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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칼럼]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라
    우리가 원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현대 교회에는 다양한 예배가 존재합니다. 먼저,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는 것이 개인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두 번째는 공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고 교회의 예배는 공적인 예배입니다. 셋째는 생활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성도의 삶 전체는 모두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구분은 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상하고 우아한 성도들과 함께 전문적인 합창단과 맞먹는 찬양대가 있고,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의 설교를 조용히 듣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토크쇼의 진행자 같은 목회자가 헤드셋 마이크를 끼고 강단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토크쇼 같은 설교를 합니다. 찬양 팀의 공연 같은 찬양이 있는 예배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는 짧고, 대신에 드라마나 영상이 있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멘’ 소리조차 내지 않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예배를 선호합니다. 이런 예배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이유, 목회자의 성향, 성도들의 선호도 등에 의해서 오늘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어떤 예배를 선호하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는 예배는 어떤 것이냐”라는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종류를 나누는 것이 신학적으로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사람이 원하는 예배라는 말이 가능한가?’라는 바로 이 두 가지 질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사전은 예배를 “경배, 고백, 기도, 감사를 통해 초월자를 향한 존경, 숭배,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예배를 “아베다”라는 단어로 가장 먼저 설명합니다. 이 “아베다”라는 단어는 ‘종, 노예’라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자가 ‘종’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역시 ‘엎드려 고개 숙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우리의 생각, 의지,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종처럼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의식의 의미는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신명기 12장 1절 말씀은 예배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1)” 드릴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거기서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잘못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예배이고 가나안의 예배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온 이집트는 수천수만의 신이 있었습니다. 각 신들마다 예배하는 신전이나 장소가 따로 있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도 신들이 많았습니다. 신명기 12장 2절 말씀에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2).” 가나안 사람들은 성전을 세우는 등 예배처를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서든지, 높은 산이든지, 낮은 언덕이든지, 무성한 나무 아래든지, 커다란 바위 밑이든지, 어디든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상을 세우고 숭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 제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석상이나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나 가나안에 예배처소가 많았던 것은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이어지면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비를 오게 만드는 신을 섬겼습니다. 가뭄을 지배하는 신, 농사를 지배하는 신, 밤이나 어둠을 지배하는 신, 건강을 주관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모두 그들이 원해서 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처소도 본인들의 생각과 필요에 맞는 곳이면 어디든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우상을 섬기는 곳을 다 허물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허물뿐 아니라, ‘석상을 부수고, 목상을 불태우고, 신상들을 부수고, 그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지워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나안 우상들은 가나안의 ‘문화’입니다. 그들의 ‘역사’이고, ‘삶의 흔적’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문화유적’으로 잘 보존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철저히 없애라고 하셨습니까? 가나안의 우상들이나 제단들을 그대로 두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2장 30절 말씀에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가나안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보다 안정되고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가나안을 볼 때, ‘이 민족들이 자기의 신들을 어떻게 섬겼을까?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상숭배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우상들과 그 예배 방법을 없애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31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의식을 싫어하시고 역겨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나안의 신들과 예배처소를 철저히 없애는 대신에 신명기 12장 5절 말씀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예배의 중심은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거기서만 예배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아무데서나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는 ‘유일중앙성소’라는 말입니다. 