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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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이 말씀이 여기 있는 이유
    본문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은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세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본문 열두 절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없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14절이 이를 보여줍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습니다. 2장 1~4절입니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므로 1장 14절에서 오늘의 본문 없이 곧바로 2장 1절로 이어지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세워진 맛디아가 그 후 복음 전파 과정에 바울처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본문이 의미가 있겠지만, 본문 이후에는 맛디아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열두 절을 그 사이에 배치하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먼저 이 말씀을 읽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베드로가 유다의 죽음과 그 직분을 다른 이가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을 보면서 주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맛디아가 세워진 과정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본문을 근거로 교회에서도 장로, 권사, 집사 등을 세울 때, 혹은 심지어 담임목사를 세울 때, 혹은 노회장, 총회장 등을 세울 때도 제비뽑기로 하자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왜 요셉과 맛디아만 후보가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3의 후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비뽑기를 할 때 베드로가 했는지, 혹은 두 후보가 직접 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본문의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 때문에 본문 열두 절을 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주신 핵심 이유는 22절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이때 베드로와 성도들의 관심은 유다의 빈자리를 채워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 두 가지 중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이 부활의 기쁨에 충만했고, 부활의 메시지를 이어 나가려는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활주일이 지나면 그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가느라 분주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365일 내내, 우리 가슴에 있어야 합니다. 또 이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데 몰두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6~48절입니다.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명에 몰두했고, 이를 위해 맛디아를 보선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모임에서 어떤 이를 세우는 데는 관심이 많지만, 세우는 자나 세움받는 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성도들은 부활의 증인이라는 목적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이 일 다음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기록된 것은 성령님 강림의 목적이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승리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기쁨으로 살고, 부활의 증인이 되는 목적에 의해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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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소강석칼럼] 우리들만의 아주 특별한 밤
    저는 故 이어령 교수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누구십니까? 천의무봉의 필력으로 끝없는 지식을 거대한 산맥처럼 이어가셨고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생명이 자본이다> 등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창조적 신지식의 세계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저의 문학세계를 인정해 주시고 시집 ‘꽃씨’ 추천사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한국 시사의 첫장으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바다에서 소년에게’에서는 파도가 네까짓께 뭐야 라고 바위와 뭍을 몰아세우며 우르르 쾅 덤벼들지만, 소강석 목사의 그리움에서는 오히려 파도와 뭍의 절벽은 서로 친화의 사랑과 그리움으로 어울린다. (중략) 불교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이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 지도자들도 시를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시기를 빌면서 이만 말을 거두려 한다.” 특별히 이어령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에 대해 애착심이 많으셨습니다. 언젠가 전화를 주셔서 “내가 하늘나라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내가 뭐 추천서 쓸 거 없습니까? 작품 있으면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집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를 썼을 때 추천사를 써 주셨습니다. “소강석 목사는 예향(藝鄕)의 마을 남원 출신으로 목회자인 동시에 시문(詩文)에 능하고 풍류와 흥이 있으며 거친 남도 사내의 야성도 있다. 그의 특유의 친화력과 열정, 사람을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풍모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나의 언어를 마지막 선물처럼 주고 이 시집의 추천사는 어쩌면 나의 마지막 도움의 말이 될지 모른다. (중략) 나는 그가 그리울 것이다. 그의 시가 그리울 것이다. 그와 나누었던 추억과 순간들이 그리울 것이다. 소년 같은 그의 웃음과 미소도….” 결국 이어령 교수님은 돌아가셨고, 저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그 분의 장례식에 직접 가서 조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께서 저의 시를 인정해 주시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목사들의 시가 문단에서 잘 인정을 못 받습니다. 일반 서점에서도 잘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시가 이미지나 낯설게 하기, 은유와 함축, 반전 같은 것들이 없고 그냥 고백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러나게 쓰다 보니 논외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종회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를 접하시더니 목회자 시의 테두리를 넘어서 문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시집 원고를 보내 드렸더니 “몇 군데 좀 수정하면 안 되겠느냐” 하셔서 다시 표현을 했더니, 확실히 더 돋보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년에 한강 세빛섬에서 북콘서트를 했을 때도 직접 참석하셔서 시 토크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그때 세빛섬에 초청받지 못한 분들이 정말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예상을 초월한 북 콘서트였습니다. 이번에는 책을 파는 북콘서트가 아니라 봄을 맞아 꽃과 관련된 저의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고 느끼는 ‘꽃소리 들리는 밤’의 시 콘서트입니다. 물론 김종회 교수님을 초청하지 않고 우리끼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럽게도 문단에서 가장 위대한 평론가 중에 한 분이신 김종회 교수님을 모시고 시 콘서트를 할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먼저 짧게 1부 예배를 드린 후, 우리 교인들과 함께 시 낭송과 노래, 연주, 토크를 진행하며 꽃향기가 보이고 꽃소리가 들리는 특별한 밤을 갖는 것은 우리들만 누리는 특권입니다. 저녁에 오신 분들을 정말 예의를 갖춰 모시겠습니다. 오늘 밤,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꽃소리 들리는 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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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시사칼럼] 봄을 사는 이들이여, 메멘토 모르툼!
