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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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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고 시간이 흘러 겨울 문턱에 서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야.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게 하루를 살아 가거라”는 음성이 내 마음속에 들려 왔다. 2022년도 이제 달력 한 장만 남아 한 해를 마무리 잘 지으라고 경고의 표시가 되는 것 같다.
아... 세월은 빠르다. 이제는 집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나도 집 콕 인생의 나락에 머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남은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번 뿐인 내 인생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지 않겠는가? 하루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무슨 일거리가 내 곁을 떠나고 있어 도무지 하루 일과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이다.
새벽 5시에 기상하고 나서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의 새벽 설교가 마음에 닿아 은혜의 단비를 적신다. 시편 119편 19편 “주의 종을 후대까지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44편, 55편도 “지킨다”란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곧바로 헬스장에 달려가 체력 단련을 한다. 늙어서도 근육을 지켜 본다. 꾸준한 단련이 몸을 지탱하고 건강을 지키는 셈이다.
컴퓨터 치는 것도 숙달되지 않아 느린 것 같이 건강도 체력의 꾸준함이 몸을 지탱하여 지켜 주는 셈이다.
은성교회 은퇴장로회 회장직을 지난 2022년 11월 27일 마지막 주일에 넘겨주고, 이미 12월 6일 화요일은 부산노회 원로장로회 회장직도 넘겨 주었다. 너무 감사하고 홀가분하다.
이제 명예직은 내게는 다 끝나 정말 무사히 지켜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다.
명예를 가질 때는 기분이 좋았으나, 다 이것도 헛되고 괜히 짐만 되어 어깨가 무겁고 책임감만 더 해진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음은 좋겠다.
일 평생 살아 가면서 감투나 명예직 회장 등 공적 회의 회장직을 맡았을 때는 최선을 다해 마칠 때까지 해 오는 동안 그 얼마나 마음과 심적 부담이 가겠는가 해 본 사람은 이해 할 것이다. 약력이나 이력 따위 때문은 아니다. 이 세상 하직할 때 그 때에 남긴 명예직을 순서지에 나열해 본들 빛 좋은 개살구이지 떠나는 사람은 그냥 빈 손으로 빈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가는데 그렇게 아웅다웅하고 애쓴 것이 모르리다. 잠언에서 다 헛되고 헛되니 모두가 헛되도다고 솔로몬도 누릴 것 다 누려 보고 말년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겠나.
이제 제2의 인생 늦은 길목에 서서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를 생각할 때 아내에게 못다한 헌신과 섬김이 가장 중요해서 열심히 하고 있다. 노인복지사 자격증을 획득한 것이 다 이럴 때 필요하고 써 먹을 수가 있구나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해야 겠다.
▲나는 지금 자서전처럼 써내려간다
오늘은 어떤 봉사를 해야 할까? 수술하고 난 아내를 목욕 시키고 수술 부위를 소독도 하고 머리도 물론 감아 드리고 젊었을 때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 자존심, 교만 내려놓고 새 출발을 어린 아이와 같이 시작한다.
요즘 또 배워야 할 것은 식단을 마련해 반찬 만들기가 어렵다. 요리 강습이라도 있으면 배우고 싶다. 청소는 로봇이 하고 세탁도 세탁기가 하고 가사일에 좀 젊었을 때 배워 놓았으면 얼마나 쉽게 나아가겠는가.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고 실감이 간다. 나이 일흔이 넘어서야 컴퓨터를 자력으로 배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온라인 수업으로 4년간 동서대와 같은 학교인 부산디지털대학교(BDU)노인복지학 11학번을 전공하여 간호 및 간병하는 케어 실용할 수 있었던 것이 혜택을 본 것 같다.
