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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현 목사]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동아시아 사람에게는 익숙한 선문답 같다. 깊이 들여다보면 아둔한 사람이 ‘퍽’ ‘확’ ‘쾅’ 깨치는 천둥 같은 가르침이지만, 설렁설렁 보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 같달까. 종잡기 어렵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골이 깊다. 어리석은 제자들과 지혜로운 예수 사이의 대화는 어리숙한 신자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좋은 교육이다. 우리 주님 말씀, 참, 맥락 없다, 제자들에게. 기껏 드실 양식 구하느라 온 동네 돌아다니며 탁발을 했건만, 스승이 한술 떠야 제자도 먹는데, 얌체처럼 혼자 드셨다는 건가, 뭔가. 드실 것이 있으면 나눠 먹어야지. 제자 수준에서는 알아먹지 못할 말씀만 하는 예수님이 멀면서도 오묘해 보인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론으로 풀면 되지 싶다. 인간이란 무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동물과 천사의 두 얼굴을 지녔다. 동물이란 본능, 욕망, 야수적 폭력과 악을 말하고, 천사는 동물적 제약을 뛰어넘은 인간, 곧 철학에서 말하는 성찰적 인간일 테고, 신학에서는 초월적 관점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이다.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와 타인을 보기, 그리고 사랑하기. 그러니까 여기서 양식은 제자들에게 동물적 차원, 예수에게는 천사적 맥락인 게다. 분명히 말하지만, 피곤해서 우물가 기대고 누운 예수에게 주린 배를 채울 양식이 필요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되고 만다. 몸이 없는 영은 없다. 영이 육이 되었고, 변화된 몸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풀 스토리에서 보면, 영과 육은 하나다. 말씀 없이 살 수 없고, 밥 없이도 못 산다. 인간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닌 것을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인간은 신(神)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이유를 소크라테스와 톨스토이는 ‘생각’에서 찾는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은 기계적, 산수적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행위를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본능적,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단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가른다. 바로 ‘의미’이다. ‘가치’라고 해도 된다. 먹기만 하고, 배만 부르면 끝인 것이 동물과 인간의 공통점이지만, 아니, 인간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먹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추구한다. 그것이 없으면 동물이 되고 만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동물이 자살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게 있다는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데, 하여간에 인간만 자살을 한다. 하긴, 대량 학살을 하는 것도 인간이지. 그것은 공허해서 그렇다. 살 이유와 의미를 모르면 죽음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살 이유와 의미를 찾으면 그걸 위해 죽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전에 도를 듣고 깨치기만 한다면,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신 말씀은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장삼이사의 희로애락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겠으며, 오병이어 표적을 일으킬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 없이는, 그러니까 육체적 주림을 해결해야 영적인 것도 찾는다. 아니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동시적이라고 해도 되고. 우리 사회의 한켠에는 여전히 먹을 것의 문제로 고달픈 이들이 많다. 다른 한쪽에는 의미의 부재로 인한 영적 공허와 허기로 방황하고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이들이 많다. 앞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마가복음의 이적 또는 요한복음의 표적이 필요하다. 뒤의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필요하다. 그걸 먹지 못하니까, 진짜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니까 별 짓 다 하는 거다. C. S. 루이스가 생각나는구나. 그는 일평생 ‘기쁨’(Joy)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뒤에는 어땠을까?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대략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기쁨이었다. 그 기쁨의 근원과 실체를 만난 다음에는 기쁨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다. 그게 인간이다. 의미, 가치를 발견하면 산다. 나는 예수가 좋다. 배가 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맘이 고픈 자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예수가 좋다오. 오늘도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열심히 글을 짓고, 가족들의 먹을 것을 위해, 교우들의 영적 양식을 위해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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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2-10
  • [서임중 칼럼]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라
    시성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구멍이 없다.”고 했다. 하루의 단추도, 한해의 단추, 인생의 단추도 그렇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한다. 2023년도 한해의 첫 단추를 잘 끼워 살아간다면 마지막 단추를 끼우면서 행복한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간다. 이런 경우는 죄악에서 죄악으로 가는 사람이다. 소돔성의 사람들, 노아 때의 사람들, 육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이는 죄악에서 빛 되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오른편 강도,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생활하다가 자기주의로 타락하는 사람이다. 사울왕, 엘리 제사장, 웃시야, 가룟유다가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빛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믿음의 길, 그 믿음을 생활로 이어가는 신앙생활의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다윗, 사무엘, 다니엘, 모세, 바울이 그들이다. 빛에서 빛으로 가는 길, 그 삶이 어떤 삶인가? 