    유행병이 한창이던 수년 전 4월의 어느 날, 박지훈 목사가 「봄을 사는 이들에게」란 노래를 발표합니다. 제목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가사가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소개합니다. “봄을 사는 이들에게 오래 전에 이미 도착한 봄의 온기가 아직 다다르지 않은 이곳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봄을 아는 이들에게 날카롭게 오는 눈발에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 무척 힘든 이곳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큰 지붕 위에도 작은 지붕 위에도 멈춘 차에도 달리는 차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이곳에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그곳에는 벌써 도착한 봄이 아직도 배달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4월에도 눈이 옵니다. 나에겐 겨울이 더 어울린다 하며 그런 따뜻함이 있을 수 있냐며 봄을 잃은 사람에도 봄을 모르는 사람에도 이곳에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그곳에는 벌써 도착한 봄이 아직도 배달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모두가 봄기운을 만끽할 때 여전히 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향기 날리고 분분한 낙화 대신 사월에도 온통 마음속 거리마다 눈이 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인생들이 어찌 한둘뿐이겠습니까마는, 특히 여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다리며 여전히 사월의 겨울을 살고 있는 세월호의 다섯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이와 같이 누군가를 우리는 잊을지언정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아니, 우리도 그래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벌써 십년 전의 그 날 우리 모두는 뭐라고 외쳤습니까?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늘의 별이 된 얘들아, 우리는 절대 너희를 잊지 않을게!’ 하지 않았던가요?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은 죽은 자를 기억한다’며 죽은 자를 향한 사랑이야말로 아무 보답도 해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비이기적인 사랑이고, 동정을 유발한다든지 해서 어떤 식으로든 강요할 수도 없는 짝을 향한 가장 자유로운 사랑이며, 도대체 변화할 수가 없는 존재를 향한 가장 신실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은 자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죽은 자를 향한 사랑은 죽은 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을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잊은 자를 어찌 사랑하겠습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자를 위해 어찌 기도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는, 지금 그들을 어떻게 얼마만큼 기억하고 있는지요? 예로부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유명했습니다. 라틴어로 이루어진 이 문구는 로마 시대 개선식을 거행할 때 승리한 장군 옆에 둔 노예가 끊임없이 속삭였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승리에 안주하거나 도취하지 말고 ‘나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되뇌며 겸손하란 취지에서 비롯된 일종의 잠언이었겠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차츰 기독교의 세계에도 들어와서, 중세 시대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였다고 전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경에 드러난 헤벨 사상 곧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전 1:2)라는 의미의 중세식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도 이 말을 간접적으로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일종의 기독교적 허무주의에 대해 살짝 비틀기를 시전하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대신 ‘죽은 자를 기억하라’를 말했습니다. 기존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대신 “메멘토 모르툼(memento mortuum)”을 주창하고 나섰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메멘토 모리”, 좋은 교훈이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숭고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했던 자기 겸손의 발로(發露)였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메멘토 모르툼”은 이타적인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죽은 자는 도무지 갚을 길이 없을 테니 그를 향한 사랑은 순수하게 이타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월에도 겨울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봄을 가져다주려면 필요한 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입니다. 앞서 소개한 「봄을 사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봄이여 오라 봄을 떠나 온 이로 인해, 꽃이 피어라 꽃을 품고 온 이로 인해, 겨울에 사니 내 안 봄 더욱 만개합니다, 보내진 곳을 사는 이로부터.” 작가는 보스턴에 머물면서 어느 해 4월에 내린 눈을 보며 이 노래를 구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도달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겨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 봄을 전하기 위해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고 있는 분들도 있답니다. 봄의 왕국을 떠나서 겨울왕국과 같았던 이 땅에 처음 꽃을 품고 온 배달의 시초, 배달부 중의 배달부이신 예수님을 따라 더 많은 봄이 배달되기를 소망해봅니다”(박지훈). 봄을 사는 이들이여, 아직도 겨울을 사는 이들에게, 이제는 겨울 대신 봄을 전해주지 않겠습니까? 눈 대신 꽃을 피워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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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은혜의말씀]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삼상 8:1-7)
