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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칼럼] 본질이 아니면 우상
    최근 안준배 목사가 ‘한국문학 속의 우상과 구원’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기독교와 관계된 소설들을 평론한 것이다. 제도권에서 보면 삐딱한 시각으로 쓴 소설들이다. 발표 당시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들은 본질과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본질과 근원 그리고 원형 속에만 구원이 있고 제도화 정형화 화석화된 종교의 틀 안에는 우상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순교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순교 문제로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다가 교단이 나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러한 사태가 소설가 김은국에게는 일부 제도권 교회들이 순교를 우상처럼 여기고 있다고 보여진 것이다. 김은국은 ‘순교자’라는 소설에서 순교적 영웅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신 목사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거기에는 구원도 없다는 예언자적 선포를 했다. 이범선의 ‘피해자’ 역시 제도권으로 전락한 기독교와 교회를 희화화했다. 주인공 최요한은 독실한 장로의 아들로 자란다. 아버지 최 장로는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아들과 똑같이 사랑한다. 그런데 최요한이 자라 고아인 양명숙을 좋아하게 되자, 최 장로는 양명숙이 고아이기에 안 된다며 결혼을 반대한다. 이 사실을 안 양명숙은 상처를 받고 요정의 마담이 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최요한을 다시 만난 양명숙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요한은 영원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양명숙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때 모두 양명숙을 정죄한다. 최요한은 양명숙을 변호하며 이렇게 절규한다. “그녀를 죽인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그녀는 피해자입니다. 아니,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입니다.” 결국 율법과 형식으로 찌들어 있는 제도권의 교회가 양명숙을 죽였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안 목사는 당시 소설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우상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통해 끊임없이 본질과 원형, 근원을 찾아가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원래 시(詩)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보면 말씀 언(言) 자에 관청 시(寺) 자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곧 기독교적 표현으로 하면 성전이라는 말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시인은 신탁을 받아 왕에게 하늘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므로 시가 아무리 서정성과 심미성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예언자적 메시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안준배 목사는 먼저 윤동주 시인의 저항성을 넘어 평화의 이상 세계를 갈망하는 예언적 요소를 소개했다. 그리고 김현승의 시를 논했고 김현승에 이어 필자의 시를 평론했다. 필자도 시의 예언성을 알기 때문에 심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시에 예언성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작품은 끊임없이 본향과 본질을 향해 돌아가는 아드 폰테스(ad fontes) 운동을 한 것이다. 그 본향과 본질을 붙잡는 곳에 진정한 구원이 있고, 그렇지 않고 제도권 안에 머물거나 그것만을 붙잡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우상 속에 머무를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항상 끊임없이 아드 폰테스, 신앙의 본질,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지 않고 오늘의 교회가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우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 우리 안의 우상을 허물 때 한국교회 연합과 세움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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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 [시사칼럼] 메시아
    열사(熱砂)의 땅 카타르에서 열린 제22회 월드컵에는 처음부터 이변이 속출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강력한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를 개막전에서 2대 1로 격파한 경기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며칠 후 아르헨티나는 경시할 수 없는 건넛마을의 호적수 멕시코와 일전을 치렀습니다. 이 경기에서마저 패배한다면 예선 탈락이라는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었던 터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아르헨티나는 한 골과 도움 하나로 맹활약을 펼친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의 활약으로 이겼습니다. 그러자 당장 이런 제목의 기사가 떴습니다. “메시, 메시아가 되다”(중앙일보, 11. 28). 십여 년 전부터 이 선수는 유럽무대에 진출해서 소속팀을 우승시키고 최고선수상을 휩쓸면서 그 이름을 빗대어 “축구 메시아”라 불렸고 “메시가 곧 축구다”라거나 심지어 “메시는 예수와 축구를 하며 놀고 있다”(마라도나)는 말까지 듣곤 했습니다(시사인, 2010. 6. 10).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사상초유로 성탄절이 있는 12월까지 진행되는 바람에 “메시아”라는 말이 더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사실 “메시아”라는 말의 용례는 운동경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현대철학자들 사이에서 “메시아”는 한 세기 동안 군림하고 있는 인기 유행어에 해당합니다. 일찍이 독일의 유대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2)은 “(…) 행복의 관념 속에는 구원의 관념이 포기할 수 없게끔 함께 공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약한 메시아적 힘(schwache messianische Kraft)이 부여되어 있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에서)라며 “메시아”라는 관념을 차용합니다. 이후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 것”(le messianique sans messianisme)으로 자신의 사상을 차별화해서 발표합니다. 신적인 간섭 내지 개입이 역사적 필연일 수는 없지만 메시아적 힘(운동)만은 수긍한다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역시 “메시아적 도래” 혹은 “메시아적 세계”라는 개념을 언급하는데 뜻밖에도 성경의 바울서신에서 그 근거를 도출하는 그의 사상을 “메시아 없는 메시아니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한보희). 