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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바로 행동하라, 이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하버드대 출신의 특강
    계획을 아무리 거창하게 세울지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하는 것만도 못하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계획을 실천에 옮겨야 훨씬 가치를 낼 수 있다. 뜻을 이루지 못해 실의에 빠진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매주 복권에 당첨돼 일확천금을 얻는 행운을 꿈꾸며 살았다. 그러면서 그는 2~3일에 한번씩 교회로 가 기도를 드렸다. “주님! 주님을 향한 저의 마음이 이리 독실하고 절실하니 부디 제가 복권에 당첨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하지만 이 일이 반복했지만 그는 한번도 복권에 당첨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젊은이는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고, 기도를 할 때도 불만이 먼저 튀어 나왔다. “주님! 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때, 낮고 힘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동안 너의 기도를 모두 듣고 있었느니라. 그러나 적어도 네가 먼저 복권을 사야 하지 않겠느냐!” 램 차란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MBA와 DBA 학위를 보유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휼륭한 교수이다. 그는 지금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모든 이상이 전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고 목표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행동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계획과 결과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버드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애초에 정확한 이상 또는 목표를 정했고 그들이 바로 이를 위한 행동에 나서고 꾸준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자카르타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나의 꿈:나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제목으로 글짓기를 시키고 있다. 학생들 중에는 과학자가 꿈인 아이도 있고, 선생님이나 의사를 꿈꾸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한 남학생은 커서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썼다. 남학생의 장래희망을 들은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남학생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역시 그가 그저 말해본 것이라고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남학생은 그냥 한번 해 본 말이 아니었다. 그 후 그 남학생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해 나중에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가정 형편이 평범한 그는 경선 비용을 얻기 위해 아파트를 담보로 잡았고 열심히 몇 주를 돌며 기업과 대학 등에서 자신의 관점을 널리 알렸다. 결국 그는 미국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되어 그의 꿈을 실현했다. 바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성공 스토리다. 행동은 빈 말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에 옮겨라”, 이것이 중요한 실천이다. 누구나 성공을 갈망한다. 하지만 탁상공론만 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제대로 실천에 옮겨라!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계획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 천개를 생각해내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이에 대해 미국 ABB의 회장 퍼시 바네빅은 “성공의 5퍼센트는 전락이고 95퍼센트는 행동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버드대에서 자주 언급되는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앤서니 자나가 하버드예술단의 뮤지컬 배우로 활동할 당시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 하곤 했다. “대학 졸업 후 저는 여행을 떠날 거예요. 그런 다음 뉴욕 브로드웨이로 가서 훌륭한 주연배우가 될 것입니다” 이튿날, 지나의 지도교수가 그녀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자네에게 여행 후 브로드웨이를 가는 것과 졸업 후 브로드웨이에 가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나?” 생각해 보니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낀 그녀는 1개월 후 브로드웨이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교수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었다. “필요한 생활 용품은 브로드웨이에 가서도 전부 살 수 있는데 다음 주에 가는 것과 오늘 가는 건 무슨 차이가 있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교수가 말했다. “브로드웨이의 제작자가 고전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전국에서 수백 명의 예술가가 주연 배역을 따내려고 오디션을 본다더라고. 내가 이미 자네 대신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해 두었으니 어서 꿈을 실현하러 움직이게.” 이튿날 그녀는 세계 최고 예술의 전당, 브로드웨이로 날아가 수백대 일의 힘겨운 오디션을 치렀다. 그리고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인생에서의 첫 빨간 토슈즈를 신었다. 그 후 그녀는 조금씩 브로드웨이에서 젊고 명성 높은 연기자 중 한명이 되어 갔다. 자신의 성공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성공의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한 덕분이었어요.” 바로 지금부터 자신을 바꿔라. 말로만 하지 말고 지금 바로 행동에 옮겨라.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신만의 성과를 거두고 하버드대 출신의 엘리트들처럼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은 책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쑤린 지음, 원녕경 옮김)에서 나온다. 20만부 팔린 이 책은 ‘무엇이 하버드대학을 글로벌 인재의 요람으로 만들었나?’에서 얻은 영감으로 이 글을 썼다. 쑤린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세계 500대 기업의 관리 자문 및 기업 훈련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쑤린이 개설한 EQ(감성지수)관리 과정이 뉴욕 · 워싱턴 ·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데, 마이크로소프트, 지멘스, 구글, 시스코시스템스 등 세계적인 기업의 고위층 임원을 비롯하여 이미 6만 명이 넘는 기업인들이 수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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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3