그 택하신 곳은 가나안 초기 ‘실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자신이 사는 곳에서 물이라도 한 사발 떠놓고 손 모아 빌면 되는데, 여유 있는 사람들은 소나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 되는데, 하나님은 굳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명기 12장에서 말씀하는 예배에 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구별하시는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정된 장소에 있는 성막과 성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장소와 건물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예배가 완성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예배를 드릴 장소와 건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장소와 건물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12장에서 예배 장소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있는 곳은 어디나 예배 처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구별된 예배처소는 주 안에서 구별된 성도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고, 또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우리의 가정이 거룩하고, 우리의 학교와 직장이 거룩하게 구별된 예배처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예배처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 세대가 이런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기성 세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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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갔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예수님의 천국비유장인 마태복음 13장의 핵심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천국은 저 하늘나라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이 보이지 않는, 그냥 머릿속에 추상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데 천국이 우리 가운데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는 겁니다. 겨자씨 한 알이 어때요?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이게 누구의 시선입니까? 어른들의 시선입니다. 어른들의 시선, 배웠다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겨자씨 한 알로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건 작은 씨앗에 불과해.” 그런데 아이들의 시선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관찰하고 계속 심습니다. 이걸 자기 밭에 갖다 심고 계속 관찰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됩니다. 여러분, 겨자는 1년 생 풀입니다. 봄에 싹이 트면 여름에 자라서 가을에 추수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는 풀보다 커서 마치 나무처럼 커진다는 겁니다. 나무는 1년을 넘어 2년, 3년 계속 살잖아요. 마치 그럴 것처럼 크게 자란다는 거에요. 이렇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어 보이는 가장 작은 겨자씨에서 풀보다 큰 나무가 나오는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공중의 새들이 누굽니까? 마태복음 13장 처음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아시죠? 거기서 길가 밭에 떨어진 씨를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즉, 새는 누구냐? 씨앗을 먹어버리는 존재. 씨의 세계에서는 천적과 같은 존재. 무서운 존재. 인생의 방해꾼입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겁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씨인데 아이의 눈으로 보면 자란 후에는 오히려 그 천적들을 품고 그들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결국은 씨가 승리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지금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구원과 은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아이들을 봐줄 때 아이들의 꿈이 보이고 아이들의 미래가 보이고 아이들의 비전이 보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봐줄 때 우리는 천국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보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지금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명품으로 휘감고 정말 번쩍번쩍 나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게 내가 지금 보여주는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 하나님이 바꿔 주시는 나, 하나님이 변화시키는 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선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어른들도요, 어른이라도 우리가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한 아이, 부지런한 아이, 성실한 아이, 매력 있는 아이들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을 봐도 마찬가지죠.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의 기대가 되는 미래는 바뀔 것입니다. 너무너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요? 이건 전국에서 분홍 목사에게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분홍 목사님!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분들이 기대하는 답은 뭐냐면 예산이나 프로그램입니다. “과연 성민교회는 아이들에게 예산을 얼마나 줍니까? 과연 얼마나 돈을 씁니까? 아니 어떤 프로그램을 합니까?” 다 거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교회 예산? 다른 교회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프로그램? 특별히 대단한 내용들 굳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미래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미래의 그 아이들이 공중에 새들이 와서 깃들 어마어마한 나무가 될 것을 믿는 겨자씨 한 알이라고 믿고, 그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알아보는 눈! 그 시선을 가진 교사들입니다. 바로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들이 자녀에게는 가장 필요한 그들의 선물이고, 또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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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6-09
  • “18년 만의 경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이하 기성) 117년차 총회장에 추대된 임석웅 목사가 지난 6월 4일 대연교회에서 취임감사예배를 드렸다. 부산과 영남지역 기성 총회장을 배출한 것은 이재완 목사(영도성결교회 원로) 이후 18년 만이다. 임 총회장은 당선 인사를 통해 “(총회장으로)취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전하면서 “부산서지방회와 대연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와 응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감사했다. 또 “영혼구원과 복음전도, 교단 부흥과 발전을 위해 총회장의 직임과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겠다”고 각오도 밝혔다. 이날 취임식에는 부산성시화운동본부장 박남규 목사와 국회의원 박수영 집사(대연교회)가 차례로 축사했다. 부산서지방회장 양희식 목사는 임석웅 총회장에게 축하패를 전달하고 축하하고, 대연주니어합창단 어린이들이 축가를 부른 후 전 총회장 이재완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이날 취임감사예배에는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이철 목사, 박형준 부산시장, 오은택 남구청장 등이 영상축사를 통해 임석웅 총회장 취임을 축하했고,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박남규 목사, 국회의원 박수영 집사(대연교회) 등 교단과 지역 기독교지도자 약 500여명이 참석해 임 총회장 취임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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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6-09
  • 이단들 여론전 강화하나?
