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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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금 납부 거부운동’ 추진중인 고신의대 학생 TF팀
    고신의대 학생들이 대학 본부 학사운영비 미지급 문제에 대해 TF팀을 꾸려 대학집행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큰 성과가 나오지 않자 등록금 납부 거부운동에 나섰다. TF팀은 “본대 측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고신대’라는 미명하에, 힘들 때일수록 다같이 먹고 살 방법을 강구해보자고 부탁하여 지금까지 대화와 소통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대측에서는 해당 상황에 대한 개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최근 (부산지역 일간지)기사에서는 지금까지의 만행을 부정하는, 우리를 기만하는 언행을 펼쳤습니다”며 “고신의대의 현 상황과 사건 개요를 외부에 알리고 이를 공론화하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의 등록금이 의과대학 교육에 적절히 사용될 수 있도록 약속을 받아내기 위하여 등록금 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하려 합니다”고 의대 학생들에게 공지를 띄웠다. 또 “등록금 납부 거부운동이 현 상황에서 대학 측의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라며 “당장 2학기부터 450명 분의 등록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학교는 재정 운영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등록금 납부 거부운동에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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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8-18
  • 한국교회 목회자 청빙 지평이 바뀌고 있다
    5060세대 한국교회 목회자들, 특히 65세부터 70세 사이의 목회자 세대들이 일선 목회 현장에서 조기은퇴 내지 정년 70세 은퇴를 하면서 은퇴 시기가 빠르게 도래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 5060세대들이 세대 교체되는 변곡점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교회마다 여기 저기서 목회자 청빙광고가 교단지에 매주 즐비하게 게재되면 이럭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청빙위들이 골치 아픈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예장통합측 부산지역 교회들을 보면 백양로교회 김태영 목사가 금년 12월로 은퇴하고 김해교회. 대민교회. 은성교회. 대지교회 등 중형 교회들이 하나 둘씩 은퇴함으로서 목회자 청빙에 신경을 쓰고 있다. 통합 교단만이 아니라 예장 합동. 고신 교단들도 마찬가지다. 교회마다 청빙 절차에 골몰하고 있다. 과거 10년~20년 전에는 담임목사 청빙의 경우 자격이나 선호했던 스펙은 SKY출신, 석·박사, 해외유학파, 훤칠한 인물, 뛰어난 설교 등이 유행처럼 등장해 자격기준에서 가산점수로 보탬이 되었다. 여기에서 대형교회 현재 목회자의 추천서가 결정적인 합격 요인으로 작용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세대들의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 청빙 선택 기준이 달라졌다. 서울대, 고대, 연대(sky), 석·박사, 해외유학파가 아니고, 이력서를 잘 쓰고 은혜로운 내용의 설교가 아니고, 대형교회 목회자의 추천서나 대형교회 부목 출신들도 아닌 오로지 영성과 인성을 겸비한 겸손하면서도 기도와 심방, 열성의 덕목에 관심을 갖고 청빙위원들이 서류심사나 면접을 하고 있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어느 A교회 경우 71년의 전통이 있는 중형교회인데 과거 목회자 청빙으로 SKY 출신 목회자가 두명이나 거쳐 갔다. 수도권 교회에서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해회유학파, 석박사 출신, SKY 출신이 대부분 자리잡아 선호했던 것이다. 이제는 설교학 전공도 AI GPT에 접목하면 멋진 설교 한편은 문제가 없이 수월하게 짜여 나오게 되어 있다. 설교를 통해 은혜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무엇보다, 권위의식이 몸에 베여있으면 바로 탈락감이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성도들, 잃은 양 한마리를 찿아나서는 겸손함, 열정과 인성이 가장 선호하는 덕목이다. 그런 데다가 성전에서 엎드려 기도 많이 하는 그런 목회자를 선호하고 있다. 이제 스펙은 5060세대에 많이 쓰인 기준으로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청빙 지형은 새 형태로 바뀌고 있다. 한번씩 청빙 경험이 있는 교회들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세상 밖의 기준에서 사용되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세대 개념의 발상에 치중하는 경향이라면서 젊은 시무장로 A씨는 “이제 목회자 청빙 지평은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필자가 경험했던 고 최상식 목사(은성교회 70~80대 시무)는 스펙도 없고 월남하여 피난민 거주지였던 남부민 산중턱 지역에서 기도와 심방은 필수이고 믿지않는 지역 주민들이 장례가 나면 찾아가서 기도와 격려하며 주민들로부터 칭송이 대단한 분이었다. 18년간 시무하다가 정년은퇴를 하고 서울로 이사 가는데 김해공항에 나온 대부분이 교회 동네 믿지 않았던 주민들이었다. 그들이 공항에 나와 아쉬워했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병원 심방하여 기도했고 교인 중 가을소풍을 갔을 때 뱀에게 물렸을 때도 손수 자신의 입으로 빨아 내는 그런 분이 목회하여 600~700명이 넘는 중형교회로 부흥시켰던 분이다. 정말 겸손하고 얼마나 열심히인지 기도시간 이외는 동네를 다니면서 구제하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 헌신했다. 부산노회 동료 목회자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된 참된 영적 목회자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B교회 원로 장로 한 분은 “우리 시대와는 목회자 청빙 기준이 정반대가 되었다. 과거 초대 교회 형태의 목회자들이 학벌도 없고 순수한 기도, 심방 밖에 모르는 순수한 목회자 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요즘 청빙 광고가 신문에 나갈 경우 줄 잡아 약 50~70통 이력서가 쌓이고 있다. 서류전형 심사에서 부터 청빙까지 약 6개월 이상 소요되고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 교단들마다 목회자들이 남아 넘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학령인구 자체가 줄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신학대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학교마다 정원을 줄이고, 각 교단에서의 6~7개의 직영 신학대학을 향후 10년 안팎에는 2~3개로 구조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다. 