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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지구의 날
    지난 4월 22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일이기도 했던 이 날은 오십 세 번째 맞이하는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국 소등 행사’였습니다. “저녁 8시부터 불을 끄고 지구를 밝혀주세요”라는 문구로 환경부가 주관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 채 관심 있는 소수들만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하기야 역사상 명멸했던 수많은 운동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 즉 인종, 계층, 재산에 관계없이 일정 연령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보통선거권 역시 초창기에는 극소수 사람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실망하는 대신, 이제 몇 걸음 못 왔다가 아니라 벌써 이만큼 걸어왔다 생각하고 힘을 내야 할 일입니다. <지구의 날>을 알게 되었다면, 이번 기회에 환경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환경’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라는 여성이 인류 역사를 바꾸는 책을 한권 출간했는데 그게 바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었습니다. 삼백 페이지 분량이지만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이 책에 한 번 도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당시 신제품으로 개발되면서 각종 병충해를 제거하고 농사나 위생에 혁혁한 성과를 자랑하던 디디티(DDT) 같은 제품의 위험성을 고발한 작품입니다. 이 책이 발표되고 난 지 10년 만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유엔 주관 인류환경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20년 뒤 브라질의 리우에서 국제연합환경개발회의가 열렸고, 이후 각종 환경 관련 회의와 선언과 기구와 단체들이 발족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학술지는 조금 부담스럽다면, 고전으로 평가받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행나무, 2011)을 추천합니다.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김한민 씨가 쓴『아무튼, 비건』(위고, 2018),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8)을 추천해 드립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다들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일찍이 유래가 없을 만큼 엄청난 분량의 일회용 쓰레기가 배출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인류 전체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리라고 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심해 바닥에서 탐사단의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온 물체가 플라스틱 쓰레기였다는 기사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다면 『플라스틱 바다』(미지북스, 2019)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책을 보시던, 신선한 충격을 받으실 테고 환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시리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독서와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실천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합니다. 어제 했던 <전국 소등 행사>도 그런 흐름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개인적인 작은 실천 하나 하나가 모여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항상 거론되는 이야기지만 많은 음료를 소비하는 추세에 맞추어 실제로 개인용 물병이나 음료용기를 모두 다 들고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플라스틱 방앗간>이나 <제로웨이스트카페> 같은 환경지향성 가게나 기업들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인용 혹은 단체로 세상을 향해 작지만 큰 목소리를 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결국 기업이나 정부를 움직이는 힘은 환경 여론이기 때문입니다. 내년 이맘때면 잊지 말고 10분간 불끄기에 동참해 봅시다. 물통을 들고 다니는 환경 운동가가 되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더 그래야 합니다. 왜일까요? 최근 요하임 라트카우(Joachim Radkau)가 『생태의 시대』(열린책들, 2022)라는 환경역사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환경운동의 역사가 일천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일찍부터 환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은 물론 동식물까지 배려하는 책이 존재했습니다. 성경입니다(출 22:30, 23:5, 19; 레 22:27, 28, 신 22:6 등). 하기야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인데 어련하겠습니까? 예수께서도 하늘의 새와 땅의 풀과 양과 소까지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마 6:26-30; 12:11; 눅 13:15). 신약성경에는 더 분명한 환경 보호 선언들이 존재합니다(롬 8:21-22; 엡 1:23; 골 1:20 등). 리용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엡 1:10)을 근거로 <총괄갱신(Recapitulation)>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개발과 이윤을 이유로 환경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만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피조 세계를 존중하고 아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중대한 책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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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은혜의 말씀] 생명을 구하는 것(막 3:1-6)
