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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일제 하에서의 공산주의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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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20세기 최고의 사건은 공산주의의 생성과 몰락이라고 말한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하고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 이 녹슨 이데올로기가 유독 한국에서는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고, 성경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벧전5:8) 있다. 공산주의는 비극의 역사였다. 스테펀 쿠르투아 등이 공동 저술한 <공산주의 흑서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에 의하면 전 세계 공산국가에서 9천4백만 명 내지 1억 명이 이 유물론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기에 폴란드 출신 철학자 레작 콜라콥스키는 공산주의는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과 인간의 마음과 역사, 인간관계까지 국유화한 것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악어’라고 말한바 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폭력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첫 희생자는 김이주, 박문기, 윤학영, 이창희 등 동아기독교 인물들이었다. 동아기독교는 지금의 침례교의 전신인데 이들은 한만국경지대라 할 수 있는 길림성에 파송되었는데, 1925년 9월 하순 공산당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들 기독교인들을 일본의 밀정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동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첫 번째 사례였다.
1932년 10월에는 간도 침례교회의 김영국(金榮國, 1884-1932) 장로와 김영진(金榮鎭, 1887-1932) 목사 형제를 살해했다. 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인 김영국 장로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 북동지역에 마을을 건설하고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 종성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동생 김영진 목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김영진 목사 또한 함경북도 종성 출신인데, 1919년 목사안수를 받았고, 간도지방에 이어 순교자 손상열 목사가 섬기던 자성군과 임강현 일대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의 형 김영국 장로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32년 10월 14일 죽임을 당했다. 당시 함경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30여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10월 14일 종성동 마을을 습격하고 마을 주민들을 종성동 침례교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신자와 불신자를 좌우로 갈라 앉히고 지금이라도 공산주의를 따르겠다면 살려주고 예수를 믿겠다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때 잡혀온 김영국과 김영진 형제는 공산주의 청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 받으라고 했는데, 격분한 공산당원들은 김영진 목사를 끌고나가 피부 살을 벗기며 매질을 가했다. 이에 김영국 장로는 “내가 이 교회 책임자다”라고 말하면서 악행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도 동일하게 묶여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 표피를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1932년 10월 14일에 발생한 탈피참살(脫皮慘殺) 사건이다. 이날 김영국 형제 외에 정춘보 집사 또한 신앙을 거부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으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보다 앞서 1931년 동만주 지방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교회당 13개 처가 방화되고 4명의 교인이 피살된 일이 있었고, 1932년 남만(南蠻)지방 장로교회에서는 25인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1931년 길림 부근에서 최태봉 외 일곱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1932년 9월에는 감리교 연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한인촌에서 선교하던 김영학(金永鶴) 목사가 시베리아에서 순교했다(민경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214). 그는 1930년 1월에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소련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 받고 중노동하던 중이었다. 감리교에서는 위험을 감지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한 사람의 신자가 남아 있는 한 남겠다”며 현지에서 일하던 중 강물에 빠져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무렵 연길현의 와룡동 교회는 공산당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은 흩어졌다. 또 적암동 교회의 노진성 영수는 피살되고 교인들 역시 다 피난을 갔다고 한다. 교회는 두 번 씩이나 습격을 받아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1931년 가을에는 남만 길림 남방에 있는 쌍거천에서 김광욱, 최태봉 등 일곱 사람은 공산당 가입을 거절하여 잔혹하게 살해되기도 했다. 만주 한인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의 핸더슨(현대선, L. P. Henderson, 1895-1932)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의 형 현거선(H. H. Henderson)과 동생 로이스 헨더슨(Lois E. Henderson)도 한국 선교사였는데, 동생 핸더슨은 1920년 10월 30일 내한하여 만주선교부로 배속되었다. 당시 만주지역은 한인 공산주의 세력과 반 기독교적인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또 만주지역 토호세력과 마적 떼들이 활동하고 있어 교회와 교인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핸더슨은 1932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후 건강이 좋지 못한 부인과 자녀를 평양에 남겨두고 혼자 만주로 돌아갔는데, 10월 15일 저녁 홍경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을 들렀는데, 그때 일본군과 중국 반군 사이의 전투를 피해 마돌령으로 가던 중 10월 16일 새벽 1시경 피살되었다. 일본군은 마적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분명치 않다. 혼란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현장에서 순교의 길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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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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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 엄마, 나 오늘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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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오늘 하루 행복했어.”