이는 한국교회 전반적인 목회자 양성, 신학대학원에 대한 재조정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래야 목회자들의 과잉 수급이 줄어 목회자들의 권위도 상승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청빙위원들도 종래는 시무장로들만의 전용으로 결정하여 공동의회에 상정하고 했는데 지금은 청빙위원도 권사, 안수집사 등 평신도 대표자들도 함께 가담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다. 특별히 청빙에 첨가할 과제 가운데 목회자 사모의 자체와 소문도 현장교회에 가서 청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의 경우 사모가 같이 목사가 되어 동역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여론이다. 이런 경우 교회 부흥에서도 보탬이 되고 흔히 스캔들 구설수에 휘말리지도 않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정인규 목사는 은성교회 임시당회장으로 파송받아 8월 6일 주일 설교 제목이 ‘청빙을 앞두고’란 제목으로(에스겔 344:7~16) 설교하면서 목회자 청빙 가이드라인 몇가지를 제시했다. 바로 스펙이나 해외유학파. 석박사 소지자, SKY출신, 설교 잘하기, 인물 중점 등을 보기 보다는 “양떼를 구원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는 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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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목회자칼럼] 늦은 비의 복을 주옵소서
    그동안 성경 첫 장 설교를 많이 한 것 같다. 창1장의 하나님의 본심 네 가지, 수1장의 쓰임 받는 사람의 여덟 가지 특징, 삼상1장의 응답받는 기도의 매뉴얼, 시1장의 복있는 사람의 특징, 눅1장의 팔방미인, 행1장의 경계선 장애 극복. 최근에는 성경 마지막장이 은혜가 되었다. 마28장의 복음의 전달자, 행28장의 담대하게 거침없이, 그리고 오늘 욥42장의 말씀이다. 사람은 마지막의 모습이 중요하며, 뒷태가 고와야 된다. 유언과 같이 최후에 남기는 말씀이 중요하다. 욥42장은 성경 상에 가장 고난 받은 사람의 모습과 치열한 논쟁 후 마지막 결론을 기록하고 있다. 욥의 회개기도와 친구들을 위한 중보기도로 마무리된다. 김양재목사 말처럼 구원역사를 통해 내 삶이 해석이 되어지면 해결이 된다. 회개할 때에 회복되고, 항복할 때에 행복해진다. 욥과 친구들의 오랜 논쟁과 갈등으로 감정이 상했을 법도 한데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요15:13) 예수님의 사랑을 친구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친구사랑의 핵심은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109:4) 욥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때 영적회복이 되고, 관계가 회복되었다. 미움은 관계를 회복할 수가 없다. 사랑하고 축복할 때 문제가 봄눈 녹듯이 녹는다.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이전보다 갑절의 소유를 주셨다. 상황이 역전되었고, 상속권이 인정되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역전, 반전, 역주행의 기적이 나타난다. 내가 설치면 나홀로 일을 하지만, 내가 기도하면 주께서 역사하신다. 주께서 욥을 돌이키실 때 고난으로 인하여 멀어지고 오해하였던 가족이 회복되고, 이웃이 회복되었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욥42:11) 욥이 어려울 때에 비난하며 떠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그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밥상머리, 베갯머리가 회복되고, 입맛, 밥맛, 살맛이 회복되고, 단잠, 숙면, 꿀잠을 자게 되었다. 그들이 욥을 슬퍼하며 위로하였으니 소통과 공감과 나눔이 회복되었다.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고리 하나씩을 위로금으로 주었으니 물권이 회복되었다. 부자는 티끌모아 태산이 되고, 십시일반이 모이고, 만 가지 은혜를 받고, 사방에 돕는 자들이 나타난다. 욥이 받은 최고의 축복은 말년의 복이다(욥42:12). 졸지에 당한 고난보다도 부인과 친구들의 정죄와 비난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 끔찍하고 황망한 시절에 마음으로 원망하지 않았고, 입술로 범죄치 않았다. 사사시대에 룻이 전반전은 엉망진창이었지만 후반전에 나중축복을 받았다.(룻3:10) 시골에서 어른들이 화투치기 하는 것을 볼 때 초장 끝발보다 후 끝발이 중요했다. 인생 이모작을 살면서, 하프타임을 지나, 배터리 충전하고, 성령충만, 은혜충만 받아야 결실의 계절에 늦은 비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낙심천만한 오랜 고난과, 힘 빠지고 지치기 쉬운 인간관계 속에서 욥은 저력있게 버티었고 마침내 모년, 말년, 노년에 복을 받았다. 욥은 졸지에 일곱 아들과 딸 셋을 잃었지만, 말년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 부인을 제외하고는 갑절의 복을 받았다. 자녀들의 미모와 기업을 볼 때 명성이 회복되었다. 주일학교에서 다음세대 일꾼들이 새벽이슬같이 일어나야 된다. 정치, 경제, 국방, 외교, 교육, 문화, 사회, 목회, 선교사역에 준비, 예비, 겸비, 유비무환의 지도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리라. 도산 안창호선생님은 인재가 없다고 탓하지 말고, 네가 인재가 되라고 하였다. 욥은 오랜 고난의 세월을 버티어서 140세를 장수하였고,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으며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다(욥42:16~17).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황충이 해하지 않고, 때를 채웠다. 나이가 차서 죽는, 충만의 복을 받았다. 물이 끊어지지 않고, 막히지 않고 연결이 되었다. 오래오래, 길게길게, 곱게곱게, 넓게넓게 복을 누렸다. 요셉이 7년 대풍년에 흥청망청하지 않았고, 7년 대기근을 잘 버티었다. 모세는 애굽, 바로의 궁궐에서 40년, 미디안광야에서 40년, 출애굽 40년, 오르막내리막 길을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잘 감당하였다. 아니, 그 변덕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께서 끝까지 이끌어 주셨던 것이다. 욥의 전반전은 눈물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것마저 후반전을 위한 눈물의 씨앗을 심는 과정이었다. 세월이 무섭게 빨리 지나간다. 누구나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 자기에게 남은 세월을 기억하며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버티고, 견디자! 주께서는 남은 자를 통하여 구원역사를 이어 가신다. 현재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늦은 비의 복을 대망하면서 살아 버티어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간다. 늦은 비가 내려야 곡식이 익는다. 찬 서리가 내려야 가을걷이가 끝이 난다. 성경에는 이른 비가 우리나라의 늦은 비이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시간 개념이 크게 혼돈하게 되었다. 골든타임, 하프타임, 파이널타임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그야말로 내일 일은 알 수가 없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은 자가 강한 법이다. 