주일이면 본 교회에서 1부 예배 9시 드리고 집 가까이 주변 개척교회나 다름 없는 부민드림교회에서 2부 11시 예배를 드린다. 이 교회는 고신측 부민교회가 70주년 기념교회로 매우 열세이지만 가족처럼 예배 공동체로 매우 즐겁게 성도간에 코이노니아로 주일 오후를 보낸다. 나는 매일 성경 필사로 노트에 펜으로 한 장씩 써내려 가는데 매우 유익한 것이 치매를 극복할 수 있다. 치매를 면하려면 하루 신문 읽고 글 쓰고 그리고 일기로 컴퓨터로 써내려가는 것이 유일한 일과이다. 물론 아침 일찍 헬스장에 나가 체력으로 근육을 키우고 있다. 이것이 생활화 된 것이 20년이 넘는다. 체력은 60대와 같다는 관장의 말이다. 지금도 손수 운전하며 오후 4시경은 손주 고교생을 학교에 퇴근 시키기 위해 학교로 운전해서 데리고 온다. 손녀는 지금 대학 1년 서울에서 자치를 하고 있다. 신문이 나올 때마다 역사의 현장이란 칼럼을 쓴지가 20년이 넘는다. 신문 창간한 햇수만도 27년이니 책 두권을 발간했다. 아직까지 글을 쓸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칼날이 시뻘겋던 박정희 대통령 1970년대 유신시대부터 80년, 90년, 2022년에 이르기까지 근50년 가까이 글을 쓰고 있으니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아! 2022년도 안녕히, 무사히 저물어 간다. 오로지 주께 감사할 뿐이다. 모두들, 있을 때 잘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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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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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 십대들이 사라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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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전 진주 공군 사령부 교회에 집회차 다녀왔었다. 오랜만에 만난 군목 목사님과 예배 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목사님, 부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최근 군인들 통계를 보고 놀랬습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종교분포 조사를 하면 10명 중 7명 정도는 친구 따라 갔든, 행사 때문에 갔든, 뭘 먹으러 갔든, 여러 이유들을 통해서 교회를 가봤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10명 중에 7명은 교회를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5년 전에 10명 중 7명은 어릴 적 교회를 가봤던 기억으로 언젠가는 교회를 찾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반면에, 최근 통계에 해당하는 10명 중 그 7명은 어쩌면 평생을 교회에 다니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현재 지역교회 상황들이 군부대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듯 하다. 교회에 십대들이 사라졌다. 교회에서 사라진 십대들, 교회를 경험해보지 못한 십대들은 결국 교회와 상관이 없는,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안티기독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교회들은 모두가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교회에 아이들이 없어요”
아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있다. 다만 교회에만 없을 뿐이다. 그 십대들이 지금도 학교에는 있다. 우리 브니엘에도 교회에서는 사라진 십대들이 수백명이 있다. 교회에서는 예배가 안되는 아이들이 감사하게도 학교 안에서는 예배가 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 일상적인 채플은 학교에서 진행을 하지만 절기예배와 학교 부흥회는 지역교회의 도움을 얻어서 교회에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한다. 이유는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1년에 적어도 4-5번의 시간을 통해 교회라는 곳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훗날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나 학교 다닐 때 교회 가봤어”라고 말할 수 있는 동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경험한 세대가 훗날 교회가 이상한 곳이 아니라, 기독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하는 자들로 살아가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역교회는 학교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 있는데 학교에 관심이 없다. 슬로건으로는 “다음세대”, “십대선교”를 외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수막과 구호일 뿐 십대들을 위한 관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의 아이들을 괴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교회에서 사라진 십대들을 위해서 선교회 이름만, 교회표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십대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지역학교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전략들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인근 미션스쿨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보길 바란다. 교회에 없는 십대들이 학교에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지역교회가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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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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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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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6.25 전쟁당시의 부산지방 상황과 기독교계의 활동, 기독교계의 전도 및 구제활동, 기독교 병원의 설립과 의료활동 등 전쟁기 상황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제 2년여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 곧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이 어떠했던 것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만행은 전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수행자들(군인) 보다 더 많이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전쟁이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행위주체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이다. 