사도 바울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던 모로코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lain Badiou) 또한 비슷한 메시아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메시아”라는 인상적인 개념을 불교계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불교의 미륵(彌勒)이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다’는 주장을 들어보셨습니까? “미륵”(彌勒)은 미륵보살이라고도 하고 미륵불이라고도 하는데,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도래한다는 존재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메시아와 그 지위와 역할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게다가 단어 자체도 본래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자비나 우정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 ‘미트라’(Mitra)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마이트레야’(Maitrya)가 파생되었고, 이를 한자어로 번역하면 “미륵”이지만 히브리어로 번역하면서 “메시아”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입니다(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42). 그러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면 오히려 기독교의 메시아 개념이 불교의 미륵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 합니다. 하기야 주지스님이 누가 교회에 가서 이야기하고 오겠는가 하니 모두가 쭈뼛거리는 상황 속에서 동자승 하나가 손을 들고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유머도 있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의 앞부분부터 등장하는 ‘기름 붓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마쉬아흐’인데, 메시아라는 말은 이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등장 시기는 불교의 미륵 사상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기원전 5, 6세기 인물로 알려진 반면, 기름부음은 그보다 천 년 이전의 야곱(창 35:14)이나 모세의 시대에 이미 등장하고 있고(출 30:26),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인 제사장(출 30:30)이나 왕(삼상 10:1; 삼하 2:4)의 출현 또한 마찬가지로 불교의 미륵에 비해 훨씬 앞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메시아”는 신령한 기름부음을 받을 자로 인류의 구원자요 대속자로 오실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그 표적을 이사야서(9:6)를 비롯해서 수많은 책들이 점점 더 또렷하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렘 23장, 겔 34장, 암 9장, 미 5장 등). 바로 그 진정한 메시아가 이 땅에 나신 성탄의 달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지양합니다. “메시아적 세계”가 아니라 ‘메시아의 세계’를 수긍합니다. 이단에서 곧잘 도용(盜用)하듯 예수 이외에 그 누구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월드컵 우승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도탄에 빠진 이 세상 속에 참된 “평화”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메시에겐 미안하지만, 오직 메시아 예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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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 [은혜의말씀] 기도 :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킵니다!(출 32:7~14)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모든 죄를 싫어하시지만, 그중에도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 음란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진노하십니다.(10절) 모두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십니다. 모세를 조상으로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면도, 모세에게 나를 말려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오버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심으로, 모세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시고, 마치 그의 기도 때문에 참으시는 것처럼 하시면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14절)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모세의 기도는 과연 어떤 기도였습니까? 1. 언약을 붙드는 기도였습니다.(13절) 구약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약속입니다. 그 언약이 다윗으로, 그리고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는 것이 신약입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드리는 기도는 강력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잘났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늘 연약하고 범죄 하였지만, 우리를 향한 신실하시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드심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성도님들은 자기 생각, 자기 고집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자신을 드리는 기도였습니다.(32절) 모세는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자기 생명을 죄인을 위한 제물로 기꺼이 바치고자 합니다. 죄인과 한 운명이 되려는 뜨거운 마음, 이것이 중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세의 간구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의 기도를 보면서 한 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드리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진멸 당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생들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간절히 중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그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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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1
