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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비극이 사랑을 만나 희극이 된 영화
    차승원표 희비극 차승원표 코미디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리>는 추석연휴가 끝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되는 한국영화로 꼽힐만한 가치가 있다. 도박과 범죄조직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들이 추석 극장가를 압도하며 <힘을 내요, 미스터리>를 밀어내는 듯한 형국을 보였지만 관객들은 마음 한구석에 진한 감동의 메시지를 간직하며 두고두고 얘기할 거리가 풍성한 이 영화를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극적인 향신료가 들어간 이국적인 음식에 한번은 손이 갈 수 있지만 연거푸 찾기 쉽지 않은 이치와 같다. 대신 잘 익은 김치만 있다면 늘 먹는 반찬에 그 밥이라 할지라도 결코 질리지 않는 집밥의 맛에 <힘을 내요, 미스터리>를 비유할 수 있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애인을 둔 가족드라마의 장르를 반복하면서도 <럭키>(2016)를 만든 이계벽 감독의 스타일로 색다르게 변형시킨 착한 영화다.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아빠와 어른스러운 어린 딸의 동행은 <아이 엠 샘>(2001)에서 이미 그 감동의 깊이를 확인했고, 백혈병과 같은 불치병을 앓고 있지만 어른 뺨치는 똑똑함과 의젓함은 <열두 살 샘>(2012)이나 우리나라 영화 <두근두근 내 인생>(2014)의 아역주인공들을 보는 듯하다. 출생의 비밀을 안은 채 아빠와 대면하는 어린 소녀라든가 화재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들의 희생적인 모습, 깡패 같지 않은 깡패들의 희화된 이미지 등 <힘을 내요, 미스터리>에는 어디선가 본 것 같고 익숙한 장면들이 퍼즐처럼 하나의 그림을 위해 맞춰져 있다. 익숙하지만 다른 영화의 매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장르 영화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것은 차승원이 있기 때문이며, 그가 2003년 2월 18일, 대구 중앙로역에서 일어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서 인명을 구하는 소방관 역할을 맡아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설정이 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 때문이다. 첫째, <힘을 내요, 미스터리>가 차승원표 영화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라의 달밤>(2001)으로 출발하여 <광복절 특사>(2002)를 거쳐 <선생 김봉두>(2003)와 <이장과 군수>(2007)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뛰어난 외모와는 정반대로 망가지는 연기를 통해 웃음을 선사했던 차승원은 이 영화 안에서도 사회적 기대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키가 크고 잘생긴데다 근육질의 몸으로 칼국수집의 주방을 장악한 그의 첫 등장은 그를 보기 위해 줄을 선 여고생들의 행렬처럼 관객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여지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외모의 힘을 내팽개쳤고, 어눌한 목소리로 손님에게 “밀가루 몸에 안 좋아, 살쪄. 보리밥 먹어!”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들은 주인공이 망가지는 차승원표 영화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의 지체장애인 연기는 그와 유사한 영화들이 이미 보여주듯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연계되어 세속에 찌든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물론이다. 어린 딸 샛별(엄채영)이의 과자를 빼앗아 먹으려는 치기어린 행동과 자신의 피를 모두 주고서라도 샛별이를 살리려는 마음이 한 인물로부터 나오는 점은 이 영화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처럼 희비극(tragicomedy)의 구조를 갖고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끌어들인 점은 코미디 장르의 특성을 넘어서서 감동의 드라마로 발전시키는 원동력 역할을 한다. 특히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주인공 철수(차승원)의 행동을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들뿐만 아니라 그가 지체장애를 갖게 된 이유가 다름 아닌 참사 현장의 소방관으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기희생적인 구조의 결과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시킨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의 개성은 살아있게 된다.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대구지하철 참사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비극적 참사를 날 것으로 내놓기 보다는 잘 보듬어서 더 이상 상처가 성나는 일이 없도록 치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192명의 사망자와 21명의 실종자 그리고 148명의 부상자라는 비극의 역사를 분노나 허망한 마음이 아닌 사랑과 희생 그리고 은혜를 갚는 현실의 기억으로 소환시킨 것은 이 영화를 기독교적 가치로 해석되게 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사고의 트라우마로 인해 지하철 계단 조차 내려가지 못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딸을 위해서 과감하게 지하도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는 사랑의 힘이 치유를 위한 첫 걸음일 수 있음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 스틸컷 우리에게는 ‘착한 영화’가 필요하다 기독교영화의 세계에서 ‘착한 영화’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착한 영화’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를 따른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마음을 가진 율법교사의 질문인 ‘내 이웃이 누구인가?’(눅10:29)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구해주는 사마리아 인의 행동은 위기에 처한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상황과 겹쳐진다. 백혈병에 걸려 골수이식이 아니면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한 샛별이를 위해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철수를 비롯하여 대구일대를 주름잡는 조폭들까지 나서는 선한 행동은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보여준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의 경우 철수는 그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돌봄이 필요한 강도만난 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했지만, 유독가스 흡입의 여파로 뇌기능을 일부 잃게 되어 이제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그의 처지는 바뀌었다. 그러나 과거의 선행은 현재의 보상이 되어 돌아온다. 그가 화재현장에서 구한 사람들은 이제 그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째, ‘착한 영화’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공유하는 콘텐츠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를 기독교영화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 제작사나 마케팅을 담당하는 홍보사 그 어느 곳도 이 영화를 기독교영화로 홍보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 눈에는 그저 휴머니티가 물씬 풍기는 감동적인 드라마 정도로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따른 분석이 가능한 것처럼 성경적 가치관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화의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긍정적 변화의 결과를 갖게 된 다는 사실은 세속적인 영화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라는 성경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철수와 자신의 딸이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고 그나마 시집간 딸이 지하철 화재로 죽은 까닭에 한과 울분을 안고 살아왔던 철수의 장모(김혜옥)는 사위와 화해하게 된다. 철수와 샛별 주위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폭력 여고생과 대구 조폭들은 샛별이를 위한 골수이식에 동참하기 위해 헌혈을 자처할 만큼 행동의 변화를 일으킨다. 샛별이와 함께 투병중인 어린이들은 다음 번 생일까지 살기를 소망하며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죽음을 하찮게 다루는 일반 영화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우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성경적으로 합당한 내용들이다. 이 영화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인에게는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을 형성하게 하며, 비기독교인에게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별종이 아니라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식시킴으로써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셋째, <힘을 내요, 미스터리>는 현대인들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기독교 영화제작가 필요로 하는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착한 영화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모두 기독교 영화라는 타이틀이 걸릴 경우 관객은 그리스도인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짙다.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다큐멘터리의 경우 기독교인 관객이 많이 오지 않더라도 집행된 제작비를 건지거나 많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러나 대중성을 갖춘 드라마 형식으로 기독교 영화를 제작할 경우 감독이나 제작자 모두 많은 부담을 않게 될 수밖에 없다. 관객은 제한되어 있는데다 그 관객마저도 극장에 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을 내요, 미스터리> 같은 착한 영화의 경우 성경적 가치관을 내포함으로써 기독교 문화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음과 동시에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관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까닭에 성경적 가치관의 전파가 용이하고 무엇보다 제작비를 회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와 같은 착한 영화는 한마디로 교회와 세상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 자체로 충분히 기독교 영화라 말할 수 없지만 기독교 영화가 세상에 뿌리내리고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복음이 자라는 토양을 구성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기독교와 교회 소리만 들려도 도망가는 세상 사람들을 향한 영화의 선교적 역할을 우리는 <힘을 내요, 미스터리> 같은 ‘착한 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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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3
