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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영광 대표]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을 압도하는 파괴적인 무기, 다름 아닌…
    최근 북미에서 영화 <바비>가 커다란 흥행을 거두었다. 한국에서는 힘겹게 60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지만,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9월 4일 기준 13억 81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며 올해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 <바비>는 정치적 올바름과 페미니즘과 관련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노골적으로 관객을 훈계하려 드는 장면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에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꼬집은 다큐멘터리 <여자란 무엇인가? (What is a woman?)>로 유명한 맷 월시 감독은 영화 <바비>를 동시기에 상영중인 영화 <오펜하이머>와 비교하며 트위터에 “지금은 페미니즘이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기 딱 좋은 때”라고 논평했다. 놀랍게도 맷 월시의 논평은 과장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수많은 태아들을 죽였다.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존귀하고 무고한 한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낙태의 현실이다. 태아는 수정 시점부터 지구상의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유전자를 가진다. 또 겨우 임신 6주차 즈음부터는 태아의 심장박동이 시작된다. 엄연한 생물학적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따라 미국의 많은 주는 심장박동이 확인된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소위 심장박동법을 제정하여 태아를 살인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오늘도 페미니즘 진영은 ‘나의 몸은 내가 선택한다(My Body, My Choice)’라는 구호를 외치며, 태아는 세포덩어리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후기 낙태의 합법화까지 밀어부치고 있는 모양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페미니즘은 가족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차일드 트렌드(Child Trends)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전인 1960년대 초에는 미국에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가 9%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그 수치가 30%까지 증가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의 이혼율도 2배 이상 증가했다.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로가 있다고 무작정 미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페미니즘 운동은 우생학과 성해방을 주장하는 운동가들과 뒤엉키며 반가족적이고 반남성적인 기조가 강했다. 이후 2세대 페미니즘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족의 해체를 주장했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 중 한 명이었던 케이트 밀레는 그녀의 논문 ‘성 정치(Sexual Politics)’를 통해 “성 혁명은 전통적인 성적 억압의 종식을 요구한다. 특히 가부장적 일부일처 결혼을 가장 위협하는 동성애, 청소년기의 성관계, 혼전 및 혼외성관계 등을 금기시하는 것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가족의 존재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믿었다. 그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트랜스젠더리즘 역시 페미니즘의 탄생과 함께 등장하였다. 남성과 여성은 생식기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던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성역할은 일종의 고정관념이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계승한 것이 바로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인 것이다. 페미니즘의 산물인 트랜스젠더리즘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트랜스젠더들이 여성 운동 대회에 참가해 메달을 휩쓸거나 탈의실, 화장실 등 여성의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전 세계에 큰 파괴와 혼란을 가지고 왔다. 아래는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핵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그러나 해당 대목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은 원자폭탄이 아닌 페미니즘인지 모른다. 대한민국도 페미니즘이라는 강력한 살상무기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남녀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결혼과 출산율 역시 바닥을 모른 채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과 대한민국 소멸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그 원인을 잘 파악해야 한다. 결정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생각과 가치관이다. 남녀 갈등과 가정 해체를 부추기는 페미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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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9-08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기도로 출범한 구미위원부와 이대위 목사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고, 5월 31일 오전 10시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대한민국 국회를 개원했을 때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은 서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된 이윤명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대한민국 공문서 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 부부분에 기제 되어 있다.