    작은 시골마을에 조그마한 개척교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한해 몇 차례는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즐거움의 가장 큰 이유는 맛있는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어서 일거다. 다음으로 성탄절의 뜻도 의미도 잘 모르면서 재밌게, 힘차게, 열심히 불렀던 탄일종, 동방박사 세 사람이란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니기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인데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함께 어울리고 노는 것이 재미있었던 거 같다. 예를 들어 탁구치고, 성경퀴즈, 성경 찾기, 찬송가 찾기 등이 즐거웠지만 특별히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중 고등학교 시절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당시 학생신앙운동이라는 연합활동이 있었는데 대림절기가 되면 그동안 준비하고 연습한 연합찬양의 밤을 가졌는데 그 감동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는 지금 대강절 기간을 지나고 있다. 가을을 노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미처 덜 준비가 된 우리의 몸은 적응을 위한 적지 않은 고통을 격기도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은 인정도, 사정도 없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연초에 계획하고 꿈꾸었던 일들을 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곧 다가올 새해를 기대하는 열정을 새롭게 주시는 주님을 인하여 감사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는다.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을 어떻게 맞고 보내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해마다 달랐다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도 너무나 달라져 적응이 쉽지 않을 정도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제한적이었던 교회공동체내의 활동이 다시금 시작되는 분위기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 옛날이 회상될 때가 많다. 예컨대 요즘은 보기 힘든 새벽송의 추억이다. 성탄 이브에는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예배와 음악회가 진행되고 이어서 게임도 하며 밤을 지새우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빛을 쫒아 새벽을 깨우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온 누리에 알리는 것이다. 비록 아름다운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우리 중심에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담아 구원의 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리고 온 세상에 이 놀라운 주의 사랑을 노래로 증거하고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는 복된 성탄의 계절이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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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5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3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시간을 통해서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나누면서 그 대안으로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제시하고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장점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특징을 좀 더 알아보고 이를 활용한 이미지 전개형 광고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상상력은 현실을 떠난 허황된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함으로서 회중들에게 설교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더욱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를테면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고 그 다음 장면을 각자 상상해서 말하게 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로 위를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보여주고 잠시 뒤 이 차가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서 말하게 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회중들은 각자 이 차가 잠시 후 어떤 일을 겪게 될지 각자 상상해서 의견을 낼 수 있다. 계속 잘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고, 중간에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연료가 떨어져서 도로 한 복판에 서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고 심지어 갑자기 앞에서 달려온 다른 차와 정면충돌을 하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회중들과 나누면서 우리는 회중들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지금은 아무 일 없이 잘 달리고 있는 이 자동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평안해 보이는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이렇듯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음을 한 장의 이미지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인도에 혼자서 생존하게 됐을 때 필요한 물건을 한 가지만 고르라고 말한 뒤 손전등, 확성기, 망치, 돋보기, 책, 알람시계, 마술 모자 등의 물건을 이미지로 보여주면 회중들은 이 물건들 중에서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회중들은 각자의 생각의 차이도 알 수 있게 되고 말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위기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이 때 이미지는 단순히 물건을 보여주는 역할이 아니라 회중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구로 쓰인다. 이렇듯 상상력은 설교에 회중들의 생각과 의견을 첨부함으로써 당연하게 생각되는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서 회중들은 성경 본문을 더욱 풍성하게 만날 수 있으며 만날 말씀을 자신의 삶에 더욱 분명하게 적용하면서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이미지 전개형 광고 활용하기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장점은 곧바로 광고로도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교회 예배시간의 광고는 주보에 나와 있는 그 주의 주요 내용을 인도자가 읽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는 교회의 일상에 익숙한 기존 교인들에게는 유효하지만 처음 교회를 찾은 새 가족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간에 전달할 광고 내용을 강단의 대형 화면을 통해서 이미지와 영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광고는 모두의 눈을 사로잡기에 적합하다. 