    사무엘도 점점 늙게 되고, 그의 아들들이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자 다시 이스라엘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믿음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중한 교훈을 배웁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처럼 믿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익에 따라 뇌물을 받고, 돈에 무너졌을까요? 믿음이란 자동적으로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본인 자신이 믿음의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은 자기 몫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를 위한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선순위이지만, 자식을 돌보는 것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믿음으로, 기도로 키워야 합니다.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를 위한 기도와 신앙 계승에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다른 나라처럼,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요구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은 기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렇게 왕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블레셋, 모압, 암몬 같은 나라들이 모두 왕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멋져 보였던 모양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왕관을 쓰고, 멋진 옷을 입고, 주위에 호위 군대를 거느린 모습이 대단해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더 좋은 것에 눈길이 가고,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좋아 보이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고, 나타난 것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오늘 현실에 당장 뭐가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하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세상과 물질과 힘을 더 의지하려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 사람은 자기중심적 교만의 성향이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으로는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보호해 줄 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계획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욕심, 불신, 자기중심적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나를 위한 세속의 보호가 필요하고, 방패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교만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을 기뻐하지 않으셨지만, 왕의 제도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 불안한 현실을 통하여, 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영적으로 어려서, 이방인처럼 왕이 없이 지내는 것을 불안해 하기 때문에 허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억지로 가려고 할 때 그대로 두십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뒤로 제치고, 눈에 보이는 왕을 구함으로 결국 어떤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인가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위기는 고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다른 것이 더 좋아 보이는것입니다. 신앙의 위기는 내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먼저 기도하고, 행동하는 원칙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주인이시오,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세상이 왕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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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위드애] 하나 된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실 때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이다. 이 기도는 무엇보다 남겨질 무리들, 즉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된 신자들을 위해 드려졌다. 얼마 후면 이들 곁을 떠나실 예수께서 남겨질 무리들을 위해 드려진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이 기도에서 두드러지는 줄거리는, 이 땅에 남겨질 무리들의 성격이다. 즉, 이 무리들은 고난 가운데서 진리로 보전되어 거룩하게 구별될 것이고, 예수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광을 이들이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사실이 있다. 그 영광이라는 것의 실체이다. 