이 세상 끝날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갈, 저 천국이 예비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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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 연구가 유영익 박사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 유영익 박사가 7월 26일 저녁 이대서울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36년 4월 9일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신 유영익 박사는 사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기고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한 그는 1960년 미국으로 가 하버드대학교 역사·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1972년에는 갑오경장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했다. 그 후 택사스의 휴스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일하던 중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사학과, 한림대학교 사학과,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객원교수, 그리고 한림대학교 부총장,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로 일했고, 그 후에는 한동대학교 국제개발협력대학원 석좌교수로 일했다. 필자가 그를 만났을 때가 이 무렵이었다. 물론 지면으로는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지만 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한동대학교 교수 기도회와 학생 채플 설교차 갔는데, 아침 교수 기도회 후 유영익 교수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필자에게 먼저 오셔서 “유영익 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던 노학자의 겸허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이후 그와 교류하며 그의 학문과 인격을 대하게 된 것은 필자에게는 큰 영예였다. 나의 부족한 책도 인사하는 뜻으로 그에게 보냈지만, 그는 2010년 4월 아시아왕립학회 서울 지부가 펴낸 영문서적 <초기 한국의 미국과 일본과의 접촉>(Early Korean Encounters with the US and Japan)을 선물로 주었고, 2013년 6월에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일조각, 2013)을, 2019년 8월 말에는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청미디어, 2019)을 보내주어 감사하고 송구했다. 한동대학교를 떠나 이후에는 한일역사공동연구촉진위원회 운영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휘하에서 제12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소천되기까지 국방대학원 석좌교수였다. 유영익 박사는 한국근현대사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이지만 특히 이승만 연구가로서 이승만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우연히 하버드-옌칭 도서관에서 청년기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읽고 그의 개혁사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에 큰 충격을 받아 이승만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탈고했을 때가 1904년이니 29세 때였고, 한성 감옥에서 쓴 책인데, 출판된 것은 1910년 미국에서였다. 이 때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문제점과 주변 열강의 움직임, 그리고 대한제국이 해야 할 일들을 말하면서 기독교입국론을 주장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유영익 교수는 이 책을 읽고 국제 정세를 헤아리는 청년 이승만의 식견에 감복하였고, 이후 이승만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직접적인 계기는 1993년 말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 교수로부터 이화장에 보관되어 있던 10만 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승만 관련 사료를 기증받은 일이었다. 이때 이건희 삼성회장은 50억 원의 연구자금을 제공했고, 최송옥 여사는 1996년 8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소재한 자신의 저택을 이승만 연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래서 유영익 박사의 주도로 1997년 연세대학교에 현대한국학연구소가 설립되어 이승만 연구를 주도하게 된다. 유영익 박사는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로서 연구원의 초대 소장이었다. 2011년에는 연세대학교 현대학국학연구소에서 이승만연구원이 분리되어 독립된 기관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영익 박사는 방대한 문헌을 바탕으로 이승만 연구를 수행하여 이승만 재평가를 이끌었고, 이승만을 비판하는 수정주의, 좌파적 시각을 거부하고 이승만의 생애, 사상, 독립 외교활동, 교육, 연설활동 등을 연구하였다. 그는 이승만의 공과를 따진다면 공7, 과3으로 평가하면서 자유민주의에 기초한 정부수립 혹은 건국, 미국식 대통령제 확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농지개혁, 60만 명 수준의 국가 상비군 육성, 양반제도의 근절과 남녀평등 실현 들을 공로로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은 중국의 쑨원(孫文),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 諭吉)를 능가하는 인물로 평가했다. 그런데 지난 6월 20일 유영익 박사가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 “경애하는 이상규 교수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요즘 같은 무더운 날씨에 교수님께서 날마다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유영익.” 자주 문자를 주시는 분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문자였기에 반가운 나머지 바로 답신을 드렸다. “아이구 존경하는 유 박사님, 황송합니다. 늘 강건하시고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제 밤에 안동에 왔습니다. 오늘 경안대학교에서 강연하게 되었습니다.” 꼭 한 달 전의 일이다. 경북 안동에서 나눈 문자가 마지막 통신이었다. 자신의 갈 길을 예견하신 듯 미천한 후배 학도에게 지상에서 마지막 고별의 문자를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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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8-18
  • [박만 교수]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하자