  • [서임중칼럼] 오늘 하루도 나는 살아 있다
    참으로 세월이 유수(流水)같다. 엊그제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 같은데 벌써 2월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매섭게 추운 것이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권의 찬바람이 국민들 가슴을 더욱 시리게 했고 국제정세와 맞물려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의 정책부재로 인한 난방비의 인상이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서민들의 버거운 삶은 고드름이 되었다. 매일처럼 들려오는 여의도 1번지의 그 잘난 분들의 언행은 우리의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앗아가는 올 겨울 한파에 혹한의 부채질을 더한다. 내 마음도 그랬다. 삼성병원 암병동을 출입하는 것이 3년째다. 그곳을 출입할 때에도 언제나처럼 입으로는 평행감축을 노래하지만 솔직히 내가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들은 참 시린 날들이다. 그럼에도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은 엎드림의 시간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이 큰 까닭이리라. 그래서인가, 감사한 것은 3개월마다 출입하던 검진 간격이 6개월로 늦춰진 것이다. 암병동 복도를 스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본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아픈 사람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 만큼의 미소만 머금고 걷는다.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와 진료실을 출입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어느 날 40대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초췌한 얼굴로 다가와 곁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곁에 앉으며 “몇 차례 지나면서 뵈었는데 어르신은 얼굴에 늘 미소가 있는 걸로 보아 환자는 아닌 것 같고 다른 누가 아프신가요?” 하고 묻는다. 아내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목사님인데 뇌신경 암으로 진료 받으러 다니고 있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 말을 듣자 흠칫 놀라며 “어떡해...” 한마디를 삼키듯 내뱉는 그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맺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의 아픈 이야기를 듣자 눈시울이 젖는 사람이니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분을 내 곁에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에 가만히 휴대폰을 열어 성경 한 구절을 보여주면서 직접 읽으라고 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22:17).”는 말씀이다. 나는 목사로서 매일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내 마음의 즐거움을 찾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킨다고 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며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만치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님이 그분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김희목 님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잠에서 깨어나니 당신이 있어 기쁩니다. 아침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요즈음 내가 자주 읊조리는 시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당신이 있어 기쁨’의 의미는 내게 있어 아내에게만 한정하였는데 요즘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아침 태양의 찬란히 빛남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을 깨닫고 느끼고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서 멈추어 뒤를 돌아보니 솔로몬의 고백이 묵상된다. 앞을 보니 바울사도의 걸음이 어렴풋이 보인다. 살아있으니 앞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통감(通鑑)의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지나온 역사를 거울로 볼 수 있는 혜안(慧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靈眼)과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주님처럼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삶이 탐진치(貪瞋痴)가 아닌 너의 유익을 위한 나의 삶이 되리라. 아들 같은 목사님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사임종용을 받았다는데 그 이유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냥 싫으니 사임하라는 것이란다. 아는 곳도 갈 곳도 없어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기한은 다가오니 목회는 고사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있단다. 나는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묻지를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커피 머신으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내려왔다. 마시지 않는 차를 앞에 두고 침묵만 흐른다. 그러다가 내가 살아온 날들, 내가 오늘도 살아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태복음 8:20절을 펴 놓고 같이 읽자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결국 그는 탁자 위에 엎디어 흐느꼈다. 바라보는 나도 소리 없이 울었다. 여기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무릎을 꿇은 아들 같은 목사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눈물이 흘러 목사의 머리에 떨어졌다. 기도를 끝내고 품에 안아주며 내가 한 말은 “이것까지 참으라.”였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렸을 때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2개월 후 그 목사를 그 교회에서 다른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 목사가 떠난 이후 촛대가 옮겨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머 한편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짐승을 지으실 때 사람을 위하여 일하게 하시며 또 수명도 정해 주셨다. 