    이단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이하 하나님의 교회)가 지난 5월 30일 본보에 한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과거 본보가 보도한 내용 중 부적절한 부분이 있으니 그것을 수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과거 2017년 6월 21일 번영로교회에서 있었던 제2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에서 이단 전문가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의 강의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탁 교수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라는 강의문을 발표했는데, 하나님의 교회측은 최근 판례(서울남부지방법원 2020카합 20183)를 제기하면서 “채권자가 과거에 시한부 종말론을 제시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현재도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부분은 수정해 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본보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방침이다. 지난 6월 1일에는 JMS(기독교복음선교회, 이하 JMS)측이 한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발언의 기회를 찾고 싶다’며 “공정한 시각에서 JMS측의 이야기도 들어주시기 바라며, 향후 관련 보도를 하실 때 JMS측에도 사실 확인을 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첨부파일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JMS 관련 오보’와 ‘누가 JMS를 이단 사이비로 만들었나’, ‘JMS 녹취파일 증거훼손 조작’ 등의 보도자료 등을 담고 있다. 이단 전문가들은 “사회적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여론을 바꿔보려는 측면에서 최근 언론사들을 상대로 활발하게 여론전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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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3-06-09
  • 담을 허물고 이웃에게 다가간 대연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부산노회 산하 가장 전통을 중요히 여기던 대연교회(담임 전승만 목사)가 이웃주민들 속으로 다가가고 있는 새로운 교회변화로 탈바꿈하여 주위로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1907년 설립된 대연교회는 100년이 넘는 오랜 전통과 역사 속에서 높은 담을 쌓고 있는 이미지였다. 한때는 고지식한 교회로 소문이 났었지만 지금은 높은 담을 허물고 교회가 지역 이웃들의 친구가 되고 있었다. 이것은 한 젊은 목회자가 7년 전에 부임하고 난 이후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회 주변 변두리에 온통 붉은 벽돌로 담을 쌓아서 이웃 주민이 감히 교회 안을 기웃거리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젊은 목사는 어느 초등학생 둘이 교회 정문 앞 건널목에서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어느 한 학생이 말하기를 교회 벽 사이로 해서 지나가면 빨리 학교에 갈 수 있으니 이쪽 교회 벽 사이로 건널목 길로 건너가자고 친구한데 제의하자, 옆에 있던 한 친구 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교회 사이로 지나가면 재수가 없데. 마귀가 해코지 한다던데? 그러니 교회 앞 건널목 쪽으로 가지 말고 다른 쪽으로 가자”라고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됐다. 담임목사가 “왜 교회가 가장 번화가로 있던 교회가 동네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교회가 어린 학생까지도 두렵게 여기고 무서워하는가?”라는 회의감을 느껴서 당장 교회 담을 헐고 어느 이웃도 편하게 지나갈 수 있고 올 수 있도록 지역교회로 오픈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당회를 열어 교회벽을 헐자고 제의를 했다. 당회는 이를 허락하고는 교회 넒은 장소에 지역주민들도 주일만 빼고 주민들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교회 마당을 주차 공간으로 만들어 내어 주었다. 주민 누구나 편하게 교회와 가까이 할 수 있도록 1층에 카페를 만들어 커피를 자유롭게 사 먹으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못골 샬롬 카페”라고 지었다. 이웃 주민 누구나 이 공간에서 만남의 장소로 허락하고 대화하며 쉴 수 있는 사랑방 공간이 되게 하였다. 이 뿐만아니라 여름철에는 ‘워터파크’ 이동 시설물을 장치하여 여름 물놀이로 어린 아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수영장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했다. 바닷가에 가는 것 보다 이웃 교회 수영장에서 즐길 수 있게 어린이 이웃 놀이장으로 변모하는 공간이 되게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이웃주민들이 교회 마당과 카페를 자기들 휴식처로, 만남의 장소로 변화되고 자연스럽게 출입하는 이웃주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주일날 교회학교가 자연히 늘게 되었고 교인들이 지역주민들의 교회로 변해 버린 대연교회는 과거같은 교회 내 분쟁과 다툼이 없어지고 전통에 메인 교회모습이 지역교회 모습으로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부산노회 내에서 두 번씩이나 담임목사로 인해 노회가 화해 중재가 나와 매우 골치 아픈 교회로도 이름이 나기도 했던 교회가 이렇게 변해 버렸다. 지난 5월 21일 오후 5시 부산노회장로회 제69회 3차 장로월례회에 참석차 교회 카페에 들어서자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휴식공간으로 만들어 놓았음을 느꼈다. 