훨씬 더 중한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인데, 전쟁에서 우연하게 죽었다고 해서 고의적 살인행위로 인한 죽음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커졌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되고 그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이었다. 1차 대전 당시 8백만 명의 군인을 포함하여 1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최악의 소모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제2차 대전에서는 7천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민간인이 4천만 명이었다. 나치독일이 일으킨 독소전 당시 소련의 20대 남성 70%(1,400만 명)가 전사했다. 스탈린의 학살이 2천만 명, 마오쩌뚱의 학살 4천만 명에 달했다. 6.25전쟁은 3년 1개월 2일 간의 전쟁이었는데, 당시 재산피해는 그만두고 인적 피해를 보면, 한국 및 UN군 피해자가 776,360(사망 전사 부상 실종)명, 북한 및 중공군 피해자 1,773,600(북한군: 801,000명, 중공군: 972,600명)명이었고, 민간인 피해(사망 학살 부상 실종)는 2,540,968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피난민 32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여 명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말한다면 군인 40만, 민간인 약 2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지난 5,600년 동안 1만 4천5백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약 35억 명이 전쟁의 와중에서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무기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 외에도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강간, 납치, 협박, 인권모독, 인권유린이 자행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독일의 위험사회학자 율리히 베커(Ulich Backer)는 현대의 재난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재난의 원인 규명이 어렵고, 둘째, 재난의 범위가 대규모적이며, 셋째, 재난의 고통이 무한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재난의 아픔을 안고 70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기독교 일각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은 거부하거나 피해야 하며 무저항 비폭력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런 입장을 기독교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라고 부른다. 그런가하면, 전쟁을 불가피하게 하는 방어적 전쟁이나 정당한 동기와 원인을 지닌 경우에는 전쟁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정당전쟁론(Just war), 혹은 전쟁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성전론(The Crusade)도 있고 미국의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현실적 평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어느 것이든 완전한 주장일 수 없지만 그래도 평화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에 근접한, 그래서 지상의 평화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은, 평화주의는 타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해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기꺼이 평화주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이웃을 위해서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당할 아무런 이유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평화주의 확신 때문에 더 큰 희생을 당할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평화주의 원칙을 난처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 비전의 윤리는 고상한 가치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인내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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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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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光水風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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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종교를 따라 증산도에 심취했었다. 태을주, 오주, 절후주, 운장주, 갱생주, 칠성경, 진법주, 개벽주, 천지불주를 다 암송하면서 주문을 낮밤으로 외웠다. 이것이 상제님의 가르침에 따라 인류가 相生과 福樂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나가는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교의 經典에 심취되어 한 때 성철, 법정스님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럼에도 내 삶의 환경은 상생과 복락의 체득은커녕 느낌조차 없는 가난과 질고의 세월이었다. 이런 삶을 이겨내지 못하고 삶을 포기할 즈음에 알지도 못하는 힘에 이끌려 교회로 갔고 처음 예배당에 앉았을 때 그토록 추구하던 상생과 복락을 무의식적으로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흔 살에 목사가 되어 오늘도 목사의 길을 행보한다. 그 옛날 상생과 복락과 더불어 사는 삶을 교회를 통하여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체득했기에 내가 교회를 통해 체득한 그 기쁨을 전하는 복음의 삶이 나의 삶의 전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相生의 아름다움이 아닌 相剋 相衝의 어둠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느낀다. 무엇인지 모를 濁함으로 영혼이 숨을 쉬지 못하는 영적 고통이 심령폐부까지 밀려들기도 한다.얼마 전 원주 구룡산 중턱에 눈이 부시는 것보다는 마음이 더 부시는 뮤지엄 산(SAN)을 다녀왔다. 