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한 것은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승만의 신앙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정사(政事)에 앞선 이승만의 기도요청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 김정민 박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이승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한 김정민 박사는 「월드뷰」 2023년 4월호에 기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외교의 시작은 기도였다”라는 글에서 1919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했던 구미위원부 출범식에서도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대위 박사께서 목사로서 기도로 구미위원부 창립식을 열어주시겠습니다.” 이 요청에 따라 이대위 목사는 회의에 앞서 1,854자에 이르는 긴 기도로 회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문으로 기록된 이 기도문 전문이 김정민 박사에 의해 번역되어 위의 잡지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국내외에서 명칭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는데, 1919년 9월 11일에는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그런데 통합된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약 2주일 전인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한성정부(漢城政府)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설치했다. 민족의 대표성을 지닌 외교기관의 출범이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위원장은 김규식이었고 위원은 송헌주와 이대위였다. 그런데 이 구미위원부가 공식 출범하게 된 8월 27일 공식적인 회의에 앞서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시작하는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이승만에게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건국 이상을 지닌 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기도했던 이대위(李大爲, David Lee, 1878-1928) 목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정민 박사에 의하면 이대위는 1878년 평안북도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니 이승만 보다 3살 아래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유학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때는 1903년이었다. 이때부터 동포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단합을 모색했고, 1905년 4월에는 민족운동 기관인 공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1908년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고, 그해 가을 UC 버클리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이대위는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 등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에는 국민회의 설립에 관여하였고,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부회장으로 국민회의의 기초를 닦았다. 그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애국동맹단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학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인 1911년 2월 32살의 나이로 상황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윤병구 전도사의 후임이었다. 이때부터 50세가 되는 1928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 간 이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1912년에는 집사목사(deacon) 안수를 받았고, 1913년 5월 14일에는 버클리대학교를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학사학위(Social Science)를 받았다고 한다. 1918년 4월 25일에는 산 안셀모에 있는 센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의 일이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미국남감리교 태평양 연회에서 드 보세(Du Bose) 감독에게 '장로목사'(elder) 안수를 받았다. 이처럼 면학과 목회활동과 함께, <대도>와 <신한민보>의 주필로서의 문필활동, 그리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래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19년 3월 미국에서 독립선언서에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같이 서명하였고, 1919년 8월에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래서 그 출법식에 대표기도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시절에도 기도로 회무를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이대위라는 한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기에 역사연구란 사건과 인물과의 만남(encounter)이라 하지 않았던가! (202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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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9-08
  • [서임중칼럼]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
    유구무언(有口無言)이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너무도 과분한 은혜를 입을 때도 그렇고, 기가 막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도 그렇고, 잘못을 저지르고 사실이 드러날 때도 그렇다. 살아가노라면 진실과 사실과 왜곡에 혼돈되어 정사(正邪)를 분별 못 하고 우(愚)를 범할 때가 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고 감옥에 갔을 때의 당시 상황에 접근해 보면 어떤 사람은 노예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주인마님을 엿보다가 옥살이한다고 진실을 왜곡하여 비난하고, 어떤 사람은 요셉이 주인마님 방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역설한다. 그런데도 요셉은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으니 사실일 것이라고 비난을 더 한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하나님과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아는 것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왜곡하여 보디발에게 이야기하여 요셉이 감옥에 가게 된 왜곡의 대표적 사건이다. 