    오늘 본문을 보면, 생명을 살리려고 하시는 우리 주님과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안식일날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주시하고는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다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고는 “네 손을 내밀어라” 하시면서, 그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 살자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완악하다'란 단어의 뜻은 ‘자기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경건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런, 이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면서” 자기 행위와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깔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열심을 다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살기가 등등합니까? 복음이 없고, 율법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 죽이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자기 혼자 의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형제의 잘못을 보거든 정죄하기보다 먼저 우십시오. 새벽에 그 영혼 생각하면서, 눈물을 쏟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죄인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그래서 교회가 죄인의 무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살려내는 클리닉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할 것을 아시면서도, 불쌍한 한 영혼을 위해,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심정과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 포도주를 담았다면, 우리의 생활양식, 우리의 의식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입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복과 치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살리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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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4
    오래전 미국에서 한 집사님께서 노래를 잘해보고자 레슨을 청하여서 가르친 적이 있다. 한두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뭔가 표정이 이상하다. 이유인즉 레슨 두 번을 받았으니 자신이 기대한 놀라운 변화를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충족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성악이라는 예술에 대한 무지로 인한 해프닝이기는 했으나 나로서는 씁쓸했던 기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빠른 것을 좋아한다. 나 역시 처음 미국 갔을 때를 생각하면 그들의 여유로움이 무척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급한 마음으로 인한 우리의 부족을 종종 보게 된다. 삶을 통하여 인내함으로 받은 주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였어도 늘 조급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재밌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서양에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다. 어린 시절이긴 하겠으나 이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번쯤 상상을 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말이라면 소원을 이루는데 참으로 좋은 도구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양 것 보다 우리 것이 사용하기에 훨씬 좋은 것 같다. 요술램프는 몇 가지 과정을 거치지만 도깨비 방망이는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소원이 이뤄지니 말이다. 한국 사람들의 심리가 그대로 반영된 이야기다. 혹 우리가 신앙(기도)생활을 하면서 자주 겪는 일은 아닐까? 빠른 응답이 없을 때의 실망감이나 상실감으로 고민가운데 헤맬 때가 있었던 거 같다. 절박하였는데 무심하심에 분노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요술램프의 지니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시다. 당연히 우리의 명령(기도)에 즉각 반응하시는 종은 더더욱 아니시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착각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다. 부활절이 지났다. 착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묵상해 보자. 오래 참음과 기다림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주님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공로 없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또 생각하기를 싫어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쉽지 않다면 생각하는 연습을 해서라도 날마다 생각하는, 기억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작금의 시대를 돌아보라. 말도 안 되게 간악한 무리들이 세상을 현옥하며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때에 진실한 믿음의 강력한 부활의 예배(찬양)는 우리 자신을 날마다 돌아보며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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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 부흥의 열쇠는 질문입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저희 부산 성민교회와 분홍목사 사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는 분들마다 재촉하는 게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해 보라는 것입니다. 성민교회는 뭘하길래 아이들이 몰려드냐? 한마디로 해봐라. 그런데 참 답이 애매합니다. 저희가 무슨 프로그램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으면 참 대답이 쉬울 겁니다. 이거 하시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다음세대 사역은 단답형으로 대답하기가 좀 복잡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성민 교회의 다음 세대의 사역은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질문. 바로 아이들에게 직접 묻는 것입니다. “얘들아, 뭘 해주면 좋겠니? 얘들아, 우리가 너희한테 뭘 해주면 너희가 행복하겠어?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여러분, 아이들에게 질문할 때 교회학교는 어마어마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가 요즘 여러 교회에 초청을 많이 받습니다. 