일본 건축의 철학자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작품이다. 2013년에 개장한 뮤지엄 SAN(Space, Art, Nature)은 자연과 예술이 있는 공간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 <SAN>이다. 그리고 우리 말 ‘산(山)’이기도 하다. 빛과 물과 바람의 건축가로 알려진 ‘안도’의 교회 작품으로는 오사카의 <빛의 교회>, 홋카이도의 <물의 교회>, 고베의 <바람의 교회>가 있다. 한국에도 ‘안도’의 작품이 몇 개 있지만 특히 제주도 <글라스 하우스>가 있다. 오래 전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공간 글라스 하우스의 <민트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원주에 세워진 해발 275m에 걸터앉은 뮤지엄 <산>에는 빛, 물, 바람을 재료로 쓰는 안도의 건축 철학이 담겨 있다. 웰컴센터에서 시작해 플라워가든, 워터가든, 본관, 스톤가든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자연과 하나 된 미술관, 오솔길 지형을 그대로 살린 미술관, 7만여 평의 부지가 자연에 안긴 거대한 작품이 <산>이다. 그 <산>에서 삶을 묵상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이다. 그리고 빛과 어둠, 땅과 물을 나누고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 하시면서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창세기 1장이 마무리 된다. 빛과 물과 바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이다.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만 원주 <SAN>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보았다.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로 인해 단절의 담이 무너지고 수직으로 하나님과 수평으로 인간과의 관계가 이어졌다. 그 십자가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사랑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그 삶 자체가 오늘의 천국이다. 역설하면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이 멈추고 단절된다면 하나님과의 이어짐도 단절된다. 하나님과 단절 되는 사람은 사람과의 이어짐도 멈춘다. 그것이 오늘의 지옥이다.
빛과 물과 공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양과 질량은 다르지만 속성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은 따뜻해서 사랑으로 표현한다. 빛은 차별 없이 모든 곳을 비춘다. 그래서 진정한 평등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겸손으로 표현한다. 上善若水가 그래서 명언이다. 물의 흐름에는 삶의 지혜가 담겨있고 그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공기는 생명의 원동력이다.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그런데 빛은 지하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은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한다. 바람은 막힌 곳을 지날 수 없다.
빛은 생명을 주지만 빛이 가열되면 火가 된다. 화가 이르는 곳에는 살아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은 만물의 생명을 살리지만 물이 濷이되면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바람은 濁함을 정화하지만 颱가 되면 모든 것을 휩쓸어 초토화 시킨다. 그래서 過猶不及이 명언이 된다.
나는 목사로서 사람을 많이 만난다. 목사이기에 예수 믿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 道를 통해 빛처럼 사랑으로, 물처럼 겸손하게, 바람처럼 淨化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종종 火와 濷과 颱의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이르는 곳곳마다 水魔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火魔가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颱風이 휘몰아치고 지난 것처럼 폐허가 되는 것을 본다.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貪瞋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그 자체다. 불가에서는 이를 三毒이라 했고, 탐진치를 벗어남이 열반이요 해탈이라고 가르쳤다. 삶의 이치가 다를 바 있겠는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연주하는 자연의 이치 光水風의 교훈을 통해 내려놓음, 낮아짐, 물러섬, 그리고 때로는 멈춤의 삶을 사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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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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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말세에 들어야 할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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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혼란스러울 때 <말세>, 세상의 끝이란 규정합니다. 세상 끝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마태복음 24장 3절에 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의 답은 몇 가지로 요약됩니다. 우선 대결과 갈등이 심화되어 민족과 나라가 서로 대적합니다. 대결과 갈등은 개인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기근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있을 것이라 하셨고, 이에 더해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말세의 모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을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말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선 말세란 영적이고 실존적 개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세란 주후 몇 년부터 몇 년까지로 정해진 게 아닙니다. 예컨대 1899년까지는 말세가 아니었고, 1900년부터 말세였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말세는 모든 시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선지자였던 하박국, 황충을 비롯한 메뚜기 류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황폐화된 고통을 경험한 선지자 요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시대를 살았던 사도들은 모두 그들의 시대를 말세라고 여겼습니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사도들이 방언했을 때,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비난한 데 대한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서 2장 28~32절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첫째로, 현재의 형편이 아무리 좋아도 그 다음에 올 말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28절의 첫 단어는 <그 후에>입니다. 