소를 만드시고 60년만 살아라 하시니 소는 30년만 살겠다고 했다. 개를 만드시고 수명을 30년을 명하셨는데 개는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원숭이를 만드시고 너도 30년만 살아라 하시니 개처럼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신 후 25년만 살아라 하셨다. 그러자 사람은 하나님께 소가 버린 30년, 개가 버린 15년,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자기에게 다 달라고 했다. 그래서 25세까지는 그냥 사람으로 살고, 그후 55세까지는 소처럼 일을 하며 살고, 그후 70세까지는 퇴직 후 개처럼 집 지킴이로 살고, 그후 85세까지는 손자들 앞에서 원숭이처럼 재롱을 떨면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유머일 뿐이지만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 될 수도 있는 수긍이 되는 유머가 아닌가.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읊조린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다. 오늘, 지금 이 하루도 나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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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성서연구] 마하나임
    야곱은 형님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좋게 말하면 축복을 사모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인간적 위계로 살아간 잘못된 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야곱이 복을 받은 것은 형님의 복을 가로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가 더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쟁취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일로 야곱은 형님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했고, 20년을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얻었고, 짐승 떼를 얻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형님 에서와 조우하는 일이었습니다. 20년 후 외삼촌의 집을 떠나 돌아올 때 그 짐은 점점 더 무거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을 가다가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사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천사>라고도 번역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본 것은 야곱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는 한둘이 아니었고,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이들을 본 후에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그 의미가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운 형님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으로 갈 때도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들판에서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은혜의 사다리를 내려보내시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내리면서 그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외삼촌의 집에서 무사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도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늘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로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두 군대>라는 뜻입니다. 마하나임은 군대, 진영을 의미하는 마하네의 쌍수로서 둘을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두 군대를 본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두 군대의 진영을 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고, 한 군대는 그의 앞을 인도하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뒤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을 알았을 때 라반은 분노했습니다. 그는 길을 재촉하여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야곱을 덮치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경고하셔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1장 24절을 보면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다말이 겁탈당한 일로 세겜 남자들을 죽인 후 야곱이 그곳을 도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셔서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셨던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불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를 막아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과거의 죄는 무섭습니다. 학교 폭력을 저지른 오래전 일 때문에 인생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를 씻어 다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뒤를 지키는 군대가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군대는 야곱의 앞을 인도하셨습니다. 무장 군인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의 마음의 분노를 녹이셨고, 에서와 야곱이 사랑으로 포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원수를 격파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길 소원합니다. 2023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두 군대가 앞뒤를 지키는 가운데 강건한 삶을 누리길 소원합니다. 주여, 저희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보호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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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시사칼럼] 감성을 장착한 인공지능, 인간을 능가할 것인가?