  • [영화] 세종은 없고 불교만 남은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의 정점을 찍다 지난해 개봉된 범죄드라마 <마약왕>(2018)에 대해서 한 영화평론가는 ‘캐비아로 알탕을 끓인 영화’라는 혹평을 내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송강호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의 이름에 걸 맞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론가와 일반관객들 모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 같은 신랄한 비평의 칼날은 조철현 감독의 신작 <나랏말싸미>로 옮겨가도 무방할 듯싶다. 이 영화 역시 우연찮게도 깐느 그랑프리 수상작인 <기생충>의 주연을 맡은 송강호를 내세웠고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의 인물이자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인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역사라는 귀하고 풍성한 재료를 가지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영화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캐비아로 알탕을 끓였다’는 말은 알탕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성격의 음식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캐비아(caviar)는 푸아그라와 트러플(송로버섯)과 더불어 3대 진미중 하나로 꼽힌다. 캐비아의 품질과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철갑상어로부터 얻은 원재료를 손질하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저장방법에 있다. 신선한 캐비아는 0~7℃ 정도에서 저장해야 하는데, 조금만 온도가 올라가도 품질이 급속히 떨어지게 된다. 캐비아를 알탕이 되도록 끓여먹는 일은 맛과 풍미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시키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초등학생조차도 잘 아는 한글창제역사에 대한 왜곡의 정점은 한글을 만든 이가 세종대왕이 아닌 승려 신미(信眉·1403~1480)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주장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세종 당시 산스크리트어나 티벳어 등 불교경전과 관련된 다양한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진 신미가 뜻글자 대신 말글자를 만들려는 세종의 의지를 실현시킨 인물로 영화는 그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같은 영화의 주장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학계에서는 이미 사라졌지만 불교대중들의 입소문으로 떠돌던 신미의 한글창제 개입설은 2013년 5월 조선 세종태학원 총재인 강상원 박사의 ‘신미 대사와 훈민정음 창제 학술 강연회’를 통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신미의 저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가 훈민정음 창제 시기(1443년)보다 8년 앞서서 한글과 한자로 출간된 사실이 있음을 주장하며 신미가 한글창제 실제적 주역이었을 밝힌바 있다. 또한 영화의 원작 시비를 일으킨 박해진의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 평전』이 2014년 출판되어 세종의 한글창제 역사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역사학계와 국문학계의 입장은 세종의 한글창제설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다. ‘원각선종석보’는 명확한 증거를 통해 2016년에 위작임이(2016.05.03, 뉴시스) 밝혀졌다. 무엇보다도 훈민정음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는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드셨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1443년(계해·세종25) 12월 30일자에도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고 기록함으로써 세종의 한글창제설에 의심을 가질만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세종의 한글창제설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당시 상황에서 승려가 한글을 만들었을 경우 혹시라도 한글 보급이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세종과 신미의 타협에 의해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거짓 발표되었다는 가설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려 함을 알 수 있다. <나랏말싸미>의 역사왜곡은 의문점을 낳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일을 갖고 있는 글자인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한글의 역사를 굳이 훼손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호기심과 상상력의 결과인가, 아니면 노이즈 마켓팅을 통한 흥행에 욕심이 난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감독은 영화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신미와 감독의 하나 된 세계관 한글창제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놓고 볼 때 영화는 세종이 아닌 신미의 편에 서있다. 통치자로서 왕의 최종결정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한글을 만든 결정적 역할은 승려신분인 신미가 주도하고 있다. 유교를 중심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폄훼하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왕의 신념에 승려 신미가 거부하지 않고 참여한 이유를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조선 땅에 불국토(佛國土), 즉 부처가 있는 나라를 이루려는 승려의 야망이 조선사회를 다시 고려시대처럼 불교의 나라로 돌이키고 싶은 것이다. 백성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이 만들어질 경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조선의 백성들은 부처의 말씀을 쉽게 들을 수 있고 조선은 다시 불교가 왕성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영화는 신미역을 맡은 박해일의 입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겉은 같으나 속은 전혀 다른 생각이 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즉 한글창제라는 한민족 역사의 중심에 불교를 놓고 한글창제의 본래 뜻 속에는 불국토라는 불교의 이상이 있음을 만인에게 공표하고 싶은 감독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신미가 한글을 통해 불국토를 이루고 싶은 염원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루려는 의지는 영화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첫째는 한글창제 이야기의 갈등 구조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종과 유학자들이 아닌 유교와 불교 사이의 갈등관계로 몰아가고 있는 점이다. 유교는 가해자로서 신분의 억압을 통해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편지하나 쓸 수 없는 사회를 만들었지만 새로운 말글자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대신 불교는 피해자로서 개와 같은 취급을 받지만 한글을 만들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유교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무능력한 반면 불교는 민간에서 신앙되는 현실에 기반하며 아울러 창조력을 발휘한다. 둘째는 세종의 친불교적 행보를 영화는 매우 의미 있게 다루고 있다. 조정대신들은 궁궐에 승려들이 드나드는 것을 경계하지만 세종은 이를 무시해버린다. 세종이 유자(儒者)나 불자(佛者) 모두 조선의 백성임을 언표하는 대목은 과연 배불숭유(排佛崇儒)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는 당시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결정적인 것은 세종의 부인인 소현왕후의 49제를 승려들이 주관하는 가운데 궁궐에서 지내는 장면이다. 불상 앞에 놓인 왕후의 위패를 향해 세종은 엎드려 절한다. 해석의 여지를 남겨둘 수는 있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처럼 세종이 ‘불교덕후’가 되는 순간이다. 셋째는 한글창제에 불교 사상이 관여된 사실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영화 초반부에서 말글자의 원리가 팔만대장경 안에 있음을 언급하는 한편 세종이 직접 썼다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문의 글자 수를 일부러 108자로 맞추는 장면을 보여준다. 108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가지수를 뜻한다. 결국 영화는 정사(正史)와는 다르게 세종과 한글창제의 역사의 숨은 사실로 신미와 불교가 깊이 내재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영화 제작의 목적은 신미가 한글창제에 개입한 목적과 같지 않을까? 영화를 통한 불국토의 달성. 감독은 신미가 한글창제의 중심에 있음을 믿고 있고 그 믿은 바를 영화를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한글에 관심이 있는 이유 유교와 불교가 한민족 역사에 끼친 영향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정 종교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자신의 종교가 민족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알았을 때 큰 자긍심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 스스로의 입을 통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조작된 역사를 통해 이득을 위하려는 행동은 그것이 상상력이 개입된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리더라도 비난과 조롱을 받기 쉽다. <나랏말싸미>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스타일로 덧입혀진 불교영화다. 겉으로는 역사물의 장르를 취했지만 메시지는 결국 불교가 한글창제의 중심임을 선포하며 대중들에게 불교의 가치를 전파시키고 있다.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불교의 사상과 문화를 담은 영화를 제작한 일에 대해서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연루된 가장 기초적인 문화인 언어와 연관된 일이라면 다르다. 왜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종이 만들면 어떻고 신미가 만들면 어떠냐고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화기부터 지금까지 한글은 복음에 가장 적합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신념 가운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랑받아 왔기 때문이다. 1882년 중국 심양에서 존 로스 목사는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선생 등과 함께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와 ‘예수셩교요한 복음젼셔’를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1887년에는 드디어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불교가 1965년이 돼서야 팔만대장경의 한글화 작업을 시작한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독교의 한글사랑은 뜻 깊다.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신분에 관계없이 문자를 애용할 수 있도록 만든 한글의 정신은 곧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요3:16) 일면 닮은 점이 있다. 선교의 방법으로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교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일은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뜻이 갖는 인간 사랑의 의미이며, 한국에서 기독교가 부흥발전하게 된 결정적 이유 또한 한글에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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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0