학교의 3월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새로운 아이들과의 적응,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학사 업무들까지 여러 업무들이 복잡하게 얽혀가다보니 3월이 길기도 하고, 빨리 지치기도 한다. 작년 가을부터 고신대 겸임교수 업무까지 겹치다보니 평상시보다 더 버거운 학기초의 시간이었다.
4년 만에 재개된 학부모 대상 학교설명회까지 교목실이 주관해야 하다 보니 여유없는 일상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수업, 채플, 행정 등 여러 학교 업무들이 아무리 바빠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게 있는데 학생, 학부모 상담이다.
3월 중순 종교수업을 마치고 교목실로 왔더니 제자 하나가 나를 급히 따라왔다.
“목사님 지금 상담이 가능할까요?”
“ㅇㅇ야, 오늘 학교행사(학교 설명회) 준비 때문에 지금 시간이 안되는데 내일 1교시에 보자.내일 아침에 무조건 너 먼저 만날게.”
직감적으로 미루어도 되는 상담인지 즉시 필요한 상담인지는 이젠 빠르게 판단할 경험치가 쌓인지라 이 제자는 급히 봐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하지마자 제자를 찾았다.
교목실에 들어오는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상담의 내용은 중학교 때까지 왕따를 당한 상처로 인해서 친구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거절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심이 입학 후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웃는데 웃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충분히 들어주고,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드디어 얼굴에 머금은 눈물과 함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마무리 지으며 결론을 내려줬다.
“ㅇㅇ야, 네가 다녔던 중학교 때까지는 지금 네 담임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안 계셨고, 그리고 목사님이 그 학교에 없었어. 근데 지금 이 학교에는 네 담임선생님도 계시고 나도 있어. 그럼 된거야” 그러자 환하게 웃었다.
그날 하루를 잘 지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날 ㅇㅇ는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엄마 나 오늘 행복한 하루 보냈어.”
지난 10년 동안 학교를 다녀도 끌려가듯 갔던 학교여서 엄마 아빠는 늘 기도했었는데, 처음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하니 어머니는 울면서 감사 인사 전화를 주셨다. 여전히 이 아이는 고비 고비를 계속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젠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돌파를 위한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아이들의 행복.
이것은 나의 행복이기도 하다.
매일 사라지는 초코파이를 또 채워야 하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작은 것 하나에 행복해하니 은퇴 때까지 퍼먹이는 일을 어찌 멈추겠는가.
올 한해도 이러한 행복의 시간이 많아지길 기대하며 3월, 4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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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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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신앙의 하이퍼골릭(hyperg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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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용어로 ‘하이퍼골릭(hypergolic)’이라는 용어가 있다. hyper는 치솟는다는 의미이고, golic은 연료를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가령 두 가지 화학 물질이 있는데 이들이 각각 따로 있을 때는 아무런 화학 반응이 없다. 그러나 두 가지가 접촉하게 되면 발화하거나 폭발한다. 우주선도 그 기본 발상은 ‘하이퍼골릭’ 현상에 의한 연소 작용에서 생기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에서 착안되었다.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로 치솟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초현실주의를 hyper-realistic이라 한다. 몹시 흥분한 상황을 throw a hyper라고 하고, 자녀교육에 있어서 과잉양육을 hyper-parenting이라 한다. 진정 차원 높은 신앙의 하이퍼골릭이란 무엇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과의 불편한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 미래지향적 정치 행보를 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국민정서도 찬반론으로 뜨겁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운명적인 이웃, 싫다고 멀리 할 수도 좋다고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나라다. 야권에서는 굴욕적이라고 피켓 시위까지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일본과의 사이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지내야 할 것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적인 상황은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토의 넓이와 인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 일본을 앞서고 있다. 굴욕외교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Spencer)는 그의 저서인 「개인 대 국가(The Man Versus The State)」에서 ‘Only the strong survive’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동학 난(東學亂)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죽창으로 총을 이길 수 없었기에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죽창(竹槍)이 아니라 반도체를 비롯한 한류문화(韓流文化)로, 역사적 원한이 아니라 미래적 역사관으로 일본에 맞서야 할 때다. 그리고 이겨야 할 당위성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얼어붙은 한일관계 12년의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국제질서의 리더 국가를 향한 걸음을 행보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군사적 강국으로 G8 가입의 문턱에 서 있다. 특히 장자가 갈파한 목계지덕(木鷄之德)으로 일본을 대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하이퍼골릭을 생각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강단의 설교에서는 재림에 대한 메시지가 들리지 않는다. 예배 찬양에도 재림을 고대하는 찬양은 부르지 않는다. 종말론 신앙이 내재되어야 오늘의 삶에서 올바른 신앙의 가치개념이 활력을 얻고 미래를 향한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데 곳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원망과 불평, 비판과 정죄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산 위의 동네로, 등경 위의 등불로서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국내외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신앙과 삶의 괴리,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 등인데 참으로 부끄러운 말이지만 극단적 이기주의 현상이 빚어낸 결과이다. 교회가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사회는 어둠의 역사로 전락되는 것을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얼마든지 경험했다.