시편37편에서는 그 삶을 아름답게 교훈한다. 그것은 먼저 불평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 것이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말씀 때문에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와 치욕을 당해도 단 한마디도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고 기도했다. 불평대신에 감사한 조건을 찾았고 투기대신 기도했다. 그것이 인생의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고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그 날 감사함으로 삶을 마무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평과 투기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뼈를 마르게 하는 독소임을 성경은 교훈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배고픈 날보다는 배부른 날이 더 많다. 추운 날보다는 따뜻한 날이 더 많고, 미워할 것보다는 사랑할 것이 더 많고, 안 되는 것보다는 되는 것이 더 많고, 아픈 날보다는 건강한 날이 더 많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불평하거나 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이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거기서 선행이 실천된다. 선행이 무엇일까? 성경적 관점의 선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간으로 한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이다. 이것은 나의 목회 철학이었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의 고령에 포항중앙교회에 오셔서 주일 설교를 하시고 나에게 안수 기도를 해 주셨다. 전율이 일어나는 기도였는데 “서목사님은 말씀사역을 하면서 녹슬어 사용하지 못하는 목사가 아니라 닳아서 사용할 수 없는 선행의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다. 그러기에 은퇴 9년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한해 70여 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사경회 강사로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한 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모진 풍상을 견디면서 자라야 한다. 자식을 양육하기 위하여 어머니의 수고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희생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선을 행하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걸음이다. 아무리 좋은 고급승용차도 가만 세워두면 부식되고 망가지면서 사용되지 못한다. 부엌의 칼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보기 싫지만 계속 사용하면 날이 서고 유용하게 사용된다. 건강도 재능도 물질도 그렇게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삶으로 사용될 때 아름답게 빛을 발하게 된다.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총이란 쏘아보지 않은 자에게 맡기면 오발탄이 된다. 옷도 입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주면 입을 줄 모른다. 화장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자에게 주면 어떻게 쓸 줄 모른다. 돈도 사용할 줄 모르는 자에게 주면 그 돈은 재앙을 불러온다. 능력도 사용할 줄 아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다. 직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귀한 은사를 받고 어둠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라가 그랬고, 발람이 그랬고, 아히도벨이 그랬고, 가룟유다가 그랬다. 빛에서 어둠으로 가지 않고 빛에서 빛으로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정욕에 이 기쁨을 빼앗기고, 안목의 정욕에 빼앗기고, 이생의 자랑에 빼앗긴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가르친다. 즉 내 삶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맡김은 믿음 없이는 안 된다. 사위 못 믿는데 딸 시집 보내는 부모님 있는가? 선생님 못 믿는데 자식 학교 보내는 부모님 있는가? 목사 못 믿는데 그 목사 설교하는 교회 가는 교인 있는가? 은행을 믿지 못하는데 돈 맡길 수 있는가? 즉 믿음 있어야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는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5)” 이것이 정답이다. 맡기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이다.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심령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 자체가 성공이다. 축복이고 기쁨이고 영광이다. 2023년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여호와 샴마, 여호와 닛시가 현재진행형이 되는 평행감축의 한해, 빛에서 빛으로 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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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30
  • [소강석칼럼] 평등 속에 감춰진 발톱을 아는가
    최근 이영훈 이재훈 고명진 이찬수 목사님 등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1인 시위에 동참하셨다. 나는 이분들의 용감한 행동에 적극 찬성한다. 아니, 추앙한다. 필자도 참가하려고 했으나 일정이 분주한 데다 반동성애 운동을 앞서 시작했기에 굳이 가지 않아도 좋겠다는 주변 조언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누가 먼저 하고 나중에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구나 힘을 모아 적극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1인 시위에 참여하길 원했고 혼자 가는 것보다 17개 광역시·도 목사님들과 함께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분들을 예찬한다. 과거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처하고 차별금지법을 막는 데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주셨다. 엊그제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십수 년 전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님과 길원평 교수님으로부터 동성애와 안티 기독교 세력의 실체와 전략을 알게 되면서 시작했던 한국교회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공적 사역의 궤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왜 이렇게 차별금지법을 저지하려고 하는가. 나는 북유럽을 방문했을 때 차별금지법의 폐해를 직접 목격했다. 