  • 보고 싶지 않은 사회현실을 대중에게 전하는 법
    대중성을 갖춘 영화사회학의 출현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봉준호 감독의 이 간단한 약력 안에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담겨 있다. 그것은 ‘사회’와 ‘영화’다. 대부분의 영화감독이 사회현실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사회와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봉준호 감독만큼 세밀하게 사회를 관찰하면서 영화 안에서 압축적이고 은유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감독은 매우 드물다. 거기다 그의 영화들은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사회현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찾는다는 점에서 대중성도 갖추고 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괴물>(2006)은 미국과의 미묘한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환경오염의 위험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었다. 미군이 한강에 버린 독극물에 의한 결과가 괴물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영화 첫 장면에 제시함으로써 환경오염의 해악성을 알리면서 동시에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있는 것인 양 정보를 왜곡하고 위험을 확대재생산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935만 명을 동원한 <설국열차>(2013)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변동을 설명하는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 있다. 새로운 빙하기를 맞이한 인류의 미래가 오직 기차 안의 승객들에게 달려있다는 가정 하에 기차의 앞쪽칸과 제일 뒷 칸인 꼬리칸에 탄 승객들과의 대결을 영화는 흥미 있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계층이 고착화되어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층 사람들이 사는 앞쪽칸 쪽으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옥자>(2017)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슈퍼돼지를 생산하고 친환경기업인양 감추려는 다국적 거대 기업의 숨은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돈만을 추구하는 거대기업의 음모를 밝혀냄으로써 유전자조작식품의 위험성을 간과한 채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이 대중친화적인 영화로 인식되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은유적 묘사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감각적이고 사실적으로 와 닿게 만드는 감독의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봉감독이 다룬 주제들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면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어디서든 터지는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봉감독의 유머는 극적 긴장을 해소하는 역할과 더불어 부정적 사회현실을 객관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유머를 통해 실현되는 풍자와 해학은 오히려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셋째는 가족이다. 가족의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이며 봉준호 감독이 제시한 부정적 사회현실에 맞서는 우군이다. 특히 아버지의 희생과 자녀의 생존을 통한 가족의 존속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대중성을 갖게 만든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빈부격차의 한국사회를 그리다 <기생충>은 빈부격차가 큰 한국사회의 현실을 봉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은유적이고 압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반지하에서 가족 전원이 백수로 살고 있는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화려한 주택에서 살고 있는 박사장(이선균)집의 고액과외 선생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대학도 못간 기우가 학력위조를 통해 최상류층 집안의 선생이 되는데서 오는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기택이네 가족이 생존을 위해 피자박스를 접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여느 가족드라마와 다르지 않다. 박사장 집 지하에 숨어 지내며 살아가는 가정부 국문광(이정은)의 남편 근세(박명훈)의 발견과 기택네 집안과의 갈등은 다분히 서스펜스 스릴러를 방불케 하고, 결과적으로 박사장과 기택과의 충돌은 빈부격차에서 오는 사회현실을 묘사한 사회심리 혹은 사회비판 드라마로 읽힐 수 있다. <기생충>은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최상의 이층 주택이라는 공간의 배열을 통해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빈부격차에서 오는 갈등과 공존을 압축적이며 은유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제목이 주는 혐오적인 어감과 달리 부잣집에서 붙어 사는 지하와 반지하 가족들의 비현실적인 실상은 자본주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압축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박사장이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기택에게서 ‘지하철을 타다 보면 나는 냄새’가 난다며 기택의 가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대목은 향기가 아닌 ‘냄새’가 ‘주거 공간’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신분과 계층을 대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봉감독의 사회를 보는 눈이 얼마나 세밀한지를 알 수 있다. 지난해 4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460만으로 1년 전보다 3.6% 증가했다. 그러나 근로활동을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상위 20%의 소득 5 분위 가구는 932만 4000원으로 10.4% 증가한 반면, 하위 20%의 소득 1 분위 가구는 123만 8000원으로 오히려 17.7% 줄어들었다. 이 수치는 통계가 잡힌 이래로 사상 최대폭으로 감소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잘 사는 사람은 점점 더 잘살게 되지만 못 사는 사람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현실을 통계는 숫자로 표시하고 <기생충>은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봉준호 장르의 한계 봉준호 장르의 영화들은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기 보다는 계속되는 위협과 위험의 현실을 인식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곤 한다. <살인의 추억>(2003)의 연쇄살인범은 잡히지 않았고 <괴물>은 한강 어디에선가 살아있는 것처럼 위험이 제거된 온전한 평안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즉 온전하고 이상적인 상태를 제시하기 보다는 끝에 희망의 단초를 제시하는 정도다. 영화감독에게 사회문제의 해결점까지 제시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의 경우에도 영화 <모던 타임즈>(1936)를 통해서 산업사회의 기계문명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봉준호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설국열차>에서 투쟁 끝에 전복된 기차 안에서 나온 사람은 어린이들이었다. <괴물>에서 송강호는 자신의 딸과 같이 있던 고아를 아들처럼 여기며 밥상을 마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기생충>에서 아들은 부잣집을 매입하고 아버지를 지하로부터 구하는 상상으로 끝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가 제시한 본질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막연하나마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게 만든다. 예수님이 <기생충>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를 그린 영화를 만드는 연출가로 나선다면 어떠했을까? 찰리 채플린이나 봉준호 감독처럼 막연하게 희망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제시하셨을까?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관원’과 ‘세리장 삭개오’라는 두 인물의 비교를 통해 기독교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에서 그려내지 못한 다른 길과 다른 차원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적인 변화가 가져오는 외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부자 관원은 누가복음 18장에 언급된 표면적인 사실로 보더라도 퍽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계명을 모두 지켰고(21절) 거기다 부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외형적으로나마 훌륭한 신앙인이었으며 거기다 성경은 그가 ‘큰 부자’(23절)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다. 자신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전시키는(22절) 일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의 문제를 물으러 왔지만 재물의 문제에 막혀 심히 근심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인 누가복음 19장에는 또 다른 부자 관리인 삭개오가 등장한다. 이번에도 성경은 그가 세리장이면서 아울러 부자라고(2절) 언급하고 있다. 그는 부자관원과 달리 말만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고(4절)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행동파였다. 그는 주변인들의 수근거림에도(7절) 개의치 않았으며 예수님이 얘기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8절) 폭탄발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9절) 영적인 응답을 하셨다. 봉준호감독이 영화를 통해 제시한 갈등과 격렬한 싸움 그리고 죽음으로 귀결된 빈부격차의 문제는 근심하며 돌아 간 부자관원의 상태에서 엔딩 크레딧을 올릴 수밖에 없다. 봉감독은 돈의 문제가 성경이 지적한대로 영적인 문제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내적인 변화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어떠한 물리적인 싸움도 빈부격차를 일으키는 돈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정답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사11:6-9).