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어둠의 현상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앉아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오늘을 엮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인류 역사에 생명의 빛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생명의 ‘하이퍼골릭’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래서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빛의 삶이란 무엇인가? 빛이란 앞을 볼 수 있고 그래서 분간도, 분별도, 구분도 가능하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 그래서 정의와 사랑이 숨 쉬며 용서와 기쁨과 평화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빛이라 한다. 이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세 가지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 개인의 인생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되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둠을 광명한 빛으로 전환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를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시킨 생명의 은총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은총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고백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5:8-9).”
그렇다. 우리는 전에는 어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빛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제 부활신앙으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은 용서와 치유를 넘어 채찍을 드신다는 것을 깨달아 겸손히 엎드림으로 개인도 교회도 국가도 부활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있다. 내용은 두 마리의 애벌레가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인데 줄무늬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처음 애벌레였던 그들이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그것은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나비라는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활의 의미를 새겨주는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바로 이런 영적 불기둥이 솟는다. 마음이 뜨거워지며 희망과 용기가 생겨난다. 이것을 나는 ‘신앙의 하이퍼골릭’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아무 힘도 없지만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되면 발화한다. 희망의 불꽃이 일고 용기가 발화한다. 기쁨이 샘솟고 사랑으로 충일한다. 그리고 내 삶의 장에서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난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경험함으로 신앙의 하이퍼골릭 현상이 나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와 정치와 사회문화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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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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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주님과 함께하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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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성탄절에 자주 읽는 말씀으로써 성탄절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성탄절의 핵심 구절을 4월에 생각하는 이유는 성탄과 고난, 부활의 승리가 사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탄의 핵심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적 죽음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사람은 다시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함>이 성사되려면 많은 과정이 요구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쁨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할 시간만 기다립니다. 그래서 평생 함께하기 위해 결혼합니다. 그러나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것이라면 둘 모두에게 극악의 고통일 것입니다. 짝사랑하는 때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달려가겠지만, 그 상대방은 괴로울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어떨까요? 임마누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으로 성사되었습니다. 인류의 첫 죄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에도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거나, 거짓 하나님들, 말하자면 우상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왔습니다.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데서 온 것임 알지 못한 채,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애타게 짝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탄생하셔서 사람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함께 계심은 하나님께는 고난입니다. 마치 사람이 땅에 기는 벌레처럼 되어 벌레와 함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악의 세상에 오시는 것,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체험하신 게 고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보통 사람도 경험하지 않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인생들을 향해 <너희를 사랑한다>고 계속 고백하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처절한 하나님의 짝사랑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찾아가는 자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오셨습니다. 발품을 팔아 갈릴리 해변의 어부들에게 오셨고, 가버나움 세관의 레위에게 오셨습니다. 먼저 오는 분이 고난을 받습니다. 함께하기를 원하는 이가 고난을 받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실패는 함께하지 못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락방 만찬이 끝난 후에 겟세마네에 갔지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는데, 그들은 잠을 잤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후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지만, 그들은 도망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는 고난을 경험해야 하고,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요즘 많이 부르는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다음 부분이 있습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못 박히신 손과 발에 우리 손과 발을 포개고,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 이것이 찾아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어 주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 임마누엘입니다.