    나이 들고 은퇴가 가까워지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시간 생각하면 아쉽고 후회스러운 점 있지만 감사할 일들이 더 많다. 많이 모자란 사람이 그저 은혜로 여기까지 왔구나 싶다. 아울러 남은 시간 더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다짐 한다. 그 가운데 요즘 들어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큐로스를 곧잘 생각한다. 에피큐로스(BC 341-BC 270)의 가르침은 대단히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곧 쾌락은 좋은 것이고, 삶의 목표는 가능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기쁨과 쾌락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우리 삶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가령 신들이 있고 그들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신들의 심판과 저주를 생각하며 살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조언한다.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설혹 있어도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당신에게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들 생각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각자 알아서 행복의 길을 찾으라.’ 더 나아가 그는 영혼도 내세도 부인한다. 이들은 몸이 죽으면 영혼(정신작용)도 끝나고 그것으로 끝이니 영혼이니 내세니 하는 데 골몰하여 지금 눈앞의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에피큐로스의 이런 주장 때문에 그의 사유는 보통 쾌락주의(Hedonism)로 간주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쾌락주의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들이 말하는 쾌락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 쾌락이었다. 그는 귀족이나 부자 남성 같은 특권층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권한이 있으며 사회 역시 이처럼 그 구성원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쾌락에도 등급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이 볼 때 맛있는 것을 먹고, 원하는 물건을 소유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 역시 쾌락을 주지만 이런 종류의 쾌락은 일시적이고 열등한 쾌락이며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쾌락이다. 곧 이들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정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쾌락이며 삶은 이런 높은 차원의 쾌락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도 없고 내세도 없다는 에피큐로스의 주장은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있고, 행복에는 등급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누구도 차별 없이 모두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실상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긍지있고 행복하게 살게 하려 하심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최근 들어 좀 더 행복하게 지낼 길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취미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기타를 다시 손에 잡았고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고 친교를 나누니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설교, 행복한 강의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스스로 먼저 행복하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분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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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소강석칼럼]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이 지치고 위축될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을 때/ 나 그 눈물을 닦아 줄게요/ 난 당신의 편이에요/ 오, 세상이 거칠어지고 친구들이 그저 당신을 찾지 않을 때도 말이에요/ 마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서/ 난 당신을 받쳐 줄게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부른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의 가사다. 1970년 발표한 노래인데 당시 빌보드 팝 싱글 차트에서 6주간 1위를 차지했고, 이듬해 그래미상에서 총 5개 부문 트로피를 받은 팝 음악 역사상 가장 훌륭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가 얼마나 험하고 각박하고 삭막한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험한 세상에 다리가 돼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마 5:13~15)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빛과 소금을 오늘의 언어로 적용하면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험한 세상에 다리 역할을 하며 우리 민족과 사회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첫째 기독교는 봉건주의 사회를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개항 이전까지 봉건사회였다. 신분과 남녀 차별이 확연했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 신분 차별을 타파하고 문맹을 퇴치하며 진정한 인권 자유 박애 정신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간 사람들이 신문물과 신문명을 받아들여 교회에서부터 신분을 타파하고 봉건주의 사상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둘째 기독교는 독립 주권국가를 이루는 데 앞장섰다. 역사적으로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거의 기독교인이었다. 훗날 독립 이후에도 건국위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건국의 모토로 삼은 정신이 바로 기독교 정신이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우리나라가 독립 주권국가를 이뤄 건국하는 데 다리 역할을 했다. 