    • 문화
    • 영화
    2019-06-26
  • [영화] 죽음으로 살아나는 신앙-영화 ‘교회 오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켜보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죽음의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외면’이다. 죽음을 바로 응대하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태도가 한국인들에게는 있음을 지적한다. 죽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은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되는 듯 머릿속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죽음과 연관된 어떤 것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는 ‘부정’이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어디서나 쉽게 발견된다. 은행에서 대기표를 뽑을 때 44번이 나오면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4자가 F로 둔갑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아라비아 숫자 4가 얼마나 홀대를 받아왔던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라도 집안에 부정 타는 일이 생길까봐 상가 집에 같다오면 집 앞에 소금을 뿌리는 일은 옛 사람들의 풍습이기 조차 했다. 셋째는 ‘혐오’다. 화장장이나 추모공원 등과 같은 죽음과 연관된 시설을 우리 사회에서는 혐오시설로 분류한다.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는 일은 애를 받는 산부인과의 존재처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결코 곁에 두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고 이를 싫어한다. 객관적이거나 과학적 지식과 상관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정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호경 감독의 영화 <교회 오빠> 는 최준식 교수가 얘기한 한국의 죽음의 태도를 모두 불식시킨다. 주인공은 죽음과 고통 앞에서 부정도 외면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기독교 신앙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분명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름을 이 영화는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 2017년 12월 22일 ‘KBS 스페셜 앎’ 2부작으로 방영된 동명의 프로그램을 재촬영·편집하여 극장용 영화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서른일곱 나이에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남편 이관희 집사와 림프종 4기 진단을 받은 아내 오은희 집사의 투병장면이 신앙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구약의 욥기의 진행 과정을 따라 영화는 욥과 주인공 이관희 집사의 신앙적 면모를 비교해 가면서 흥미로운 연출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욥과 같은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했을 때 신앙인이 보이는 반응과 또한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우리가 기대하는 반응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묘사하며 죽음 앞에 선 신앙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믿음의 선한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6:12) <교회 오빠>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기암의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믿음의 싸움이며, 이를 통해 많은 관객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증인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를 봐야하는 이유 <교회 오빠>는 개봉 일주일을 맞았을 때 다음 사이트에서 일간 영화 검색어 순위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위 <알라딘>과 2위 <악인전>에 이은 순위다.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교회 오빠> 다음 순서로 밀려나 있다. 관객 수도 3만 명을 넘어섰다. 역대 최고의 관객을 모은 외화 <어벤져스:엔드 게임>이 1천3백5십3만 명을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너무 왜소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개봉 첫날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전국 2760개의 스크린에서 1만2545회 상영되었다. 하루에 1만 2545회가 상영되었다는 말은 한 번 상영에 10사람만 봐도 10만 2천 명이 훌쩍 넘는다는 뜻이 된다. 첫날 상영점유율은 80.9%, 좌석점유율은 85%로 역대급이다. <교회 오빠>는 상영하는 극장 보다 상영되지 않은 극장이 훨씬 많다. 극장에 걸리더라도 하루에 고작 1회 내지 2회가 전부다. 상영시간도 아침 첫 회 아니면 늦은 시간을 배정 받아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교회 오빠>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극장에서 외면당하는 독립예술영화의 설움을 고스란히 받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지금까지 기독교영화가 한국 영화계에서 받아왔던 기대와 실망을 교차시킨다면 꼭 서럽게 생각할 만한 일도 아니다. 개봉 5일 만에 달성한 3만 관객이란 숫자는 서울의 대형 교회 출석 교인 수보다도 적다. 기독교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는 실무자들은 항상 기대감을 갖고 출발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의 10%만 볼 수 있다면 1백만 관객을 모을 수 있다고. 이런 얘기를 예전에 했다면 영화가 가진 작품성이나 예술성 혹은 오락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신앙영화는 재미가 없더라도 보러가란 말이냐는 타박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오빠> 만큼은 이에 대한 변명을 적극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 첫째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서 <교회 오빠>의 작품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말기암 환자의 투병생활과 부부애 그리고 신앙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다루는 영화의 정서적 접근은 결코 신파적이 아니다. 눈물을 짜내기 위해 억지스런 연출 보다는 인생의 희노애락 가운데 다가오는 죽음을 신앙의 자연스러움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만일 이호경 감독이 대중의 충격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길 원했다면 암환자가 겪는 고통을 극대화 시켰을 것이고, 죽음으로 끝을 맺는 환자 보다는 신앙의 기적으로 회복되는 주인공을 택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근본적으로 소재주의를 택한다.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정말 특이한 인물과 사건을 쫓아다니는 특성이 다큐멘터리에는 있다. 부부가 함께 암투병을 해야 하고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기독교 영화의 훌륭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교회 오빠>는 분명 다큐멘터리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다큐멘터리는 ‘생각하는 영화’로서의 장점이 있는 반면 드라마는 생각하는 순간 망해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는 관객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계속 자극적인 장면을 쏟아내야 한다. <교회 오빠>는 다큐멘터리로서 충분히 죽음에 맞서는 신앙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영화가 구약의 욥기를 따라 진행되며 중요한 욥기의 성경구절이 화면에 자막으로 나타날 때 마다 관객들은 그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배운 욥과 성경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영화를 위한 변론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난 후 관객들은 마치 한편의 잘 만든 드라마를 본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흔히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카메라 앞에 서는 주인공들은 일반인으로서의 어색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상황에 잘 녹아들고 있다. 이것은 ‘편집의 예술’이 <교회 오빠>에는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으며(만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연기를 하려든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본래적 성격을 잃어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죽음의 상황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일어난 현실일 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이관희 집사는 이제 다른 영화에 다른 배역을 맡아 출연할 수 있는 드라마의 배우와는 다르다. 그는 오직 한 편의 영화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영화계를 은퇴한 셈이 되고 말았다. 감동이란 말은 영화의 오락성 안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대중의 가치를 말한다. 대중영화가 오락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즐거움을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감동은 즐거움을 포함하여 다양한 감정을 분출시키는 가운데 일상의 기대감을 넘어서는 경험을 넘어설 때 쓰는 말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생일에 느닷없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주는 동료들에게서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대통령이 비를 맞으며 전사자를 맞이하기 위해 활주로에서 기다리는 장면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평범한 집사의 마지막 시간은 감동적이다. 기독교영화가 재미없고 작품성이 떨어져서 보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기독교영화가 없다는 애기는 이제 할 필요가 없다. 부산국제영화제나 칸영화제만큼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도 올해로 16회를 맞은 기독교영화제인 ‘국제 사랑 영화제’도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이며 영화가 문화계를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르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맛집에 찾아가기 위해 돈과 시간을 써 본 적이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영화관을 수소문 해볼 일이다. 훌륭한 설교 말씀을 찾아 유튜브를 뒤적여 본일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볼 일이다. 신앙의 감동은 25년 평론을 해온 기독교영화의 전문가가 보장해드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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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7
  • [영화] 예술이 신앙의 가치를 위협할 때