세상 방법의 법리적 결론은 왜곡이 진실을 이긴 것 같다. 약자로서의 요셉은 강자로서의 보디발의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회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이 상황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루벤스의 작품 <simon과 pero> 명화(名畫)가 있다.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춘화도 같다고 왜곡한다. 그림의 내용으로서는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그림의 진실은 아사(餓死)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한 딸의 지극한 효성의 마음을 표현한 루벤스의 작품이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사실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왜곡하여 비난하게 되지만 진실을 알고 나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은퇴 후 9년을 지나면서 전국 600여 교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농어촌, 산골과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듣고 보고 느낀, 지상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진실과 함께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노래하던 교회가 한 순간에 분쟁으로 벌판이 되어가고, 헐뜯고 비방하는 아귀다툼이 되고, 결국에는 산산조각이 난 그릇처럼 되는 것을 본다. 그 분쟁의 중심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하여 벌판이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유명인들의 경찰, 검찰 조사와 관련된 보도가 항상 쏟아지고 있다. 유튜버들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서 내용을 퍼 나르는데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보는 것 같다. 진실은 법정에서 마무리되지만, 법리적으로 진실이라고 마무리된 사건도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후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억울하게 옥살이한 예도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접한다. A 목사의 경우, 예산위원회 예산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통과하여 집행한 특별항목의 지출을 횡령이라고 SNS를 통해 유포되어 A 목사를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의 시선이 차갑고, 그 아름답던 인간관계가 뒤틀려진 상황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진실은 모든 회의의 기록이 있고, 사실은 그 금액이 집행되었고, 왜곡은 횡령이라는 단어로 A 목사를 죄인으로 만들고 공동체는 벌판이 되어갔다는 것이다. 결론은 모든 것이 왜곡으로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동안 A 목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로 인한 교회의 혼란과 그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아픔은 그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B 장로의 경우, 개인 사업을 하면서 예배당 건축위원장의 직무를 맡아 교회 건축을 하면서 장로님 개인 돈을 더 많이 들여 건축하였는데, 건축비 횡령으로 고발되어 구치소에 갇히었다. 법정에서 판결로 마무리된 일이지만 진실은 건축비 중 5천만 원을 어음 처리를 위해 당회장에게 허락받고 며칠 사용하였는데 이 사실을 횡령으로 소위 광고지를 예배당 안에 뿌리는 그것이 발단되어 결국 법정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담임목사가 증인석에서 진실보다 교회 상황에 얽매여 5천만 원 사용을 모른다고 하여 B 장로는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재판 결과는 반대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장로는 억울함이 벗겨지고 대신 목사가 위증으로 처벌받게 된 사건이었다. 진실은 장로가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한 헌신이었고, 사실은 5천만 원을 며칠 사용한 것이고, 왜곡은 그것을 뒤집어 찌라시를 만들어서 뿌리고 담임목사가 거기에 맞추어 동조함으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B 장로는 탄원서를 써서 담임목사의 위증에 대한 처벌을 선처해 달라고 판사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B장로는 조용히 그 교회를 떠났다. 유구무언이다.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접근방법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사람은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 확인도 없이 왜곡에 관심을 더 두고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이해관계로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그 이해관계 당사자로서는 그 상황의 여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의 보편적이라면 극복하는 지혜를 요셉과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 즉 아프지만 침묵하며 자기의 삶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뿐임을 확신하는 마음가짐에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믿고 대처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요셉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다. 어쩌면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비를 피하지 말고 맞으라는 교훈이리라. 필자의 저서 가운데 <성도입니까?>가 있다. 세례받고 교적부에 등재되면 교인이 된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전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의 존칭, 천주교에서는 특히 공덕이 높은 신자라고 표기한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인도 성도도 제자도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한다. 나는 어떤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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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성서연구] 시세를 아는 사람들