특히 필자가 섬기는 성민교회에서는 매주일 광고시간에 교회학교에서 예배하고 활동하는 다음세대들의 모습을 부서별로 이미지와 영상으로 편집하여 회중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장년 교인들이 교회학교에 관심을 갖는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눈으로 매주일 다음세대 부서의 활동을 지켜본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교회학교 행사를 돕게 되고 기도하고 후원하면서 장년과 다음세대의 효율적인 연결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전개형 광고는 가정예배의 정착과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존의 가정예배는 순서지를 나눠주고 가정별로 예배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인데 이는 누가 참여하는지 잘 알 수 없고, 참여할 동기 부여도 잘 되지 않는다. 이 때 가정예배 인증샷을 찍어서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하고 이 인증샷들을 매주일 광고시간에 한 장씩 보여주면서 소개하면 가정예배를 드린 가정은 온 교회 앞에 소개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참여하지 못한 가정들은 참여한 가정들의 인증샷을 보면서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고 가정예배에 동참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성민교회를 찾은 새 가족들의 하나같은 이야기는 교회가 참 따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일예배 한 번 드렸을 뿐인데 어떻게 교회가 따뜻한지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이미지 전개형 설교와 이미지 전개형 광고의 효과이다. 30분의 설교시간동안 대형화면으로 설교자의 얼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팎의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서 설교 말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광고시간에도 교회의 여러 부서, 여러 성도들의 다양한 활동들을 접하고 나면 짧은 시간이지만 교회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이야기를 들은 듯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느낌을 받은 새 가족들은 교회에 등록하여 정착하는 비율도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성민교회가 시도하고 있는 이미지 전개형 설교와 이미지 전개형 광고는 준비과정이 힘들지 번거롭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성과와 반응을 건져 올리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협 속에서도 교인 수가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나고 다음세대의 유입과 교회 예산이 도리어 올라가는 현상은 이미지로 교인들의 마음을 열고 자연스럽게 복음이 각 사람의 심령 속으로 파고들도록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시도를 모든 교회들이 시도해보길 권면하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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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12-20
  • [신앙교육나침반]세대통합 성탄놀이터 Happy Birthday Jesus!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므로 죄와 함께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가운데 고통 받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로 몸소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은 죄 가운데 고통 받는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감이 도사리는 세상, 그리고 초미세먼지와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오염!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한숨만 안겨다줄 뿐, 기뻐할 소식은 없는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가복음 2장 10-11절 말씀에서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줄 소식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일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코로나 펜데믹 속에서 무력감과 불안을 겪는 다음세대에게 기쁜소식일까요?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나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이었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죽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올해 성탄절기에는 온 세대가 이 기쁜 소식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시간을 꼭 마련해보시길 바랍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세대를 분리하지 않고, 교회의 여러 세대가 기쁜 소식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우리집 성탄놀이터를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습니다. 종이컵과 복음색깔 탁구공을 이용해서 복음을 즐겁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쁜소식 릴레이 모든 사람이 양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두 줄로 나누어 팀대결 놀이를 합니다. 기쁜 소식 공을 옆 사람의 종이컵에 전달하면서, 공의 색깔에 해당하는 복음단어를 말하면서 전달합니다(하늘색 “하나님!”, 빨간색 “십자가!”, 노란색 “자녀!”, 초록색 “생명!”). 제한시간을 정하여, 더 많은 기쁜소식 공을 마지막 사람 또는 바구니에 전달한 팀이 승리합니다. ✤기쁜소식을 찾아라! 두 팀으로 나누어, 동일한 수의 종이컵을 준비합니다. 종이컵 바닥에 누가복음 2장 11절 말씀의 30개 글자를 적은 후, 종이컵 바닥의 글자가 보이지 않게 세워둡니다. ‘시작’신호와 함께 종이컵을 뒤집어서 글자를 확인한 후에, 누가복음 2장 11절 말씀의 순서대로 종이컵을 포개는 놀이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을 완성한 팀이 승리합니다. ✤기쁜소식이 짠! 종이컵 바닥에 복음색깔 스티커를 부착하고, 기쁜소식 팀과 방해팀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기쁜소식 팀은 기쁜소식이 드러나게 종이컵을 뒤집어 세우며, 방해팀은 기쁜소식이 나타나지 않게 종이컵을 뒤집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기쁜소식 스티커가 더 많이 나타났다면 기쁜소식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집 성탄놀이키트 구입문의 | 향기나무교육개발원 031-30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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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12-20