    난해하거나 인간적이거나 1970, 80년대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의 각본을 써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감독이 개성 넘치는 자신만의 영화를 들고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2천 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자신의 개성을 살린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었다. 공포영화에서 범죄와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평론가들로부터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의 특기는 종교적 감각을 활용한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를 심미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세계적인 논란을 일으켰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꿈꾸는 듯한 환상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원하는 욕망과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운명가운데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 적이 있었다. 당연히 가톨릭을 포함하여 세계 교회들이 이 영화를 성토했고 상영반대 시위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의 최신작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예수가 아닌 목사라는 성직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부조리한 인간의 욕망을 들추면서 어쩌면 그가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내용을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만든 자기 고유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교회비판의 외형 속에 담긴 내면의 부조리 군목 출신으로 자신의 아들을 이라크 전쟁에서 잃어버린 에른스트 톨러 목사(에단 호크)는 250년 역사를 지닌 시골의 작은 교회 ‘퍼스트 리폼드 처치’의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화란의 개혁교단 출신의 이민자들이 세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지만 지금은 가끔씩 관광객들이 들려가고 주일이면 열 명도 채 안 되는 교인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박물관식 교회가 되고 말았다. 대신 이 교회를 발판으로 인근 도시에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예배당이 건축되어 ‘퍼스트 리폼드 처치’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외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시골교회의 목사 톨러는 여성신도인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자신의 남편을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그의 삶은 조용히 그러나 심각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메리의 남편 마이클은 극렬한 환경주의자로 상담을 진행하던 중에 숲 속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톨러 목사는 메리를 위로하며 그녀에게 남다른 느낌을 받고 아울러 신비적인 경험조차 하게 된다. 툴러 목사는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큰 기부를 한 에너지개발 업체 대표인 교회 성도로부터 환경주의자의 장례식에 성가대원 일부가 참석하고 노래한 것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된다. 톨러 목사는 리폼드 처치의 설립 25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마이클의 유품으로 나온 자살폭탄용 조끼를 입고 퍼스트 리폼드 처치에 들어가려던 중 메리가 있음을 알고 당황해 한다. 그러나 그는 토끼 울타리 용으로 사용했던 철조망을 몸에 감은 채 세제를 먹고 고통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는 길이 고난을 지고 가신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려던 중 그를 찾아 온 메리와 마주치게 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단지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에게 이러한 줄거리 요약은 별 의미가 없다. <퍼스트 리폼드>는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영화라기보다는 감독의 독특한 이미지 구성 방법에 의존하여 뭔가 부조리한 현실세계와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인간의 심리를 영상이미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보면 알 수 있지만 말로 설명해서 이해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화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 단어는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읽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를 교회나 기독교신앙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관객이 본다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목사의 테러미수 정도로 읽혀질 수 있다.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성직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는 자연파괴를 통해 돈을 번다고 믿는 에너지 기업이 후원하는 대형교회의 행사에 불만을 품고는 교회 행사에서 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래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곰곰이 따져보는 관객이라면 두 가지의 비판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첫째는 환경파괴에 무관심한 현대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며, 다른 하나는 기업화하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영화를 통해 충분히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보다 중요한 다른 것을 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즉 자살한 교회의 성도가 옛날 작은 교회에 출석한 환경운동가인 반면에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기여한 성도는 환경파괴를 일으키는 에너지 기업의 대표란 점 말고는 구체적인 상황은 나타나 있지 않다. 에너지 기업의 대표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으며 그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교회 또한 환경훼손에 무관심하거나 반성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필자가 현대교회에 너무 익숙한 탓일 수도 있으지 모르지만)영화는 단지 외형적 규모가 클 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한 부자교인들도 다니는 보통의 평범한 교회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다. 오히려 작은 리폼드 처치로부터 성장한 대형교회의 흑인 목사는 백인 툴러 목사를 청빙한 장본인이이며 동시에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가 행사를 마친 후에는 정신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하는 사려 깊은 목회자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영화가 철저히 툴러 목사 개인의 삶과 신앙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영화 제목은 ‘퍼스트 리폼드’이지만 내용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아닌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툴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일기는 쓰지만 은혜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정말 적막하고 어쩌면 수도원적 생활이 어울릴 것 같은 시골의 목사관에서 매일 일기를 쓰는 툴러 목사의 삶은 깊은 신앙으로 가는데 최적의 환경일 수 있다. 시끌벅적 시장 같이 시끄럽지 않으며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대한 불만이나 부족함이 있다면 얼마든지 개선하기 위한 시도도 가능하다. 비록 큰 교회의 지원을 받지만 그는 250년 된 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주님으로부터의 목회적 소명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울러 그는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고 아내와는 이혼한 상태에서 알코올 중독증세도 보이는 등 성직자로서 불안한 문제를 갖고 있다. 기도로 못한 이야기를 일기에 적는 다고 하지만 그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자신의 어려움을 신앙 안에서 극복하지 못한 채 외부의 문제에 대한 공격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순교로 착각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자신이 비판한 부조리한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툴러 목사를 이해하는 방법은 폴 슈레이더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는 일이다.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며 문명화된 도시사회의 인간소외를 잘 그렸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핵심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영웅화된 이미지로 그려나갈 때 생기는 또 다른 부조리한 모습에 있다. 트레비스는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밤에만 운전하는 뉴욕의 택시 운전사다. 부패한 도시 뉴욕을 청산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어린 여성을 성매매하는 포주들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부조리를 발생시킬 뿐이다. 툴러 목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인정하지 못한’(딤후3:5) 인물을 대표한다. 겉으로는 환경을 생각하고 자본주의에 물든 기업형 교회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경건한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데는 실패했다. 성직자로서 극렬한 환경주의자인 마이클에게 영향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영향을 받아 그가 계획했던 자살폭탄조끼를 입고 마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툴러 목사는 자신과 주변의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폭탄으로 제거되어야 할 부조리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인가? 부조리한 세상을 구원할 존재를 영화는 놀랍게도 마이클의 미망인 메리로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리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와 같은 이름이며, 툴러 목사가 급히 자살폭탄 조끼를 벗어던졌던 이유도 메리가 교회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다. 메리와 그녀의 복중에 있는 아이는 툴러 목사로부터 보호받음으로써 결과론적으로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다. 감독의 가톨릭 신앙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이 같은 해석은 부조리한 세상의 왜곡된 구원의 모습이다. 툴러 목사는 멸망과 구원에 대한 인식을 환경주의자가 아닌 성경으로부터 얻어야 했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메리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경험이었다.
