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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속편의 시대가 남긴 숙제
    속편이 지배하는 한국영화 코로나 엔데믹 시기를 맞으며 한국의 극장가는 코로나 이전의 부흥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전인 2019년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2억 2천6백6십8만여 명에 달함으로써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가 4.37회에 달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실시되고 음식물 섭취가 제한된 데다 외출을 극도로 회피하기 시작하자 영화관은 관객의 발걸음이 끊긴 적막한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영화관을 직접 찾아간 관객의 수는 6천5십3만여 명에 불과했다.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도 1.17회로 뚝 떨어졌다. 그야말로 국내 영화관들이 아사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화계에 희망을 전해준 영화는 2017년 추석에 개봉한 이상용 감독의 <범죄도시>의 속편인 <범죄도시2>였다. 괴력의 형사 마석도(마동석)를 앞세워 무려 1천2백6십9만여 명의 관객을 모아 천만 관객 돌파라는 한국 영화계가 그토록 열망하던 부흥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편에서 중국교포들이 모여 사는 가리봉동 일대를 순식간에 장악했던 하얼빈 출신의 신흥 조폭 장첸(윤계상)의 악랄한 행위를 맨손으로 제압하는 마석도 형사의 불주먹에 당시 열광했던 관객의 수는 6백8십8만여 명이었다. 결코 적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이미 예고되기 시작했었다. 왜냐하면 극장 개봉이 끝난 후에도 <범죄도시>는 공중파 TV를 통해 해마다 명절용 영화로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전용 케이블 TV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재방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인기를 받아왔던 까닭에 제작자나 관객 모두 속편에 기대감이 높은 상태였다. <범죄도시2>의 천만 관객 돌파는 <마녀 Part2. The Other One>과 <탑건: 매버릭>, 그리고 여름방학 특수용으로 제작된 <한산: 용의 출현>과 추석용 가족영화 <공조2: 인터내셔널> 등의 속편 영화들의 연이은 개봉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들은 이미 전편을 통해 대중성을 검증받은 영화들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개봉을 늦춰왔던 대형영화들이 한꺼번에 영화관에 걸리는 바람에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어서 좋아 보였지만 적지 않은 수의 영화들이 속편의 성격을 띠고 개봉한 점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속편의 흥행 이유 속편 영화가 나오는 이유는 전편의 흥행에 대한 기대심리가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흥행에 실패한 영화는 각색을 거친 후 리메이크하는 경우는 있어도 주인공과 이야기를 연장하면서 속편을 만드는 일은 흔하지 않다. 속편 영화는 기존의 캐릭터와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독창성의 면모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흥행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사가 제작하기도 쉽고 투자받기도 훨씬 수월하다. 전편을 본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이미 어떤 성격의 영화인지를 알 수 있어서 새로운 영화를 보고 난 후 실망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고 속편을 통해 새로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기대감을 상승시킬 수 있으니 선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상승한 영화관람비에 대한 부담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선택에 더욱 신중한 자세를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속편은 매우 안정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금년 4월 주요 영화관들은 모두 영화관람료를 1천 원씩 인상하는 바람에 주말 티켓값은 1만 5천 원이 되었다. 주말에 4인 가족이 극장에서 팝콘세트를 먹으면서 영화를 본다면 10만 원 정도의 지출은 예상해야 한다. 평일 조조할인조차 1만 원에 이르는 등 할인을 받지 못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선택에 있어서 안전성과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재미가 없다면 지출에 따른 실망감이 큰 만큼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고 관객들은 믿고 있다. 또한 넷플릭스나 왓차, 웨이브 같은 OTT 서비스의 범람은 MZ세대들로 하여금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최신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점은 영화관에서 꼭 봐야 하는 이유를 꼼꼼이 따지도록 만들어 속편의 선호도를 높이는 이유로 볼 수 있다. 대형영화가 속편으로 만들어 질 때 관객들은 앞서 본 영화의 스케일에 대한 만족감을 다시 얻기 위해서라도 극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빌런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속편의 한계 금년에 주목받은 한국영화의 속편들은 범죄와 액션 그리고 코미디 장르라는 대중성이 강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미 관객들은 영화의 구조나 성격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범죄도시2>나 <공조2: 인터내셔널>과 같은 한국의 속편 영화들은 두 가지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첫째는 외형의 확장세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범죄도시2>는 배경을 베트남으로 옮겨 동남아시아로 확대하는 새로운 범죄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다. <공조2: 인터내셔널> 또한 남북공조에서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CIA를 결합시켜서 외연이 확장되었다. 비록 셋트와 그래픽을 이용했지만 뉴욕시에서의 액션 촬영 장면 등 해외풍경을 배경 삼아 다채로운 볼거리도 제공했다. 둘째는 악역의 교체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범죄도시2> 악역은 장첸(윤계상)에서 강해상(손석구)로 바뀌었고, <공조2: 인터내셔널>의 경우 북한에서 위조지폐 동판을 가져와 거래를 하려던 1편의 차기성(김주혁)에서 글로벌 범죄조직의 장명준(진선규)으로 교체했다. 범죄의 유형과 범죄인의 캐릭터에 변화를 줌으로써 기존의 주인공들을 다시 보는 익숙함에서 오는 재미와 더불어 새로운 느낌을 갖게 만드는 바람에 전형적인 장르의 장점을 살리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액션이나 범죄영화에 있어서 주인공의 변화가 아닌 악역의 변화를 통해 속편을 전개시키는 점은 자칫 과도한 폭력성과 선정성의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범죄도시2>가 속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마동석 배우가 마블 영화 <이터널스>를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 형사를 상대하는 악당의 잔혹한 연기가 주목을 끌었던 까닭에도 있다. 흔히 빌런(villain)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주인공 못지않은 개성을 보여주며 흥행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최근 범죄영화나 액션 영화와 같은 대중성 높은 장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매우 중요한 흐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악당은 단순히 정의로운 주인공에 의해서 제압당하기 위한 존재로 출연하는 보조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충분한 개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과거와는 다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빌런의 개성이 폭력의 잔혹성이나 기발한 범죄유형을 통해 전개되는 점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범죄도시2>가 받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 또한 천만 관객 돌파의 이유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관람 연령이 낮을수록 관람대상의 폭은 넓어질 수 있어서 제작자의 1차적 관심은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될 수 있으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지 않는 데 있다. <범죄도시> 1편의 등급은 청소년 관람 불가였다. 18세 미만이거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사람은 관람할 수 없다. 그러나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은 보호자가 동반하는 경우 그보다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도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다. 즉 가족이 함께한다면 어린 학생들도 결코 적지 않은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비해 한국영화에서 마약이나 폭력의 수위는 결코 낮아지고 있지 않지만, 등급은 하양 추세로 가고 있음을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탑건: 매버릭>, 영화의 품위를 말하다 36년을 기다려 온 영화 <탑건: 매버릭>은 전편 <탑건>(1986)의 인기를 바탕으로 만든 속편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서 완벽한 영화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전편의 힘을 빌려 흥행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영화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전편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출발점으로 작용하며 관객이 듣고 싶고 보고 싶어하는 새로운 이야기와 장면에 대한 기대에 부응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명예와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 다는 점에서 영화의 품위를 보여준다. 주인공 매버릭(톰 크루즈)은 교관 신분으로 과거 자신과 함께 비행하다 사고로 숨진 동료 조종사 구스(안소니 에드워즈)의 아들 루스터(마일스 텔러)를 가르치게 되고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영화는 신구세대 간의 충돌과 연합을 뛰어넘어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을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 세대가 아들 세대를 지켜주고 키워주려는 책임감과 사명이 부각되고,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자긍심과 명예는 악당을 중심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다른 속편들과는 매우 다른 차원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핵시설을 건설하여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다만 ‘적’으로 묘사될 뿐이다. 악당을 통해 관심을 고조시키기 보다는 주인공의 가치에 초점을 둔 영화의 전략을 읽을 수 있다. <탑건>(1986)을 처음 봤을 때는 겉멋만 잔뜩 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탑건: 매버릭>은 주인공이나 영화 속 이야기 모두 성장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속편을 만들 때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며 덕을 세울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빌:8) <탑건: 매버릭>을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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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영화]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
    영화를 통해 배우는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그린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인 <한산:용의 출현>(이하 <한산>)이 뜨거운 여름의 극장가를 점령했다. 이미 <명량>(2014)을 통해 1,761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아 한국영화 역사상 최다 관객 수 1위에 오른 일이 있어서 <한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대단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외부 환경도 좋은 편이다. 코로나 엔데믹으로 인해 거리 두기가 없어졌고 극장에서 콜라와 팝콘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한여름 피서지로서 영화관을 찾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명량>의 흥행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일본 정치인들의 군국주의 망언에 따른 반일 정서 또한 계속되는 중이다. 최근에는 일본 자민당 거물 정치인인 에토 세이시로 중의원 의원이 일본을 한국의 “형님 뻘”이라고 주장하여 크게 반발을 샀고, 일본의 적지 않은 정치인들은 여전히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화의 수치스러운 자국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영화 <한산>은 역사물로서 현실의 대일관계에서 오는 화 나고 답답한 현실을 속 시원하게 뚫어주는 사이다 역할을 한다. 1592년 5월 23일 시작된 일본의 조선 침략은 채 두 달도 못 돼서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켰다. 선조는 평양성을 떠나 의주로 피난을 떠났고 왜군은 육지의 기세를 몰아 조선의 마지막 남은 수군을 격파하고 명나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전쟁영화는 모름지기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영웅도 탄생하고 비책이 빛을 발하듯이 <한산>은 전세의 전환점이 될 8월 14일의 한산도 앞바다를 비춰주고 있다. 결과는 물론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승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한산대첩을 영화화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 기록물을 넘나들며 역사적 사실과 재해석 사이를 오가야 할 뿐만 아니라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다. 김한민 감독의 오랜 연구와 기획 그리고 <명량>에서 쌓은 노하우는 무난한 결과를 가져왔다. 