셋째 기독교는 이 땅에 공산 전체주의를 막아내는 데 앞장섰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절대 존재와 영혼의 가치를 존중하는 종교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절대 같이할 수 없고 충돌하게 돼 있다. 공산주의가 들어가는 곳마다 교회를 폐쇄하고 교회당을 공장으로 만들고 목회자를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6·25전쟁 때도 가장 피해를 본 종교가 기독교였다. 그중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호남의 영광 영암 신안 지역이다. 영광 염산교회는 77명, 야월교회는 66명, 영암 지역 교회도 89명의 기독교인이 순교당했다. 최근 나는 몇 분의 호남 지역 목사님과 함께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님께 면담을 요청해 만났다. 국가 차원에서 학살당하고 순교를 당한 교회와 지역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조사를 하고 진실 규명을 해 달라고 말이다. 김 위원장님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잘 추진해 보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을 했는가. 이 사안에 대한 진실한 조사와 규명, 명예 회복이 이루어질 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더 확고하게 세워지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7년째 해오고 있다. 보은(報恩)이 한 인격의 품격이라면 보훈(報勳)은 한 국가의 품격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윤석열 대통령께서 축사를 보내줬고, 김진표 국회의장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도 참석해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했다. 한국교회는 과거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험한 세상에 다리가 돼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고 있다. 물론 비판에는 자성하고 개혁해야 한다. 동시에 어떤 일이나 역할을 통해서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돼야 한다. 지치고 위축된 세상을 향해 눈물이 고여 있는 사람들에게 다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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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성서연구] 안식,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한순간도 아까워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는 <마차를 기다리느라고 10분을 영원히 상실했다. 오. 이 상실을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바쁘게 사는 사람의 말입니다. 현대 생활은 매우 분주하고 피곤합니다. 그러다 보니 휴가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고, 그것은 평소 생활이 그만큼 피곤하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다 모처럼 휴식이 오면 나사 풀린 기계처럼 됩니다. 사고와 범죄가 급증하고, 문란해집니다. 성경은 안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곱째 날에 끝났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합니다. 창조가 여섯째 날에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에도 계속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렇다면 일곱째 날에 창조된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11세기의 유명한 랍비였던 <이챠크>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메누하, 혹은 사바 쓰>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메누하는 안식입니다. 안식일을 사바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 맨 마지막으로 안식을 만드시고, 안식을 누리셨습니다. 엿새 동안 만드신 만물에 안식이 첨가되자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안식은 창조의 마침표요, 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휴식은 목적이 아니며, 노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노동이 최고이고, 휴식은 노동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안식 자체가 목적입니다. 노동을 위한 안식이 아니라, 안식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입니다. 제7일은 나머지 6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엿새가 제7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이나 거룩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들은 매주 중요한 것들인데,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성전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먼저 거룩하게 하신 것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안식 없는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안식 없는 성공은 불쌍합니다. 그런데 안식 없는 가정이 많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부모님께 가장 원하는 것을 조사했더니, 50% 이상이 <싸우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수도원 규율은 엄격했습니다. 새벽에 기상해서 여덟 번 기도하고, 몇 시간의 성경 읽는 시간이 있고, 각자의 특기대로 노동했습니다. 그리고는 밤늦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들은 육체를 피곤하게 할수록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가장 조용하고 쉼이 있을 것 같은 수도 생활에도 안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안식의 나라입니다. 안식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필요 없는 사람은 지옥에나 갈 사람인 셈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사랑하여 안식일을 잘 지키면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안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칠 일에는 쉬셨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신명기 5장 15절의 말씀처럼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지 않으셨다면 안식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할 때 참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없는 안식은 저주일 뿐입니다. 세상 안식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방종과 쾌락의 추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영원과 연결되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참 평안으로 인도합니다. 올 여름 휴가철을 맞이하여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맛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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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시사칼럼] 대기의 강