    역대상은 읽기 어려운 성경으로 인식됩니다. 족보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족보에서 시작된 역대상은 11장에 오면 다윗이 왕이 된 것을 알리고, 다윗을 도운 용사들을 거명합니다. 12장에는 다윗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을 나열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장군이요, 사위였지만, 사울은 그를 정적으로 인식하여 죽이려고 시도했고, 다윗은 여러 해 동안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후에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 중 전사한 후에도 다윗이 곧바로 왕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 이는 다윗이 유다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모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받들었습니다. 칠년 육 개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상황이 사무엘하 2장 8~11절에 나옵니다. <8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그런데 다윗과 사울의 가문의 긴 전쟁과 대립의 와중에 점점 다윗에게로 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을 보면 이에 대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12장에는 이 무렵 다윗에게로 온 사람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중에 잇사갈 자손 중에 이백 명이 다윗에게로 왔는데, 본문이 이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본문을 보면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시세를 알고>란 대목이 나옵니다. 『NIV성경』에서는 <understand the times>라고 했고, 『쉬운성경』에서는 <때를 분간할 줄 아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인의성경』은 <그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시대의 자녀입니다. 특정 시대에 태어나 시대의 영향을 받으며 삽니다. 시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시대에 올바른 삶의 열매를 맺으려면 시세를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때에 대해 전도서 3장 1~8절은 유명하지요.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때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처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2023년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때일까요? 올해는 광복 78주년이며,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70주년입니다. 아직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고통당하고 있고, 전쟁 위협은 점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창조질서를 거부하는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지향의 문제로 사회가 어지럽고, 흉기를 들고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말기적 증세를 보고 있습니다. 자연 파괴로 인한 기후 이상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도 시세를 분별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게으를 때가 아닙니다. 눈앞의 일에만 매달릴 때가 아닙니다. 개인의 작은 이익을 추구할 때가 아닙니다. 평소처럼 행동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비상 상황을 선포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랑을 빼앗긴 날과 같아서 금식할 때입니다. 지금은 잘못된 다수가 아닌, 의로운 소수와 뜻을 함께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다시 허리띠를 동여매고, 출발선에 서야 합니다. 다시 새벽을 깨워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시세를 아는 현명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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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시사칼럼] 더 이상 금모으기 없는 세상을 꿈꾸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제새만금잼버리대회가 무수한 얘깃거리를 양산하면서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그 가운데 돌연 ‘금모으기운동’이 소환이 되어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요. 시설 및 여타 준비 소홀과 태풍으로 인한 기상악화로 인해 야영을 비롯한 본래 행사가 조기종료가 되면서 수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을 위한 후속조치가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집권여당의 정책위의장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금반지 정신으로 돌아가면 못할 게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역시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일부 멤버가 군 복무 중인 비티에스(BTS)를 동원하자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가수 몇이 참가하는 케이팝(K-pop) 콘서트가 열려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다시없을 잼버리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색다른 금모으기운동의 모습을 한 차례 더 보여주었습니다. 대기업들 특히 삼성은 음료와 의료진 심지어 신입사원까지 투입했고, 엘지와 포스코 그리고 현대그룹 등이 각종 물품과 인원을 지원했으며, 이마트와 파리바게트 등 유통업계도 이에 질세라 뛰어들었고,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이런저런 후원에 나섰습니다. 종교계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숙소 지원에 나섰고, 사찰 또한 템플스테이 같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제공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적 위기 순간에 거짓말처럼 등장하는 대한국민들의 감동적인 사연이 이어졌습니다. 대원들을 알아보고 마치 자기 잘못인 양 ‘미안하다’를 거듭하며 물이라도 한 병 건네고 과자를 사 주며 물건이나 음식 값을 깎아주고 보듬어주고 두드려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슴 뭉클한 시민들이 속출하면서 ‘아, 대한민국~!’ 가슴 벅찬 구호를 거리마다 소리 없이 울려 퍼지게 하는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원래 금모으기운동의 시작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효시입니다. 