무엇의 후일까요? 요엘 시대에 메뚜기 류의 습격으로 황폐하게 되는 고통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고통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엘 2장 24~25절을 보면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28절의 <그 후에>는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는 좋은 때 후를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할 때 <말세에>란 단어를 추가하여 인용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가 말세입니다.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 후에 말세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풍요롭고 평화로워도 우리는 늘 그 다음에 올 말세에 대비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예언하고, 환상과 꿈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미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말세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세상이 끝나는 일뿐인데, 무슨 미래가 있습니까? 마치 임종하는 사람에게 십 년 후를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끝 그 후에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세상이 끝난 후에 시작될 다음 세상, 즉 하나님 나라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예언을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뿐이지요. 그래서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와 성도가 예언하고, 환상과 꿈을 본다면 그 초점은 구원에 맞춰져야 합니다. 세상이 악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성도는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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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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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아재상법(我在上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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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필(神筆)’로 불렸던 홍콩의 김용이 쓴 「신조협려」에 보면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절벽 아래로 투신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여주인공이 벌의 날개에 “아재곡저(我在谷底)”라는 글씨를 써서 날려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글자 그대로 ‘나는 골짜기 아래(바닥)에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중국 명문 가문 출신으로 “명보(明報)”를 창간한 탁월한 언론인이었던 저자(본명 사량용)가 신문의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중소설을 연재하면서 느꼈던 남다른 소회를 담아 살짝 흘려보내는 고백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이 문구를 떠올린 이유는, 최근 이와는 반대로 “아재상법(我在上法)” 곧 ‘나는 법 위에 있다’는 대담무쌍한 선언을 노골적으로 쏟아내는 듯 행동하는 무리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바로 서울 성북구 소재 사랑제일교회 사건에서입니다. 합법적인 재개발지역에 포함된 이 교회는 보상 문제로 조합 측과 다투다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최종적으로 패소하고 말았지만 몇 차례의 명도집행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방해하여 마침내 조합 측의 굴복을 이끌어 냈습니다. 양측이 협의보상금 500억과 대체 부지에 합의하여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교회의 자칭 목사는 “그래, 나는 대법원 위에 있어”라는 망발을 공공연하게 내뱉기에 이르렀습니다. ‘직접적 아재상법’입니다. 물론 법이라 해서 모두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때로 악법에 대해 혹은 자의적인 해석과 집행에 대해 분연하게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더군다나 ‘프로테스탄트’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신앙도 법치주의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 법치주의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아재상법”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예수님보다 자신이 위에 있다(我在上主) 여기지는 않겠지요?
두 번째도 서초동 소재의 한 교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한국교회사상 가장 많은 돈을 들여 건축했다는 이 교회는 세상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본당을 지하에 두고 아동시설 등을 만들어 기부하는 등의 행보를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세계최대규모의 예배당 일부가 공용공간을 침범하여 지어졌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코 고의로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결국 공공도로 점용허가를 내준 구청에 대해 주민소송이 제기되었고, 지난 2019년 10월 17일 대법원은 교회 측의 도로점용은 불법이므로 원상회복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법으로 건축된 예배당 일부를 헐어서 공공도로부분을 반환하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곧바로 집행정지 및 행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합니다. 예배당 헌당식에 참가했던 해당 지역 구청장은 “영원히 예배당의 점용허가를 해드리겠다”는 말을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영적제사장법이 세상법보다 우위에 있다”, 평소 교회 측에서 자주 언급해 왔던 신묘한 화법입니다. ‘간접적 아재상법’입니다.