관객들은 이미 <명량>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CG로 입혀진 50분간의 해전 장면에 만족했고, IMAX로 다시 한번 보는 재차 관람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역사적 고증도 비교적 잘 되어 역사가들의 판단 또한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왜군을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으로 투입된 배의 숫자가 영화에서는 3척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5~6척에 이르며, 한산대첩에서 연을 통신 수단으로 사용한 적이 없고, 왜군의 움직임에 대한 결정적 정보를 제공하여 승리를 이끈 핵심인물로 조선의 민초였던 당포 목동 김천손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는 부분 등 팩트 체크를 하자면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산>은 한마디로 이순신의 전략이 빛나는 역사현장을 목격하는 재미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전략가 이순신을 만나다 <명량>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위대한 영웅의 이미지로서 이순신을 그려냈다면 <한산>은 지략가 혹은 전술가로서의 이순신(박해일)의 면모가 빛나고 있다. 특히 <명량>과 다르게 이순신과 일본의 장수 와카자키 야스하루(脇坂安治, 변요한)와의 전술 대결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점은 <한산>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은 용인술(用人術)에서 빛났다. 학익진(鶴翼陣)은 각각의 함선을 이끌 장수들의 이름을 전술도(戰術圖)에 적어 넣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누구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세밀한 계획은 마치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선수들의 포지션을 정하는 감독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羅大用, 박지환)을 옆에 둔 일과 거북선에만 의지하지 않고 전 병력을 고르게 활용한 전략도 이순신 장군의 높은 지략을 엿보게 한다. 사천해전에서 12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 시켰던 주역이 바로 거북선이었고, 거북선의 무서운 맛을 본 왜군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게든 거북선의 약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집중공격하고자 하는 것이 와카자키 전술의 핵심이었다. 그만큼 거북선은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전함이었던 셈이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중심으로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이려고 하는 전투계획을 세울 만도 하지만, 막상 일본의 첩자가 거북선의 설계도를 훔쳐 도주해버리자 거북선을 출전시키지 않기로 한다. 이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적에게 이미 약점이 노출된 것을 알았을 때 빨리 전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지장(智將)의 면모다. 과거의 승리에 도취해서 변화하기를 주저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한산>에는 세 척의 거북선이 출전한다. 모두 약점이 보완된 거북선들로서 이는 나대용이란 뛰어난 제작자를 옆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했고 이 소식을 들은 나대용은 사촌 동생인 나치용과 함께 여수로 건너가 이순신 장군에게 거북선 건조를 건의하였다. 거북선 설계도를 검토한 이순신은 나대용을 전라좌수영의 전선(戰船)을 건조하고 군병의 출납을 감독하는 ‘감조전선 출납 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에 임명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4월 초에 실전 배치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순신은 다 계획이 있었다. 이순신보다 13살이나 많았던 노장(老將) 어영담(魚泳潭, 안성기)이 위험을 무릅쓰고 왜군의 유인책에 앞장선 것도 이순신이 용인술을 돋보이게 하는 장면이었다. 광양 현감으로 이순신과 함께 출전한 어영담은 경상도 앞바다를 한눈에 꿰고 있을 만큼 수로를 읽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순신의 승리 때마다 그의 공적이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적이 이미 아군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획대로 기다리는 자와 참지 못하고 조급히 서두르는 자의 결말이 어떻게 다른지는 어영담의 노련함을 통해 드러난다. 이순신의 전쟁관에서 배우다 <한산>을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단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이순신에게 총상을 입혔던 왜군 준사(김성규)가 포로로 잡혀와 이순신에게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전쟁은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다.” 임진왜란을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정의 내린 이순신의 확고한 생각은 군사들에게는 왜 백성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백성들에게는 왜 나라를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의병(義兵)은 이순신의 전쟁관을 실행하는 가장 독보적인 존재들이다. 조선의 의병은 서양처럼 민간에서 전쟁에 차출된 단순한 민병대가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나타난 의병은 불의에 저항하는 도덕적 심판자이며 보편적 가치의 준행자였다. 일제강점기에 국권 상실을 목격하며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쓴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뛰어난 우수성(國粹)이며 우리나라의 본연의 성향(國性)’으로 보았다.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병자호란과 구한말의 의병, 그리고 항일투쟁의 독립운동가들이 보여주는 역사는 한민족이 침략자들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토록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굴복하거나 동화되는 일이 없었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드러낸다. 전쟁을 의와 불의로 판단하는 이순신의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논어(論語)였을 것이다. 논어 이인(里仁)편의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말이나, 양화(陽貨)편의 ‘군자는 의로움을 첫째로 여긴다. 군자에게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다면 난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맹하고 의로움이 없다면 도둑질을 하게 된다(君子義以爲上 君子有勇而無義 爲亂 小人有勇而無義 爲盜)’는 말은 이순신의 전쟁관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군자 같은 이미지로 나온 연유로 파악될 수 있다. 군자는 유교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군자의 으뜸가는 특징은 의에 있으며, 불의를 보고 물러서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순신의 의(義)로 기준을 삼는 전쟁관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를 악을 미워하고 의로움을 좋아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5-7) 그리스도인이 전쟁터에 나가서 적에게 총을 쏘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의와 불의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왜선의 십자가가 남긴 숙제 영화 <한산>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때 왜선의 커다란 돛에 그려진 십자가가 나오는 장면에서 혹시 당황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약간의 역사 기술이 필요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으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가톨릭 교인이었다. 나가사키를 포함한 일본 남부 규슈지방의 영주들 가운데는 가톨릭 교인들이 제법 있었고 그들의 부하들 또한 가톨릭 교인으로 개종했는데 이들을 포르투갈어인 크리스탕(Cristão)의 일본식 표현인 ‘기리시탄(キリシタン)’으로 불렀다. 기리시탄 영주들은 일본에 와있던 가톨릭 신부를 종군신부로 참가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스페인 출신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로 1593년 12월부터 약 1년 반을 조선에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가한 기리시탄 왜병들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기리시탄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른 왜병과 다른 점은 아무 데도 없었다. 양민을 학살하고 귀와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챙겨갔다.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십자가 깃발을 들고 가는 왜병들의 모습이 비춰진다면 그것은 연출자의 실수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송한 가톨릭 선교사들이 임진왜란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앞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진해 웅천동에 있는 우리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세스페데스 공원’이 과연 역사적으로 의(義)로운 일에 해당하는지 시급히 판단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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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1
  • [영화] ‘K-칸’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한국 영화를 추앙(?)하는 칸영화제 대한민국이 영화를 잘 만들고 대한민국 영화가 재미있다는 얘기는 소문이 아니라 사실임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지난 5월 17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을 연출한 박찬욱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고, 영화 <브로커>(Broker)에서 주연을 맡은 송강호 배우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100년의 영화 역사상 칸국제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두 개를 받은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칸국제영화제는 같은 작품에 두 개의 상을 주는 일이 없는 까닭에 어떤 상이든 받기만 한다면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만 가지고도 대단한 영화라는 인정을 받는다. 왜냐하면 칸영화제는 전세계에서 출품한 2천 편이 넘는 영화 가운데서 단지 20편 내외의 작품을 선정하여 경쟁부문에 올리고 거기서 상 받을 영화와 배우들을 뽑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3대 영화제를 거론하며 다른 국제영화제들도 많은데 굳이 칸영화제에서 상 받은 것을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떠는 게 아니냐 하며 겸손하라는 뜻을 비추기도 한다. 현대의 영화들이 다국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한국 영화가 발전하기까지 영화 선진국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세계 최고라는 교만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칸영화제가 바라보는 한국 영화의 위상이 예전과 다르게 ‘추앙’하는 현실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칸영화제가 보수적이라는 비판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그 위상만큼은 가히 절대적이다. 세계에는 칸영화제 말고도 베를린영화제나 베니스 영화제 같은 유명영화제들이 더 있다. 그러나 규모나 작품의 숫자, 세계영화계에 주는 영향력을 비교한다면 칸영화제에 견줄만한 영화제는 그 어디에도 없다. 마치 영화계의 노벨상 같다고나 할까. 이번 칸영화제는 경쟁 부문 뿐만 아니라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한국 영화들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배우로서 활동해오던 이정재 배우가 첫 연출을 맡은 감독 데뷔작 <헌트>(Hunt)는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박수갈채를 받으며 시사에 성공했다. 칸영화제의 메인 상영관이자 가장 많은 객석인 3천 석을 보유한 뤼미에르 극장을 배당받은 <헌트>는 전회 매진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감독들의 약진 또한 대단했다. 정주리 감독은 신작 <다음 소희>로 국제비평가주간 폐막작 상영의 영광을 안았고, 문수진 감독의 <각질>은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진출한 9개 영화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칸영화제 극장 밖의 한국 영화 열풍은 더욱 뜨거웠다.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들을 포함하여 각국의 유명 영화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들고나와서 팔고, 또 영화 수입업자들 또한 흥행이 예상될만한 영화들을 찾아 촉각을 세우며 거래하는 영화시장이 서는 데 여기서도 한국 영화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외에도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과 신연식 감독의 <카시오페아>를 포함하여 16개 작품이 마켓에서 주목할 만한 한국 영화로 현지 언론들은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올해 칸영화제에선 어디를 가도 한국 영화가 있었다. 이것을 현지 언론들은 ‘K-칸’(Korea-Cannes)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켜 본 한국영화 발전의 역설 칸영화제와 한국인들이 유달리 사랑하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의 가족영화 <브로커>(Booker)가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일은 새로운 영화의 트렌드 속에서 한국 영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즉 한국 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이면서 세계화된 속성을 영화 <브로커>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국경을 초월하는 현대 영화 제작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감독은 일본 사람이지만 배우들과 제작사는 모두 한국 국적이다.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송강호를 비롯하여 강동원, 배두나, 아이유(이지은) 등의 주연급 뿐만아니라 송새벽, 김선영, 이동휘, 박해준 등 한국영화계의 명품 배우들이 단역을 마다하지 않고 총출동하여 보는 즐거움과 작품의 질을 높였다. 이는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라고 하는 세계적인 연출가와 함께 한다는 의미도 개인적으로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제작과 배급은 한국 최고의 영화투자사 CJ ENM이 맡았다. 