부활은 이처럼 주님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승리입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순간에,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우리를 부활을 넘어 영생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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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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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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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 신 아버지가 /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시인 정지용이 쓴 <향수> 가운데 일부입니다. ‘충남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시인이 태어난 생가가 있던 곳인데, 이제는 그 주소명이 ‘충남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시인의 향수는 고즈넉한 이 마을에 고스란히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다닌 휘문고보가 위치했던 서울의 궁궐 서편(원서동)에서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다녔다던 도시샤(同志社)대학이 위치한 교토에서도, 시인은 게으른 듯 지즐대는 고향마을을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살았던가 봅니다.
오랫동안 잊혔던 시인 정지용과 그의 시가 세상 속에 꽃망울 터지듯 툭하고 등장한 때는 1989년입니다. 테너 박인수 씨와 가수 이동원 씨가 60년 이상의 세월을 묻혀 있던 동명의 가곡을 새롭게 편곡해서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가요계는 물론 문학계와 일반 세상까지 발칵 뒤집혔습니다. 클래식을 하는 동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곳은 약간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요 한국 성악계의 얼굴과도 같았던 테너 박인수는 대중가요를 부르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오페라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그는 꿋꿋하게 가는 곳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이 노래를 기꺼이 불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클래식과 가요는 물론 국악까지 조화를 이루어, 전통과 현대를 한데 어우르며 전 세계가 극찬하는 한국 음악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출발점에 있던 박인수 씨가 지난 2월 28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수>의 파트너였던 가수 이동원 씨는 그보다 열세 살 아래였으나 지난 2021년 11월 14일 먼저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그토록 자주 불렀던 노래의 배경과 너무나 흡사한 지리산 자락 한 마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향수에서 이동원 씨가 담당했던 파트의 노랫말들입니다. 그는 1951년 전쟁통에 부산의 전포동, 유난히 별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달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학교는 서울에 있는 보성고보를 다녔지만 그 역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릴 적 도란도란 살았던 동네가 일평생 눈에 선하지 않았을까요?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옛 마을의 호젓한 굽이길 혹은 도시의 하늘 아래 어느 골목길 또는 낯선 땅을 가로지르는 강가에서 머물렀던 하숙방 어쩌면 달도 별도 곱기만 하던 동네 그 비슷한 어디쯤의 기억을 우리는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돈도 벌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건너간 일본 땅 나고야(名古屋, なごや)에서 종일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녹슨 군용기를 닦고 페인트칠을 하는 중노동을 감당하며 하릴없이 눈물짓던 열네 살 양금덕 소녀에게도 고향 마을 정든 집 그리운 부모형제가 꿈엔들 잊힐 리 있었을까요? 지난 삼십 년 동안 싸우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양관순’이라 불리는 올해 나이 아흔 다섯의 이 할머니를 포함해서 생존하는 몇 분 되지 않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탄식과 한숨과 절망의 시간들을 어찌 돈으로 환산해서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남화태도(사할린 남부)로 끌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채 죽는 날까지 ‘전남 나주군 세지면 오봉리’ 그 따뜻한 이름 속에 남겨두었던 아내와 갓난아기를 그리워하며 살았었을 김오남 씨 같은 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정지용과 박인수와 이동원은 이제 다 떠나고 그 아련한 노래만이 남았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떠난 사람들, 지금도 향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도 이 노래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신령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영원한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간 이들이 먼저 가 기다리는 그곳,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문득 한 발 더 가까운 곳으로 느껴지는 그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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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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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부활의 증인(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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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을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기뻐하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여인들이 전해주는 부활의 소식을 믿지를 않습니다. 부활만 안 믿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원래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그 제자들이 돌변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용감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것입니다. 부활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삶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 삶에 위대한 목표가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람들을 살려내라고 주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제자들의 삶에 분명한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목표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숨이 넘어가는 순간 내딛는 한 발자국은 한 사람은 천국이고, 한 사람은 지옥이고, 천지차이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해주기만 하면 그 운명의 한 발자국은 극복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옮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여러분,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그 간절한 소원을 안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는 것은 단순히 크리스천의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갖가지 문제로 영과 육신이 부서져서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그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둘째, 삶에 놀라운 능력이 생겼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만 하면 필요한 능력은 얼마든지 공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다가 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가 뭐라고 하지요?(행 3:6)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는 곳에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부활의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며 사십시오!