세 번째는 서울 강동구 소재의 초대형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소속 교단은 수년 전 목회자세습금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교계를 넘어 세상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 교회는 부자세습을 시도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법을 무시하고 이루어진 일이라 더욱 반발이 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단 재판부가 세습무효판결을 내렸으나 총회는 화해수습이라는 명목으로 재차 탈법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세상법정에서 대표자지위의 존재 여부를 둘러싸고 엇갈린 판결이 오가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설립자 목사는 빈궁과 가난을 벗 삼았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마을 형의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에 훗날 큰 선물을 하면서 “주님께 바치나이다, 2003. 11. 30. 작은 종 드림”이라고 수줍게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교단의 법 위에, 교단의 재판 위에 서 있습니다. 말은 안 해도 ‘묵시적 아재상법’입니다.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이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6. 16).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 자신만은 법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들 교회가 무슨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곧잘 법을 경시하며 유월하니 말입니다. 전술한 “아재곡저”는 원래 “아재절정곡저” 즉 ‘나는 절정곡 아래에 있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소설 속 골짜기가 하필 “절정곡(絶頂谷)”입니다. 높은 절정과 낮은 골짜기의 합성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 내려놓고 쓴 글 때문에 김용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다 갔습니다. 그는 한 때 기독교계열의 학교를 다녔다 합니다. “아재상법”이 아니라 “아재곡저”야말로 예수께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도 깨달았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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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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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감사가 답이다(출 23:14-17, 골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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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 보면, 일 년에 세 차례 절기(무교절(유월절-고난주간 부활주일), 맥추절(오순절-맥추감사주일), 수장절(초막절-추수감사주일))를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수장절[收藏節]이라고 하는 것은 가을에 추수하여 곡식을 저장한 후, 한 해 동안 햇빛과 비를 주셔서, 풍성한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초막절[草幕節]이라고 하는 것은 풀로 지붕을 만들어 조그맣게 지은 막집인데, 이스라엘은 나뭇가지로 집을 지으며 그 안에서 7일동안 지내며,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초막에 거주하던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음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1.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골 2:6)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주로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 지옥의 심판밖에 없던 우리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 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2)이제는 내가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하나님, 제가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하고 감사하는 것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줄 믿습니다.
2.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골 2:7)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환경이 남달리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7절은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감사는 언제나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감사도 줄어지게 됩니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변화되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어떤 문제도 감사하며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감사는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1)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골 3:16)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 중 하나는 감격하여 드리는 찬양입니다. 우리의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2)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출 23:15)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작은 것이라도 정성을 다해서 감사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3)작은 일 하나라도 감사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면 할수록 더욱 늘어납니다. 매일 매일 감사를 선택하고, 감사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훈련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어려운 경기에 감사가 힘드시지요? 예수님을 힘입어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려고 머리에 의존하지 말고 주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감사의 제단을 쌓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의 편이시며, 감사하는 자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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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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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세금] 교회의 자동차세 납부기준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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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세(automobiles tax)는 자동차의 소유와 주행에 대해 과세하는 지방세이다. 자동차의 소유에 대해 과세하는 ‘소유분’과 주행에 대해 과세하는 ‘주행분’으로 구분된다. 소유분 자동차세는 자동차의 배기량과 적재정량을 기준으로 부과한다. 주행분 자동차세는 2000년에 주행세로 도입되어 운영하다가 2011년부터 자동차세 주행분으로 편입되었다. 주행분 자동차세는 휘발유, 경유 등에 부과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의 부가세(surtax)이다.
자동차 종류는 승용・승합・화물・특수・3륜 이하 소형자동차로 구분되며, 용도에 따라 영업용과 비영업용으로 구분된다. 승용자동차의 과세표준은 배기량이며, 내연기관이 없어 배기량 개념을 적용할 수 없는 전기자동차의 경우에는 비영업용 10만원, 영업용 2만원의 정액을 부과하고 있다. 자동차세 주행분의 과세표준은 휘발유나 경유 등에 대해 과세되고 있는 교통・에너지・환경세액이며, 기본세율은 36%이다. 다만 30%의 범위 안에서 탄력세율을 적용할 수 있으며, 2022년 현재 26%가 적용되고 있다. 자동차세 소유분의 납기는 6월과 12월 2회이며, 자동차 소유자를 기준으로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징수한다.