요컨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해지고 다시 신자들의 무리에게 계승되어진 그 영광은, ‘하나 됨’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교리를 통해서 ‘하나 된 교회’를 ‘우주적 교회’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 된 교회를 특정한 어떤 지역 교회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하나 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갖고 살다가 한 교회에서 만났다. 물론 우리는 하나의 구주와 하나의 아버지를 고백하였기에 교회에 모여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각이 어떤 주제와 관점에서도 ‘하나’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무리이다. 차라리,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무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의견, 다른 생각, 다른 배경을 한 교회 안에 용납하지 않으려 해왔다. 동일한 취향, 동일한 배경, 동일한 계급, 심지어 비슷한 학력과 직업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그것을 하나 됨의 증표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아도 좋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새 신자가 교회로 들어오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사도는 설교에 전념하고 행정은 비유대인을 포함한 일곱 집사를 세워 처리하게 한 것이다. 이는 다양한 혈통과 문화를 갖고 교회로 들어온 교인의 다양한 문제들을 유대교적 사고에 주로 익숙한 사도들에게만 맡기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즉, 교회의 다양성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에 이견이 없다는 말이 사실은 자랑이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 예배당에 모여 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며, 한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받음 사실을 찬양하며, 다양한 삶의 정황 가운데 동일한 은혜로 승리케 하시는 성령님을 고백하는 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장엄한 예배 가운데 나와 다른 내 옆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자 해도 사랑할 수 없는 내 보잘 것 없음에 한탄하며, 어느 구석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면서도 같은 사랑을 받은 형제와 자매 가운데서 그만큼 사랑할 이유를 볼 수 없음으로 인해 통곡하고 부르짖는 처절함이 우리 가운데 없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끝으로 묻고 싶다. 혹시 나의 그 거북함 때문에, 그 불편함 때문에 나의 교회에 장애인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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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드애(with 愛)
    2024-04-1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통계로 본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2
    지난 시간에 우리는 기독교 인구 자체가 줄고 있다는 통계자료를 접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교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을까요? 역시 통계를 통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2022년 국민일보와 <사귐과 섬김>이라는 단체가 같이 조사한 ‘개신교인의 교회 인식조사’를 보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 교회의 모습과 현재 한국교회 모습이 각각 실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교인들이 바라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예배 중심이면 좋겠다는 답이 60%, 기도 중심이면 좋겠다는 답이 31%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조사했더니 권위주의적이라는 답이 57%, 보수적이라는 답변이 46%로 제일 높게 나왔습니다. 전도 중심이라는 답은 26%, 예배 중심이라는 답은 22%에 그쳤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과 지금 우리 교회 현재의 모습이 너무나도 크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마음으로는 예배 열심히 드리고 싶고, 기도하고 싶은데 교회에 와보면 권위주의적이고, 매우 보수적이어서 “이 교회에 다녀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해 보지 않으셨다면 이제 마음을 좀 넓히시고 귀를 여셔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통계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현장예배가 얼마나 회복되었는가를 담임목사님들에게 조사했습니다. 자료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전국 만19세 이상 개신교인 남녀 2000명에게 온라인으로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입니다. 이 자료로 살펴봤더니 장년 출석이 얼마나 회복되었나, 작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85%에서 86%가 회복되었다고 답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무리 해도 올라오지 않는 겁니다. 100% 회복은 이제 어렵습니다. 엔데믹이 됐지만 장년 출석은 86%에서 멈춰 섰습니다. 더 이상 나오지 않는데 교회학교는 보니까 같은 기간 71%였던 게 79%까지 조금 올랐습니다. 이것은 애들이 그동안 워낙 안 나왔기 때문에 조금 더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실은 목사님들 생각입니다. 담임 목사님들은 “적어도 지금 86%는 나오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데 교인들은 어떨까요? 정말 그만큼 나오고 있을까요?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트렌드 2024 조사’ 자료에 보면 교인들한테 직접 “지난주일 교회 갔습니까?”