둘째는 국경을 초월한 최고의 조합을 보여주었다. <브로커>의 장르는 가족영화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영화를 통해서만 칸영화제에서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 2013)로 6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데 이어서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2018)은 제71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송강호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을 통해 소시민적인 아버지 연기의 달인으로 평가받은 명배우다. 거기다 입양 사기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가족영화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점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영화계의 흐름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셋째는 국경을 초월하여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인간애라는 주제가 통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손에서 버려지는 영아들과 갓난아기를 해외에 입양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한국사회의 불행과 고난의 역사를 담고 있다. 6.25 전쟁고아들을 해외로 입양시켜야 하는 빈곤의 상황은 한국 역사가 낳은 비극이지만 영화의 좋은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버려지는 아기들이 있고, 이들의 생명을 어떻게든 구하고 건강하게 성장시키려는 교회와 기관의 존재는 급속한 사회변화를 겪는 한국 사회의 난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적으로는 흥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의 고난과 불행의 역사와 사회상은 한국 영화를 발전시키는 또 다른 원동력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영화 <브로커>는 채무에 시달리는 상현(송강호)과 보육원 출신으로 교회의 베이비 박스 시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수(강동원)가 몰래 협작하여 유기된 아기들을 양부모에게 연결시켜주고 돈을 받는 입양 브로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브로커의 실상을 알아버린 아이의 엄마 소영(아이유)이 나타나고 이들을 뒤쫓는 형사들(배두나, 이주영)이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얽히고설키기 시작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여느 가족영화에 비해서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 역시 범죄자를 쫓는 형사물의 특성을 결합시킨 까닭이다. 영화는 진정한 가족애를 인식시키기 위해 ‘동시 대조 효과(The Effect of Simultaneous Contrast)’를 활용한다. ‘동시 대조 효과’란 사람들이 색을 인식할 때 비슷한 색보다는 다른 색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 경계 부분에서 가장 크게 인식한다는 이론이다. <브로커>는 객관적으로 보자면 불법입양 범죄자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가족애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건강하고 이상적인 가족 안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색깔에 둘러싸여 있을 때 가족의 중요한 가치인 생명성은 단연 빛나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대신에 ‘무엇이 가족인지’를 새롭게 인식시켜 온 감독의 주제의식은 <브로커>에서도 여지 없이 들어난다. 가족의 가치에 대한 뻔한 대답이 아니라 의식의 전환을 통해 가족의 본질을 물으려는 감독의 의도는 이번 영화에도 계속된다. 브로커들과 소영은 아이를 불법 입양시키는 과정에서 함께 차를 타고 움직이며 마치 가족처럼 행세한다. 아니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가족애를 느끼며 생명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들이 가족에 대해 깨달은 것은 바로 생명성이었다. <브로커>에서 불법 입양 조직을 뒤쫓는 형사 수진(배두나)은 처음에는 아이를 버리는 엄마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도대체 아이는 왜 낳는 거야!” 어찌 보면 아이를 돌볼 형편이 안되는 미혼모를 포함한 영아유기의 현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영(아이유)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문한다. “낳기 전에 죽이는 게,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죄가 가벼워?” 정말 뼈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낙태 합법화에 따른 논쟁이 여전히 사회문제로 남아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 영화는 정말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출산과 입양은 기본적으로 생명성에 대한 존중의 가치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비록 형편이 어렵지만 아이를 낳는 엄마의 마음에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마음 속 깊이 배어있다. 영화 속에서 불법적인 입앙 행위를 일삼는 브로커지만 그들에게 생명은 가족을 연계시키는 의미있는 가치로 와닿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이유 역시 생명성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모두 불법자들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살아줘서 고마워!” 적어도 가족은 살아서 함께 있다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야 하지 않을까? 생명이 절대적 가치를 지녀야 함을 우리는 잊고 산 것이 아닐까? 생명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어야 함(잠9:6)은 성경에 바탕을 둔 절대적 가치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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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영화] 4차산업혁명 시대에 부활한 김용기 장로를 만나다
    난세(亂世)에 김용기를 소환한 이유 가수 진성이 부른 노래 ‘보릿고개’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가사는 가수 본인의 어머니가 경험했다는 가난했던 시절을 노래하고 있다. 지난해 추수한 쌀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에서 보리를 거둬들이려면 아직 멀었던 난감했던 시기를 보내는 방법은 물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어디 어린 진성의 어머니뿐이었겠는가! 그 시절 대한민국의 국민은 가난을 운명이라 여기며 원 없이 배 터지도록 먹는 소원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며 살아야 했다. 지난 4월, 국제통화기금 IMF는 2021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1조 8천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4,800달러라고 공식 확정 발표했다. 전세계 순위로는 캐나다에 이어서 10위에 올랐다. 이미 작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분류하였듯이 한국은 이제 가난과는 거리가 먼 경제선진국으로 발전한 나라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기보다는 두툼한 지방으로 채워진 뱃살을 걱정해야 하는 국민으로 바뀌었다. 김상철 감독은 과감히 김용기 장로를 영화를 통해 소환시켰다. 이것은 감독이 가진 영화 철학에 기인한 것으로 한국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열망을 드러내는 일에 다름아니다. 즉 그는 영화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한국 교회가 김상철 감독을 기억하게 만든 영화는 <제자 옥한흠>(2014)이었다. 한국 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 <제자 옥한흠>은 그 문제점의 원인을 목회자의 책임에 두고 목회자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가득차 있었다. 김상철 감독이 이를 위해 소환한 인물이 바로 사랑의교회를 일구며 교계에서 존경받았던 옥한흠 목사였다. 영화는 옥한흠 목사의 생전 기록 영상들을 빌려서 그가 한국 교회의 현실을 걱정하고 미래를 안타까워하면서 남긴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교회를 살리는 방법은 목회자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 교회에는 <제자 옥한흠>을 볼 수 있는 교회와 볼 수 없는 교회로 나눌 수 있다는 교계 내부의 반성과 쓴소리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제 김상철 감독은 김용기 장로를 소환했다. 교회를 넘어 우리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처음부터 ‘난세론’으로 시작한다. 말세라 하지 않고 난세라고 한 것은 ‘아직 희망이 있어 어려움과 환란 속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좋은 세상, 좋은 사회를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는 김용기 장로의 말로 영화는 시작한다. 디지털 세대에게도 가나안 정신은 통할까? 경제발전과 4차산업혁명의 시기를 사는 현대 한국인과 한국 교회는 난세를 개척한 숨은 영웅 김용기 장로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나마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농촌사회의 계몽운동가 정도로 여길 뿐이다. 그가 세운 가나안 농군학교는 산업화 사회 이전의 농촌사회에서나 필요한 운동일 뿐 디지털 혁명이 거세게 부는 오늘날 과연 그를 기억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는 사람도 있다. 영화 <가나안 김용기>는 두 가지의 논리로 그가 이 시대에도 김용기와 가나안 농군학교의 정신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첫째는 전국민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스승과 어른의 필요성이다. MZ세대를 포함해서 모든 세대에게 어른은 꼰대와 잔소리꾼으로 읽히기 쉽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듣는 사람의 문제이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즉 기성세대가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존경받았다면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기 장로는 행동으로서 자신의 신앙과 철학을 보여주었고, 그 행동은 빈곤으로 가득 찬 난세를 개척하는 디딤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어른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감독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는 문구는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로부터 가져온 말이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김용기 장로는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이 정신 개혁 운동을 한국 사회에 퍼뜨렸다. 기독교 정신으로 시작한 가나안 농군학교는 교회와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승려나 수녀들도 훈련을 받았고, 농촌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산업계에 종사하는 근로자와 사업가들 모두가 참여하는 생활 혁명으로 이어졌다. 성경이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듯이, 김용기라는 어른이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가나안 정신은 디지털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둘째는 가나안 농군학교가 정신적인 면에서 한류열풍의 콘텐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졸업하고 아프리카에서 가나안 정신을 심고 있는 활동가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장면은 영화 구성의 단조로움을 깨며 MZ세대가 좋아하는 ‘국뽕’을 제공하여 영화의 흥행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즉 한국이 스마트폰을 잘 만들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정신세계에도 영향을 주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소재였다. 그러나 영화는 메시지의 진중함에 너무 몰두해 있어서 <울지마 톤즈>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지 아쉬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도 가나안 농군학교가 수출이 되어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사단법인 세계가나안운동본부를 설립하여 현재 세계 12개국에 15개의 가나안농군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우리의 옛 모습처럼 가난이 가져온 곤란한 처지에 있는 나라들이다. 지구촌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가나안 농군학교가 근로, 봉사, 희생정신을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류문화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한국이 유엔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남의 나라를 돕는 위치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경제원조를 포함해서 정신적인 도움을 제공한다는 점 또한 유일무이하다.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빈곤의 해결방법이 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과거 유럽의 식민지였고, 유럽의 선진국들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엄청난 돈으로 배상해왔다. 그러나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는 빈곤의 악순환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빈곤한 상황을 고치는 방법은 돈보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정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영화는 전하고 있다. 고무신과 박정희를 넘어서 영화 <가나안 김용기>는 민족과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 밑바탕에 기독교 신앙이 흐르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대한독립을 넘어서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도 가슴에 품고 싶었던 풍운아 김용기가 어떻게 농촌운동가로 변신했는지를 영화는 매우 의미있게 설명한다. 사회와 민족의 변화가 가정과 생활 개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가나안 정신은 김용기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김용기는 고무신과 박정희 전대통령과의 일화에 맞춰져 있다. 흰 두루마리에 하얀 고무신은 1966년 막사이사이상 받기 위해 필리핀 마닐라의 시상식에 선 김용기 장로의 행색이다. 해외 기자들은 번쩍이는 구두가 아닌 흰 고무신에 주목했고, 김용기 장로는 한국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고무신을 벗지 않겠다는 연설을 통하여 기립박수를 받는다. 가난이 자랑이 될 수는 없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의지와 정신의 소유자가 얼마나 민족의 자랑이 될 수 있는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요즘 MZ세대들은 고무신에 색깔과 모양을 입혀서 신고다니는 것이 유행이라 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또 한가지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한 일이다. 김용기 장로는 삶은 감자와 빵으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에게 여기에서는 누구나 먹기 전에 식사기도를 드려야 한다며 식사기도를 한 일화를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10분이 넘는 기도가 이어지자 경호원이 와서 빨리 끝내 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장면이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새마을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고무신과 박정희로 상징되는 가나안 농군학교에 대한 생각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며 미래형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두고 온 세상을 향한 한국의 정신문화유산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지 심는대로 거두는’(갈 6:7) 농부의 믿음은 성경적이면서 세계에 통하는 사상이 아닌가! 영화 <가나안 김용기>가 과연 난세의 한국교회와 사회에 가나안 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 그 답은 영화를 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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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0