국회예산처의 2022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2020년 자동차세 징수액은 8.1조원으로 전년대비 5.3% 증가하였으며, 전체 지방세 수입 102.0조원의 8.0%를 차지한다. 또한 지방세 대비 비중은 감소하는 추세로 2011년 12.4%에서 2020년 8.0%까지 하락하였다. 그리고 주행분에 포함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 징수액은 2021년 16.6조원으로, 국세수입 344.1조원 대비 4.8%의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동차 관련 세금을 교회(Church)에 적용할 경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교회의 자동차 관련 세금은 차량을 구입하는 경우 취득세와 등록세, 부가가치세를 납부하여야 하며, 소유 및 운행 시에는 위에서 설명한 자동차세와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교회가 고유목적을 위해 토지나 건축 등을 구입할 경우 과세가 면제되는 비과세 규정이 없다. 차량을 구입하면 약 7%의 취등록세는 물론, 거래금액의 10%에 해당하는 부가가치세를 소비과세로 국세기관에 납부하여야 한다. 둘째, 자동차 소유분에 해당하는 자동차세를 배기량과 적재정량에 따라 지방세로 납부하여야 한다. 셋째, 주행분 자동차세로 휘발유, 경유 등에 부과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자동차는 교회의 사역에 있어 운송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교회의 규모에 따라 여러 대의 차량 및 버스와 같은 대형차량을 보유하는 사례도 있다. 그럼에도 다른 조세와 달리 비영리법인이 고유목적의 업무를 하는 경우 주어지는 비과세 혜택이 없는 것이 자동차와 관련한 조세 시스템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말이다. 한해의 결산을 준비해 가는 시기이다. 교회마다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며, 감사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회가 지켜야 최고의 윤리는 무엇일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예수님은 모두를 사랑하라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또한 개인은 물론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도 교회와 성도가 그 공동체를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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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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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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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호에서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나누면서 그 대안으로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설교 형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오늘은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구조를 알아보자.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서론과 본론, 적용과 결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된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설교 제목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설교자는 처음 화면에 보이는 제목 이미지에 이 설교의 메시지에 대해 관심을 끌 수 있는 이미지와 제목을 선정해서 회중들에게 보여주면서 설교를 시작한다. 이 때 너무 직접적인 주제를 담는 이미지보다는 회중들이 적절히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관심을 끌만한 이미지와 제목이 좋다. 설교를 시작하면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질문, 문구 등을 보면서 회중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주제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서론 단계를 갖는다.
또한 이 서론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설교 제목을 은유적으로 정하는 것이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회중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시작해서 주제로 들어가는 귀납적인 형태의 설교이기 때문에 설교 제목에 주제가 모두 드러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으로 하되 결론까지의 과정을 다 거치고 나면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제목을 정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회중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현실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성경 본문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여 의미를 분명하게 알아보는 본론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청중의 필요를 충분히 듣고 성경 본문에 귀를 기울일 때 살아있는 말씀이 실제 상황에 파고들어 회중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잘 인지하고 회중을 향하여 말씀을 전한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이미지나 영상을 활용하여 본문의 내용을 더 확실히 전달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지나면 다시 회중과의 교감을 통해서 그날의 본문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적용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 때 설교를 듣고 결단할 내용을 텍스트로 정리해서 화면에 띄우고 온 회중이 함께 읽으면서 오늘의 말씀에 대한 실천할 사항들을 다같이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어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설교의 주제와 연결되는 가사의 찬양을 함께 부르며 결단의 기도를 드리는 결론 단계로 마무리된다. 이 때 함께 부르는 찬양의 가사를 회중들이 고백하는 것은 이 설교를 완결하는 주체가 설교자가 아니라 회중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능숙한 메시지 전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응답과 결단으로 마무리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를 마무리하는 찬양을 선곡할 때 가사의 의미를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장점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설교자가 전하고 있는 이슈에 대한 도표나 연구 결과물을 한 눈에 이미지로 보면서 설교에 참여하기 때문에 모든 회중이 설교에 더욱 신뢰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 방식의 설교는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전달하기 때문에 회중들은 설교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더 신뢰할 수 있게 되어 설교의 효과가 배가된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인터넷을 접하고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관련 내용을 즉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설교의 내용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설교를 들으면 설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설교의 메시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교 형태이다. 상상력이야말로 우리를 위해서 언어에 있어서 새로운 창문들을 창조해주고 우리의 믿음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세상을 보는 데에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에 사용될 새로운 언어들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미지를 직접 보여주면 언어로만 전달하는 방식보다 회중들의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단순히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의 상상력을 북돋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바르게 사용하면 회중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할 수 있다.