교사 헌신 예배, 교사 세미나, 교사 수련회, 교회 학교 부흥을 위한 자리에 불려 가면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겁니다. 잘못 불렀다고. 저를 부르지 말고 이 자리에 서야 할 오늘의 강사가 있다고. 그러면 모두 그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강사가 누구냐면 ‘여러분 교회 부서의 아이들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여러분 교회 부서의 아이 중에서 특별히 교회에 나오기를 싫어하고 예배에 집중을 못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불러 놓고 마이크를 주고 “네가 원하는 걸 말해봐. 어떻게 해주면 너희 부서의 애들이 많아지고, 행복하고,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겠니?”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여러분이 그대로만 하시면 여러분의 교회는 부흥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아이들을 부르지 않고 저를 부를까요? 왜 소위 전문가를 부를까요? 어른인 우리가 애들한테 물어보기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먼저 애들에게 물어본 분홍목사, 저를 부르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뭐냐면 먼저 물어본 사람이 전문가입니다. 먼저 물어봐서 아이들의 마음을 아는 제가 전문가라고 강의를 하고 다니지만 결국 중요한 키는 아이들이 쥐고 있습니다. 질문이란 건 뭐냐면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왜 질문이 그렇게 중요한 화두일까요? 이미 교회학교에서 10년, 20년 교사근속하신 분들이 많을 텐데 왜 질문이 핵심이라고 하는 걸까요? 질문이라고 하는 것. 질문을 할 수 있다, 질문을 받아 준다, 질문에 답한다, 말이 오고 간다. 여러분, 이것 자체가 소통입니다. 제가 다음 세대 사역을 20년 이상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소통과 부흥에 대한 정의입니다. 많은 분이 어떻게 알고 있냐면 ‘소통하면 부흥한다.’라고 알고 계세요. 맞습니까? 소통하면 부흥합니까? 소통하면 부흥이 됩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해보니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은 ‘소통이 부흥이다.’입니다. 소통하는 자체가 부흥입니다. 이미 아이들과 교사가, 어른과 아이가 서로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그것이 부흥인 것입니다. 제가 저희 교회에 와서 처음 한 것은 아이들의 교회 학교 예배시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25년 동안 저희 교회는 아이들은 9시에 오고, 어른들은 11시에 오는 예배였습니다. 25년을 하면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들이 다 9시에 오는데 항상 제시간에 못 오고, 9시 10분, 20분, 30분, 40분, 50분에 오고 10시가 되어야 아이들이 오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 25년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제가 와서 아이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애들아, 뭘 해주면 좋겠니?” “목사님, 시간이 너무 일러요. 9시에 못 나오겠어요. 미치겠습니다. 팔짝 뛰겠어요.” 그래서 제가 “그럼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했더니 아이들은 “어른들은 11시에 나오잖아요. 우리도 11시에 나오면 좋겠어요.” “그래? 11시에 나오면 너희들 잘 나올 수 있겠어?” “그럼요! 저 누구도 데려오고, 누구도 데려오고, 다 데려올 수 있어요! 11시에 오면 안 돼요? 왜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당회에 건의했습니다. 우리 교사들이 9시 예배드리고, 애들은 11시에 예배하자. 그랬더니 웅성웅성 그러세요. 왜? 25년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요. 애들은 9시에 교회에 데려다주고, 또 집에 갔다가, 애들 데리고 와서 데려다 놓고, 11시에 예배드리는 게 그동안 누구도 아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내내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아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애들한테 물어보는 순간 애들은 하나같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9시에 못 오겠다고. 자, 그래서 저희는 2017년부터 교회학교 예배시간을 오전 11시로 전부서 다 바꿨습니다. 바꾸는 순간 어떻게 됐을까요? 모두 부서가 부흥했습니다. 잃은 양 다 찾았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학교앞 전도하면서 수요일마다 간식 주고 말씀 나누고 했던 아이들 주일에는 한 명도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수요 교인이었어요. 그런데 11시로 바꾼 후 다 나왔어요. 왜? 아이들이 자기가 올 수 있는 시간, 오고 싶은 시간대로 어른들이 물어봐 주었고, 아이들은 말을 해 주었고,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답을 찾은 것이죠. 그러면서 저희 교회가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질문이 부흥의 키입니다. 오늘, 바로 아이들을 만나 질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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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4-28
  • [다음세대칼럼] 믿음의 유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가페의 사랑과 비슷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보면 아무런 조건이 없고 무한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까요?’ 우리가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자녀들을 위하는 것인지에 대해 창세기 26장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절에서 11절 말씀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10절에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 흉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런데 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흉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브람 때에 일어난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그랄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아브람 때에 흉년이 들었을 때는 아브람과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갈려고 할 때에 창세기 26장 2절에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은 이삭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흉년이 들어서 살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지역에 머무르게 됩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은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때로는 우리 인생에 흉년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줘야 될 중요한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어느 종교든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참 진리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세의 때에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 밖에도 세상에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심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만이 우리가 믿고 따라에 될 유일한 삶의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것인가?’ 