  • [다음세대칼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1-2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해마다 그 느낌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해는 성탄절을 준비하느라 분주함으로 맞이하기도 합니다. 어떤 해는 들떠있는 세상의 분위기에 마음이 들뜬 상태로 맞이하기도 합니다. 올해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드는 생각은 위로였습니다. 이번 주에 만난 청소년 때문입니다.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입니다. 현재 중학교 1학년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가정환경은 부친과 모친이 오래전 이혼한 결손가정입니다. 부친은 현재 조현병으로 입원치료중입니다. 모친은 외국인 여성으로 현재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현재 학생은 조부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아무런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이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복지적 혜택보다는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탄의 계절에 이 학생을 만나면서 묵상이 되었던 말씀이 바로 이사야 40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주의 백성 된 우리를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 고통받고 여러 어려움에 허덕이는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을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이사야 40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 200년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 될 때는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이후의 일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에 대항하여서 많은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승리 이후에 히스기야는 병이 들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에서도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문병을 온 바벨론 사신에게 히스기야는 자신의 건재를 자랑이라도 하듯 자신의 창고를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창고가 아니라 자신에게 승리를 주시고 병에서 놓임을 얻게 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어찌되었던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기를 심판의 날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소유와 자손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회복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 첫마디가 “위로하라”입니다. 이 말씀이 있고 130여년 후에 남 유다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포위 되어 있는 동안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습니다. 살아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바벨론의 칼에 죽어 일부는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70년 후에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말 그대로 위로일 뿐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은 정확하게 70년 만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미리 예고하며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40장 2절 말씀에 보면 ‘힘든 노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음을 선언’해 주시므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패역한 삶의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를 통해 70년간의 포로기간을 예언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70년간의 포로 기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포로로 끌려 갈 때부터 첫 번째 돌아 올 때까지가 70년입니다. 또한 성전이 파괴되고 재건 될 때까지가 70년이었습니다. 누가 일부러 짜 맞추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은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성탄은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세상의 온갖 환란과 고통 속에 살고 있던 우리들을 완전히 놓아 주신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으로 이 일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노역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끝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의 사하심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입니다. 이 놀라운 일의 시작,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성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은 우리의 노역의 때가 끝나고 우리의 죄악의 사함을 받게 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위로자 되시는 우리 주님을 전하는 이번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자 되십니다. 주님만이 세상의 위로자 되십니다. 필자가 만난 학생에게도 위로자 되십니다. 그 학생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위로자 되시는 주님이 증거되는 이번 성탄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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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목회자칼럼] 유토피아와 성탄절
    하늘에서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아담한 집의 창문 사이로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때 가족 중 막내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더니 보란 듯이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다음주는 드디어 크리스마스에요. 제가 1년 동안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죠?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해요. 그리고, 예수님 제가 올해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은요...” 5살 어린이가 바라는 성탄절의 참 모습은 예수님이 자기가 바라는 선물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1년 동안 꼬박 12월을 기다린 것도 성탄절이 되면 생일, 어린이날과 마찬가지로 떳떳하게 하나님께 선물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선물을 가지고 올 것이라 믿으며 그 선물을 받는 크리스마스가 5살 어린이에게는 최고의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막내의 기도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아이의 아빠는 달력을 보며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승진발표일’이라고 적힌 것을 봅니다. 1년의 마지막 승진 발표가 있는 날이 하필 크리스마스 다음날입니다. 