본당 안에도 리모델링을 하여 역사와 전통을 자랑만했던 대연교회 이미지가 싹 없어진 느낌이었다, 젊은 전연승 목사가 부임하던 당시만 해도 연이은 사건 사고로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둠의 역사가 없어지고 오랜 이곳 못골에 샬롬이 번져나고 노란 우산이 물결치는 아름다운 희망의 교회, 다음세대를 위해 다시 어게인하는 교회로 태어나야겠다는 젊은 목사의 절규를 시무장로들이 함께 힘을 보태어 주었다고 말하지않는가! 그래서 전 목사는 일찍이 이웃 대연초등학교 학생들이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노란 우산을 개당 5천원 수백개를 만들어 우산에다 대연교회 이름을 새겨 무료로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편의를 베풀게 하는 착안을 내어 시행하였다. 어린 학생들은 비가 와도 편하게 등하교하는 친구가 되는 대연교회로 변해갔다. 교회가 다음세대 친구들을 구원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간접 전도야 말로 젊은 목사의 아이디어로 인해 변해가는 모습에 교인들은 협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스프랑크니조마이(spranchnizomai)”(헬라어로 자궁까지 깊숙이 통하는) 그런 전도의 확장에 박차를 가해서 이단 신천지가 온통 서면일대 대형 화면 스크린에 등장하고 경성대 앞마당 장소할 것 없이 이단 신천지의 어둠의 그림자가 판을 치고 있다. 부산이 이단 천지로 변해가도 기존 교회들은 서로 이기심에만 몰두하고 연합단체들은 싸움만 하고 있는 어둠의 부산 도시가 되고 있는데 대한 외침에 이날 모인인 장로들은 회개 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다. 지금 부산 주요 일간지에는 한주가 멀다하고 신문 전면 광고로 신천지 광고가 게재되어 부산 시민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단 신천지의 활개를 차단할 아무런 대안도 없는 부산 교회 현실 앞에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 목사, 장로들의 중론들이었고 고민거리였다. 이 땅에 광복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있었다면 대연교회에는 교회가 깨어나야 회복할 수 있다고 절규하는 젊은 목회자 전승만 목사가 있었다. 이 땅의 잠자는 교회들을 이단으로부터 깨워 일으켜 세워야 하는 과제가 남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명기 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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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목회자칼럼] 목회에도 맷집이 필요하다
    목회를 하다 보면 종종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만난다. 어제도 성도를 떠나보낸 선배 목사님의 아픈 이야기를 들으며,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오랫동안 열심히 영혼을 섬겼건만, 떠나면서는 “모두 목사님의 잘못이에요”란 원망만 돌아왔을 때 목사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선배 목사님이 눈물을 머금고 말하는 이야기가 개척 목사는 충분히 공감이 되고 이해가 간다. 또 이렇게 목회의 한 페이지가 눈물로 쓰여진다. 우리의 삶은 평가를 받는다. 나 스스로에게 평가를 받기도 하고, 타인에게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평가하시기도 한다. 먼저, 내 자신이 나를 평가할 때,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교만이 또 때로는 자기연민이 나를 쉽게 유혹한다. 나의 죄와 연약함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는 반면 내가 타인을 평가할 때는 나에게 재던 기준과 원칙보다는 훨씬 더 엄격하게 적용한다. 내가 하면 괜찮고, 잘하며, 로맨스가 되고 타인이 하면 원망하고, 잘못하며, 스캔들이 되어 버린다. 죄인인 인간은 나를 평가할 때도 철저히 자기중심성을 고집한다. 그래서 사실 자신을 잘 보지 못하고, 평가하지 못한다. 둘째, 타인의 평가이다. 자신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항상 편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교사 혹은 친구 등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볼 때는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본다. 타인이 오히려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신학자, 최고의 목회자인 바울은 타인이 평가하는 것 또한 불완전하다고 한다(고전 4:3). 평가받는 것이 작은 일이라 말하면서. 목회자는 타인의 소리를 들을 때 수용성도 있어야하지만 동시에 맷집도 필요하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는 기꺼이 미움을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미움을 받았고, 제자들도 그러했다. 물론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맷집이 대단한 분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사도바울도 사람이기에 마찬가지이고, 목회자도 동일하게 교인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다. 그러나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를 향한 평가는 필요하지만, 불완전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얼마나 빨리”를 말하며 날 속도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얼마나 많이”를 말하며 날 양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나의 삶을, 나의 삶의 방향을 인정해주시면서 그대로 평가해주신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성적은 ‘수우미양가’로 평가되었다. 그 때는 ‘수’와 ‘우’만 좋은 점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름다울)미도 나쁘지 않고. (양호할)양도 좋은 점수다. (가능할) 가는 희망을 말하기에 오히려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영혼은 오늘도 내일도 가능성을 본다. 