물어봤을 때 68%만 출석하는 교회의 현장예배에 갔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10%는 교인인데 교회에 안 갔다고 답했어요. 그러면 교회 간 사람과 안 간 사람을 합하면 78%잖아요? 나머지 22%는 어디로 갔을까요? 이들이 바로 출석도 아니고 불출석도 아닌 중간에 붕 떠 있는 “플로팅 크리스천”들입니다. 이들은 우리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렸던지(12%), 다른 교회의 현장 예배를 드렸던지(3%), 다른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드렸던지(3%), 기독교 방송으로 예배를 드렸던지(2%),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린 겁니다(2%). 이 플로팅 크리스천을 붙잡는 것이 현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계에서는 이 플로팅 크리스천들의 비중을 전체교인의 약 24% 정도로 보는데 4분의 1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의 4분의 1은 출석도 불출석도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를 온 것도 아니고 안 온 것도 아니에요. 이들은 지금 이곳저곳을 넘나들고 있는 플로팅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이 말이 작년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는 비중이 전체 교인의 20% 정도였는데 지금 25%까지 올라왔습니다. 4분의 1이 넘나드는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이죠. 저희 성민교회도 매주 방문객들이 많습니다. 이 방문객들이 대부분 플로팅 크리스천들인데 그런 분들을 우리가 어떻게 흡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을 조금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의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씀도 중요하고, 찬양도 중요하지만 과연 성도들이 어떻게 예배하고 있느냐를 그분들은 굉장히 유심히 봅니다. 그래서 대부분 저희 교회에 등록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설교를 듣고 등록했다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뜻밖의 대답입니다. 대부분의 분들에게 등록을 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면 ‘주차하다가 은혜 받아서’입니다. 주차를 하려고 왔는데 날 언제 봤다고 너무너무 귀하게 대접해 주셔서 내가 민망하고 미안해서 “아! 교회 등록해야겠다!” 했다는 겁니다. 또 어떤 분은 ‘예배드리고 나가다가 붙잡혀서’입니다. 우리 교회 밥 맛있으니까 국밥 오늘 뜨겁게 잘했으니 먹고 가라는 그 한마디에 한 숟가락 먹어봤는데 “이 교회 나와야지!” 이런 마음을 먹었다는 겁니다. 또한 이분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내는 또 하나는 실시간 예배에 참여를 독려하는 겁니다. 최근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니까 ‘녹화된 영상을 보는 것과, 실시간 영상을 보는 것과 예배에 내가 정말 참여한 것 같이 느끼느냐?’ 라는 말에 반응이 거의 두 배 차이가 납니다. 그만큼 실시간 영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희 교회가 녹화방송 하다가 이제 실시간으로 바꾼 이유가 바로 그런 결론 때문입니다. 지금 약 두 배의 사람들이 실시간 예배송출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교회를 가지는 못해도 같은 시간에 참여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새벽 기도, 수요 예배, 주일 예배, 모든 예배와 집회를 지금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교회의 실시간 영상 링크를 잘 간직하시고 전달하시면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전도의 대상자들 또는 교회에 나오게 하고 싶은 그분들이, 또한 플로팅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접하고 마음이 열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계속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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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04-19
  • [다음세대칼럼] I am special
    얼마 전 둥지 아이들과 필리핀날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단순한 관광이 아닌 까비떼, 마닐라, 앙헬레스 등의 도시빈민지역을 방문하여 자신들보다 더 열악한 형편에 있지만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생활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지원에 익숙해져 있는 둥지 아이들이 스스로 다른 이들을 위한 피딩(급식)과 한글수업, 봉사활동을 통해 성취감을 맛보고, 필리핀 위기청소년 그룹홈 NEST를 방문하여 함께 소통하며 서로에게 행복한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 타본 비행기도 해외여행도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는지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면서도 괜히 긴장하고, 요란한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짜릿함을 경험했습니다. 무엇보다 둥지 아이들은 이러한 필리핀 시골 오지부족의 문화가 신기하기도 하고 충격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너희들이 만약에 학교도 없고 놀 것도 없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가난하게 지내다가 지금 아기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어떨 것 같애?”라고 제가 던진 질문에 “난 자살한다” “나도!” “근데 나는 뭔가 그냥 살고 있을 것 같은데. 뭘 알아야 나가든지 비교하지. 그냥 이게 정상이라고 살고 있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고 양치질도 안 하고... 옷도 빨지 않고 그냥 입고 사는데... 난 진짜 잘 먹고 잘 지내는거였네” “나는 여기 변기에 뚜껑 없는게 최악이다. 진짜 싸러 들어갔다가 그냥 나왔다” “한국에 있는게 다 좋다. 진짜 감사해야 된다” “나만 돈 없고 우리집이 제일 가난하다고 불평했는데. 진짜 부끄럽다” “어제 우리 마을에서 나올 때 계속 따라오던 아줌마 기억해?” “우리가 들고 있던 그 종이 상자 받으려고 따라온 사람 말이죠? 