서유럽이나 북유럽 국가들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놓고 기독교계가 후회하고 탄식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북유럽에서조차도 차별금지법 처벌 예외 조항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런데 왜 국내 일부 정치인은 전 세계적으로 사회문화적 병리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인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부당한 차별을 없애는 데는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어 개별적 차별금지법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또는 평등법안이 내세우는 ‘차별 없는 세상의 구현’이라는 구호 속에 감추고 있는 무서운 발톱이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는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 진리를 흐리는 사이비·이단 합법화,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합법화라는 ‘파괴적 이빨’이 있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한다는 미명 아래 더 많은 절대다수 사람의 인권을 제한하고 수많은 역차별을 초래할 수 있는 독소조항을 품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모든 국민을 차별 대상으로 만들고 국민의 생활 영역 전체를 차별 사유로 규정해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 수 있다. 또 모든 국민을 감시자와 고발자로 만들고 심판자와 범죄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한국교회뿐 아니라 더 많은 국민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의 폐해를 알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 문화전 사상전 여론전을 펼쳐야 한다. 여론조사를 할 때도 국민에게 이 사실을 똑바로 알려야 한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도 소수자들은 얼마든지 보호받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다수 국민을 종교적으로, 성적으로 역차별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뜻있는 국민은 모두 이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길이 끝난 것 같아도 우리가 새길을 열어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특정 종교 관점을 넘어 국가의 미래, 국민과 다음세대의 안위와 평안,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위한 것이다. 올해에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저지를 위한 1인 시위는 계속돼야 한다. 아니, 한국교회와 국민 모두 힘을 모아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새길을 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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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성서연구] 아직은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조무래기 시절 짓궂은 친구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 준다면서 달걀귀신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썼고, 여자애들은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건 정말 두려운 게 아닙니다. 이십여 년 전에 80리터 배낭에 침구와 먹거리를 싸서 메고 혼자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영양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해서 봉화, 현풍을 거쳐 정선을 지나 평창 오대산을 넘어 강원도 양양을 거쳐 속초까지 갔습니다. 8월 무더위에 가다가 쉬고, 밥을 해 먹고, 한잠 자고, 또 걷고, 지치면 1인용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평창 오대산 아래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질 때여서 등산객들이 하산하는 시간이었지만, 저는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밤새 쉬지 않고 오대산을 넘어 다음날 새벽 4시경에 도로에 도착했습니다. 피곤이 몰려와 잘 곳을 찾았는데, 새벽 어둠 속에서 희끗한 건물이 보였습니다. 폐교된 초등학교였는데, 운동장에 사람 키 이상의 풀이 자라 있었습니다. 대충 정리하고 텐트를 쳤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 화장실에서 나왔다는 달걀귀신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대산을 한밤에 홀로 걸어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본문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교만했고,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대신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사무엘도 세상을 떠난 마당에 사울은 영적으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블레셋이 대군을 일으켜 침공했습니다. 사울의 마음이 크게 떨렸습니다. 사무엘상 28장 5절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길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침묵하셨습니다. 아무 답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28장 6절입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자 어쩔 수 없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가난, 질병, 외로움, 실패에 대한 불안감, 정치 사회적 갈등, 전쟁 위협 등이 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자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기도 했으나 무익했고,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을 막다가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그의 시신마저 벳산 성벽에 매달리는 수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지금 형편이 어떻습니까? 어렵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지만 않으신다면 아직 괜찮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살던 남 왕국 유다의 악한 현실에 깊이 좌절했습니다. 하박국 1장 2~4절에서 그는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남 왕국 유다를 징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또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하박국은 매우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의 형편이 절대 절망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통로가 아직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박국 2장 1절을 보면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박국 2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우리의 소망은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만 한다면,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라도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과의 통로가 막히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답을 주신다면 다른 두려움들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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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시사칼럼] 호모 코로나쿠스