요시아는 8세에 왕으로 올라 39세까지 31년 온 인생을 바쳐 종교개혁을 성실히 임했지만 므깃도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을 보고 어떤 사람은 “허무하게 죽고, 종교개혁도 완성시키지 못했으니 무슨 의미가 있냐?”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시아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제대로 된 말씀을 가르칠 때, 그 말씀에 은혜를 입은 부모가 다니엘을 나았고, 또 에스겔이 그 시기에 태어났다. 당장은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때 태어난 다니엘과 에스겔에 의해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은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말씀을 다시 전하는 진짜 개혁을 맞이한다. 이렇게 보니, 요시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 않는가? 사람은 지금 당장의 모습을 보고 평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과 다르다. 언약의 관점으로 얼마나 순종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영혼을 위해 순종하며 다시 걷는다. 맷집을 기르며 동시에 순종의 자세도 다지며 역사의 주인이시자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평가를 기다리며 오늘도 묵묵히 이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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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만주의 사도바울 한경희 목사2
    1915년 후반 한경희 목사는 서간도(西間島)의 전도목사로 임명되어 온 가족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사하여 삼원포,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휘남현(輝南縣)의 5개현을 담당하였다. 개척 전도자 한경희 목사는 고결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는 방기전(方基典, 1861-1920)이 1912년 10월 설립한 은양학교(恩養學校)의 2대 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교회 개척과 전도 외에도 교육사업에 관여하였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1920년 중국거주 한인들에 대한 일제의 개입이 노골화 되자 한경희 목사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중국국적 취득활동을 벌이게 되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경희 목사를 감시하던 일제가 그를 구속수감하기에 이르렀다. 즉 한경희 목사는 1929년 3월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3년 2월 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때 ‘아리랑’이란 소설로 유명한 김산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1월 29일 출옥한 이후 창성읍(昌城邑) 교회와 평로동(坪路洞) 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경희 목사는 길림성 동북쪽에 위치한 호림(虎林), 요하(饒河), 수원현(綏遠縣) 등에서 사역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곳으로 자원하여 갔다. 친구들은 그곳은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고 여기고 1933년 북만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그는 1935년 1월 1일,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는데, 교회에서 설교하고 김창근 등 제직 네 사람과 함께 설차(雪車)라고 불리는 눈썰매를 타고 오소리강(烏蘇里江) 소목하(小木河)으로 향하던 중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잡혔다. 중국인 공비는 돈 1천원을 요구했으나, 조선인 공산당원은 목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한경희 목사에게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2시간 동안 구타하고 그와 동행한 교인을 총살하고 시체를 얼어붙은 강 속에 던졌다. 이대 유일한 생존자인 이낙섭 집사는 한경희 목사는 “오, 주여 이 작은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세 번 외치고 죽음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신학지남」에는 한경희 목사에 대한 조사가 실려 있다. “불 수레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선배 엘리아를 쳐다보며 홀로 땅에 남겨서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 이스라엘의 기사여!’하고 슬퍼하는 엘리샤의 심정이 다시금 새롭습니다. 이제 한경희 목사님을 보내는 북만의 교도들은 한숨으로 한울을 쳐다보며 ‘오 북만의 병거, 북만의 기사여!’하고 가슴을 치며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목사님은 일찍이 남만에 건너가셔서 그 난마(亂麻)와 같은 사회에서 기다(幾多)의 위험과 곤고를 겪으시며 오로지 구령사업에 힘쓰시는 중 남만노회장의 중직에 있은지도 여러 차례셨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받들고 살벌(殺伐)의 세계, 성풍이 아직도 코를 찌르는 북만의 광야를 찾아오시니 목능, 밀산, 호림, 요하 등에 산재한 수천의 양 무리는 목사님을 통해서 배부름을 얻었으며 목사님을 따라 쉴 자리를 찾았었습니다. 그리하여 핍박받는 교도를 찾아 돌아다니시는 중 1935년 1월 1일 비적에게 잡혀 마침내 순교의 피를 뿌리셨습니다. 열에 가까운 유족을 무엇으로 위로하오리까?