오늘 이 특별한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위에 계신 만왕의 왕 되신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골짜기에서 부활의 주님이 주신 능력을 붙드는 자는, 담대하게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함으로 기쁨과 감사와 기적이 있는 여러분의 삶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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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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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세금] 교회와 세금 칼럼, 최종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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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부활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산 소망이다. 교회 재정과 세금에 관한 실무를 돕기 위해 그동안 10회에 걸쳐 칼럼을 연재해 왔다. 또 오늘이 그 마지막회이다. 교회가 납부해야 할 세금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실무자로서 주의 깊게 보아할 점이 무엇일까? 우리나라 세법은 국세(14개)와 지방세(11개)로 총 25개 세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동안의 내용을 총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득세와 법인세는 일정 과세기간 발생한 소득에 대해 납부하는 세금으로, 현행세법은 예배 중 성도들이 낸 헌금이나 헌물에 대해서는 부과하지 않는다. 단 이 경우 교회는 국세기본법(제13조)에 따라 설립시 관할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고유번호등록증을 교부받아야 하며, 교회가 고유목적을 넘어 수익사업을 할 경우 법인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둘째, 부가가치세(VAT)는 재화나 용역이 생산・제공되는 단계에서 창출된 부가가치에 대해 부과하는 소비과세로서, 그 거래액의 10%를 납부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비영리법인으로 고유목적을 위해 재화를 취득한 경우 매입세액의 부가가치세를 납부해야 하며, 공급 매출세액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됨으로 환급이 적용되지 않는다. 셋째, 취득세는 자산을 매매 교환 증여 등으로 취득한 경우 납부하는 지방세로, 표준세율이 주택은 1~3%, 주택외부동산은 2.3~4%, 기타 2~7%이다. 그리고 교회는 고유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토지와 건물부동산 등은 취득세가 면제된다. 단 이 경우에도 해당자산은 3년 이상 고유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하며, 만약 다른 용도로 사용을 변경하는 경우 소급하여 취득세가 부과될 수 있다.
넷째, 종합부동산세는 주택 및 토지 등 부동산의 공시가격의 합계액이 일정기준을 초과하는 경우 부과하는 세금으로, 교회가 소유하는 예배당과 담임목사 주택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면제된다. 그리고 부목사 사택과 선교관은 교회 재산으로 간주되어 재산세와 같은 개념으로 종합부동산세의 납부가 요구될 수 있으나, 종부세법 8조2항2호, 시행령4조에 따르면 사원용주택(국민주택규모이하 또는 공시가격 3억원이하)은 종합부동산 합산에서 제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다섯째, 재산세는 토지, 건축물, 주택 등 부동산 등의 소유에 대해 부과하는 지방세로서, 취득세 및 법인세와 동일하게 고유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보유하는 경우 면세가 된다. 단 사택의 경우 담임목사가 거주하는 사택(1건)은 재산세가 면세되나, 기타 부목사 등의 사택은 과세 대상이 되고, 교회 사찰 관리인이 부속 건물에서 관리를 위해 거주하는 경우도 고유목적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어 재산세가 부과될 수 있다. 여섯째, 자동차세는 자동차의 소유와 주행에 대해 과세하는 지방세로서, 교회가 차량을 구입하면 취득세와 등록세, 부가가치세를 납부한다. 또 소유 운행시에는 자동차세와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마지막 일곱째는 종교인소득 과세로,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종사자의 소득에 대해 기타소득과 근로소득 중 선택하여 세금을 납부하고, 원천징수와 연말정산을 적용하는 제도이다. 종교인소득이 전산화되며, 교회 목회자도 소득이 적은 경우 근로·자녀장려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4대보험(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도 보다 투명하게 적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교회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또한 선한 행실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충전소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세금 또한 국가적 질서를 존중하여 모범이 되어 납부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국가는 교회 고유의 목적활동에 대해 지금까지 그 공익적 기능을 인정하여 왔듯이, 앞으로도 순기능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신앙의 자유와 활동을 존중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를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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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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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부활을 바라보는 네 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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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제임스 띠소가 1894년에 그린 “우리의 구원자는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십자가를 둘러싼 여러 군상들이 참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네 가지 시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십자가형을 집행하고 있는 로마 병정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당하게 서서 예수님의 죽음에 이들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 군주의 명령대로 아무 생각 없이 정해진 군법대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 뿐이죠. 이들은 타인에 대한 감정 자체가 없습니다. 다만 일일뿐이니까요. 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지만 그 열심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 가는지, 아파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과 율법사들 같은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을 타고 보란 듯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 있습니다. 마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겸손하신 왕 예수님을 업신여기듯이 말입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이 땅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성공에만 집착하는 자들이죠.