    드디어 이번 달 말 즈음하여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될 예정이라 합니다. 길고도 길었던 코로나 기간이 공식적인 종료를 앞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 시대에 이미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용어 중 하나가 바로 ‘호모 코로나쿠스(Homo Coronacus)’입니다. 본래 ‘호모(Homo)’는 ‘인간’이란 의미의 라틴어에 해당합니다. 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요새는 ‘코로나 사피엔스’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런 용어들을 언어유희의 산물로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실제로 우리 일상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고, 어쩌면 후세 사가들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다시 써 나갈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대면이나 온라인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호모 코로나쿠스란 바로 엠지(MZ)세대를 일컫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일간지는 이들의 습성으로 “학교에 꼭 가야 하나 라고 생각한다(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삶도 멋지다(인간관계에 구속되지 않는다)”, “남의 인식은 신경 쓰지 않는다(타인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는다)”를 들었습니다(중앙, 22. 4. 19). 타인이나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감지됩니다. 파장은 실로 놀랍습니다.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던 각종 관행들 이를테면 결혼이나 장례나 돌잔치 등의 간소화가 이루어졌고, 직장의 회식 문화에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려 수준이던 결혼이나 출산율 또한 계속해서 급전직하(急轉直下)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철저하게 개인화 · 파편화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형태의 ‘호모 솔로엔시스(Homo Soloensis)’의 출현입니다. 호모 코로나쿠스의 특징 중 또 하나는 ‘호모 논-로쿠엔스(Homo Non-loquens)’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7년 데이빗 프라이가 쓴 『호모 로쿠엔스』라는 저서를 통해 대중화된 이 개념은 그러나 이제 획기적인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언어의 기반은 소통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차츰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엠지세대는 더합니다. “청소년들과 대화를 해 보면 일단 그 목소리에 놀란다. 청춘의 패기가 느껴지기는커녕 모기 소리처럼 다 기어 들어간다. 어린애처럼 하이톤으로 앵알앵알하는 경우도 많다. 변성기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이다. 성대결절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장이 없어진 탓이다. 하루 종일 주고받는 단어도 불과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이젠 카톡이 대신한다.”(호모 큐라스, 고미숙, 2015) 이제 등장하는 호모 코로나쿠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날 때부터 마스크를 착용한 아이들은 아예 호흡이나 폐활량에서부터 피해를 입고 있다니 말입니다. 코로나는 사회경제적으로도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어떤 정당과 정책으로도 잡을 수 없었던 치솟는 집값이 하락세를 거듭하는 현상을 보십시오. 여파는 젊은 세대를 뒤흔듭니다. 코로나 세대들은 ‘호모 디스컨텐트(Homo Discontent)’나 ‘호모 두비타스(Homo Dubitas)’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자는 불만(不滿)형 인간을, 후자는 의심(疑心)형 인간을 의미합니다. 물론 양자의 개념은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불안도 커진다고 한 바 있고, 국내에도 양자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다루는 시각이 존재합니다(선봉란, 박규철).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양산되는 불만과 의심은 그 양상이 다릅니다. 현상을 타개하고 발전을 지향하자는 긍정적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적 인간은 좀처럼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분노하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그렇다면 호모 코로나쿠스가 지향해야 할 인간형은 무엇일까요? 앞선 논의를 참고한다면, 결국 우리는 고립을 넘어 서로를 이어주는 연결형 인간 즉 ‘호모 커넥투스(Homo Connectus)’(최민자, 2020)나 타인과 교류하고 소통하기 위한 공감형 인간 즉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haticus)’(최배근, 2020) 혹은 지나친 개인주의를 초월해서 선한 사회를 만들어갈 공동체 인간 즉 ‘호모 코뮤니타스(Homo Communitas)’(유장춘, 2022)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코로나가 가져 온 폐해를 치유하고 나서야 합니다. 교회는 더 심각합니다. 학교나 직장을 나가지 않으려하는데 교회를 가겠습니까? 친구나 가족관계마저 파편화되는 마당에 ‘코이노니아’가 가능은 할까요? 이후로 교회의 현장성과 공동체적 속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리라 전망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 교통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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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은혜의말씀] 에베소교회 (계2:1~7)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세운 교회이며, 디모데가 잠시 사역을 했고, 요한이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특히 에베소는 교통, 문화의 중심지로 이단이 침투하기 쉬웠고, 영지주의 이단의 본거지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이단사상과 투쟁해야 했고, 진리를 위해 싸우느라 성도들의 마음은 점점 냉냉해지고, 교회 안에 사랑까지 식어지게 되었습니다. 1. 우리 주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지 다 알고 계시며, 그들을 칭찬하십니다.