  • [영화] 구속과 은혜에 대한 은유가 빛나는 단편영화 세 편
    영화의 ‘콘트라팍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가운데 <You raise me up>이 있다. ‘내 마음이 우울하고, 나의 영혼이 많이 지칠 때(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로 시작하는 가사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들어 산정상에 세우시며 폭풍이 치는 바다 위를 걷게 해주신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교회 안에서도 즐겨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출처를 보면 누군가의 신앙고백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나 복음송이 아닌 팝송이란 사실에서 다소 놀랄 수 있을지 모른다. 리듬과 멜로디가 그리스도인의 정서에 맞고 신앙적인 해석이 가능한 가사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You raise me up>은 북아일랜드 민요인 ‘Londondery Air(아, 목동아)’를 기반으로 한 노래로 2002년에 출시된 시크린 가든의 앨범 <Once in a red moon>의 수록곡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쉬 그로반(Josh Groban), 웨스트 라이프(Westlife), 일 디보(Il Divo)등 수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이 곡을 리메이크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노래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소향과 소울 등 CCM 가수들이 즐겨 불렀고 어느덧 교회 행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기곡으로 자리 잡았다. <You raise me up>의 출발점이 팝송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에 결코 실망할 필요는 없다. 교회음악의 역사에는 <애니 로리(Annie Laurie, 찬송가 493장)>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찬송가 280장)>과 같은 민요 선율이나 세속적인 음악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사용한 예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세속적인 리듬이나 멜로디에 기독교적인 가사를 붙여서 사용한 교회음악을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 부른다. 기독교 영화에도 ‘콘트라팍툼’이 있다. 세속적인 영화지만 그 메시지가 매우 성경적이고 기독교 신앙을 북돋우는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마치 처음부터 기독교 영화로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는 영화를 말한다. 바로 체코의 단편영화 모스트(MOST, 2003)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터넷에서 떠돌던 편집 영상을 통해서 감동을 받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름아름 교회에서 사용해왔지만 정작 완편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최근 일이었다. 김상철 감독의 기독교 영화사인 ‘파이어니어21’이 정식으로 수입하여 DVD로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가 체코의 보비 가라베디안(Bobby Garabedian) 감독이 만들었고 2003년 아카데미 단편영화상 후보에도 오른 일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영화 ‘모스트’ <모스트>가 한국교회에서 주목을 끌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속의 메시지를 쉽게 읽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에 배가 지날 때마다 철교를 들어 올리는 도개교(跳開橋) 관리인과 그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 읽힌다. 도개교가 들려있는 상황에서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본 아들이 많은 사람이 위험에 빠진 것을 직감하자 도개교를 내리는 레버를 조작하다 그만 기계장치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를 본 아버지는 중요하고 심각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아들을 살리려면 기차가 강으로 추락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내리면 아들은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모스트>에 나타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는 구속의 메시지는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대속의 은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체코의 고풍스런 도시 분위기와 기차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묻어나서 서정적이며 주연 배우들의 인간미를 물씬 풍기는 연기는 이 영화의 예술적 가치가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모스트 이전에 ‘대속’이 있었다 체코 영화 <모스트> 이전에 한국 영화 <대속>(代贖, 1998)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속>을 만든 오풍원 감독은 미국 기독교 명문 대학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후 한국에 돌아와 서울 강남의 사랑의 교회에 방송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1990년대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서 문화의 영향력을 새롭게 인식하던 시기였고, 교회 또한 예배와 교육, 선교 등에서 영상의 활용가치가 높아지던 때였다. 오풍원 감독은 새로운 세대들의 눈높이 맞춰 신앙적으로 ‘좋고’ 또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상작품을 만든다는 취지에서 ‘조코재미’라는 제작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고 <대속>은 그 첫 작품이었다. 사랑의 교회 중등부가 친구초청잔치를 통해 전도의 목적으로 상영한 <대속>은 초신자나 비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를 통해 구원받은 사건을 조명하는데 매우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 해 문화선교단체인 ‘낮은 울타리 문화선교회’가 연세대 총학생회와 함께 벌인 ‘신촌 문화축제’에서도 상영될 만큼 <대속>은 비기독교인에게 그들의 눈높이 맞춰 기독교의 구속 사상을 전파하는데 매우 설득력 높은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할 때는 CCM 가수인 홍순관의 ‘천국의 춤’을 사용했고 슈베르트의 ‘숭어’와 우리 가곡 ‘비가(悲歌)’를 영화에 입혀서 친근감을 더하기도 했다. 휴일을 맞아 간이역에서 근무하는 철도원인 아버지를 따라나선 아들은 철로를 변경하는 제어장치가 고장나는 바람에 직접 현장으로 나가 철로를 변경하다 기차에 치여 죽는 안타까움을 보여주었다. 만일 아들이 철로를 변경하지 않았다면 기차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통곡과 아들을 잃은 슬픔이 영화의 전면에 흐르지만, 열차의 승객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 채 세속적 즐거움에 살아갈 뿐이었다. 주인공이 철도원과 그 아들의 등장, 그리고 달려오는 기차 속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아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정작 구원을 받은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 등은 <모스트>를 빼닮았다. 오풍원 감독은 이 기가 막힌 구속의 모티프를 어떻게 생각해 낸 걸까? <모스트>의 보비 가라베디안 감독은 오감독의 <대속>을 봤을까? 기회가 생기면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교회 청년들이 만든 영화 <버스> 영화예배로 유명한 ‘꿈이있는교회’ 담임목회자인 하정완 목사는 청년들의 삶에 미치는 영화의 영향력에 주목하고 또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영화를 사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남이 만든 영화를 활용하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영화제작에도 나섰다. 꿈이있는교회는 교회 소속의 영화사 ‘아이즈 필름’을 창설하고 2010년 5월 20일 대학로 풀빛극장에서 첫 작품으로 <버스> 시사회를 개최했다. <버스>는 십계명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데칼로그(Decalog) 시리즈의 첫 영화였다. <버스>는 총제작을 담당한 하정완 목사가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처제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버스에 탄 생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치어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의지와 결단을 통해 하나님과 아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소재가 기차에서 버스로 바뀌었을 뿐 <모스트>나 <대속>의 구조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버스는 기차와 같이 세상을 상징한다. 죽음의 위기로 내몰리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관심이 없는 것이 세상이다. 버스 안에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청년들은 브레이크가 고장나는 바람에 내리막길을 치닫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지를 걱정할 뿐이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먹먹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승객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죽인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아버지란 말인가!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2010년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단편영화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음으로서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광을 누렸는가 하면, 그해 서울에서 열린 제8회 서울기독교영화제에서 기독교인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버스>의 가장 큰 특징은 교회에서 제작한 영화라는 점에 있다. 꿈이있는교회의 청년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니었으면 꿈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21분짜리 단편 드라마에 불과하지만 2천만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갔고, 감독부터 엑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청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돋보인 영화였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배우 가운데 주연인 버스 기사 역의 이상직을 제외한 30여 명의 출연자들 대부분이 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출을 담당한 장재현 성도는 이후에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의 감독이 되어 한국영화계가 주목하는 흥행의 귀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모스트>와 <대속> 그리고 <버스>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들 영화의 메시지가 성경의 구속사건을 비유적으로 묘사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기차나 버스에 탄 사람들이 한 생명의 희생으로 인해 살게 되었음을 세상의 언어로는 ‘이타적 죽음’이라 말한다. ‘이타적 죽음’은 사회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분열된 사회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는다. 2001년 도쿄 지하철 역에서 일본 취객을 구하다 숨진 이수현 청년의 희생이 한일 양국의 냉각 관계 속에서도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단단히 잇는 끈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다른 모든 ‘이타적 죽음’의 원형의 역할을 한다.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세상의 어떠한 이타적 죽음도 예수의 죽음보다 더할 수는 없다. 이것은 <모스트>와 <대속> 그리고 <버스>가 세상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선한 작품이지만, 관객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 사건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이어지는 적절한 해설이 뒤따른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이보다 훌륭한 영화선교는 없을 것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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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2
  • [영화] 기독교 멜로드라마는 무엇이 다른가?