자녀들이 우리를 통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도록 힘쓰는 것은 우리가 평생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힘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인생의 흉년에 관계 없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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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04-28
  • [신앙교육나침반] 친구가 가득한 교회로 자녀세대가 몰려온다!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열두 살, 아홉 살이 된 아이들과 우비만 입고 밖으로 나간다. 음악을 틀지 않아도, 온 세상 가득한 레인 비트는 온 가족을 춤추게 만든다. 함께 첨벙첨벙 뛰며 물을 튀기고, 나뭇잎 배를 만들어 물웅덩이에 띄운다. 그 순간, 남편과 나는 열두 살, 아홉 살로 돌아간 것과 같이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 어느새 아이들과 몸과 마음의 온전한 일체감을 경험한다.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 대부분은 병리학적인 목적으로 놀이치료를 처방받는다. 정서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정서적 공급을 충분히 받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로인하여, 아이들은 일상에서 어려움과 도전을 만날 때에, 적절히 반응하는 자기만의 전략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놀이는 놀이하는 대상과 순수한 정서적 교감을 느낄 수 있으며, 아픈 아이들이 세상에 반응하는 자신만의 전략을 하나씩 만들어갈 수 있는 보석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자녀세대들의 마음이 다치고 상하여 있다. 마음이 다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 아이들의 마음이 다쳤을까? 아이들을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끊임없이 가르치고 채우려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이 아이들의 마음을 점점 시들게 만들고 있다.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지식이 가득한 바리새인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기며 가까이 와서 쓰다듬어 치료하는 친구였다. 지금 우리 자녀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이다. 친구라면, 무엇을 할까? 친구라면, 함께 노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 좋은 친구는 함께 노는 친구이다. 교회의 모든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큐티는 잘 했는지, 예배태도는 정숙한지, 밑줄은 잘 채우고, 공과 만들기는 잘 하는지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교사들만 가득한 교회는, 아이들이 가기 싫은 교회이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함께 웃어주고, 함께 뛰고, 잡으러 가고, 잡히고, 재미있게 놀아주는 어른친구,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 삼촌 친구, 이모 친구, 또래 친구가 가득한 교회는, 아이들이 날마다 가고 싶은 교회이다. 온 교회의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서 매 주일 신나게 놀이하면 참 좋겠다. 영유아, 어린 아동들이나 모여서 하는 놀이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다시 한 번 대답하고 싶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마음이 아픕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목사님, 선생님들이 모두 친구로 변신해야합니다! 아이들에게 친구는 ‘같이 노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같이 놀아야 합니다.” 온 교회가 진지하고 신중하게 철저히 준비하여 함께 놀이하는 시간을 준비했으면 좋겠다. 단순히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세대들의 마음을 돌보고 치료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전략적으로 마련하면 좋겠다. 이 일을 위해서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복음놀이 전문가 양성과정을 5월 중 진행한다. 향기나무 성경놀이는 복음으로 부모세대들이 자녀세대들의 친구가 되어 즐겁게 하나 되는 놀이이다. 또한 복음으로 가정을 하나 되게 하는 놀이이며, 복음으로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 신앙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놀이이다. 10가지 성경놀이를 배우는 자리가 아니라 1000가지 성경놀이를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문의| 향기나무 교육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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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서울시 퀴어축제 허락할까?