일단 남성들 중심으로 3개월간 금연하며 모은 돈으로 나라 빚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보다 더 대범한 여성들이 가락지와 패물을 모으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합니다. 남녀노소 신분고하 종교신앙을 막론하고 전국민이 참여하여 심지어는 도적떼까지 모인 금붙이들을 훔치기는커녕 자신들 것까지 보탰다는 전설 같은 일화들이 넘쳐납니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금융(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나라가 또 다시 부채의 위기에 몰리자 우리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모습도 장엄했습니다. 차고 다니던 목걸이나 가락지는 물론 장롱에 두었던 돌반지나 심지어 우승메달까지 금으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내놓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금물결이 되어 방방곡곡을 수놓았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 1월에서 4월까지 석 달 동안 미국 자유의 여신상 무게와 같은 225톤의 금이 걷혔다고 했습니다(경향, 구혜영). 어쩌면 금보다도 더 귀한 무언가를 모은 사건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07년 12월 삼성중공업 소속 선단과 홍콩 선적의 유조선이 충돌하여 원유 12,547리터가 유출되면서 순식간에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는 대참사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이후 벌어졌지요. 어느 순간부터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서 양동이로 기름을 퍼 나르고 흡착포나 헌 옷가지 등으로 바위나 토사에 묻은 기름을 직접 닦아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여한 인원이 물경 123만 명에 이르렀고,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어깨에 어깨를 이어 시커먼 바닷가를 가로지르며 만들어냈던 ‘인간띠’는 그 어떤 화가가 그린 선이나 획보다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습니다. 복구에 수십 년도 모자란다던 내외신의 평가가 무색하게 국민들의 고귀한 땀방울들로 씻긴 바다는 불과 10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이제는 이런 소망을 가져봅니다. 더 이상 금모으기 운동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누군가 책임 있는 자들이 저지른 과오의 결과 초래된 재앙을 순진무구한 시민들이 대신 나서서 감당해야 하는 그런 일들은 이번 잔치(“잼버리” 뜻)가 마지막이면 좋겠다는 그런 소망 말입니다. 한국만의 상황도 아닌 것이, 성경에도 일종의 금모으기 운동들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목자를 잃은 양같이 고생하던 백성들을 애(腸)를 태우며(스플랑크니조마이, 막 6:34) 바라보셨는데, 그런 와중에도 성전을 위해 가진 바 전부인 두 렙돈을 내놓은 과부를 칭찬하셨고(눅 21:4),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기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기꺼이 내놓은 소년을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셨습니다(요 6:9). 반면에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도 호의호식하던 무리들을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셨고(마 12:34), 교인이라 하면서도 불의에 가담할 뿐 도무지 책임의식조차 없는 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 23:27). 분명히 그런 자들이 다시는 등장하지 않고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래서 착하기만 한 백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짐을 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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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은혜의말씀] 우리의 작은 헌신으로(막 6:34-43)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 12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가벼운 동정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하는 곳에 깊이 들어가, 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사랑과 긍휼의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는 저물어가고, 제자들도 많은 무리로 인해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를 보내어 자기들이 뭔가를 사 먹도록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고의 차이를 보십시오. 제자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함께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빈들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짐을 지기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달려 나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까’ 제자들은 이것은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며, 단정 짓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자원만을 보았습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계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자기의 능력만을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해야지요. 그런데, 제자들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어떻게 합니까? 머리 굴리기 바쁘지 않습니까? 사람 찾아다니기 바쁘고, 이리저리 끌어 막기 바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순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기도하십니까? 주님을 놓치면, 그때부터는 제자들같이 ‘부족합니다, 안 됩니다.’ 하게 됩니다. 부족할 그때가 바로 믿음의 눈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은 내 자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한 분만을 바라봅시다. 주님이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우리의 인생에 부족함과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대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답이 무엇인지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제자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한 끼 도시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받아 축사하시고, 떼어주십니다. 