    청춘의 사랑은 언제나 간절하다 연애와 결혼에 지극히 관심이 많은 건 교회 안의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연애·결혼·출산·내 집 마련·인간관계 등 5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5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가 출현했다고는 하지만 이성으로부터 사랑받고 또한 사랑하고 싶은 뜨거운 피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 사이에 한 몸을 이루게 하신(창2:24)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치고 연애와 결혼이 성경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교회 예배에만 국한되어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온 삶의 영역에서 실천되는 것이라면 오히려 성경적인 연애와 결혼을 이루고 싶은 것이 요즘의 똑똑한 크리스천 청춘들이다. <아이 스틸 빌리브>(I Still Believe, 2020)는 대충 교회에 다니며 신앙보다는 연애에 관심을 둔 청년들이 아니라 진심으로 신앙에 중심을 둔 청춘 남녀가 연애와 결혼 그리고 고통을 넘어선 사랑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 크리스천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유명 크리스천 보컬인 바트 밀라드(Bart Millard)의 삶과 신앙을 다룬 영화 <아이 캔 온리 이매진>(I can only imagine, 2018)을 만들어 유명해진 어윈 형제(Andrew Erwin/Jon Erwin)감독이 이번에는 세계적인 CCM 팝 가수 제레미 캠프(Jeremy Camp)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 역시 미국 CCM계의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인 ‘도브 어워즈’ 5회 수상에 빛나는 유명 크리스천 뮤지션이지만, 그의 사랑과 결혼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그의 감동적인 노래는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져서 암 투병을 해야 하는 여성과 결혼을 하고, 치유라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천국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이 그의 노래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대중들로 가득 찬 공연장에서의 사랑 고백과 사랑하는 여인의 회복을 위해서 관중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모습은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을 빼앗고도 남을 만한 장면이기도 하다. 장르로서의 기독교 멜로드라마 기독교 영화 안에서 멜로드라마는 통속적인 멜로물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지만, 신앙 안에서 혹은 신앙을 위해서 연애감정을 넘어서려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구하는데 내적인 갈등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김훈순과 동료 교수들이 함께 쓴 <영상콘텐츠연구>의 이론을 빌리자면 <아이 스틸 빌리브>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관습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나 스타일이 이 영화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1)일반적인 유형의 인물을 설정하고 (2)남녀 간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지며 (3)가족이나 직장 등 사적인 배경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고 (4)비극적 사건의 전개로 인한 파국의 위기와 (5)비극적 정서를 강조하는 데서 일어나는 정서의 과잉 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장르란 영화의 비슷비슷한 소재나, 주제, 형식 혹은 구성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영화를 구분하는 분류법이다.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다는 점도 장르영화를 이해할 때 항상 기억할 점이다. 즉 장르 영화는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의 반복성이 매우 중요하지만, 식상하지 않아야 하며 감독 고유의 성향도 드러나야 하는 까닭에 조금은 다른 변이성이 반드시 들어가야 좋은 장르 영화로 평가받는다. ‘비슷하지만 다르다’라는 평가는 성공적인 장르 영화의 핵심 사항인 셈이다. <아이 스틸 빌리브>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관습을 따른다. (1)평범한 기독교 가정에서 음악에 대한 꿈을 갖고 대학으로 떠나는 신입생인 제레미 캠프(K.J.아파)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 본 아버지(게리 시니즈)는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고급 기타를 선물하는 애정을 보여준다. 아버지에게 음악은 취미였지만 아들에게는 전문가적 소양이 있다고 본 아버지의 판단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옳은 것으로 판명난다. (2)CCM 콘서트 현장에서 신입생 제레미는 우연히 멜리사 헤닝(브릿 로버트슨)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3)멜리사의 전 남자 친구 때문에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감정들을 분출하지만 이들은 다시 결합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4)그러나 멜리사는 암으로 인해 고통받고 마침내 세상을 떠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기도를 하고 아내 멜리사가 입원한 병실에서 노래를 불러주지만 아내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다. (5)제레미는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기타를 부수는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다룬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나타나는 장면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 만큼은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기적을 바라지만 기대가 절망으로 바뀔 때 절망은 분노로 변하기 쉽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의미를 잃고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드라마로서 <아이 스틸 빌리브>는 일반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특징을 따르지만 분명 다른 면모도 갖추고 있다. 기독교 멜로드라마는 분명 다른 데가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청춘들의 연애와 사랑은 일반적인 젊은이들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달라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개입시키자면 죄인 된 속성을 가지고 남녀가 만나더라도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혜 가운데서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첫째, 위기에서 신앙의 개입은 기독교 멜로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제레미는 멜리사에게 한눈에 반해서 사귀기를 청하지만 멜리사는 하나님과 언니에게 올해는 딴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며 일단 거절한다. 제레미는 멜리사가 전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를 언급하며 그 때문인지를 묻는 바람에 멜리사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자신의 성급한 처사로 미숙한 처신과 오해로 인해 헤어지자는 그는 멜리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님도 우리 사랑을 응원하신다면? 놓치면 안되는 사랑인 거지?” 정말 교회 다니는 청년이 이성을 유혹(?)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고단수의 작업 멘트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아무 데나 개입시키는 일은 옳지 않지만, 인생의 중대한 일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것은 바른 신앙이라 볼 수 없다. 청춘의 삶에서 이성을 사랑하고 연애를 하는 일은 직장을 구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는 일 만큼 중요하다. 특히 결혼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어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통속적 멜로드라마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남녀관계에서 왜 하나님을 개입시키는지 세상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크리스천 청춘이라면 가능하고 또 그래야 한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운명은 그저 우주의 운행과 우연이 맺어준 인연으로 여기지만, 이 운명을 굳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자면(‘운명(運命)’이란 용어는 자칫 운명론과 연계될 수 있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 우연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우주와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안에서 일어난다고 믿는 까닭에 연애와 결혼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일은 당연하다. 둘째, 연애의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개입은 기독교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통속적 멜로드라마에서 사랑은 끓어오르는 감정의 분출과 육체적 욕망을 통해 드러난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개방된 연애관이 보여주는 현실일 수 있다. 그런데 <아이 스틸 빌리브>의 연인들은 하늘의 별을 보며 주님의 무한하심을 얘기한다. 수십억 개의 별 하나하나를 수 놓으신 하나님의 창조성에 감탄할 뿐이다. 마치 시편 8편에서 별을 보며 다윗이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생각하는 것과 닮았다. 다만 수명을 다하는 별이 가장 빛난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여주인공의 비극을 예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셋째,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서 이 영화는 명확히 기독교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아내를 떠나보내는 젊은 남편의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가 있으랴마는, 고통에 대한 신앙적 질문과 해석 그리고 그것이 창조적인 발전으로 이어져서 성공하는 크리스천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분명 일반 영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들에겐 아버지의 위로가 중요하다 아내를 잃고 병실에 쓰러져버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프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제레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아버지에게 묻는다. 제레미의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아내를 떠나 보낸 아들을 위로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왜 하필 멜리사였는지 묻는 거라면 글쎄, 모르겠다 정말로. 미안하다. 솔직히 지난번에는 결혼한다는 널 이해하지 못했다. 멜리사와 함께 고난의 길을 택했잖니.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기로. 그런데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도 너처럼 행동할 것 같다. 그게 사랑이니까. 우리 아들은 정말 사랑을 했더구나. 그런 사랑은 흔치 않는 기회거든. 네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겠지만 이건 알겠어. 실망과 낙담으로 얼룩진 인생이 아니라 그로 인해 충만한 삶이란 걸.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버지는 아들을 인정함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러한 아버지는 기독교 영화에서 중요하다. 흔히 멜로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기독교 드라마에서 아버지는 자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수용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인생의 어려움에 대한 조언자 역할을 한다. 교회 청년회가 영화관에서 다시 봐야 하는 영화 <아이 스틸 빌리브>는 2022년도를 시작하는 첫 기독교 영화가 되었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은 현실에서 기독교 영화를 극장에 거는 일은 큰 모험에 가깝다. <아이 스틸 빌리브>는 보기 드문 청춘 멜로드라마로서 영화관의 주 고객층인 젊은이들을 모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서 개봉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서울의 ‘필름포럼’ 같은 기독교 전문 영화 상영관에서는 계속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교회 홍보의 어려움을 겪는 현실에서 관객을 모으는 데는 어려운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극장에 관객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영화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꼭 극장이 아니더라도 IPTV든 OTT 서비스를 이용하든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면 인생에 보탬이 되는 영화한 사실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음악영화로서 오락적 가치도 충분하고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성경적이어서 좋다. 음향시스템이 잘 갖춰진 영화관에서 다시 한번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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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4