    얼마 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샘 올트먼(Sam 미스무)과 공동으로 설립한 <오픈 AI>에서 공개한 신제품(?) 하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로 정식 명칭은 “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줄여서 ‘챗GPT’)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잡담하는 로봇’(챗봇, chat-bot) 혹은 ‘생성 AI’ 즉 생성 능력이 있는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말입니다. 작년 12월 1일 공개된 이후 고작 두 달 만에 사용자가 천만 명을 돌파하면서 구글(Google)의 자리마저 위협하지 않을까 할 정도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챗봇”은 질문이나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자료나 지식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기존의 검색엔진과 달리, 이름의 뜻 그대로 ‘생성적 사전 학습 수행’ 능력을 발휘하여 관련된 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은 물론이요 답안지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준마저 능가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의 맥 혁신경영연구소는 최근 ‘챗GPT가 와튼 MBA를 수료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챗GPT가 필수 교과목인 ‘운영관리’ 기말시험에 응시하여 ‘B-’에서 ‘B’ 학점 사이를 받았다고 알려왔습니다. 상당히 준수한 성적입니다. 경영 실력이 이 정도라면 로스쿨은 어떨까요? 비슷한 시기의 N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챗GPT는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치러 진 로스쿨시험마저 거뜬히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렵기로 소문난 의사 시험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의료 스타트업인 앤서블헬스 연구진은 챗GPT가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에 응시한 결과 모든 시험에서 50% 이상의 정확도를 보이며 합격가능한 점수를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이상 매일경제 2023월 1월 26일 기사에서 발췌). 물론 아직까지는 언어의 문제점이라든지 여러 가지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한 모델은 ‘GPT-3.5’ 버전으로서, 향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GPT-4.0’가 출시된다고 합니다. 286에서 시작했던 컴퓨터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 컴퓨터와 비교할 수도 없는 인공지능이니, 앞으로 어떻게 얼마만큼 진화할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장은수는 한 칼럼(챗GPT와 창의성)에서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프레히트의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열린책들 펴냄)의 한 대목을 소개하는데, 인공지능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대화 잘하고, 공감 잘하고, 자주 고마움을 표하고, 어려울 때 흔쾌히 도우라”는 식의 다소 지루하게 들리는 답을 내놓았다고 하면서, “틀리지는 않지만 흥미롭지도 않다. 사랑을 잘하려면 무수히 변하는 상황에서 연인의 감정과 기분, 생각과 뜻을 살펴 그때그때 눈치껏 잘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피곤하며, 진정한 모든 관계는 사적이다.”라고 썼습니다. 로고스(logos)는 몰라도 인간적인 파토스(pathos)는 어림도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종교적인 분야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역시 편집자 발 기사에서 “챗봇은 연구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며, 웅변까지도 할 수 있겠지만, 설교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러셀 무어, 1월 26일). 마음은 물론 영성은 절대로 갖출 수 없을 거라는 확신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떨까요? 지난 신년 첫 날 뉴욕주 햄튼 유대교회당에서 조시 프랭클린이라는 랍비가 메시지를 전한 후 감동을 받았다는 청중들에게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챗봇이 작성한 설교문을 읽었노라고 밝혀서 충격을 선사한 바 있습니다. 최근 챗봇이 썼다는 “선임장로님의 장례식 설교문”은 어떻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 교회와 지역사회에 많은 것을 바친 사랑하는 선임장로님의 삶과 유산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큰 손실이지만 그가 우리 모두에게 미친 영향을 기억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그를 기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교회 건축에 헌신했고, 사람들이 예배와 공동체에서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했습니다. 그의 친절과 관대함, 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최승현). 솔직히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수자보호와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지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무분별한 조롱과 악의적인 댓글 그리고 ‘카더라’ 통신과 ‘아니면 말고’ 식의 논설이 난무하는 인간의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는 챗봇이 쳐다보지도 못할 그런 지경에 있다고 우리는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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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교회와세금] 종교인소득 과세의 실무적 영향
    2018년부터 시행된 종교인 과세 소득세법령이 적용된 지 5년이 지났다. 종교인소득 과세는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종사자의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기타소득과 근로소득 중 선택하여 세금을 납부하고, 연말정산을 통해 부족 부분은 추가 납부하거나 환급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또 이로서 종교인소득이 투명하게 전산화되며 종교단체나 종교인이 부담해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이 달라지고, 근로가족 장려금 수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목회자 소득에 대한 과세가 법률로 정해짐에 따라 교회가 부담해야 할 사례비와 급여항목 체계가 달라지고, 목회자의 보험료와 국민연금, 근로가족장려금 등 수혜금액에도 변화가 생겨난 셈이다. 교회와 세금, 오늘은 제9회 칼럼으로 종교인소득 과세가 교회의 실무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다. 또한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인소득은 소득세법상 “기타소득”으로 분류하고, 원천징수를 하거나 과세표준확정신고를 하는 경우 해당소득을 “근로소득”으로 선택할 수 있다(소득세법 제21조3항). 과세대상 소득은 종교활동과 관련하여 받은 생활비, 상여금, 격려금 등 매월 또는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수당 등을 포함하며, 비과세소득을 차감한다. 