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터’ 이오매 목릉하에 뿌리신 목사님의 붉은 피 방울마다 꽃펴 이 땅을 꾸미리이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는 조선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후에 손양원 목사는 설교하면서 한경희 목사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로 1941년 11월 4일 피체되어 광주 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참 신앙은 고난이라 시련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얻는 것인 고로 우리들은 이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점점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때를 당하여 현하(現下) 교회는 사랑과 지혜와 용맹을 가지고 일하는 교역자를 요구한다. 우리 조선 기독교 교역자는 모두들 순교자 한경희 목사와 같이 순교 정신으로 선교에 종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경희 목사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만주의 사도바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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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6-09
  • [최병학 목사] ‘신화적 폭력’에 맞서는 ‘신적 폭력’
    “권력은 1, 2, 3차원으로 분류되는데, ‘직접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권력’인 1차원적 권력과 ‘법이라는 간접적 힘’으로 통치하는 2차원적 권력, 그리고 ‘설득과 영향력으로 부지불식간에 작용’하는 3차원적 권력이 그것이다.” 『3차원적 권력론』(나남, 1992)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정치 이론가인 스티븐 룩스 교수의 권력에 관한 정의이다. 사실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며,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으로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 ‘다양하게/극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우리는 ‘군부독재’와 ‘검찰 지배’, 그리고 ‘언론의 편향성’으로 이 3가지 권력을 맛보았고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권력이 오용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불의한 권력의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을 구분하며 신적 폭력을 지지하는데, “신적 폭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신화적 폭력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가리키고, 신적 폭력의 ‘신’은 유대교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먼저 신화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베냐민은 그리스 신화 속의 ‘니오베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딸 각각 일곱 명을 두었고 그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따라서 니오베는 자신이 레토(Leto) 여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낸 불경죄를 저질렀다.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 한 명씩밖에 없었던 레토는 화가 나서 두 자녀로 하여금 니오베의 아들,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결국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는 신화인데, 여기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이다. 법 정립적이고 경계 설정의 폭력이다. 반면, 베냐민이 예를 든 신적 폭력의 사례는 구약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이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으나,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모세가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것이 반기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같은 레위 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숨어 있었다. 이것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따라서 모세가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여호와는 땅을 가르고 불길을 솟아 오르게 해 고라의 무리를 한꺼번에 소멸했다(민 16:32-35).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냐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라고 말한다. 곧,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법 정립적이고 경계 설정의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인 것이다. 따라서 베냐민은 이 신적 폭력을 ‘순수한 폭력’이라고 옹호하였다. 신화적 폭력이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 자족하지만, 신적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신화적 폭력으로 변질된 1, 2, 3차원 권력의 폭력에 맞서 그리스도인의 신적 폭력을 묻는 우리 시대가 참 비극적이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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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서임중칼럼]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니?