    • 문화
    • 영화
    2019-04-29
  • 선교와 사랑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다
    새로운 기독교영화의 탄생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은 디지털 세대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기독교영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비싼 관람료와 극장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공짜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우선 선택을 받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동안 기독교영화란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형 성서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진 기독교인을 놀라게 하는 일인 동시에 문화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한국기독교영화계에 가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만한 일이란 점에서 주목받기에 합당하다.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콜링>은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첫째는 영화를 상영하는 플랫폼(platform)으로 일반 극장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택했다는 것과 둘째는 젊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삶과 고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변화는 물씬 느껴진다. 플랫폼의 변화는 디지털 시대가 한창 진행 중인 현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어떤 플랫폼을 선택하느냐가 성패를 가늠한다할 만큼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콜링>은 일반 영화관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선택했다. 즉 영화라는 문화콘텐츠를 전달하는 플랫폼에는 영화관과 TV와 같은 전통적인 상영방식을 비롯하여 이제는 과거 유물이 된 VCR과 우리나라에서는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내는데 실패한 DVD가 있다. 또한 최근 각광받고 있는 IPTV나 인터넷을 통하여 원하는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 있는 VOD 등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의 성격을 지닌다. 과거 영화의 경우 플랫폼은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 시스템 안에서 이해되곤 했다. 즉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이 극장뿐만 아니라 DVD와 영화전문 케이블 TV 그리고 컴퓨터 게임과 책으로 까지 연계되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활용될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플랫폼은 스마트폰과 연계되어 정보콘텐츠를 디지털세계 안에서 전달받을 수 있는 시스템 환경을 말한다. 쉽게 말자하면 아마존이나 구글, 페이스북 등이 플랫폼에 해당한다. 유튜브나 인터넷 VOD는 가장 성장세가 빠른 영화의 플랫폼들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밝힌 지난 해 한국인들의 영화관람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2018년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총 2억1,649만 명으로 1인당 영화관람 편수는 4.18회에 해당한다. 이것은 세계최고 수준의 영화관람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한국의 영화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17의 2억 1,987만 명 보다 약 3백만 명 이상 줄어든 수치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의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줄어들었지만 극장입장권 판매액은 오히려 늘어났다. 이유는 극장관람료가 올랐기 때문이다. 평일 일반 영화를 관람비가 1만원이고 3D나 4D를 주말에 보려면 2만원을 줘야하는 현실은 주머니 사정이 열약한 학생들의 입장을 줄어들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지만 전체관람료 수익은 증대시킨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람료에 부담을 느낀 한국의 젊은층들이 대신 찾아간 곳은 넷플릭스(Netflix)를 볼 수 있는 인터넷 VOD시장이었다. 흔히 말하는 디지털 온라인시장의 규모는 극장관람료 수입이 감소한 것과는 다르게 상승세에 있다. 2017년 4,362억 원이었던 온라인 영화시장은 2018년 4,739억 원으로 8.6% 증가했다. 이것은 영화관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극장만이 아니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기독교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세계와 유튜브 세상에 발을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함을 시사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이 유튜브를 놀이공원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매우 적절한 문화선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 삶을 코믹하고 성경적으로 풀다 <콜링>이 이전의 기독교영화들과 다른 두 번째 면모는 작품의 내적인 표현방식에서 나타난다. 주제는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심과 응답을 다루고 있지만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현대적이며 새롭다. 중고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재민(임재민)은 어느 날 자동차를 보러 온 시연(김시연)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예전에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동안 시연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재민은 정직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재미는 선교사로의 부르심과 옛 사랑에 대한 성취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개된다. 재민은 시연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시연이를 따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만일 시연과 다른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매우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교회에서 나름 진지한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울러 연애와 결혼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를 영화는 갈등의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영화는 정답도 제시한다. 선교는 선교이고 사랑은 사랑이지 선교를 사랑과 혼합시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혼잡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관객에게 제시한다. 교회를 다니는 신실한 청년들의 고민 가운데 하나인 부르심 혹은 소명, 아니면 비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철저히 현실적인 언어로 영화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감독의 영화관이라 볼 수 있는 재미의 추구는 기독교영화도 디지털 세대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연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주변 상황을 만들어가는 조연은 매우 코믹하다. 재민이 정직한 중고차딜러로서 방송을 타고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을 무렵 그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감독은 매우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장은 재민에게 아메리카노 커피 투 샷을 건네주면서 격려하지만 재민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며 사표를 제출한다. 사장: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거야. 혹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최실장이 괴롭혀? 재민: “아닙니다.” 사장: “그럼 뭐야, 아메리카노가 맛이 없어? 재민: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차 파는 일을 하는 게 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 “임실장, 정신차려 자네가 대한민국 중고차 딜러 중에서 최고야. 자네가 웬만한 딜러 다섯 명 여섯 명 보다 훨씬 많이 팔고 있어. 재민: “저는 이제 선교를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 “그걸 왜 니가 해? 재민: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사장: “하, 하나님은 너를 중고차 딜러로 부르셨어!” 영화 연출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심오하고 중요한 얘기를 코믹하게 묘사하는 일이다. 신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무거운 톤으로 연출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포영화는 무섭게 만들고 멜로드라마는 달콤하게 묘사하듯 기독교영화라면 신앙의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기품있고 은혜가 넘치는 느낌이 나도록 표현하면 될 것이란 생각을 영화는 뒤집는다. <콜링>은 결정적 순간에 코믹한 발상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세대가 좋아하는 쿨한 방식인 셈이다. 슬프다고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고 잘됐다고 해서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다. 인터넷 세대에게 진짜 멋진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을 때 사표를 쓰고 하나님의 소명임을 언급하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일은 얼마나 훌륭한 기독교인의 모습인가? 그러나 이를 진지하게 묘사했다면 관객은 곧 부담을 느끼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선교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생각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적용했을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 때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을 통한 코믹한 연출은 선교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가볍게 선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의식을 전환시킨다. 유머는 두려움의 해독제란 사실을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디지털 세대에게 유튜브로 다가가는 코믹한 기독교영화 <콜링>. 중요한 신앙의 주제를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모습은 분명 미래 기독교영화의 전망을 밝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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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7