비과세소득은 과세대상이 되지 않는 항목으로 학자금(본인), 식사(월10만원 이하), 실비변상적 성질 지급액(일직료, 여비 등 20만원 이하), 출산보육수당(10만원 이하), 사택제공이익 등이 포함된다. 과세표준은 과세기간에 받은 지급액에서 비과세소득과 필요경비 또는 근로소득공제, 소득공제, 세액을 차감하여 계산한다. 둘째, 종교인소득 과세 납부와 관련하며 다음과 같이 원천징수세액을 계산하고 신고한다. ①소득지급액- ②필요경비 = ③소득금액 - ④기본공제 - ⑤연금소득공제 = ⑥과세표준 × 세율(종교인소득원천징수세율 20%) = ⑦산출세액 - ⑧세액공제* = ⑨결정세액 ÷ 12개월 *세액공제: 총지급액 7천만 원 이하인자는 총지급액의 2.3%(초과자는 정액 161만원)+산출세액의 10%(90만 원 한도)=종교인이 일반인보다 기부금 등의 지출액이 높은 수준을 감안하여 산정 셋째, 종교인소득이 투명하게 신고되며, 교회 목회자도 근로·자녀장려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근로장려금은 근로소득이 적은 경우 이를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부부합산 총소득이 단독가구 2천만원, 홀벌이 가구 3천만원, 맞벌이 가구 3600만원 미만이며, 가구원 전원의 재산합계액이 2억원 미만의 경우 신청이 가능하다 (조세특례제한법 제100조). 자녀장려금은 저소득 가구의 자녀양육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것으로, 18세 미만 부양자녀가 있고, 부부합산 총급여액이 4000만원 미만인 경우 자녀 1명당 최대 7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넷째, 종교인소득이 전산화되며, 4대보험(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납부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4대보험은 국가의 책임하에 질병, 노령, 실업 등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일정 이상의 소득 보장을 위하여 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기타소득의 경우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근로소득의 경우 4개 모두를 납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건강보험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보수월액에 6.46%의 건강보험료율을 곱하여 산정하고, 후자는 추가로 주택, 차량 등 재산을 반영하여 산출한다. 국민연금은 가입자의 기준소득월액에 연금보험료 9%(교회 부담 4.5%, 본인 부담 4.5%)를 곱하여 산출된다. 아울러 퇴직연금 지급을 의해 금융기관에 예치하는 경우, 퇴직기여제도를 선택해 퇴직금 운용에 대한 리스크를 종교인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 교회는 지출을 비용으로 처리하면 되나, 퇴직급여제도를 선택해 운용 리스크를 교회가 부담하는 경우 퇴직급여부채와 이를 위해 적립한 퇴직연금자산을 관리하고 회계장부인 재무제표에 표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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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은혜의말씀] 서머나교회(계2:8~11)
    서머나란 ‘몰약’이란 뜻인데, 이곳은 향료 수출지로 유명한 무역 도시였습니다. 또, 오래전부터 로마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어 로마로부터 온갖 혜택을 누리며 부유하게 살던 도시였습니다. 서머나에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은 교회입니다. 자, 이제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8절) 우리 예수님은 태초에도 계셨으며 역사의 마지막에도 계셔서, 우리 인생들의 걸음을 주관하며 다스리시는 주권자시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영원토록 살아계신 생명의 주이십니다. 두 번째, 서머나 교회를 향한 칭찬의 말씀입니다.(9절) 서머나는 예로부터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도시였습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를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또, 황제 숭배가 모든 사회의 각 분야에 스며들어, 황제 숭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장사를 하거나 직업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서머나 교인들은 심한 핍박뿐만 아니라, 옥에 갇히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너무나 어려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같은 동족의 비방이었습니다. 전통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 배척하고, 박해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유대인들 때문에 자기들이 누리는 지위와 혜택을 빼앗길까봐 위기의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마나 교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한 죄 때문에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생명을 빼앗겼습니다.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서머나 교회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안다. 내가 너의 환난과 궁핍을 다 안다. 그러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보시는 것은 물질적인 부요가 아니라 금보다 귀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내면을,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통장 잔고로 자신의 부요함을 자랑할지 몰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부요함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요, 네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고후 6:10) 여러분, 코로나로 경제적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믿음만은 부유해야 합니다. 진짜 궁핍은 물질의 궁핍이 아니라, 영적인 궁핍이며 말씀의 궁핍이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해도, 오직 주님만 섬겼던 위대한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믿음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두려워말라 네가 이 상황을 다 알고 있고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오히려 죽도록 충성해라” ‘충(忠)’이란 한자를 보면 ‘가운데[中] 마음[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옛말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이라 했습니다.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축복이 있습니다.