저 진짜 놀랬어요” “선교사님에게 들었는데 자기 집 바닥에 깔려고 달라고 하면서 계속 따라온거래” “와! 대박이다. 그 종이박스가 뭐라고. 참...” “안되겠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왜?” “여기에 학교 짓고 유치원 만들고, 병원 지을려고” “필리핀 정부는 뭐하노? 이게 나라가?” 둥지 아이들은 이제 겨우 일주일을 지내고는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필리핀을 오기 전 필리핀 아이들을 위해 옷과 학용품, 음식 등을 챙기고 나눠서 박스에 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하는 동안 해리는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는거지? 이렇게 고생을 해도 누가 알아줄까’라는 푸념으로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필리핀 입국심사 때는 서류에 문제가 생겨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죠. 그렇게 힘들고 짜증내면서 필리핀에 와서 덥고 짜증나고 찝찝하기도 하여 왜 온건가 싶기도 했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은 그런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특히 교실에 들어가서 한글수업 일일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한글도 가르치면서 재미없어하거나 관심없어 하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는데, 들어가서 가르쳐보니까 자음, 모음 하나하나 잘 따라서 말해주고 대답해주면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뿌듯하고 누구를 가르친다는 걸 처음 느껴보니까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땡볕에서 더운 줄도 모르고 풍선으로 강아지, 꽃, 칼 등을 수없이 만들어 길게 줄 서 있는 아이들에게 전해줄 때 아이들의 미소에 뿌듯하기까지 했구요. 이렇게 한국에서는 그렇게 가기 싫어했던 학교였는데.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따따이. 여기 2~3만원이면 아이들 학교 다닐 수 있다고 했잖아요. 저 어제 피딩센터에서 만난 아이가 있는데요. 제가 그 돈 따따이에게 주면 그 아이가 학교 다닐 수 있는거예요?” “당연하지. 가은아. 니가 만약에 2만원 내면 내가 그만큰 더 내서 여기로 보내줄게” “좋아요. 저 이제 돈 아껴서 여기 후원할거예요” “와~~ 우리 가은이 철 들었네. 고마워. 근데 돈은 있냐?” “이제부터 담배 줄일려고요. 건강도 챙기고 후원도 하고...” “멋지다. 가은이” “저도 후원할래요” “저도요” 둥지 아이들은 피딩센터를 찾은 어린 친구들에게 더욱 정성스레 한 명 한 명에게 소중한 한 끼의 식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기들을 안고 천천히 먹이면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지난 시간 너무 쉽게 돈을 쓰고 음식을 남기고 불평했던 부끄러운 모습 때문이었을까 배식이 끝난 한참 후까지도 눈물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피딩센터를 뒤돌아서 마을을 다시 돌아보면서도 밥을 먹이던 그 어린 눈망울이 떠올라서인지 계속 울면서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특별해질거야. I am special”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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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신앙교육나침반] 강원도 정선 여량교회
    강원도 정선 깊고 깊은 산골마을에 여량교회가 있습니다. 작은 산골마을 시골교회이지만, 주일에는 교회앞 마당 주차장에 차가 가득해서 주차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모여 예배드립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보니, 예배당 안에 35-40여명의 성도가 가득 모여 뜨겁게 주일 오전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간 날 새 가족 한분이 참여하여 환영식도 하였고, 성경양육반 수료를 하신 분들을 축하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뜨거운 열정과 생기가 가득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시골교회 풍경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여량교회 담임목사님이신 박경일 목사님은 시골교회도 할 수 있다는 사명과 열정을 가지고 성경양육반, 성경읽기, 큐티, 토요행복놀이터, 길거리 전도 등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달려가시며, 시골교회의 새로운 목회모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올해 3월부터 여량교회 오후예배가 달라졌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1시30분이 되자, 주일학생과 성인 성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복음을 놀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온세대 주일학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박경일 목사님은 올해 1월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의 복음놀이코디네이터과정에 참여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복음놀이코디네이터과정 대면코칭을 참여하신 후 본인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런 소감을 적어주셨습니다. “무조건 외치는 복음이 아닌 함께 어우러지는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게임이나 놀이가 좋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흥미와 관심을 집중시키고 몰입한 가운데 계속 선포되는 복음의 핵심단어를 통해 아이들이, 그리고 부모님과 가정이 복음에 반응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의 개념을 알고난 후 복습게임으로 실천해오다가 향기나무 복음놀이터를 만나니 잘이해가 되고 좋네요.” 여량교회 오후예배 때 온세대 주일학교인 <향기나무 복음놀이터>가 세워졌습니다. 향기나무 복음놀이터는 0-100세까지 온세대를 위한 복음전수 프로그램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 찬양을 하고, 함께 복음을 듣고, 함께 복음을 놀이합니다. 