    5월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에게 늘 불만인 아들이 있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뒤로하고 아들은 휑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음 날도 학교에 가기 전에 용돈을 달라고 투정을 부리다가 도시락도 버려두고 학교로 가버렸다. 아들의 어머니는 ‘돈이 중하냐? 아들이 중하냐?’ 하고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불편하게 지낸 아들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건축 현장 앞을 지나는데 자기 눈을 의심할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벽돌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 아들은 되돌아 건축 현장으로 가보았다. 분명 아버지였다. ‘회사에 출근하신 아버지가 왜 저기서…?’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어머니도 몹시 놀라 회사로 전화를 했다. “김 계장님 지난 달에 명예퇴직 하셨는데 사모님은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여직원의 답변을 들은 아내는 너무도 황당했고, 아들과 함께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남편은 퇴직한 사실을 숨기고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편이 약간의 취기에 어려 돌아왔다. 아내가 자리에 앉는 남편 앞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말했다. “여보, 미안해요. 오늘 동혁이가 당신이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봤어요. 당신은 가족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회사를 그만 둔 사실을 말하지 않았더군요. 가족 간의 진정한 사랑이란 힘든 것도 함께 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혼자 힘든 시간을 보낸 거예요.” 아버지 앞에 아들이 무릎을 꿇었다. “아빠, 죄송해요.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리고 교회도 나갈게요.”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취기어린 한 마디를 한다. “미안하다 아들아, 남들처럼 훌륭한 애비가 못되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에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이 있다“父兮生我, 母兮鞠我, 哀哀父母. 生我劬勞, 慾報深恩, 昊天罔極<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아 애달프고 슬프도다.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고 수고하셨도다.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하늘도 다함이 없도다>.” 이 애틋한 마음을 한자에서는 親(어버이 친)이라 한다. 어버이 친자는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아들(子)을 보고 있는(見) 모습을 뜻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형상인가? 어버이 친(親)에 버금가는 한자가 ‘효도 효(孝)'자다. 즉 노인을 업고 오는 아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한자의 모습, 親 자와 孝 자가 가정에 있을 때 그 가정은 복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 지고한 효도다. 기분 좋고 마음 내킬 때 부모님께 잘 해 드리기는 쉽다. 그러나 끝까지 편하게 모시기는 참으로 어렵다. 가끔 찾아뵙고 잘 대접하기는 쉽다. 그러나 매일처럼 찾아뵙고 대접하는 일은 쉽지 않다. 효도는 관계가 아닌 이해에서 진정한 효행이 시작된다. 나에게는 김기수 목사님이 믿음의 아버지이다. 나의 약혼과 결혼주례를 해 주셨는데 어르신이 소천하실 때까지 35년간 늘 찾아뵙고 축복기도를 받는 것이 나의 결혼기념일 행사였다. 관계보다 이해의 행동하는 효도였다. 지난 삼월과 사월은 미국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귀국하니 5월이다.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맺은 부목사님들과의 관계로 그들은 모두가 내 아들 딸이었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라고 해마다 찾아온다. 언제나 그렇지만 만감이 교차된다. 지극함으로 뒷바라지를 했던 자식 같은 아이들은 소식이 없지만 제대로 돌보아 주지도 못했던 아이들은 해마다 변치 않고 찾아주니 그렇다. 섬김과 사랑은 관계가 아닌 이해에서 행동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밤중이었다. 장로님의 아들이 술을 마시고 목사관을 찾아왔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차서 넘치고 있었다. 그 아들을 붙들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했다. 그 때 내가 그 청년을 품에 안고 던진 마지막 질문 하나가 있다. “아버지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니?” “……?” 서서히 술이 깨던 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눈빛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외롭고 쓸쓸하고 고뇌에 찬 눈빛을 나는 보았다. 장로님이고 사회적으로도 괜찮은 위치에 있으며 돈도 많고 모든 면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아버지의 눈빛이 왜 그리도 외롭고 쓸쓸할까? 나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그것은 바로 너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 아들은 내 품에서 울기 시작했다. 언제 술에 만취가 되었던가 싶게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달라진 것을, 그 아들도 달라진 것을 나는 나의 목회 현장에서 경험했다. 오늘의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른다. 아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식들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천만 마디의 말을 쏟아내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따뜻한 눈빛교감은 전혀 없이 살아간다. 