  • [영화] 기독교인은 코미디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코미디와 경건한 신앙 영화로도 만들어진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가톨릭이 웃음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제시된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윌리엄 수사와 그의 조수 아드조가 등장한다. 죽은 수도사들마다 손가락과 혀에서 검은 잉크의 흔적을 발견한 윌리엄 수사는 그들이 모두 독살되었고 모종의 책과 연계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수도원에서 결코 읽으면 안 되는 금서로 밝혀진 책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 제2권이었다. 이 책은 인간을 웃게 만드는 희극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호르헤 수도사는 경건한 수도생활에 웃음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두려움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호르헤 수사는 신앙의 본질이라 여긴다. 즉 두려움이 없다면 신앙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만큼 두려움을 없애는 웃음은 신앙에서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르헤는 응징의 차원에서 남몰래 시학 제2권을 읽는 수도사들이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는 습관을 이용 책 귀퉁이마다 독을 발라놓았었다. 그는 독살의 장본인으로 밝혀지자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시학 2권을 씹어 먹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어두운 문화적 분위기를 현대인에게 잘 전해준다. 웃음과 핏기를 잃어버리고 신앙이란 이름아래 무겁고 창백한 그림자가 수도원 안팎을 깊게 드리우고 있다. 수도원의 타락과 수도회와 교황간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행간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가 소재로 채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다만 지금 현존하는 시학 제1권 6장에는 “서사시와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지금은 비극에서 관해서 논의해보자.”라는 언급이 나온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먼저 쓰고 나중에 희극을 썼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이 점에 착안 <장미의 이름>의 끝 장면처럼 시학 제2권이 사라진 연유를 중세 수도원의 엄숙한 분위기를 배경 삼아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웃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적어도 기독교 영화의 분야에서 웃음을 통해 관객에게 즐거움과 메시지를 주는 코미디 장르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기독교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나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한 드라마 장르에서 웃음은 배제되어 있었다. 신앙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선교적 소명 등 매우 중요한 교회의 이슈를 다루었지만 웃음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마치 기독교영화를 보면서 웃는 일은 불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 진중한 자세만이 요구될 뿐이었다.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 이병헌 감독의 영화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본질을 잘 살린 대중영화다. 설 연휴에는 온 가족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담 없는 영화를 선택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개봉시점도 매우 잘 선택했다. 거기다 맞대응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바람에 <극한직업>은 불과 개봉 15일 만에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영화는 마약범죄조직을 감시·소탕하기 위해 투입된 5명의 마약반 형사들이 작전상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코미디의 주요 장면을 구성한다. 치킨장사는 단지 범인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까닭에 수사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형사(진선규)가 개발한 ‘수원 왕갈비맛 통닭’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치킨집은 맛집으로 소문나게 되고 형사라는 본업은 오간데 없이 치킨 장사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종합선물세트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상대방을 비꼬는 언어감각이 살아있는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의 형식이 주효하지만, 범인검거 현장에서 드러난 형사들의 과장되고 어설픈 행동들은 찰리 채플린이 했던 것처럼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의 연장선을 잇고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녀 형사의 애정표현은 이 영화가 나름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도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기독교 관점에서 <극한직업>은 왜 기독교 영화 제작자들이 코미디영화 제작을 꺼려하는지를 깨닫게 도와주기도 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웃음유발의 특징들을 선뜻 수용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한직업>에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요소의 핵심에는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위의 붕괴’란 선하든 악하든 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사회적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며, 그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같거나 그 보다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영화에서 마약반 형사들은 강력범을 잡은 경찰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비록 위장전술이긴 하지만 형사들이 치킨집 종업원으로 변신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경찰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웃음이 유발되는 ‘권위의 붕괴’를 보여준다. “180도 기름에 대이고 칼에 베이고 얼마나 쓰라린 줄 알아? 아파. 지금 현재도 굉장히 쓰라린 상태야.” 마형사는 마약범을 잡다 몸을 다친 것이 아니라 닭을 튀기다 얻은 상처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의 얼굴은 닭을 잡을 때의 표정이 아닌 범인을 잡을 때의 비장함이 묻어난다. 범인이 아닌 닭을 잡는데 온 힘을 다 쏟는 형사의 모습에서 권위는 전복되고 만다.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 운영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며 고반장(류승룡)은 반원들에게 크게 한마디 한다. “정신 안차릴래. 우리가 지금 닭장사하는 거야? 야 그럼 이 참에 사표 쓰고 닭집을 차리던가!” 마약반의 책임자로서 이 같은 말에는 권위가 살아있음을 관객은 느낀다. 그러나 전화벨이 울리자 그의 말은 곧 변해버린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 인가 통닭인가, 네 수원왕갈비 통닭입니다.” 급 반전된 반장의 말과 억양에서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가 가져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다. 악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한직업>에 등장하는 마약조직의 보스인 이무배(신하균)나 테드창(오정세)이 잔인하고 포악한 범죄자의 모습만을 갖고 있지 않고 나긋나긋한 말투와 연예인 뺨치는 스타일로 등장한다. 심지어 헤어밴드와 노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온 것은 악당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악당들도 코믹 연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권위를 버릴 것인가? ‘권위의 붕괴’는 곧 잘 조롱이나 폄하 혹은 풍자로 읽혀지다. 지배자의 권위를 앞세우며 독재 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통령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금지되었었다. 민주화를 지향하던 한 대통령은 자신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는 언급을 공식적으로 할 만큼 한국사회는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권위의 붕괴’로 얻는 것도 있다. 바로 대중적 친밀함이다. 그것은 새로운 소통방식이며 또 다른 리더십이기도 하다.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로서 경찰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이지만 경찰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치킨집은 일상 그 자체다.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면서 퇴직 후 선택하는 1순위 직장이기도한 치킨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숙한 이웃으로 인식된다. <극한직업>에서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에 몰두할 때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그것으로만 끝났다면 결코 천만 흥행을 달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권위는 내려놓았지만 역할은 살아있었다. 결국 형사들은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역할에 충실한 주인공들을 보며 관객들은 웃음과 더불어 도덕적 만족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세상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교회를 우습게 여긴다는 뜻에서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영향력을 주는 의미에서 권위를 되찾고 싶다면 권위 자체에 몰두하기 보다는 교회의 역할을 바로 세울 일이다. 소금의 권위를 쫓기 보다는 본래의 맛을 내는 역할(마5:13)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미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기꺼이 허용한 사람이다. 왜 일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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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0
  • [영화] 죄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발견