(10,11절) ‘생명의 관’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승리자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 승리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의 약속을 주십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육신의 사망 후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 불과 유황으로 타는 구덩이에 들어가 영원히 당하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가서, 하나님 주시는 모든 영광을 유업을 받는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직 주님께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천국의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하는 여러분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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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다원주의를 넘어 예수님을 전합시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나 다음세대가 “왜 예수님만 믿어야 해요?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고 여러 신앙들이 있는데 왜 예수님만 우리를 구원하시죠?”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원주의의 도전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란 예수님만 구세주가 아니라 어느 종교나 어느 대상이나 하나님이 될 수 있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다원주의는 신은 마치 산 정상에 있는 것과 같은데 인간이 어떤 길로든 올라가기만 하면 결국에는 다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다르지만 결국은 신에게 다다를 수 있으니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라고 하는 게 다원주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다원주의 논리에서는 누구를 믿느냐 하는 신앙의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중요하지 않고 도리어 믿는 인간의 열심히 중요해집니다. 얼마나 열심히 믿냐, 얼마나 열심히 산에 올라가느냐, 얼마나 열심히 정성을 드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분들을 여러분들 아시잖습니까?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그 새벽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서 그 물을 뜨고 그 깨끗한 물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하는데 그 기도를 누가 듣는지를 모릅니다. 그걸 누구한테 비는 겁니까? 달님한테 비는 겁니까? 별님입니까? 구름입니까? 하늘이 듣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 기도를 열심히 드립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직장 다니는 분들 보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개업하면서 돼지머리 놓고 그 코에 돈을 꽂아 넣으면서 고사를 지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 정성을 누가 받는 건지 아냐고 물어보셨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정성은 갸륵하지만, 그 정성이 누구에게 가는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위안을 받는 겁니다. “난 열심히는 했어. 나는 그냥 최선을 다했어. 정성껏 했어. 그러니까 내가 정성을 드렸으니까 좋은 결과가 날 거야.” 그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다원주의는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기독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모든 다원주의를 부숴버립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 모든 다원주의, 모든 실용주의를 부숴버리는 게 기독교입니다. 다원주의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만약에 산 위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이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올라가면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정상의 자리를 박차고 우리에게 내려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높은 곳에 가만히 앉아서 “야! 올라와 봐! 실력껏 올라와! 올라오는 사람만 내가 만날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갈 능력이 없는 우리, 하나님을 만날 능력이 없는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뒤집어엎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열심히 믿어라! 잘 믿어라! 최선을 다해라! 너희가 잘하면 하나님이 너를 만나 줄 수도 있다. 천국 갈지도 몰라!”그게 신앙이었다면 이제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끌어안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시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과 정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고 누구를 부르러 찾아가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가 중요해집니다. 그분은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 이름난 사람만 품어 안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찾아와서 만나 주십니까? 주님은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여기에 대한 기준을 마가복음 2장 17절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2:1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의사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병든 자에게라야.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병이 들어 죽게 생겼는데 이게 난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겁니다. 난 어떻게 이 병을 치유할 수도 없고 이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의사에게 목을 메고 매일매일 찾아와서 나 좀 고쳐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 그 미천한 사람, 그 막막한 사람, 그 병든 자, 그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쓸 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영혼의 치료자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다음세대가 믿고 따를 진리가 되십니다. 우리, 다원주의의 도전을 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모와 교사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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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2-10
  • [다음세대칼럼] 평범하게 살아봤어야 평범하게 살지