(2,3절) 악한 자들과, 거짓사도에 대항하여 진리를 지킨 수고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핍박과 고난을 참고 견딘 인내를 아시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알다’라는 원어는 지식적 이해가 아니라, 신적 통찰력–모든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신앙의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모든 행위를 놓치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를 위한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고전 15:58) 새해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수고와 헌신이 하늘에서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2. 그러나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4절) 에베소 교회가 개척된 지 40여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자 교회는 안정되고, 기반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숙원사업이었던 예배당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어졌습니다. 이제는 금식하며 기도할 절박한 기도제목도 없어 보였습니다. 차츰 모임은 형식화되고 은혜가 없어졌습니다. 가슴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하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며,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그 첫 사랑이 있습니까?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은혜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타성과 형식에 젖기 쉽습니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는 앉아 있지만 말씀을 듣는 감격이 없습니다. 벅찬 감격의 찬송이 없습니다. 그저, 종교 생활에만 만족하는 자리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우리 교회를 향해 무슨 책망을 하실까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셔야 합니다.(5절)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첫 사랑을 잃어버리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이러면 안 되는데,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행동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3. 첫 사랑을 회복한 자–이기는 자에게 주님이 약속한 축복이 있습니다.(7절) 새해, 우리 교회가 주님이 말씀하신 첫 사랑으로 돌아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새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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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2
    어느 듯 2022년도는 흘러간 과거가 되었고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변함없는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올해는 전과 다르게 뿌듯함으로 가득찬 한해이기를 늘 그래왔듯 기원해 본다. 지난 시간들을 반성하며 새로워지기 또한 원한다. 보다 치밀한 계획들을 세우고 실천할 것을 결단도 한다. 지난하게 반복하며 실패를 경험하였지만 이처럼 다시 계획을 세우고 잘해보기를 작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의 부질없는 짓인냥 부정적인 모습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오래 참음과 인내로 우리네 인간들에게 주신 큰 은혜요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단원들에게 자주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노래에는 가사가 있고 그 가사는 아름다운 시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시성 넘치는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느끼며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하며 말이다. 아름다운 의미를 담은 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를 하노라면 마치 내 자신이 시인이라도 된 듯 시의 바다 속을 헤엄치며 그 내면의 깊음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러한 수준의 연주라면 어찌 청중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지 않겠느냐고 단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다. 세상의 노래도 이러할진대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을 담은 노래가 아닌가? 말씀을 기초로 한 작시자의 삶과 삶 가운데 경험한 주님의 터치와 흔적을 담아 노래한 이 찬양이 우리의 마음에 닿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심어린 고백으로 노래되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은혜의 자리를 경험하게 되고 듣는 이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나아가 우리의 찬양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그분에게 드려질 것이다. 새해의 바램은 우리가 드릴 찬양 혹은 찬송의 노랫말을 자주 묵상하고 기도로 마음에 새기며 그것이 내 삶의 고백이요 헌신의 내용이 되기까지 성숙함으로 나아가 우리 모두 진정한 찬양(예배)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찬양(예배)을 통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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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 사역과 성령의 임재
    우리는 다음세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비전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은 다음세대 사역을 하면서 우리가 표어로도 내걸고 사역의 목표로도 삼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육 현장에서 보면 성령의 임재와 이에 따른 권능에 대해서 아직도 오해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이 임했다고 하면 열광하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결과를 기대합니다. 겨울수련회를 하면서 우리가 신경 쓰는 부분은 아이들이 저녁집회 시간에 얼마나 열광적으로 찬양을 했는가? 얼마나 눈물을 많이 쏟고 큰 소리로 기도했는가? 얼마나 손을 높이 들고 발을 열심히 굴렀는가? 얼마나 기운을 빼면서 밤을 새도록 기도했는가? 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것을 기준으로 성령의 임재를 재려고 하고 평가하려고 할까요? 그건 바로 이런 것들이 학생들의 삶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변화보다 훨씬 쉽고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눈물 한 번 쏟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찬양 한 번 뜨겁게 하고 기분을 풀어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과 회개는 눈물의 기도와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선 후의 삶의 변화로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 받고 난 후의 삶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시험에 들어 그렇게 간절하게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도 겨울성경학교나 수련회에서 잔뜩 은혜 받고 집에 돌아왔는데 밀린 공부는 언제 할 거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와 한 판 거하게 붙고 나서(?) 