다음세대에게 있어서 상상력만큼 위대한 스승은 없다. 다음세대가 얼마든지 자기의 상상력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행할 수 있도록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준비해서 전하는 시도를 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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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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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돌아갈 집이 없는 둥지 잃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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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법형그룹홈으로 법원에서 보호처분을 받은 여자청소년들과 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둥지청소년회복센터장 둥지아빠입니다. 저희 부부가 입양한 막내를 포함해 아내와 아이들 4명, 그리고 둥지센터에서 함께 생활하는 흔히 비행(非行) 청소년이라고 말하는 여자보호소년 8명이 한 식구입니다. 아이들이 많을 때는 12명까지 되기도 합니다. 사법형 그룸홈인 청소년회복센터가 시작된 것은 14년 전 창원에서 소년보호재판을 담당하던 천종호 판사가 보호력이 약한 위기청소년들에게 보호환경인 가정을 제공해주어 재비행을 막고자 시작된 것입니다. 현재는 부산에 5개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18곳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2014년 봄부터 시작된 둥지센터는 지금까지 200명이 가까운 아이들이 거쳐 갔습니다. 누군가는 비행 청소년들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알고 보면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해 생일상을 차렸는데 그 아이는 자신만의 생일 밥상을 처음 받아본다고 했습니다. 밥상 주위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자신을 향한 진심어린 축하에 난감해하며 불편해하는 아이에게 결국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부분만 겨우 부르고 노래를 끝까지 불러주지 못했습니다. 생일상을 앞에 두고 다들 목이 메여 노래를 마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심어린 축하를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이 아이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보듬어줄 수 있을까요?
아내와 저는 넷째를 입양했습니다. 저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셋만 해도 사실 버거웠을 수 있지만 넷째로 인해 즐거움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희 막내는 청소년미혼모가 낳았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고 가출하여 미혼모시설에서 아기를 출산하고 키우려고 했지만 남자친구와 갈등으로 헤어지고, 자기 혼자서는 아기를 키울 수가 없어 결국 아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기가 저희의 넷째가 되어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함께 만나서 식탁공동체를 이루면 가족이 됩니다. 저희 넷째는 장기입양하였고, 둥지센터의 아이들은 단기로 입양하여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가족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족이 되어 주고, 부모가 되어주는 것일 뿐입니다.
둥지 아빠인 저에게 오랜 고민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입니다. 6개월이란 법원의 의무적인 처분기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가정이 없는 아이들 때문입니다. 아빠엄마의 역할을 할 보호자가 없는 경우가 많고, 보호자가 있어도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자신을 심하게 학대하고 폭력을 행했던 아버지, 성추행했던 삼촌 또는 알코올 중독 상태인 아버지를 피해 가출했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악몽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조금씩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데, 정작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걱정이 앞섭니다.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집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부모가 거부하며 난색을 표합니다. 사랑받고 보호받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아이들을 위해 부모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둥지센터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 자신은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좋은 변화를 보였지만, 가정으로 돌아가서 반복되는 문제로 인해 또 다시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고야 마는 것을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음껏 꿈을 펼치고 날아올라야 할 아이들이 가정형편과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날개를 접고 있거나 날개를 다쳐 혼자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날개에 다시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더불어 이제는 날기를 시도할 생각조차 못하도록 둥지를 잃어 방황하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둥지를 제공하고 날개의 힘을 키워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정을 제공하고 품을 수 있는 둥지가 되고 큰 꿈을 가지고 비상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습니다. 둥지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비행(⾮⾏)청소년의 아름다운 비행(⾶⾏)을 위해 지역교회와 성도들의 관심이 모아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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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