그랬더니, 떼어도 떼어도 끝없이 양이 늘어납니다. 남자만 5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12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빈들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짐을 진다면, 필요한 자원은 우리 주님이 책임져주신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오병이어를 드린 소년이 나옵니다. 이 아이는 작은 자기 도시락을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드릴 때, 그 음식은 작은 것이 아니라, 기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가 주님의 손으로 옮겨지는 순간, 땅의 일이 하늘의 사건으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탁월한 능력이나 은사가 없어도, 겸손히 순종하고자 애 써는 그 열심을 주님은 귀하게 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지만 큰 헌신이 주님의 손에 들려져 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조용하게 교회와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많아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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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작은 승리를 기뻐하는 아이로 키우자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기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은 큰 성공을 거두고 성적이 쑥쑥 올라가는데 우리 아이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아서 걱정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고 단시간에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어려울 때 우리는 작은 승리를 꿈꾸며 그것을 기뻐하는 아이로 우리 자녀를 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큰 성공, 큰 승리를 꿈꿉니다. ‘그게 아니면 아예 승리도 아니야.’ 라고 지레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상의 승리가 없어졌습니다. 일상의 간증이 없어졌습니다. 너무 큰 것, 대단한 것만 바라보니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한때 서울 수서동에서 유명한 과외 선생이었습니다. 과외 선생 홍 선생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거의 그 아파트 한 단지가 다 저의 필드였습니다. 제가 한 달만 쉬겠다고 그랬더니 어머니들이 안 된다고 해서 군대 입대하기 열흘 전까지 과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대하고 나서 과외를 다시 하라는 굉장히 많은 유혹을 받았는데 그걸 다 뿌리치고 월 27만원 받는 교육 전도사를 시작해서 목회의 현장으로 들어가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결국 돈보다 목회의 길을 걷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당시에 평균 60점 맞는 아이가 열심히 하겠다고 많이 찾아왔습니다. 홍 선생님 밑에 가면 뭔가 잘 된다니까 애들이 옵니다. 근데 60점 맞는 아이의 다음 시험 목표는 몇 점이어야 됩니까? 저에게 보내는 모든 엄마들의 목표는 100점입니다. 물론 제가 가르치는 클래스에 평균 100점 받는 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원래 99점 받던 아이입니다. 99점 받던 애가 저한테 와서 100점 맞게 되니까 전교 1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홍 선생이 전교 1등을 만들었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60점 받는 애를 데려다 놓고 100점 맞으라고 하니 어떻게 될까요? 그 아이는 도저히 100점 맞을 수가 없습니다. 또 실패를 맛볼 뿐입니다. 그 아이는 일단 한 문제부터 더 맞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65점부터 맞고 그 다음이 70점, 그다음 80점, 90점, 이렇게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절차와 계획이 엄마들의 마음에 들지가 않은 겁니다. “돈이 얼만데. 당장 100점을 맞아 와야지. 70점? 야! 다니지 마!” 그리고는 학원 끊어요. 그럼 그런 애들이 다시 60점으로 내려갑니다. 원위치가 되는 겁니다. 한 문제씩 맞춰갈 때 하나씩, 하나씩 배워갈 때, 기본기가 없는 애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배우고, 그다음 루트도 하고 미분, 적분도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언젠가는 100점도 맞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금 나의 수준보다 딱 한 단계만 더 올라가자, 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적어도 10단계, 20단계, 100단계는 단번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알아줄 만한 대단한 승리를 거둘 거야! 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목표는 항상 적어도 두 배 이상, 적어도 10배에서 100배 정도는 돼야 성공이지, 그렇지 않고 약간 늘어나는 건 성공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라톤을 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2.195km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걸음을 잘 달려야 합니다. 지금 한 발을 잘 디뎌야 결국에 이 한 발 한 발이 모여서 마라톤 코스를 완주합니다. 그러면 지금 나의 한 발은 승리인가요, 아닌가요? 승리입니다. 지금 나의 한 발은 성공인가요, 아닌가요? 성공입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이 뭐냐면 지금 나의 한 걸음이 성공임을 아는 겁니다. 지금 나의 한 걸음이 승리인 걸 아는 겁니다. 한번 도전했습니다. 한번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성공인 것이고 그게 승리입니다. 너무 큰 것을 바라보다가 지금을 놓치는 우를 범치 않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내가 예배하고, 지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성공이고 승리입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가 교회에 나오는 건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로 만족을 못하고, “적어도 중등부 회장은 해야지! 적어도 얘가 예배 인도쯤은 해야지! 찬양 인도쯤은 해야지! 우리 애가 드럼은 좀 쳐야지!”라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왔으면 대단한 겁니다. 업고 다니고 뽀뽀를 하고 용돈을 줘도 시원치 않은데, 구박합니다. “왜 아침에 나오는데 30분씩 걸리냐? 네 머리 괜찮은데 왜 또 감냐?”고 구박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환대해 주세요. 