세 번째로는 십자가 사건을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지나가는 구경꾼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서 크게 힘을 써서 저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또 얘기는 달라지겠죠. 그러나 패배자 예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앙에 절망에 휩싸인 십자가 밑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아마 이들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또 한 사람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자 예수님에게는 이모가 되는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 이곳에는 이렇듯 네 가지의 시선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이 중에 세 가지는 교회 밖 사람들의 시선이고 한 가지만 교회를 다니는 우리의 시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 안에 이 네 가지 시선은 모두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로마 병정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이 말하는 가치와 법칙에만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던 유대 종교지도들처럼 자신의 지위와 신앙연수를 자랑하며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아니면 지나가는 구경꾼들처럼 교회 출석은 그런대로 하고 성경공부 제자훈련과 각종 교회 프로그램엔 열심이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주변인의 심정으로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온전히 절망하는 여인들 옆에 서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사랑하며 믿었던 주님이 죽었을 때 여인들이 절망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끝없는 비참한 절망 다음에 부활의 소식이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칠흑 같은 죽음과 절망 속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신다는 것, 절망의 아픔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여인들의 이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네 명 모두 이름이 ‘마리아’라는 점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를 대표하는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쓰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쓴 맛을 단단히 본 여인의 이름이죠.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백성들에게도 고난과 절망의 순간은 찾아옵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고통과 아픔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아프게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밑에서 비통에 잠긴, 십자가 밑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흐느끼던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절망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지막 목적지는 절망과 패망의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의 나락 한 가운데 숨겨진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절망하던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보면 마리아라는 이름에는 ‘쓰다’라는 의미 외에도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반란’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존의 슬픔과 실패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는 반란의 여인이 바로 마리아인 것입니다. 사람의 가능성과 기대가 끊어진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부활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음세대 사역도 코로나19 이후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벌써부터 여름행사를 축소해서 진행한다는 교회들, 교회학교가 사라져서 여름행사가 없어졌다는 교회들이 속출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고통가운데 부활의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의 반란을 일으킵시다. 이 부활절에 우리 주님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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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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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영광스럽게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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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92년도부터 청소년사역을 하다가 2014년도부터는 교회사역보다는 교회밖 학교밖 청소년들, 다른 말로 비행청소년들. 특히 죄를 지어 소년법정에 서게 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과정을 돕기도 하고, 재판 후에 돌아갈 가정이 없는 아이들의 재비행방지를 위해 대신 부모역할을 하면서 회복을 돕는 청소년회복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약 10년 동안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처분받아 온 아이들의 경우 검정고시를 합격하거나 생활이 달라지거나 눈에 보이는 변화들로 힘이 들어도 감사한 일들이 있어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되었습니다.
이 아들 데리고 사역하면서 참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자기 부모도 안 돌보고 포기한 아이들 데리고 사는데 안 힘듭니까?” “왜 안 힘들겠습니까?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힘들긴 한데 참 행복하게 사역합니다’라고 공손하게 은혜스럽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 수고많죠. 이 아이들 좀 변합니까?” ‘안 변합니다. 계속 사기치고 속이고 속을 확 뒤집어 놓습니다. 어른들은 평생을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변하든가요? 집사님은 장로님은 제자훈련도 받는데 좀 변했습니까?’라고 말하려다가 ‘워낙 방치되었던 아이들이라 시간이 좀 걸리지요. 그래도 계속 품어줘야죠’라고 아주 목사답게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처분받아 온 아이들의 경우 검정고시를 합격하거나 생활이 달라지거나 눈에 보이는 변화들로 힘이 들어도 감사한 일들이 있어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주 더 힘든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이나 일러줘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다그치면 ‘까먹었는데요. 몰랐는데요’라는 말로 사람의 속을 확 뒤집어 놓습니다. 감동스런 뮤지컬을 관람하고 돼지갈비를 실컷 잘 배불리 먹고 사라져버렸습니다. 비록 사고쳐서 재판 받아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함께 전국 곳곳을 여행 다니고 좋은 프로그램을 경험하면 좀 괜찮은 대우를 받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제 자녀들을 데리고도 이렇게 문화행사나 시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만 둥지의 아이들에게는 그 이상의 기회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땅히 더 잘 생활해야죠. 그런데 이탈을 반복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챙겨줬는데 이런 배신을 당해야 합니까?’ 이런 것이 영광스러울까요? 아픈 아이가 회복되고 웃음을 찾고 성공하고 대학가고 하는 성공스토리가 좀 생겨야 영광스러운 것 아닙니까? 잘해주고 원망듣는게 영광스럽습니까?