유아부터 청소년까지 15명 정도로 모이는 주일학교인데, 1세대와 2세대가 함께하자 50여명이 모이는 풍성한 주일학교가 되었고, 현재는 지역에서 주일학생이 많이 모이기로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3월과 4월 두 달동안 매 주일 오후마다 90세를 바라보는 1세대 어르신들과 아동, 청소년으로 구성된 자녀세대가 함께 복음을 놀이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결실은 바로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수많은 자녀세대가 교회에는 가입되어 있으나, 교회공동체를 향한 강력한 소속감이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세대분리 구조속에서 신앙생활을 한 결과, 교회공동체를 향한 특별한 소명과 사랑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회공동체와 함께한 추억과 경험이 없는 자녀세대는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떠나게 됩니다. 두 달동안 온 세대가 함께 복음을 듣고, 함께 웃으며 복음을 경험한 결과는 세대간의 친밀감이 증대되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알던 부모세대들은 온세대 주일학교를 통해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훨씬 더 친밀해졌다고 합니다. 온세대가 정기적으로 모여 생명의 복음을 함께 경험한 결과는, 단순히 마음의 연합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한몸됨’을 이루는 은혜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박경일 목사님은 향기나무 복음놀이 코디네이터회의 회장으로 현재 활약하고 계십니다. 목사님은 온세대 복음놀이터를 준비하거나, 시작하고있는 많은 복음놀이코디네이터들에게 도전을 주고 계시고, 본인이 직접 준비하고 진행하시면서 얻은 노하우와 자료를 공유해주십니다. 5월 13일부터 향기나무복음놀이코디네이터 두 번째 과정 Great Gospel “느헤이먀”가 시작됩니다. 자녀세대와 그들의 부모인 3040세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전략을 찾고계신 분들, 세대통합 사역의 실제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신 분들, 주일학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신 분들,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과정안내: 향기나무교육개발원 홈페이지 https://sweet-tre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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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4-04-19
  • 김 목사가 총대에 떨어졌다고...?
    예장고신 봄 정기노회가 지난 15-16일 이틀 동안 진행됐다. 금번 정기노회에서는 총회 총대선출이 가장 관심을 끌었는데, 특히 부산서부노회에 이목이 집중됐다. 금년 9월 74차 정기총회에 목사부총회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 두 명(김경헌 목사, 정은석 목사)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노회이기 때문에 부산서부노회 내에서도 후보자 추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명을 배제하고, 특정인을 추천하는 문제도 그렇고, 둘 다 모두 부총회장에 추천할 경우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노회의 고민이 클 수 밖에 없는 상황.(총회선거관리위원회는 한 노회에서 같은 직에 두 명까지 추천을 할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한 바 있다) 그래서 금번 총대 선거가 후보자 추천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교단내에서 관심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최근 3년 동안 총대 4위권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던 김 목사가 15번으로 탈락했기 때문. 부산서부노회는 목사, 장로 각각 14명씩 총대를 파송하는데, 김 목사는 91표를 얻어 15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투표에 직접 참여한 노회원들도 놀랐고, 당사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단내에서도 이 소식이 발 빠르게 이슈가 됐다. 모 목회자는 본보에 전화를 걸어와 “김 목사가 총대에 떨어진 것이 사실이냐?”고 확인할 정도. 그만큼 교단 내에서는 큰 이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김 목사는 총대로 참석할 수 있다. 총대선출 발표 잠시 뒤 총대로 당선된 모 목회자가 총대 사퇴를 하면서 후보 1번인 김 목사가 총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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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자유통일당 원내진출 무산
    자유통일당(고문 전광훈 목사, 대표 장경동 목사)이 22대 총선에서도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자유통일당은 비례대표 1석 최소 요건인 3%에 못 미치는 2.26%를 얻으며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로서 자유통일당은 2016년부터 3회 연속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기독자유당으로 도전했던 20대 총선에서는 2.63%, 기독자유통일당으로 도전했던 21대 총선은 1.8%를 기록한 바 있다. 특히 금년에는 지역구에도 10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10명 중 가장 득표율이 높았던 곳이 대구동구 군위을의 정은실 후보였는데, 4.39%로 4천 785표를 얻어 꼴찌(3위)를 기록했다. 전광훈 목사는 11일 사후 행사에서 자유통일당이 원내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우파 간 싸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 목사는 "우리 당원 350만 명이 우파끼리 싸우다가 국민의힘 망한다니까 거기 찍어서 우리 정당이 망한 것”이라고 총선실패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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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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