  • [영화] 종교적 판타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종교와 판타지 영화 극장이나 OTT 서비스를 통해 보는 일반적인 드라마들은 상상력이 동원된 상업예술이다. 가장 높은 상상력과 상업성이 결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장르가 판타지이며, 종교가 지닌 초월성이 드러난 영화들은 일반적으로 판타지(fantasy) 장르로 분류되고 있다. 신이나 악마, 귀신, 요정, 마법, 기적, 영혼 그리고 천국과 지옥, 구원에 대한 묘사가 영화를 끌어가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거나 중요 소재로 등장할 때 현대인들은 이를 판타지로 부르고 있다. 이 안에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세상의 현실과 다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나 워쇼스키 자매(원래 ‘워쇼스키 형제’ 감독으로 알려졌으나 성전환 수술 후 이들은 자매 감독이 되었다) 감독의 <매트릭스> 시리즈는 종교적 비유와 은유 그리고 상징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판타지 영화의 전형이다. 2021년 11월에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를 통해 선보인 6부작 드라마 <지옥> 또한 지옥의 사자가 현실 세계에서 죄인을 심판하는 등 종교적 표현이 생생히 살아있는 판타지 장르에 해당한다. <반지의 제왕>이 ‘신화적 판타지’라면 <매트릭스>는 ‘SF 판타지’이며 <지옥>은 판타지 드라마로 보다 세분화 시킬 수 있다. C.S.루이스의 원작 동화를 바탕으로 만든 <나니아 연대기> 영화 시리즈 역시 기독교의 상징과 은유가 짙게 깔린 ‘아동 판타지’ 혹은 ‘가족 판타지’ 영화로 불리운다. 최첨단 컴퓨터 문명으로 둘러싸인 세속적인 사회에서 종교가 지닌 초자연적 이미지와 상징으로 무장한 판타지 영화의 흥행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즉 영화를 통해 종교의 이미지를 보는 관객과 사회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종교가 스크린 위에 등장할 때 판타지 장르를 통해 종교성이 깊이 깔린 주제를 표현하는 영화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종교가 대중의 무대 위에 등장한다는 것은 곧 그 종교의 쇠락 또는 소멸을 뜻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보았던 많은 그리스의 우상들(행17장)은 신화와 연극무대 위에 등장할 뿐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북유럽의 주신(主神) 오딘(Odin)과 토르(Thor)는 온라인 게임과 넷플릭스 드라마 제목인 라그나로크(Ragnarok)로 부활했지만, 인간의 경배를 받는 거룩한 신성을 가진 존재로서 신앙하는 사람은 없다. 1980년대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무당으로 알려진 김금화 만신이 한미수교 100주년기념사업 문화사절단에 포함되어 굿을 한국 전통무용의 하나로 미국에서 공연했을 때 종교학자들은 무교의 소멸을 예단하기도 했다. 굿이 한이 맺히거나 복을 비는 사람들을 참여시키기보다는 입장료를 받고 즐기는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그 종교가 성(聖)스러움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금화는 그 뒤로 뉴욕 링컨센터 공연 등 세계적인 무대 위에 올라섰고 대동굿을 통해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종교에 대한 또 다른 입장은 앞과는 정반대로 종교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고 내부 신앙인의 결속력을 강화시킨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아데네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던 그리스 연극들이 신들을 향한 제의로부터 나왔고, 기독교 영화와 성경의 내용을 담은 뮤지컬들이 신앙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데 한몫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선교의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를 보여준다. 무교의 경우 무당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공연의 형식으로 시연될 때마다 사람을 모으고 또한 무당을 찾는 단골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한 증거로 보는 시각이다. 지옥과 메시아를 다룬 판타지 영화들의 등장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종교적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제작자의 의도와 관객의 시선이 어떠한지를 먼저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업적인 영화에서 종교적 이미지나 상징의 사용은 해당 종교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관심을 끌고 그럴듯한 이야기 전개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은 상업적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관에 맞춰 의미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 처음 개봉되었을 때 기독교와 불교계에서는 저마다 <매트릭스>를 자신의 신앙적 전통을 반영하는 영화라는 상반된 해석을 내놓은 일이 있었다. <매트릭스> 시리즈가 보여주는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의 설정과 인간의 위기, 그리고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의 출현이란 구도는 성경의 흐름과 상당히 유사하다.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한 오라클이 등장하고 예수의 사역을 준비한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로서 모피어스가 존재한다. 이번에 개봉된 <매트릭스-리저렉션>(The Matrix Resurrections)은 이전 시리즈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제목 자체에서부터 네오의 부활을 설정함으로써 이 영화가 성경의 메시아 사상을 일부 패러디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불교계에서도 영화 <매트릭스>를 불교의 철학이 담긴 자신의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매트릭스>를 끌고 나가는 가장 중요한 요체인 가상의 공간에서 실제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바로 이 점이야말로 불교가 그토록 주장하는 공(空)의 세계를 가르쳐주는 것이란 해석이다.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이 세상의 바른 모습이고 사람들은 세상이 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눈에 보이는 세계(色)에 너무 집착해있기 때문이란 것이 <매트릭스>에 대한 불교적 해석이다.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가 불교의 지옥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면,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기독교 계열의 사이비 종교에서 말하는 지옥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두 작품 모두 웹툰이 원작이다. <지옥>은 죄인에게 내리는 초월적 존재의 죽음에 대한 고지가 이루어지고 예정된 시간에 나타나 죄인을 찢고 불태워 죽이는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킨다. 또한 이것을 ‘시연’이란 이름으로 생중계하며 회개와 심판을 강조하는 ‘새진리회’라는 사이비 집단과 죄인의 신상을 털고 린치를 가하는 ‘화살촉’이라는 이름의 강성 집단을 묘사하는 방식은 최첨단 디지털 문명 속에 사는 종교인들의 교활함과 물질세계를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인 모두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우화로도 읽혀질 수 있다. 지옥과 심판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한편 이를 시연하는 댓가로 금전을 제공하고 사람을 규합하는 등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새진리회의 모습은 정통 교회가 아닌 이단의 모습을 연상시켜서 그나마 다행이다. 종교적 판타지를 보는 사회의 의미 <지옥>과 <매트릭스>와 같은 종교적 이미지와 은유가 살아있는 영화들을 즐겨보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종교인 혹은 무신론자들이 다수인 사회란 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국갤럽이 최근에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 조사에 따르면 무종교인의 비율이 1984년 첫 조사 이후 처음으로 60%를 넘었음을 알 수 있다. <표>한국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2021년 조사(%) *그 외의 다른 종교: 1984년 3%, 1989년 2%, 19972004년 1%, 그 이후는 1% 미만. 한국갤럽은 무종교인 비율이 증가한 결정적 원인을 청년들의 종교인구가 감소한 데서 찾아냈다. 2004년 조사를 할 당시 20대 종교인구는 45%였는데, 2014년에는 31%, 2021년에는 22%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전통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의 풍요로움과 세속적 문화에 세례를 받고 자란 청년들은 뜻밖에도 판타지에 익숙하다. 인기있는 온라인 게임의 이미지와 스토리는 신화나 종교적 성격을 가진 판타지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청년 세대는 판타지 게임에 매일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교회와 예배에 관심 없는 현대인들이 지옥, 영혼, 심판, 부활과 같은 초월적인 주제를 다루는 영화를 본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가지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첫째 그들은 무종교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써 영화의 종교적 메타포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고 다만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원초적 액션과 새로운 이미지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예수를 모형으로 삼았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다만 중국 무협지에 나올법한 액션이 재미있어서 본다는 뜻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종교성 혹은 영적인 욕구를 교회가 아닌 판타지 영화를 통해서 해소하고 만족을 얻으려는 태도가 이 같은 현상을 낳았다고 보는 해석이다. 한 교회의 교인으로서 교리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 일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채 기계로 둘러싸인 물질세계에 만족하며 살 수 없는, 뭔가 허전함과 허망함이 마음에 솟구치는 것을 느낄 때 종교적 판타지 영화들은 잠시 마음에 위안을 제공해줄 수 있는 까닭이다. 이것은 자석의 원리처럼 극단적인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무엇인가 초월적이며 영적인 대상에 마음이 끌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교회가 종교적 판타지 영화에 심취한 무종교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은 조금 더 선명해질 수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물질문명에서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교회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영적인 지식과 이해를 상업영화에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보는’(욜2:28) 교회를 세상은 찾고 있다. 새해에는 성령의 역사가 교회마다 임하시기를 기도해 본다.