    최근에 하늘에도 강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하늘에 흐르는 ‘대기(大氣)의 강’이 최근 물난리의 원인” 같은 기사를 부쩍 많이 대합니다. 여기서 “대기의 강”(Atmosphere River)이 바로 하늘에 생긴 강입니다. 열대 지방에서 발생한 수증기가 좁고 길게 마치 강을 이룬 것처럼 상공에 모여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좁고 길게”라고 했지만 사실은 길이만 해도 2,000km 이상이고 너비도 수백km에 이를 때가 많습니다. 미국 하와이부터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대기의 강이 대표적입니다. 떠다니는 강이나 마찬가지라 상공의 강한 기류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엄청난 비를 쏟아냅니다. 대기의 강의 길이와 수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기상관측위성에서 포착한 것들 중에는 중국 대륙 동부에서 북미 대륙 서부까지 10,000km 이상 길게 형성된 경우도 있었습니다.(나일 강 6,650km) 또한 웬만한 대기의 강 하나가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들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과학자들이 측정한 바에 따르면 아마존 강의 2배, 미시시피 강의 15배나 되는 양의 물을 품은 대기의 강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려주는 사건이 작년 8월에 발생했습니다. 미국 텍사스 일대에 대기의 강으로 인해 하루 동안 2,300mm 가량의 비가 내려 데스벨리(Death Valley) 지역까지 천 년 만에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여름과 비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올해 초에는 캘리포니아를 3개월 동안 총 서른 번 이상이나 대기의 강이 덮쳐서 폭우와 함께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2020년 여름에 관측 사상 최장(54일)의 비가 내려 섬진강이 범람하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기의 강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동일한 원리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벌써 기록적인 강수량 수치가 속속 나타났습니다. 전북 익산에 하루 388mm, 충남 청양에 누적 강수량 580mm, 그리고 전국 누적 강수량(16일 현재 511.7mm) 역시 기상청이 집계를 시작한 1973년 이래로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집중적으로 내린 엄청난 양의 빗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충북 괴산댐에서는 ‘월류(越流)’가 발생해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피하기도 했습니다. 수문을 통해 강물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이 댐 위로 흘러서 넘쳤다는 뜻입니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급격하게 불어난 물로 인해 인근의 미호 제방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침수되어 십여 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오송의 지하차도 사고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기후 위기로 “대기의 강” 현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난 40년 간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난 세기와 비교할 때 1.09도가 올랐는데, 지금 추이대로 간다면 21세기 말까지 4도 이상이 되리라고 추정합니다. 기후변화학회에 따르면 온도가 1도 오르면 대기 중 수증기량이 약 7% 늘어난다고 합니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생길 대기의 강의 위력은 어떠하겠습니까? 한국의 경우에도 전술한 기간 동안 전체 평균 기온이 1.8도가 올랐고, 수도권의 경우에는 2.8도나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갈수록 비가 내리는 기간이나 강수량이 지금보다 더 증가하지 않겠습니까? 2015년 12월 12일에 채택된 파리기후협정은 이런 현상들과 관련하여 지구의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2도 이상 올라가면 안 되고 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18년 10월 6일 한국에서 <지구온난화 1.5도>라는 특별보고서를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각국의 입장과 자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앞길이 험난해 보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 율법 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신 28:15, 61). 다시는 물로 인류를 심판하진 않는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래도 이제는 창조주의 준엄한 경고를 모두 함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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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은혜의말씀]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막 5:25-34)