아빠는 오래전부터 승진을 준비하고 원했는데, 하필 그 날이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혹시, 예수님의 생일을 맞아 나를 위해 승진을 준비한 것이 아닐까?’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26일에 승진이 된다면, 이 아빠에게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자, 그 곳이 곧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성탄절을 꿈꾸고 있나요? 5살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이 어떤 선물을 주실까?’ 기대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 아이의 아빠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예수님이 승진을 시켜주시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있나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가 되면 뭔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뭔가를 주시지 않을까? 이왕이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걸로, 가능하면 돈이 좀 되는 걸로...” 어렸을 때,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집에 들어오는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들린 맛있는 간식들이 더 반가웠던 것처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사실만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나를 위해 가지고 왔으면 하는 것들로 기대하며 반기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어지럽고 힘든 세상, 경쟁과 다툼 속에 참 평화와 평안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내 마음 속에서 충만히 이뤄질 때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어디든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많이 소유해야지 유토피아가 이뤄질 것이라 말하고, 더 높은, 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지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혹은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밟고 일어나야지 유토피아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참 평안’을 맛보기만 하면 그곳이 유토피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알 리도, 알 수도 없는 비밀이자, 기쁨인 셈입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한국교회가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실을 다지고 오히려 성숙할 수 있는 자양분을 쌓은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2022년 크리스마스에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실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 예수님의 탄생 그 사실 만으로 기뻐하며 그 속에서 참 의미를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는 도피적 유토피아 대신 무너진 사회와 정의를 회복하는 재건 유토피아를 2023년에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2023년에는 내실이 든든한 한국교회, 거품보다는 알맹이가 있는 한국교회로 성숙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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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횡령없다는 부기총’, 새로운 사실 드러나
    최근 부기총이 기자회견을 열고 “트리축제와 관련해서 횡령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부 업체가 후원비를 제공했지만, 이 돈도 트리축제 자비통장에 입금되어 결국 트리축제에 사용됐고, 개인적으로 횡령한 사실 자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부기총의 이러한 주장과 달리 최근 새로운 사실이 경찰청 반부패조사팀에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접수된 이 내용은 개인의 명백한 횡령 내용을 담고 있는데, 돈이 오고간 통장 내역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구체적인 추가 제보 내용도 담고 있어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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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박옥수와 상관없다는 그라시아스...?
    부산시 금정구 모 중학교가 문화예술체험 행사로 그라시아스 합창단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계획했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은 이단 박옥수가 설립한 합창단으로 박옥수 성경세미나와 IYF 월드캠프 때 꼭 등장하는 합창단. 일부 크리스천 학부모들이 학교측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학교측은 “오래전부터 계획했고, 지금와서 행사를 취소 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해당 학교장은 “우리가 가는 날(9일)에도 부산지역 3개 학교가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학교만 취소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동래교육청 소속 장학사도 “주최측(그라시아스 합창단)은 박옥수와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학부모가 문제제기를 계속할 경우 법적인 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결국, 일부 학부모들과 금정구기독교연합회 등 다양한 곳에서 학교측에 문제제기를 했다. 금정구기독교연합회 모 목회자는 “행사를 강행할 경우 학교 측에 항의방문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확산되자, 학교측은 공연관람 하루 전 전체교사회의를 통해 행사를 무기한 연기했다. 일부 학부모들은 “포털에 검색만해도 그라시아스 합창단 설립자가 박옥수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는데, (박옥수와)상관없다는 말은 정말 궁색한 변명”이라고 비난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금정구 모 중학교가 그라시아스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세운 예산만 1,800여 만원에 이른다는 것. 공연 1회당 수 천만원의 입장료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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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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