기쁘게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세요. 교회에 나오는 그 아이들이 너무너무 귀한 아이들입니다. 손흥민이라는 선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23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득점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골씩 넣어야 됩니다. 한 골씩. 이게 중요합니다. 축구공 23개를 한꺼번에 들고 와서 한꺼번에 뻥! 차 놓고 나 득점왕 됐다! 이럴 수 없습니다. 23골을 한꺼번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유명한 캘커타의 성녀라고 하는 마더 테레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기아에서 건지고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했습니까?”라고 묻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명씩 안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난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축구는 한 골이 중요하고 사랑은 한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적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거창한 성공보다 작은 승리를 기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길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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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8-18
  • [다음세대칼럼] 은혜의 집(2)
    만약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인다고 했을 때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 중에 몸이 가장 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정작 은혜가 필요한 중증 환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 연못은 진짜 은혜가 필요한 병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죽게 된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단순 감기 환자가 먼저 뛰어 들어가 버릴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만성두통과 복통 환자가 먼저 들어가 버립니다. 다리의 장애가 있는 사람이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운동하다가 다리를 접질린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쟁과 대립으로 가득한 살벌한 현장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각종 환자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로 인해 영적 질병에 걸려서 무기력, 무능력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 줍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있어서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고통스러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다리를 절고 있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고 긴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중풍병자와 같아서 진리를 향하여 움직이거나 진리 안에서 활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예 진리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불신자들, 모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모든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들도 비슷합니다. 무한 경쟁시대 속에서 교회와 교회도 형제가 아닌 경쟁자입니다. 교회와 교회끼리 경쟁합니다. 서로 큰 건물 짓기 경쟁을 합니다. 서로 사람 수 늘리기 경쟁을 합니다. 몇 십억, 몇 백억, 몇 천억 단위의 건물을 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큰 건물이 많은 사람을 흡수하고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룰 발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왕들을 뽑습니다. 진돗개 전도왕, 양육 전도왕, 파워 전도왕, 능력 전도왕, 웃음 전도왕, 심지어 마사지 전도왕까지 뽑습니다. 그리고 이 전도왕들은 자신들의 노하우를 집회를 통하여 전파하고 다닙니다. 이런 교회들끼리의 경쟁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감투 경쟁, 기득권 경쟁, 자기중심적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경쟁 원리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넘쳐야 할 교회에 38년 된 병자와 같이 남을 원망하며 남을 탓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현실입니다. 은혜는 사라지고 온갖 원망과 불평과 불신과 판단으로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혹자는 세상보다 더 이기적이고 더 자기중심적인 곳이 교회라고까지 말합니다. 참으로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습니다.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예수님을 보고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자비와 은혜의 실체가 되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예수님을 찾고 그를 절대적으로 의지합니까? 주님이 계실 때에야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 되고 맙니다. 주님이 계셔야만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고 부를 수가 있게 됩니다. 주님이 계실 때 그곳은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베데스다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살아야 합니다. 베데스다는 오늘날 교회입니다. 은혜와 자비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베데스다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소원해야 합니다. 예수만이 소망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만이 치유자이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독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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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신앙교육나침반] 온 세대가 하나 되는 전교인 수양회, 기적을 만들어내다!