저는 너무도 절망스럽고 무기력해지고 헛 일을 하는 건가라는 무력감에 참 힘들었습니다. 하나님! 이게 영광스럽습니까? 저는 주님이 걸으신 배신의 길을 안 걸으면 안될까요? 고생은 이제 그만하고 낙을 누리면서 살면 안될까요? 배신은 그만 당하고 칭찬과 인사 좀 받으면 안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안된다!”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도다”
제자 가룟 유다가 배신하여 나간 후에 주님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제자의 손에 팔려 십자가 지고 죽음 당해야 하는 그 상황을 다 아시면서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절망스럽고 수치스러운 상황을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배신하는 자를 사랑하면서 배신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팔아치우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는 헌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나보다 낮은 자를 위해 겸손히 자기자신을 낮추어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영광은 네가 아무 이유없이 오해받고 배신당하는거란다. 네가 둥지 아이들을 선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로 갚음받고 팔려나가는 그런 일을 위해서란다. 순종해라. 그게 바로 하늘의 영광이란다. 그게 바로 걸어야 할 영광의 길이란다. 내가 걸었던 그 길을 너도 걸어야 한다”
지금도 이탈하여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 속에 주님의 영광의 길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을 나도 영광스럽게 걸어가렵니다. 제게 은혜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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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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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나침반] 온 세대가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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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놀라운 복음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와 연합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십자가’, ‘그 부활’이 아니라 ‘나의 십자가’, ‘나의 부활’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나의 옛사람이 함께 죽고, 예수님이 살아날 때에 나도 새사람으로 함께 살아나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강력한 부활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죄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가 되고, 오직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부활절기를 맞이하며, 이 놀라운 복음을 부모세대와 자녀세대에게 어떻게 전하십니까? 아마도 부모세대는 본당에서, 자녀세대는 교육부서에서 예배드리고, 절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이 복음의 본질에 부합한 것일까요? 이러한 모습은 결코 복음적이지 않으며 교회의 본질과도 맞지 않습니다.
이번 부활주일에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분리하지 말고, 온 세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함께 받으며, 그 놀라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서는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온 세대 간에 어떤 차별과 편견, 그리고 조금의 문턱도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사하는 ‘하나됨’을 경험하는 부활절 예배와 프로그램을 준비해보십시오. 온 세대가 평생 동안 잊지 못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부활절이 될 것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 하는 부활절 예배를 드린 후에, 그 자리에서 온 세대가 함께 부활의 복음을 경험할 수 있는 ‘복음캡슐’놀이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 사전준비: 에그 캡슐을 한 명의 성도가 하나의 캡슐을 받을 수 있는 수량으로 준비합니다. 각각의 캡슐 안에 초콜릿(또는 검은색하트), 십자가 목걸이, 왕관패치 중 하나를 넣습니다. 이때 1/4 분량의 캡슐에는 아무 내용물도 넣지 않고 비워둡니다. 모두 준비한 후에, 커다란 상자 안에 넣습니다.
■ 진행방법
① 예배를 드린 후, 모든 성도에게 에그 캡슐 하나씩 나누어줍니다.
② 진행자는 각각의 캡슐에 담긴 내용물이 의미하는 복음의 의미를 순서대로 설명합니다. 성도들은 설명을 들은 후에, 모두 일어서서 자신의 캡슐에 해당하는 복음의 말을 돌아다니면서 전합니다.
[초콜릿 캡슐]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십자가 목걸이 캡슐]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빈 캡슐] “예수님은 3일 후에 부활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왕관 캡슐]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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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