    서울 퀴어축제가 7월1일 예고된 가운데 퀴어축제 주최측은 서울시청 광장을 사용하기 위해 신청서를 서울시에 제출한 상태다. 오는 5월 초 광장 사용허락 여부를 결정하는 심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지난 17일 서울시청 광장 앞에서는 ‘동성애 퀴어축제 서울광장 사용승인 반대’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작년 퀴어행사의 서울광장 사용 신청에 대해 서울시는 유해 음란물 판매·전시 등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사용을 조건부 허락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며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이상 국민을 실망시키며 머뭇거리지 말고, 2023 퀴어행사의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하지 말라며 사용불허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면서 만약 오 시장이 2023년 퀴어행사의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한다면 그동안 고통받아왔던 서울시민들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꼴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또 2022년에 오 시장 스스로가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하면서 내건 조건은 물론 서울시민과의 약속을 또다시 저버리지 말길 엄중히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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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조용기 목사 생가 보존 놓고 갈등
    고 조용기 목사가 태어난 생가가 KTX 울산역 역세권 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보존 여부를 놓고 갈등이 일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생가가 소재하고 있는 울주군 삼남읍 신화리 일대는 2019년 KTX울산역 역세권 복합특화단지 조성을 위한 개발구역에 해당한다. 한화솔루션과 울주군, 울산도시공사가 특수목적법인을 만들어 민관 공동 투자로 시행하고 있다. 울산시가 일자리 창출과 도심 균형발전을 위해 상당히 공들여 온 사업이다. 이 사업이 예정대로 추진되면 조용기 목사의 생가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나 준주거 시설 등이 들어선다. 사업부지 안에는 은혜와진리교회, 그리고 조용기 목사의 동생 조용목 목사의 땅이 총 3만 2000㎡가량 포함돼 있다. 은혜와진리교회측과 지역교계 등은 당연히 이 사업을 반대하면서 조용기 목사 생가 보존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시행사측은 “이미 4년 전부터 시작한 사업이고, 조 목사의 생가를 보존하고 싶어도 이미 사업이 인허가 신청 단계까지 다다랐고, 서울산 중심의 도심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사업이어서 생가를 보존하면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난색을 표하는 중이다. 다행이 최근 정치인과 종교인, 법조인 등이 ‘조용기 목사 생가보존회’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생가보존회측은 “세계적인 영적지도자의 생가를 철거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며 “역세권 개발사업에서 생가는 제외하고 원형 보존해 기념사업에 활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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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바울과 바나바 같은 인물 故 장성만 목사와 임현모 장로
    성경에는 바나바가 먼저 나서서 바울을 인도하며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런데 훗날에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는 바울이 먼저 나서고 바나바는 항상 뒤에서 바울을 도와주며 섬겨 온 것을 볼 수가 있다. 팔십을 살다보니 부산 교계의 숨은 크고 작은 이야기 거리를 많이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살아생전에 한번 뿐인 생애인데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남는 것은 픽션에 가까운 실화들을 남겨두는 것만이 후대에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우연히 가까운 지인이 불러내어 점심약속을 하여 부담 없는 만남을 주선하는 분이 있다. 이 만남은 4년 전 부터 21세기포럼 이사장 홍순모 원로장로님이 흔쾌히 승낙하여 교계 언론인 대표들이 만나는 것이다. 교계 돌아가는 이야기를 비롯해 소소한 삶을 나누다보니 편안한 마음이 든다. 이를 주선하는 인사가 바로 21세기포럼 상임이사 임현모 장로이다. 이 친구는 나와 같은 동갑내기로 오직 한길로 걸어 온 동지이기도 했다. 임 장로는 방송계에서, 나는 교계 신문에서만 5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고 장성만 목사와의 특별한 인연 살아생전 장성만 목사님이 임현모 장로를 옆에 가까이 두고 부산교계에 무언가 뜻있는 업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평소에 늘 글로 신문에 칼럼을 쓰며 한국교회와 부산 교계를 걱정하다가 무언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싶어 임 장로를 불러 ‘크리스천21세기포럼’을 만들었다. 포럼을 통해 이웃을 돕고 지역 교계를 섬기고자 했다. 또 이름도 없이 선교와 교육, 봉사에 숨은 일꾼들을 발굴하여 이들에게 격려하는 뜻에서 기독문화재단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는 ‘기독문화대상’을 시작했다. 봉사와 선교와 교육에 이바지하는 분들 중 각 분야별로 1명씩, 총 세 분을 해마다 발굴하여 ‘기독문화대상’을 주되 상금은 각각 1천만원씩 시상하는 것으로 구상을 했다. 그러려면 재정이 무엇보다 필요하니 이 재단설립 발기이사 몇몇을 임 장로에게 찾도록 부탁했다. 재정 목표는 약 20억원을 모금하는 선에서 기부를 약속 받을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정 모금은 먼저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낸 본인부터 솔선해야 성공할 수가 있어 장 목사님 자신이 10억원 반을 내는 선에서 의견이 모아졌다. 아무리 동서학원 이사장이지만 학교로부터 재정은 마음대로 쓸 수가 없는 것이 교육부에서 감사가 내려오고 학교에 교수들과 학생들의 눈이 있어 그 쪽은 생각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평소에 가까운 지인들이랑 그동안 국회 부회장 역임과 정치, 교육계, 문화계, 종교계에서 쌓아 온 지인들로부터 자원해서 선한 일에 쓴다는 취지로 설득하여 후원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10억원을 모금하여도 나머지는 임 장로한테 전적으로 맡겼다. 평소 통합 교단에서 활동하는 기업가인 홍순모 원로장로(성민교회)와 이성만 원로장로(은성교회), 김임권 장로(구덕교회, 수협중앙회장 역임)에게 각각 2억5천만원씩 기부받고 나머지는 양한석 장로(문현중앙교회)를 비롯한 몇 분 교계이사로부터 기부를 받아 그들로 구성한 재단법인 이사회를 출범시켰다. 당연히 일등공신인 임현모 장로는 상임이사로 선임되었고 장제국 총장(동서대) 등 몇몇 이사들도 충원시켜 이사회가 발족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출범해보니 일년에 하는 행사 경비가 상당히 지출될 수밖에 없어 결국 이사들에게 연간 일천만원씩 이사 회비를 받아 처음에는 지탱해 왔다. 도저히 이것으로는 유지 발전시킬 수가 없어 법인 모금한 20억원으로 부산 동구 조방 앞 국제호텔 옆에 위치한 5층 빌딩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건물을 사고 층마다 임대하여 얻은 수입금으로 21세기포럼 행사를 차질없이 진행할 수가 있었다. 현재 새 건물 시가는 60~70억원이다. 때로는 국내 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포럼을 열었다. 한국사회 발전과 미래를 위한 비전 포럼에 초청된 인사만도 김형석 석좌교수 등 십여명, 이러한 과정을 옆에서 조언하고 서포트하는데 일조한 분이 임 장로였다. 때로는 아닐 상황이면 그것은 해서는 안된다고 바른 말 하는 분이 누가 있는가? 