    • 문화
    • 영화
    2022-01-07
  • [영화] 복수의 세상에서 용서를 외치다
    상실을 대하는 태도가 믿음을 결정한다 현대영화에서 기독교 영화와 세속적인 영화를 결정짓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상실(喪失)에 대응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건강과 재산을 잃어버린 상황이 전개된다면 세속적인 영화는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라는 식의 분노로 화면을 채우기 십상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화라면 욥이 말한 것처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는 주인공의 고백과 함께 상실과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를 화면 가득 펼칠 것이다. 그런데 건강과 재산 정도가 아니라 부모나 자식, 형제를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잃어버린다면 어떨까? 드라마의 대중적 인기 요소가 ‘갈등’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영화는 주인공의 갈등이 크면 클수록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높은 까닭에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모는 경향이 있다. 이때 기독교 영화가 아닌 세속적인 영화라면 갈등은 분노와 더불어 복수로 이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복수는 대중영화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인기있는 방법이다. 관객은 복수를 보여주는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영화 제작자는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아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까닭에 관객이나 제작자 모두 복수극을 마다할 필요가 없다. 특히 복수극에 자주 나타나는 폭력성에 대해서도 윤리적 비판을 비켜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액션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복수는 정의로운 심판으로 위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가장 큰 위험성은 그것이 ‘인간다운 행동’으로 인식되거나 예술의 차원에서 미학의 한 부류로 취급될 때 일어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소위 말하는 ‘복수 3부극’은 인간다운 행동으로서의 복수를 묘사한 영화들이다. <복수는 나의 것>(2001)과 <올드 보이>(2003)에 이어서 <친절한 금자씨>(2005)에 오면 복수는 그 잔인성이 사회의 규범적 가치를 초월하여 영혼에 대한 속죄의 방법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복수가 인간의 가장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아이들을 유괴 살인한 백선생(최민식)에 대한 집단적 복수 살해 장면은 종교의례를 방불케 한다. 그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의 폐교의 한 교실 한가운데 백선생을 묶어 놓고 한사람씩 차례대로 잔인한 보복행위를 가한다. 피가 튀지 않도록 우비를 입고 연장을 손에 들고 살해방법에 대한 절차와 방법을 의논하고 들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신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예식행위를 연상시킨다. 죽은 아이들을 위한 속죄 행위로서 벌이는 백선생에 대한 복수는 이미 보복살인이 인간적인 행동으로 정당화하는 수준을 넘어 경건한 예식을 통한 예술적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비나 웜브란트는 달랐다 <사비나: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시대>(Sabina: Tortured for Christ, the Nazi Years , 2021)는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 14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던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와 그의 아내 사비나 웜브란트의 사랑과 용서를 그린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의 전반부는 유대인이었던 두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기독교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다. 마르크스의 책을 가까이했었던 남편 웜브란트는 결핵에 걸려 요양생활을 하던 중 성경을 접하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다. 유대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웜브란트의 회심은 진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겪게 될 고난과 순교적 신앙을 예고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루마니아를 점령하며 유대인 사냥에 나섰던 독일군이 소련군에 의해 퇴각당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다. 숨은 유대인을 찾아 나섰던 독일군은 상황이 역전되어 유대인이었던 웜브란트 목사 부부의 도움으로 소련군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비나 웜브란트(Raluka Botez)와 유대인 도살자로 불리며 사비나의 가족을 학살한 당사자 보릴라(Gabriel Costin)와의 만남에 있다. 어느 날 밤, 잠을 자던 사비나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학살한 바로 그 독일군이 소련군의 눈을 피해 자신의 집 거실에 있음을 듣게 된다. 학살자를 눈앞에서 마주한 사비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분노와 복수의 마음이 머리끝까지 올랐을 것 같지만 영화는 그 반대의 장면을 보여준다. 사비나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학살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복음의 핵심이 용서임을 말한다. “복음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제가 용서받은 것처럼, 당신도 용서를 구하면 주님께서 용서해주실 거에요.” 그리고 배고픈 그를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장면처럼 느껴져야 하지만 낯설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대중영화 속 복수의 논리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사비나 웜브란트는 철저히 성경적인 사람이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25:21-22)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은가! 사비나 웜브란트는 예수님이 가르쳐 준 용서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분노와 복수가 넘쳐나는 영화세상에 기독교 영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웜브란트와 ‘순교자의 소리’ <사비나: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시대>는 교회가 주목할 만한 매우 특별한 제작과정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제작 수순을 밟지 않고 <순교자의 소리>라는 선교단체의 후원 속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문 영화연출자와 교회 혹은 선교기관이 특별한 목적을 두고 극장용 영화제작에 나서는 선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고 스태프들을 통솔한 존 그루터스(John Grooters)감독은 ‘순교자의 소리’와 깊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영화제작에 나선 사람이다. <사비나: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시대>를 제작하기 직전에는 웜브란트 목사의 고난과 신앙을 주제로 한 책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Tortured for Christ)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공산치하의 루마니아에서 핍박받는 웜브란트 목사와 동료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충격적인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고, 한국의 경우 2020년 부활절을 앞두고 유튜브로 공개되어 2만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을 한 기록을 갖고 있다. 또한 2019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북중접경지대에서 선교활동 하다 북한에서 순교한 한충렬 목사와 그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게 된 북한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영화 <상철:북한>(Sang-chul: North Korea, 2019)을 제작하기도 했다. 모두 제작을 지원한 선교단체의 특성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순교자의 소리(The Voice of the Martyrs)’는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Richard Wurmbrand, 1909~2001)가 공산주의 국가의 지하교회를 돕기 위해 설립한 선교단체로 출발하여 현재는 전세계 70여개국에서 핍박받는 그리스도인을 돕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선에 성경책을 담아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운동을 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순교자의 소리’는 웜브란트 목사 부부의 순교적 신앙을 한국교회에 전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여기서 ‘순교적 신앙’이란 자신의 가족을 학살하거나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을 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만일 정부나 권력기관과의 갈등이 빚어진다면 처벌을 감수하더라도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옥고를 치러야 했고,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은 순교로서 신앙을 지키기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차별금지법 문제나 대북선교, 코로나 시대의 예배의 자유 등 세속적 정부나 권력기관과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어서 순교적 신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실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웜브란트 목사 부부는 예수님이 가르쳐 준 용서를 실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분열과 갈등이 넘쳐나는 시기에 이 영화를 우리가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문화
    • 영화
    2021-12-03
  • [영화]‘서울극장’의 종료와 ‘오징어 게임’의 시작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쓸 시간 서울극장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8월 31일을 끝으로 한국영화계에 짙은 발자취를 남긴 채 문을 닫았다. 1960, 70년대 영화의 배급과 제작으로 한국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회장은 종로3가에 있던 재개봉관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단장한 뒤 1978년 현재의 자리에서 서울극장의 시대를 열었다. 오직 한 개의 상영관만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극장문화에서 서울극장은 종로3가 교차로를 앞에 두고 단성사와 피카디리와 마주하는 위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극장가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서울극장은 기독교 영화계의 발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2011년 제9회 서울국제기독교영화제(현.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서울극장에서 열린 일을 비롯하여 2019년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와 2020년 한국기독교영화제 등 한국 기독교계의 영화인들이 모이고 기독교 영화들을 교회와 대중에게 선보이는 사랑방 기능을 수행해 왔다. 이것은 서울극장을 이끌어 온 곽정환 장로와 그의 부인 고은아 권사의 영화선교에 대한 믿음과 의지의 결과이기도 했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지배하는 상업영화계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고 기독교 영화계를 알게 모르게 지원했던 일은 대중문화의 영향을 일찌감치 간파한 덕분이었다. 곽정환 장로는 합동영화사를 설립하여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작품들을 만든 제작자로도 유명했지만, 영화배우이자 아내인 고은아 권사와 함께 기독교 전문 영화사인 은아필름을 설립하여 한국 기독교 영화발전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1994년에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무거운 새>는 곽정환 감독이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기독교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위인전 형식의 기존 기독교 영화의 틀을 깨고 재미교포사회를 배경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가지고 인생의 위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영상에 담아서 기독교 영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은아필름의 고은아 권사는 <무거운 새>를 시작으로 10편의 기독교 영화 제작에 대한 신념을 밝혔지만, 교회 성도들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고, 기독교 영화의 부흥과 발전에 대한 소망은 새로운 세대에게로 넘어갔다.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물씬 묻어나던 서울극장의 페이드 아웃(fade-out, 영화 장면에서 밝았다가 차츰 어두워져서 사라지는 기법). 그것은 어쩌면 기독교 영화의 변신을 요구하는 신호탄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해 가뜩이나 관객을 잃어버린 영화관의 현실은 넷플릭스와 왓챠, 웨이브 같은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개인 관람 시스템으로 영화를 몰아가고 있는 중에 있다. 서울극장이 사라진 한국 기독교 영화계가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 시스템에서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있다. 세계인의 마음을 훔친 ‘오징어 게임’ 지난 9월 17일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불과 4일 만에 미국을 비롯해 대륙을 가리지 않고 세계 22개국 넷플릭스에서 시청자 조회 수 1위에 올랐다. 최근 <살아있다>와 <승리호>, <킹덤:아신전> 등의 한국영화가 세계 1위에 오른 적은 있지만 9편에 이르는 한국의 시리즈형 드라마가 미국 시장에서 1위를 기록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넷플릭스가 2백억을 투자한 몰입도 높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과 <수상한 그녀>, <도가니> 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의 재능은 이정재와 박해수, 정호연 등 연기력을 검증받은 유명 배우들의 캐릭터를 잘 살려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사회 문제를 일깨우는 의미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특히 한국인 감독과 배우가 참여하고 한국의 문화가 두텁게 입혀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넷플릭스 가입자들이 열광할 만한 보편적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한류문화가 어떻게 세계인의 눈높이에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즉 <오징어 게임>이 단지 한국인들의 호응만을 기대한 것이라면 넷플릭스는 결단코 2백억을 쏟아붓지는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오징어 게임>은 빚에 허덕이며 절박한 상황에 처한 456명의 사람들이 최종 우승자 한 명에게 총상금 456억을 몰아주는 데스 게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생존한 사람은 막대한 우승 상금을 가져갈 수 있지만, 나머지 455명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이 드라마에 대한 찬사와 비난은 한 명을 제외한 참가자 모두의 죽음이 전제되었다는 데 집중되어 있다. 게임 참가자들이 경험하는 6가지 게임의 성격은 개인의 독립적인 능력에 따라 생존이 결정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설탕 뽑기’도 있지만, 상대의 희생이 있어야 하거나 상대를 희생시킴으로써 살아남아야 하는 ‘줄다리기’나 ‘구슬치기’ 같은 게임도 있다. <오징어 게임>에 대한 찬사는 기성세대가 어린 시절 골목에서 놀았을 법한 천진난만한 놀이가 목숨이 달려있는 잔혹한 게임으로 변할 때 일어나는 감정의 혼란으로부터 시작된다. 놀이동산으로 사용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그라운드는 피로 물들고 친분과 인간애로 돈독해진 관계는 하루아침에 피를 보는 사이로 전락하고 만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릴 때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끝자락을 지켜볼 수 있는 점은 이 드라마가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성을 갖게 만든 출발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명확했지만 정답은? 이 드라마가 물질문명을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한가지다.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생을 한방에 역전시킬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돈을 가질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돈의 유혹에 취약한지를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의 자유의지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즉 <오징어 게임>이 범죄드라마로 읽혀지지 않는 것은 게임이라는 형식을 빌려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게임 참가자들의 자발적 동의로 진행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진행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가자 절반이 찬성하면 얼마든지 게임을 중단한다는 나름대로 계약도 맺고 있다. 드라마는 참가자들의 불안과 불만이 터져 나오면 숙소로 사용하는 체육관 천장에 달려있는 커다란 돼지저금통에 가득찬 5만원권 지폐 뭉치들을 보여주며 이러한 멘트를 스피커를 통해 흘려보낸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단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당신들은 모두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이곳에 왔다.” 