수련회에서 은혜 받아봤자 아무 소용없다며 다시는 수련회 안 갈 거라고 은혜 무용론을 외쳐대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찬양하고 결단하고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될 줄 믿는다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은 내 주변 환경을 전혀 달라지게 해주시지 않으셨냐고, 하나님이 과연 정말 계시는 게 맞느냐고 원망하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너무하신다고 낙망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수련회에서 받은 은혜를 떨어뜨리려는 사단의 시험일까요? 많은 경우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가 정말 올바른 성령의 역사인지 확인시켜주는 아주 감사한 기회입니다. 내가 정말 은혜를 바르게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만 계시다면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고 견뎌내고 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증거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받은 은혜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정말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면 권능을 받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하고, 바뀌어야 할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정작 수련회에 가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았다는 나는 바뀌지 않으면서 왜 우리 엄마는 바뀌지 않았냐고, 왜 내 형제 자매나 친구들은 예전 그대로냐고, 그래서 시험에 들었다고, 다 때려치우겠다고 하면 그건 말씀을 잘 못 이해한 것이고 은혜도 이상하게 받은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차기 왕으로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는 얼마나 가슴이 뛰고 벅찼을까요? 하지만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골리앗이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다윗 자신이지 골리앗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믿음과 숙련된 기술로 골리앗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또한 다윗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요?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사울 왕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일로 시험에 들어 ‘기름부음 받아도 아무 소용없네!’ 하면서 포기했다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사울 왕을 피해서 동굴에서 전전할 때에도 꾸준히 기도하고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도 그를 몇 번이나 살려주면서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의 권위와 의미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악하고 완악한 내가 변화되는 이 유일한 권능은 성령님이 임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다음세대들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아이들이 될 수 있도록 바르게 가르치고 양육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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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1-20
  • [다음세대칼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우리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보다 더욱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웃이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에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시끄럽다고 신고를 하고 서로 싸웁니다. 주차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집 앞에 옆 집사람이 주차하면 반드시 욕을 하며 싸우게 됩니다. 더 이상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눅10:29 말씀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율법교사는 눅10:27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개념상 이웃에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교사는 아마도 그의 친족과 같은 동료 유대인들에게는 선을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좁은 의미로는 같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마을에서든 성읍에서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사는 낯선 자도 모두 ‘이웃’이어서, ‘이웃’은 ‘같은 사람’을 뜻했습니다. 레위기 19장 34절 말씀에는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에서 이 거류민은 타국인, 객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에서 신앙을 바르게 보존하고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를 두고 격렬히 다투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시기 전 200년 동안에는 ‘이웃’ 개념이 아주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실제로 ‘신앙의 동지’ 또는 ‘같은 당원’이라는 정도의 뜻만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율법에서 본래 뜻하고 요구했던 ‘같은 사람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 불리는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들려주시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웃의 개념에 자신의 친족이나 가까운 동지 유대인들만을 포함시킨 율법교사의 위선과 편협한 사고를 이 비유를 통해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유대사람이 한적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그 강도가 그냥 깔끔하게 돈만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그 강도는 아마도 그 유대인을 죽일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죽을 정도로 폭행을 당한 유대인은 길가에 그냥 버려졌습니다. 그 유대인에게 당연히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모른 척 지나칩니다. 