    열두 해를 혈류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혈류증이란 하혈을 하는 부인병입니다. 12년 동안 치료라는 치료는 다 받아 보았지만, 차도는 없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갑니다. 이제는 병원비도 다 떨어지고, 병은 더 심해져가고, 그럴 때 그 절망감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당시 그런 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무언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은 성 밖으로 쫓겨나서, 혼자 머물러야 했습니다. 사회(가족)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를 당하는 것입니다.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얻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끝난 줄 알았는데,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여인 어떻게 이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포기하지 믿음 때문입니다. (27절) 나사렛 예수가 ‘능력과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아온 것입니다. 이 ‘듣고’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들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는 자마다 삶이 바뀔 것입니다. 왜요? 예수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그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희망을 붙드는 것이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2. 믿음의 손으로 주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28절) 소문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붙들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실 여기에서 드러난 이 여인은 믿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소극적이고, 아주 작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34절) 중요한 것은, 이런 허물투성이인 여인에게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여인을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시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접촉이 일어났다고 모든 사람에게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믿음이지만 나아갈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간절함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영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오지만, 어떤 모습, 어떤 마음으로 찾아왔는지를 다 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독과 슬픔 속에 얼마든지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더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보면, 혈루증 여인이 주님에게로 다가간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 다가가고 계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12년 동안 고통과 절망 속에 눈물 흘려야 했던 한 영혼을 향해 주님은 사랑의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힘든 인생 한가운데로 걸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절대 무시하지 않으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자 하는 심정으로 나아온다면 주님은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던 선포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길 바랍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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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6
    어김없이 올해도 장마철을 지나고 있다. 원하진 않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된다. 반갑지 않고 피하고 싶은 일들이 해마다 반복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모습을 날마다 확인할 뿐이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이러한 재난이 일어날 때 마다 요란을 떨며 대책을 강구하고 다시는 반복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처럼 다짐을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너무 쉬이 잊어버리고 또다시 옛 이야기처럼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마치 고난 중에 열심히 기도하며 찾았던 주님을 시간이 지나며 간절함도 열정도 식어져버리는 우리의 비겁함을 보는 듯, 실로 출애굽 하여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딱히 다를 바 없음에 민망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런 형편없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아니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때 유명가수요 작곡가였던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고난 중에 있을 때, 그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히 사역하며 결국 목사안수까지 받았는데 그 시기에 찾아온 너무도 힘든 상황을 맞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받은 질문은 오히려 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냐? 였다고 한다. 깊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그러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연히 목사님의 신앙과 사역의 페러다임은 바뀌었고 늘 이 원초적인 질문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극한고난을 통하여서라도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간섭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감사하며 노래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와 자연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어찌 우매한 인생들이 일일이 알아서 준비하고, 대비하여 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간의 영혼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파괴되어져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물론 주변을 돌아보며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우리 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계명인 “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날마다 기억하며 진실 된 예배자로 살아갈 필요가 절실한 시간이다. 사랑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강력하게 선포되기를 원한다. 살아있는 예배와 진실 된 찬송이 끊임없이 생명력 있게 드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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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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