사기꾼들이 피해자들에게 늘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죽음의 위협에도 멈추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게임의 참가자들은 드라마 초반부에 살상의 현장을 목격한 후 게임을 중단하고 세상으로 복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에 쪼들리며 사는 세상이 더 지옥 같다는 말을 뒤로하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 현장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현대인의 돈에 대한 충실한 욕망을 드러낸다.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이지만 우승자에게 거액의 상금이 배당되는 ‘오징어 게임’의 규칙이란 돈과 생명이 서로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균등한 교환가치를 지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기독교 가치관으로 들여다 볼 때 심각한 오류를 드러낸다. 첫째는 재미를 추구하는 목적으로 설정된 이 게임에서 과연 타인의 죽음과 죽음 앞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욕망을 지켜보는 재미가 과연 인생을 만족시켜주는가에 대한 성찰의 부족이다. ‘오징어 게임’의 주최자이자 001번을 받은 첫 번째 참가자이기도 한 노인 오일남(오영수)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오징어 게임’의 생존자가 된 성기훈(이정재)에게 이 잔혹한 살상게임을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즉 돈에 대한 욕망을 쫓는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참여하는 데서 오는 재미를 느끼기 위함이라고. 둘째는 ‘오징어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온전한 자유에 대한 해답을 영화는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다. 게임의 실무 책임자인 프론트맨(이병헌)은 이전 게임의 우승자로서 게임의 모순성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게임의 진행자로 남아 있다. 주인공 성기훈은 그 많은 돈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게임 참가를 독려하는 전화를 뿌리치지 못한다. 결국 돈이 아니면 재미를 쫓는 인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재미를 인생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은 역사상 가장 럭셔리한 삶을 살았던 솔로몬왕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넷플릭스와 기독교영화 인터넷으로 각종 영상물을 즐길 수 있는 넷플릭스(Netflix)는 관객이 사라진 코로나19의 세상에서 영화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자리매김을 하는 중이다. 극장 상영을 하지 않고 넷플릭스용으로 제작된 영화들에 대해서 과연 진정한 영화인지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재의 추세는 일반 영화와 넷플릭스용 영화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분위기가 대세다. 작품의 질이 떨이진다고 보기 보다는 오직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도록 제한을 두는 의미가 영화가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창작과 관람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넷플릭스의 입맛에 맛는 영화들이 제작되어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을 때 과연 영화의 생태계가 온전해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상황은 오히려 넷플릭스와 같은 새로운 영화관람의 플랫폼이 영화인들에게는 구원자처럼 다가서고 있어서 넷플릭스의 영화를 기존의 영화계가 거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만 하더라도 넷플릭스용으로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 <마이 네임>, <지옥>, <승리호>, <낙원의 밤> 등 4편의 한국영화를 포함한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들까지 총 7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영화란 이제 영화는 플랫폼에 상관없이 관객을 만나고 관객의 선택을 받는 일이 중요해지는 수요자 중심의 영화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넷플릭스에서 기독교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알렉스 켄드릭 감독의 순전한 기독교 영화 <오버커머>(Overcomer, 2019)는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했다. 단 일반 극장이나 넷플릭스 모두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따른다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한다. 기독교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면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보다 훨씬 많은 돈을 기독교 영화 제작에 투자할 것이다. 사실 <오징어 게임>에 투자된 200억원은 할리우드에서 납품하는 단가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9편에 이르는 시리즈물임을 생각할 때 편단 겨우 20억원이 조금 넘는 금액에 불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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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영화]‘모가디슈’의 한국인을 말하다
    류승완 감독이 그린 남북 갈등의 현대사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2015)에 이어 남북 간의 갈등을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새롭게 조명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베를린>이 남북 첩보원들의 충돌과 인간애를 액션을 통해 그려냈다면, 최신작 <모가디슈>는 남북갈등은 시대적 배경으로 전개시켜 놓은 채 소말리아 반군의 혁명 속에서 함께 탈출하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남북외교관의 모습을 다루었다. 즉 <베를린>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적대적 관계로 등장한다면 이번에는 외부의 총을 피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모가디슈>에서 발견하는 한민족의 상황은 한마디로 웃프다(겉으로는 웃기지만 속으로는 슬픈 처지라는 신조어). 동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어서 남북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되어버렸을 때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1991년 남과 북은 유엔가입을 앞두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유엔 회의장에서는 잘살든 못살든 한 국가당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는 까닭에 아프리카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시급했다. 소말리아주재 한국 대사관의 한신성(김윤석) 대사는 안기부 출신의 정보 요원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소말리아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장강도를 고용한 북한 대사관의 방해 작전에 피해를 받고 만다. 강대진은 이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북한의 총기가 소말리아 반군의 손에 들어간다는 언론 플레이를 벌여 어떻게든 소말리아 정부와 북한 간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으려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군은 수도 모가디슈에 진입하게 되고 남북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은 수도를 탈출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지명(地名)’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전 작품의 도시 베를린은 동서독 분단을 상징하는 도시여서 남북 정보원들의 생사를 넘나든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은 충분히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은 이제 분단이 아닌 통일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누구도 합칠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어진 이념과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고 한순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왜 우리만 과거 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일으켰다. 이제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를 들고 나왔다. 우리에게 소말리아는 국제 수송선들 납치하여 몸값을 받는 ‘소말리아 해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2001>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으로서의 미군 특수부대와 유엔의 구호식량을 착취하는 소말리아 민병대와의 시가전이 압권인 영화였다. 그런데 소말리아와 모가디슈는 이게 전부였다. 부정과 혼돈의 도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그 속의 남북은 부조리한 상황 가운데서 살기위해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모가디슈는 통일 이전에 개별적 생존을 상징하는 도시로 남게 될 전망이다. 한국의 영화 관객들은 이제 낯선 소말리아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모가디슈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민족성 영화는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 무의식의 통로 역할을 한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하고 인기 있는 영화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보여준다. 칼 융(Carl G. Jung)이 언급한 집단 무의식은 개인이 갖는 무의식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들이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 가운데 갖게 되는 무의식으로 보통은 신화나 설화 그리고 전래동화를 통해 드러난다.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은연중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집단 무의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집단 무의식은 대중성을 통해 나타난다. 한국의 오랫동안 사랑받는 상업영화나 시간을 뛰어넘어 인기 있는 가요 안에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가디슈>에는 세 가지의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민족성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경쟁(競爭)의 무의식이다. 그 먼 아프리카에서조차 남과 북은 갈라져서 서로에 대한 비방과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말이 좋아서 외교전이지 실상은 거짓과 술수 그리고 폭력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 같은 갈등은 소말리아에 주재하는 남북외교관들이 아프리카에까지 오게 하는 원동력이며 그들은 경쟁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는 성과를 거둔다. 삼국시대에 민족 안에서 분열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모습으로부터 조선시대의 당파싸움과 현대 사회에서 여야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하는 모습은 때로는 국민들을 절망시키고 위기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이는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적절한 안내를 통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이 국가들과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는 동정(同情)의 무의식이다.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동정은 인간의 본능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미워하고 못된 사람이라도 잘못되고 위기에 빠졌을 때 모르는 척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인들로서는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도와달라고 사정하는데 이를 어찌 무시할 수 있냐는 생각이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있는 듯하다. 북한 대사관이 소말리아 반군에 의해 피습당하고, 믿었던 중국대사관마저 폭도들에 의해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며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가 택한 곳은 한국 대사관이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림용수 대사는 한국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 대사관 안에서는 고민이 흐르고 마침내 문을 열어준다. 이들을 망명으로 보고하여 실적을 올리려는 외교적 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맞이하는 한국 대사관 안에는 난장판 속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는 기류가 흐른다. 셋째는 문기(文氣)의 무의식이다. 책을 좋아하고 배움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무의식이 한국인에게 있다. 남북의 외교관과 가족들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찍은 액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도로마다 반군이 장악한 상황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이들은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임용수 북한 대사는 한국 대사관에 있던 책들을 모아 승용차의 외부에 붙여서 방호벽을 만든다. 끈과 테이프로 책들을 승용차 위와 겉면에 부착시켜서 총알이 뚫고 오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탄복 역할을 하게 함을 볼 수 있다. 책으로 총을 막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책으로 총을 막는다’라는 말도 유행시켜야 할 듯하다. 관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지만 이것은 문기(文氣)에 대한 한국인의 무의식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만든 민족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 들어온 선교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을 많이 출판하는 나라다. 모가디슈의 그리스도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한신성(김윤석) 대사의 부인 김명희(김소진)의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명희는 매우 신실한,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본다면 극성스러울 정도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대사 부인 역할을 맡은 김소진 배우는 <마약왕>에서도 범죄의 길에 빠진 남편(송강호)을 구하고 가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 현모양처의 역할로 주목을 받았었다. 대사관 밖의 어려움을 감지한 김명희는 여직원과 직원 부인을 모아 기도회를 연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심지어 불교 신자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청산유수로 주기도문을 외울 줄도 안다. 기독교 영화가 아닌 일반 상업영화 속에서 기독교인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대개 긴박하고 무거운 상황을 잠시 쉬어가게 만드는 코믹한 설정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후에 나타난 대사 부인의 행실은 감동적이며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사부인 김명희는 저만 살려고 애쓰며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 쉬운 전장의 상황에서 부상당한 현지인 운전사를 치료해주고 대사관을 가득 채운 북한 대사관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대접하는 면모를 보인다. 남북의 위기 속에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을 거부했던 류승완 감독도 이 장면만큼은 뺄 수 없었다. 바로 남북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절인 깻잎을 집기 쉽도록 젓가락으로 잡아주는 장면이다. 이 주인공은 소말리아의 그리스도인 김명희였다. 모가디슈의 남북이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이것이 실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류승완 감독의 머릿속에는 남북이 위기 속에서 마음을 열고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사람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역할은 그리스도인인 대사부인에게로 돌아갔다. 이것은 세상이 생각하고 수용할 수 있는, 혹은 마땅히 그렇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상업영화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생각과 판단을 담고 있다. 영화는 세밀한 작업이며 의미 없는 장면이란 영화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또한 반대로 영화 속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관객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기 때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언뜻 나타나는 이미지, 특히 매스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기도 하고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켜 나가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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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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