그런데, 천대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친절을 베푸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당연히 누가 이웃인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이 강도당한 유대인의 이웃입니까? 누구나 아시겠지만 사마리아인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나는 율법을 잘 지킵니다.’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답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 같은 동네의 사람, 아는 사람, 등등이 그 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답이라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들려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나 친분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증오와 미움의 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이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사랑을 베푸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을 회복했고, 신앙을 지키며 산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이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편의에 맞게 이웃의 범위를 각자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만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부자의 이웃은 부자만 되고, 가난한 자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젊은 사람의 이웃은 젊은 사람만 되고, 나이든 사람의 이웃은 나이든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람의 이웃은 한국 사람만 되고, 외국인의 이웃은 외국인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만드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이웃이 아니었던 사람을 이웃이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이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하면 서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알게 모르게 기독교인이라고 경계를 그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경계를 그어놓고 그 안에서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경계를 그어놓고 사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가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필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이웃이 누구인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나는 위기 청소년들, 그의 가족들, 저의 도움이 필요한 모두가 저의 이웃입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니까 복음 안에서 회복이 일어납니다. 이번 주에 어떤 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아이는 선생님 만나서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과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 비유 속에서 이웃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실천하는 2023년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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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신앙교육나침반] 복음을 놀이하다!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지난 3년 동안 쉼 없이 ‘우리집 성경놀이터’를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인지적인 방법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놀잇감을 이용해서 복음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컨텐츠입니다. 지금까지 향기나무가 개발한 놀이는 약 100여개가 넘으며, 그 중에서 복음 놀이 50개를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50주 과정의 복음놀이 책이 발간되면, 누구나 손쉽고 저렴하게 복음놀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놀이터는 저 멀리 땅 끝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과 한인교회 사역자들에게는 귀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사역하는 현장은 한국보다 훨씬 더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장벽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세대의 장벽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복음 도구는 안타깝게도 인지적인 방법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향기나무교육개발원에서 개발한 복음 놀이는 언어와 문화와 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차별화된 복음도구가 될 것입니다. 아래는 이번 복음놀이 50주 과정의 놀이시연에 참여한 인원입니다. 4세 어린이 1명, 5세 어린이 1명, 7세 어린이 1명, 9세 어린이 2명, 10세 어린이 4명, 11세 어린이 1명, 12세 어린이 1명, 12세 어린이 1명, 14세 청소년 1명, 40대 장년 5명, 50대 장년 2명 다양한 연령의 영아, 유아, 아동, 청소년, 장년이 3일 동안 동일한 놀잇감과 내용으로 복음놀이를 경험하였습니다. 복음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세대의 수준 격차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뛰고 놀고 웃으면서, 우리는 어느 새 나이와 성별과 모습을 초월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놀이의 힘입니다. 복음을 인지적,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복음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요? 복음놀이가 마친 둘째 날, 이들 중 세 명의 아동들이 목욕탕에서 만난 할머니께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을 능숙하게 잘 하지 못하는 유아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의 스토리를 떠올려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온 몸으로 경험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놀이하다 50」(가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앞으로도 많은 과정이 있으며, 무엇보다 많은 분들의 후원과 기도가 절실합니다. 예수님 손에 올려진 오병이어처럼, 주님 손에 올려져 열방의 많은 영혼을 배불리는 데에 쓰임 받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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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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