    서울 강남일 교회 150여명의 온 세대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주제로 전교인 수양회를 열었습니다. 미래를 꿈꾸는 3세대와 현재를 열정으로 살아가는 2세대와 과거 역사의 유산과 지혜를 품은 1세대가 3일 동안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강남일 교회 전교인 수양회의 주요 프로그램은 담임 목사님의 저녁 말씀집회와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이 이끄는 온세대 복음놀이터입니다. 지난 5월에 저는 교회의 요청으로 오후예배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설교시간에, 이 시대를 살아하는 자녀세대에게 교회와 가정이 하나 된 자리가 얼마나 가치 있고 절박한지를 강조하였습니다. 담임목사님과 많은 성도들은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복음을 놀이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러한 복음 놀이 안에서 온 세대가 하나 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 하셨습니다. 당시 교회는 올 여름 전교인 수양회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분리하여 별도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교회는 향기나무에 연락을 주셔서, 온 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복음을 놀이하는 시간을 요청해주셨습니다. 드디어 전교인 수양회의 온 세대가 복음놀이터가 시작되었습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150여명의 온 세대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온 세대가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주제의 복음 말씀과 놀이에 참여하였습니다. 강남일 교회는 특히 1세대 실버 어르신들이 절반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2세대 장년들과 3세대 다음세대들은 바닥에 앉고,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실버어르신들은 관절이 불편하셔서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힘도 없으시고, 표정도 없으셨습니다. 과연 온 세대 복음놀이터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한마디로 ‘미라클’이었습니다. 향기나무의 세대통합 복음말씀이 시작되자, 온 세대가 숨죽여 매력적인 복음에 사로잡혔습니다. 복음은 연령과 성별과 직분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선사하였습니다. 1세대와 2세대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3세대를 품에 안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3세대는 1세대의 2세대의 진심어린 기도와 응원의 미소 앞에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복음 놀이가 시작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세대와 3세대가 주도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1세대 실버부대의 함성소리가 온 강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왕년에 강남일 교회를 세우셨던 뜨거운 열정이 2023년도에 다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뜨겁게 즐거워하며 복음놀이에 참여하셨습니다. 2세대와 3세대는 1세대의 숨은 열정과 천진난만함을 보며, 실버세대의 새로운 모습에 감격했습니다. 강남일교회의 40년 역사를 품은 1세대와 교회를 열정으로 세워가는 2세대, 그리고 강남일 교회의 미래를 꿈꾸는 3세대의 매듭이 묶여지니, 놀라운 기적이 만들어졌습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전교인 수양회는 미라클(miracle: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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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8-18
  • [양육칼럼] 묻지마 범죄를 보며 양육태도 돌아보기 : 십계명을 되새기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요건을 먼저 선포하신 것이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열 가지 말씀이 나타내는 신앙과 윤리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계명 속에 들어 있는 신앙과 윤리적인 삶을 구분해 본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관한 규범은 1-4계명으로 4가지이고, 나머지 5-10계명 즉 6가지는 윤리적인 삶에 관한 규범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매일같이 보도 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 묻지마 범죄 사건을 보면 도대체 저 범죄자들은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설명되지 않는 동기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지며 일상에 대한 불안도 가중된다. 이미 일어난 범죄에 대한 모방범죄를 예고하는 글도 온라인상에서 폭주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국민 전체가 혹여 피해를 입을까 하는 불안심리도 높다. 묻지마 범죄자들은 일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처지나 실패 등의 원인을 타인이나 사회구조에 전가하여 이에 대한 분노나 스트레스를 블특정 다수를 향해 표출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이들의 범죄 원인은 현실적으로는 실업으로 인한 생활고, 외부와의 단절, 인터넷 게임 중독으로 인한 충동성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 원인에 대해 교육학적. 심리학적 접근을 하면 범죄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포함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 충분히 공감 받지 못했으며 소외되거나 거부되는 양육환경에서 자랐고,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또래들로부터 또는 주변 성인들로부터도 따뜻하게 공감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며 자란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공감 받지 못하며 자란 아이들은 당연히 타인의 입장이나 처지를 공감하지 못하며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타인이나 사회에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십계명 중 5-10계명을 다시 살펴보면 자녀 양육의 핵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숙고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은 살인하지 마라. 7계명은 간음하지 마라.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마라. 9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마라. 10계명은 네 이웃의 아내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이는 모두 가족과 이웃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되며 탐욕을 부렸어도 안 된다는 규범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탐심을 버리고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명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먼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앞서 칼럼에서도 피력한 바 있지만 아이들은 가르치는 것을 배우기보다 보여주는 것을 더 쉽게, 더 견고하게 배우게 된다. 부모들의 신앙과 윤리적인 삶을 보면서 아이들의 신앙과 윤리적인 삶이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의 탐욕보다 가족과 이웃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어려서부터 자기 자신이 존중받고 공감 받으며 실수하고 실패해도 지지하고 격려하는 양육을 받아야 한다. 존중과 공감하는 능력은 존중받고 공감 받을 때 배우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족과 이웃을 존중하는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공감능력이 갖추어진다면 더 이상 묻지마 같은 범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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