임 장로의 성격이 “옳은 일에는 옳다고 하고 아닐 때는 한사코 아니다”고 옆에서 쓴소리도 해 온 것이 임 장로였다. 소위 “장성만 목상님은 바울이었다면 임현모 장로는 바나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십수년간 진행하여 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부산에 선적을 둔 우리 상선이 소말리아의 해적들에게 피납되어 억류된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포럼이 발 벗고 나선 적 있다. 장성만 목사님의 결단으로 임 장로가 특명을 받아 그곳까지 달려가서 일부 자금지원을 하고 선원들을 구출하여 온 것이다.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 최초 업적이었다. 보람있는 일로 인해 억류되었다가 석방 되어 돌아오자마자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여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바로 선교의 본질을 이행한 수확이었다. 부산 일신기독병원은 호주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인데 병원 안에 강성 노조들로 인해 병원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사장 인명진 목사와 상임이사 임현모 장로가 들어갔다. 이들은 협상과 더불어 겨우 병원을 살려 지금은 재단 산하 병원이 무려 4개나 세워질만큼 발전하고 있다. 임 장로는 하동 출신으로 청년시절에 부산노회 청년연합회 회장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으로 당국에 요 시찰 인물로도 찍혀 있었다. 은영기 장로가 CBS부산방송국장으로 부임한 이후로 부산 교계 상대로 방송 모금을 위해 고 배경업 장로 추천으로 임현모 집사를 특채하여 선교국 직원으로 채용했다. 그 후 기자로 활동하다가 제주방송국 본부장으로 최초로 가서 기반을 닦았던 공로로 훗날에 부산방송 본부장에 취임할 수가 있었다. 그의 걸어 온 길이 오로지 방송 선교에만 매진하여 하나님께서 후한 복을 주신 것이다. 이런 분에게 부산 교계를 위한 공로로 부산 교계이름으로 제안하여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수여할 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이니라. 야고보서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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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목회자칼럼]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는데…
    임종을 기다리는 시간, 어머니는 한숨을 몰아쉬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 외국에서 들어오지 못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일까? 하루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데… 어머니는 아쉬움 속에 잠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동을 하고, 저녁시간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밤에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당연한 일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의 전환을 해보면,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내가 맞이한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갈망하고 기다린 내일이 아닌가? 일본 에세이 [종이학]을 지은 이무라 가즈키요는 일본 의과대학을 나와 내과 의사로 일하다 32세로 세상을 일찍 떠났다. 사망 이유는 ‘섬유육종암’이 ‘폐암’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인데,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알고 죽음을 앞둔 시점에 남긴 글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자신 스스로 병마와 싸우는 용기, 그렇게 살면서도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혼자 남을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 특히 자녀를 먼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글로 잘 표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 내 두 발로 마음대로 움직이고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 소리가 들리고 말을 하고 손으로 잡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 아프고 보니 이 모든 것이 감사와 소중함이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많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매일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고, 직장에서 일과를 보내고 저녁에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일상이 돌아보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중환자실에 입원해 보면 감사이고, 은혜임을 알게 된다. 이번 봄에는 유난히 벚꽃이 아름답다. 연상홍이 붉고,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바람소리를 듣고,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 행복 아닐까? CCM 가수 손경민씨가 노래한 행복이란 노래 가사가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행복이라네 / 눈물 날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이라네” 당연함을 일상으로 알고 산 무지에서 감사함을 일상으로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자신도 모르게 불평, 불만을 품고 살아온 현실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동행이 말만 아닌 실재가 되어 질 때 우리 속에 참 은혜가 아닌가? / 항상 내 옆에 있는 아내와 남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은혜가 아닌가? / 내게 맡겨준 자녀가 있고 그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만으로 은혜가 아닌가? / 문제 많은 이 세상이 있기에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 문제 많은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있어서 성령님이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심이 은혜가 아닌가? 매일 반복되는 묵은 날,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새날(사43:19)을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이라는 최상의 선물을 받고 지금이라는 최고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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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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