    희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누가 책임지고 키울 수 없어 보육원에 맡겨졌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보육원 생활에 답답함을 느껴 순간적으로 가출하였는데 그때 나쁜 오빠들을 만나 성폭행과 성매매로까지 이어져 한 번의 가출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희진이는 성매매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제가 이 사건의 국선보조인이 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줄곤 자신의 비행을 부인하던 희진이가 재판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제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 이제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요. 저 사실은 가출 기간 동안 오빠들이 시켜서 성매매를 했었어요. 오빠들이 잡히면 안된다며 울산, 대전, 인천, 수원까지 데리고 다니며 시켰어요” “이제 왜 사실을 말하는거니?” “사실대로 말하면 소년원 갈까봐 겁나서 거짓말 한거예요. 처분을 잘 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데, 이젠 처분이 어찌 되든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받고 싶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생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잡히게 되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털어놓은 희진이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동안 성매매를 너무 많이 해서 횟수도 모르겠어요. 어떤 오빠는 하루 2~3회 정도 시켰고, 또 다른 오빠는 4~5회 정도 시켰어요. 가출한 7개월 중 5~6개월 정도 그렇게 성매매를 한 것 같아요” “가출한 후 도움받기 위해 갈 곳도 찾아갈 사람이 없었어요. 어떤 날은 정말 하기 싫어서 아무리 사정을 해도 계속 시켰어요. 딱 하루 제 생일날만이라도 안하게 해달라고 부탁부탁하여 겨우 그 날은 하지 않았어요”라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 이제부터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교복 입고 학교 다니고 싶어요”라며 희진이는 울부짖었습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아픔과 고통을 누르느라 끄억끄억거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희진이는 힘들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저 이제 10호 소년원 보내도 갈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 그동안 잘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라는 희진이의 인사를 뒤로 하고 저는 소년원의 철문을 나왔습니다. 돌아와서 판사님에게 제출할 의견서를 정리하는 내내 희진이의 ‘이제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울부짖던 그 울음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렸습니다. 드디어 재판 날. 판사님은 희진이의 진심어린 반성하는 태도를 보시고 둥지센터에서 지내도록 선처해 주셨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판결이었습니다. 소년원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희진이도 저와 함께 둥지에서 지낼 수 있다는 말에 너무 좋아 몇 번이고 판사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희진이는 둥지에서 지내면서 중졸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희진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2개월 정도 일한 월급을 들고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몇 번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희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희진아! 너 왜 이러니?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잖아? 교복 입고 학교 가고 싶어했잖아?” 한참 뒤에 답장이 왔습니다. 씨X. 평범하게 살아봤어야 내가 평범하게 살지. 평범하게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 뭘 더 원하는거야? 그렇게 희진이는 둥지를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보호관찰위반으로 구인장이 발부된 상태에 서울에서 불심검문으로 붙잡혀 재판을 받고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10호 처분을 받아 소년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때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아껴주시고 믿어주시고 보살펴 주셨는데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게 고작 이것 뿐이라서 죄송해요. 감사해요. 도와주셔서. 미안해요. 이런 모습 밖에 보여드리지 못해서. .... 도와주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딸이라 불러주시고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 많이 못나고 부족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고 또 주고 또 주셔서 감사해요. 한 없이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보듬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감사할게 많은데 어리석은 모습만 보여드렸네요. 후회. 당연히 되죠. 제가 늘 그랬죠.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구요. 바로 이거였네요. 제가 갚지도 용서받지도 못할 잘못. 기회는 여러 번 있었고 제 발로 그 기회들을 차버렸네요. 제가 왜 그랬던 걸까요. 도대체 왜. 어떻게 해야 저를 멈출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저는 행복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행복들을 피해 도망치려고만 할까요. 왜 저는 늘 이런 식일까요. 모르겠어요. 저도 저를 모르겠어요. 잘하려고 해봐도 그게 잘 안되요. 왜 안될까요.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서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목말라하고 필요해 했는데 너무 오랜 기간 마르고 굳어 갈라져서 걷잡을 수 없을만큼 작아지고 작아졌어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행복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건지. 사랑과 관심을 어디에 담아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늘 힘들었던게 이거일까요.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나도 나를 모르겠어요.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나오는데 무엇을 위해 우는 것까요.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린걸까요. 견딜 수가 없어 미치겠어요. 정말 진짜 너무 힘들어요. 저는 왜 구제불능일까요. 이렇게 못되쳐 먹은 걸까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을까요. 