죽고 난 후 눈을 감고 관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는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눈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 어머니의 눈빛을 본 자식이라면, 자식들의 눈빛을 본 부모님이라면 그 다음 말은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눈보다 정직한 표현을 하는 지체는 없다. 전국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하면서 내가 하는 마지막 한마디가 있다. 목사에게 묻는다. “성도들의 눈빛을 보았느냐?”고, 성도들에게 묻는다. “목사의 눈빛을 단 한번이라도 보았느냐?”고. 질문을 들은 회중들 대부분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지고 눈시울이 젖어들고 여기저기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 같은 자들의 당이 만들어지면 그들은 철연장으로 소란을 피우고 망치로 두드리고 도끼로 찍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상황에 함몰되어 말씀을 잊어버리고 서로의 눈빛조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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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성서연구]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사람
    언젠가 유명한 모 목사님께서 당신의 텔레비전 설교 방송 시청률이 1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약간은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주님께서 <중요한 시청률은 따로 있다. 그것은 내가 너의 삶을 보고 듣는 것, 내가 너의 기도를 듣는 것>이란 생각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우리에게 열광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다면 그건 무의미합니다. 주님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만드는 삶의 드라마를 보고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더러운 우리 삶을 외면하시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본문은 남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39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죽음을 준비하라고 통보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죽고 싶지 않은 일반적 생각 외에도,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침략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으로 모면했지만, 아직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려면 할 일이 태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가 열왕기하 20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열왕기하 20장 5~6절입니다.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할 때 누가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기도자를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면 뜻밖의 인물이 선택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도자가 신앙생활의 경륜이 짧은 사람, 나이가 어린 사람, 아무런 직분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영혼이 맑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즐겨 듣고 응답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기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개의 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 기도를 장로님들이 맡습니다. 그 장로님의 기도를 평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장로님이 평소에 기도하지 않고, 어쩌다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성도들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것은 비극이 될 것입니다. 기도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설교합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마다 두렵습니다. 제가 말씀을 잘 알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의 능력을 삶에서 체험하는 사람이라면, 설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정하신다면 의외의 인물이 선정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믿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아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않은 사람이 단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설교를 해야 하고, 청중은 그런 설교를 들어야 한다면, 교회 전체의 비극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조직과 제도에 의한 직분이 아닙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설교하고, 장로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등의 방식만으로는 바로 서기 어렵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알기에 설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듣는 기도의 사람이기에 기도해야 힘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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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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