 가자”라고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됐다. 담임목사가 “왜 교회가 가장 번화가로 있던 교회가 동네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교회가 어린 학생까지도 두렵게 여기고 무서워하는가?”라는 회의감을 느껴서 당장 교회 담을 헐고 어느 이웃도 편하게 지나갈 수 있고 올 수 있도록 지역교회로 오픈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당회를 열어 교회벽을 헐자고 제의를 했다. 당회는 이를 허락하고는 교회 넒은 장소에 지역주민들도 주일만 빼고 주민들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교회 마당을 주차 공간으로 만들어 내어 주었다. 주민 누구나 편하게 교회와 가까이 할 수 있도록 1층에 카페를 만들어 커피를 자유롭게 사 먹으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못골 샬롬 카페”라고 지었다. 이웃 주민 누구나 이 공간에서 만남의 장소로 허락하고 대화하며 쉴 수 있는 사랑방 공간이 되게 하였다. 이 뿐만아니라 여름철에는 ‘워터파크’ 이동 시설물을 장치하여 여름 물놀이로 어린 아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수영장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했다. 바닷가에 가는 것 보다 이웃 교회 수영장에서 즐길 수 있게 어린이 이웃 놀이장으로 변모하는 공간이 되게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이웃주민들이 교회 마당과 카페를 자기들 휴식처로, 만남의 장소로 변화되고 자연스럽게 출입하는 이웃주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주일날 교회학교가 자연히 늘게 되었고 교인들이 지역주민들의 교회로 변해 버린 대연교회는 과거같은 교회 내 분쟁과 다툼이 없어지고 전통에 메인 교회모습이 지역교회 모습으로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부산노회 내에서 두 번씩이나 담임목사로 인해 노회가 화해 중재가 나와 매우 골치 아픈 교회로도 이름이 나기도 했던 교회가 이렇게 변해 버렸다. 지난 5월 21일 오후 5시 부산노회장로회 제69회 3차 장로월례회에 참석차 교회 카페에 들어서자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휴식공간으로 만들어 놓았음을 느꼈다. 본당 안에도 리모델링을 하여 역사와 전통을 자랑만했던 대연교회 이미지가 싹 없어진 느낌이었다, 젊은 전연승 목사가 부임하던 당시만 해도 연이은 사건 사고로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둠의 역사가 없어지고 오랜 이곳 못골에 샬롬이 번져나고 노란 우산이 물결치는 아름다운 희망의 교회, 다음세대를 위해 다시 어게인하는 교회로 태어나야겠다는 젊은 목사의 절규를 시무장로들이 함께 힘을 보태어 주었다고 말하지않는가! 그래서 전 목사는 일찍이 이웃 대연초등학교 학생들이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노란 우산을 개당 5천원 수백개를 만들어 우산에다 대연교회 이름을 새겨 무료로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편의를 베풀게 하는 착안을 내어 시행하였다. 어린 학생들은 비가 와도 편하게 등하교하는 친구가 되는 대연교회로 변해갔다. 교회가 다음세대 친구들을 구원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간접 전도야 말로 젊은 목사의 아이디어로 인해 변해가는 모습에 교인들은 협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스프랑크니조마이(spranchnizomai)”(헬라어로 자궁까지 깊숙이 통하는) 그런 전도의 확장에 박차를 가해서 이단 신천지가 온통 서면일대 대형 화면 스크린에 등장하고 경성대 앞마당 장소할 것 없이 이단 신천지의 어둠의 그림자가 판을 치고 있다. 부산이 이단 천지로 변해가도 기존 교회들은 서로 이기심에만 몰두하고 연합단체들은 싸움만 하고 있는 어둠의 부산 도시가 되고 있는데 대한 외침에 이날 모인인 장로들은 회개 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다. 지금 부산 주요 일간지에는 한주가 멀다하고 신문 전면 광고로 신천지 광고가 게재되어 부산 시민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단 신천지의 활개를 차단할 아무런 대안도 없는 부산 교회 현실 앞에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 목사, 장로들의 중론들이었고 고민거리였다. 이 땅에 광복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있었다면 대연교회에는 교회가 깨어나야 회복할 수 있다고 절규하는 젊은 목회자 전승만 목사가 있었다. 이 땅의 잠자는 교회들을 이단으로부터 깨워 일으켜 세워야 하는 과제가 남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명기 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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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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