뭐가 필요한건지 무슨 방법을 써야 하는지 하나도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너무 아프고 망가지고 힘들어서 정말 죽고만 싶어요.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요.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아픈데 아무리 생각하고 쥐어짜 내봐도 모르겠어요. 정말 죽고 싶을만큼 아파요 마음이. 원래 이렇게 쓰려던게 아니었는데 말이 변해버렸네요. 저는 감사하다고 할랬어요. 감사하다고. 너무 고마웠어요. 진심이예요. 아빠. 사랑해요. 딸 희진이가” 평범하게 산다는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김종환이라는 가수가 그의 딸 리아킴에게 만들어 준 노래 가사 한 절 한 절이 와 닿습니다.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 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그대가 아플 때도 약속한대로 그대 곁에 남아서 끝까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에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가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 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며 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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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신앙교육나침반]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신앙교육 프로그램 ‘All generation 성경놀이학교’
    2006년,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의 리처드 로스 교수는 이러한 예견을 했습니다. “교회는 세대 분리 교육을 위해 새 건물을 아주 잘 지을 것입니다. 건물의 외형적인 매력과 부서별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을 자신의 또래들과만 어울리게 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녀들을 축복하는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며, 청년들은 장년들과의 관계로 인해 얻게 되는 풍성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가족들은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견은 놀랍도록 정확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은 자신이 맡은 교회학교 부서의 사역을 성공시키기 위해 다양한 훈련과정과 프로그램을 준비합니다.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환경 등의 모든 면에서 세대 간의 분리가 정교하여 전문화될수록, 우리는 교회교육의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착각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처럼 세대 간의 분리를 추구하면서도 가정이 신앙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올해 귀 교회의 어린이, 청소년 부서의 사역비전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제자 양육’, ‘신앙고백의 회복’, ‘사랑의 공동체’, ‘믿음성장과 회복’, ‘섬김’을 비전으로 삼고 달려갈 것입니다. 어찌하면 다음세대를 잘 훈련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 세울지 고심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사역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세웁니다. 혹시 ‘부모와 자녀를 어떻게 함께 믿음의 양육을 경험하게 하는가?’, ‘부모를 통한 신앙전수를 활성화하기 위해, 부모들을 어떻게 훈련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비전에 넣고 있나요? 아마도 많은 경우에 이 내용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학교 부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신앙양육의 책임을 빼앗아가는 구조입니다. 부모들 역시 이러한 구조 안에서, 자녀의 영적발달에 대한 책임을 주일학교 사역자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신앙교육에 대한 일차적 책임자를 누구라고 정하셨을까요? 성경에 분명한 정답이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라기 4:6)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시편 78:5-6) 하나님이 지목하신 자녀의 신앙에 대한 일차적 책임자는 부모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음세대 사역자들의 사역의 방향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그들은 부모의 신앙전수가 활성화되도록 하는 방향을 사역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중등부에서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까?’만이 아닌, ‘이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어떻게 복음을 전수받게 할 수 있을까?’도 함께 고민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귀 교회에 부모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나요?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나요? 그렇다면.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정기적인 프로그램이 있나요? 그러한 리듬을 시급히 마련해야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복음의 대대로 수직전수는 곧 끊어질 것입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모든 세대가 복음을 놀이하며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프로그램, ‘All generation 성경놀이학교’가 있습니다. 향기나무가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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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교회분쟁 유발 원인 77%가 ‘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부설 교회문제상담소가 2월 1일 발표한 ‘2022년 교회 문제 상담 통계 보고서’에서 작년 총 102개 교회 159건의 상담이 진행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분쟁 사례를 살펴보면 목사(담임, 원로, 부목사)가 77%로 압도적이었고, 장로(당회)가 10%로 조사됐다. 이외 노회가 개입하면서 발생한 분쟁도 8%를 차지했으며, 반면 집사와 권사, 일반교인이 분쟁을 유발한 사례는 1%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개혁연대측은 “대면예배로 전환되면서 목사의 전횡과 이를 당회가 비호하는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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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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