    무책임함 부모를 고소한 12살 아들 레바논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자신의 출생일도 모른 채 일곱 식구와 살고 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지만 여동생 사하르(세드라 이잠)와 함께 길거리에서 주스도 팔고 상점에서 배달 일을 도우며 집안생계를 돕고 있다. 자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약국을 돌며 사온 약품에서 항정신성 약물을 물에 녹이고는 옷가지에 묻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몰래 넘기는 일을 할 뿐 정상적인 가족생계는 자인이 모두 떠맡고 있다. 심지어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를 돌보는 일 조차 한 살 터울 오빠인 자인의 몫이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 집안이 단순히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는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레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주인공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을 상인에게 돈을 받고 시집보낸 것에 대해 분노하고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일찍이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초 런던 슬럼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소매치기 범죄 집단에 끌려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일이 있었다. 그 이후 빈곤의 상황에 처한 어린 아이와 그를 둘러싼 사악한 어른들의 풍경은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주인공 어린이가 처한 심각한 일탈과 위기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어린이를 이용해 먹은 악당에 대한 죄과를 드러내어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의 편에서 심판하도록 마음을 부추기는 한편 어린이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의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이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영화 <가버나움>은 다르다. 자식을 낳을 줄만 알았지 키울 줄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와 어떤 돌봄도 없이 거리에서 자란 어린이의 삶 속에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죄와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중영화에서 자식을 거리로 내몰며 앵벌이에 가까운 노동과 범죄행위를 부추기는 경우 그 부모는 대개 진짜 부모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친부모라면 돈 때문에 자기 자식을 팔아넘기고 거리의 부랑아로 살도록 만들기는 보다는 빈곤의 현실을 안타가워하며 어떻게든 자식을 정상적으로 교육시키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방관을 넘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용하는 무책임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자인은 부모를 법정에 고소한다. 왜 부모를 고소하는지 묻는 판사를 향해 자인은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말을 남긴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들이니까요.” 이 영화의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가 납득되는 순간이다. 책망 받은 도시 가버나움 영화 <가버나움>은 기독교영화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내용이나 가치관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비판하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 인근의 ‘가버나움’이란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언행을 알고 보았을 때 비로소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 다섯 제자를 부르셨고(마4:13,18-22 9:9),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 병자 등에게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마8:5,14, 9:1, 요6:55-59). 마태복음은 ‘본 동네’(his own town, 마9:1)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버나움이 그 누구의 장소도 아닌 ‘예수님의 동네’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장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목격된 도시인만큼 ‘예수님의 동네’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뜻밖에도 가버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스런 질책을 받은 도시였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 영화 <가버나움>은 가장 기적을 많이 목격한 도시가 책망의 대상으로 변한 상황을 현대적인 은유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적은 생명성이다. 집을 나간 자인은 거리를 떠돌다 이디오피아 출신의 불법 체류 여성 라힐(요다노스 쉬페로우)의 돌봄을 받지만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자인은 라힐이 사라진 집에서 라힐의 젖먹이를 돌봐야 하는 신세가 되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재미있게 느낄만한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12살 집을 나간 어린이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젖먹이 요나를 돌보는 모습은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과 가치가 인간성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명으로 충만할 기적의 아이는 더 이상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만다. 자인은 자신의 부모가 여동생을 결혼이란 명목으로 팔아넘겼듯이 아이의 아빠라고 추정되는 남자에게 젖먹이를 돈 받고 넘겨버리고 만다. 이 저주스런 행동의 결말은 법정에 서는 일이다. 자인은 시집간 여동생이 임신 끝에 죽은 사실을 알고 남편이 되는 남자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교도소에 가게 되고, 아동학대가 위법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부모를 고소하는데 이른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레바논의 현실이 성경의 ‘가버나움’과 다를 바 없음을 그렇게 묘사했다. ‘가버나움’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린 아이가 처한 빈곤과 불의의 현실을 담은 영화를 만든 감독 가운데는 유난히 여성 감독이 많다. <가버나움>의 나딘 라바키 뿐만 아니라 우간다의 빈곤한 현실 속에서 체스우승을 꿈꾸는 어린이를 묘사한 <체스의 여왕>(2016, Queen of Katwe)의 미라 네어(Mira Nair) 감독 또한 여성 감독이다. 이 두 여성 감독은 여성 특유의 모성애를 발휘하여 사회의 약자인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업영화의 세계에서 매우 선정성 높은 묘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면들이 순화되어 있는 것은 여성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가버나움>을 본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회개에 대한 촉구다. 성경의 가버나움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보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가버나움의 대중들에게 납득되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둘째는 가버나움을 향한 구원사역에 대한 의지를 갖도록 촉구 받는 일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본 장면들은 모두 사실이다. 아니 현실은 이 보다 더 참혹할 수 있다.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대거 들어있는 이러한 영화들이 기독교인 관객에게 갖는 의미는 오직 한 가지다. 가서 그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영화의 끝 부분에는 교도소를 방문한 가톨릭 수녀들이 보여주는 위로의 찬양이 있고, 이슬람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자인에게 종교가 위로가 되지 못한 현실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형식적인 종교행위는 어느 곳에서도 삶의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과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영화를 본 우리에게 남은 생각거리는 한기지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가버나움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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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7
  • [영화] 로마의 어둠을 밝힌 순교자를 마음에 담다
    새롭고 오래된 성서영화의 발견 영화 <바울>(Paul, Apostle of Christ, 2018)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 10월 31일 국내 개봉을 시작한 이후 12월 4일 현재 233,863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하여 전통적인 형식의 성서영화(Bible Cinema)로서는 보기 드물게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추정 제작비가 5백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로서 과거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서사적 특징을 배제한 가운데 이룬 성과로 의미가 매우 깊다. 한국 영화계의 비수기인 11월을 택해 개봉하는 바람에 대형 상업영화로부터 상영관을 뺐기지 않을 가능성을 높인 것도 흥행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상영관수가 적은데다 여전히 한국극장가의 고질적인 병폐인 징검다리 식 개봉(1회, 3회, 5회 상영과 같이 띄엄띄엄 상영시간을 배정하는 것)에도 불고하고 이룬 성과여서 차후 한국의 기독교영화 관객의 기호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 지금까지 제작된 성서영화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영화로써 세실 드 밀 감독의 <왕중왕>(1927)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까지 영화사 초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영화를 대표해왔다. 둘째는 예수 외에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영화로써 <십계>(1956)나 금년에 새롭게 제작 개봉된 <삼손>(2018)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셋째가 매우 흥미로운 성서영화의 부류인데 예수시대 혹은 초대교회를 배경으로 삼은 기독교영화들이 있다. <벤허>(1959, 2016)나 <부활>(2016)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 영화들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닌 가공의 인물들이다. <벤허>의 주인공은 유대인 귀족이었다가 노예로 전락한 유다 벤허이고, <부활>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로마의 군인이다. 이 두 인물의 경우 예수님 시대에 살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로서 성서영화가 단지 성경의 내용을 영상화하는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외연이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세 번째 부류의 성서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제한된 노출을 시도하면서도 주인공의 인생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서 예수를 등장시킴으로써 전통적 성서영화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화 <바울>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신앙 가운데서 순교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영화에서 이 부분은 바울의 회상 장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다. 즉 주인공은 바울이지만 바울을 주인공으로 만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란 점에서 성서영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사실은 바울이 갇힌 로마 감옥의 새로운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란 인물의 등장이다. 그는 물론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지만 이 영화가 역동적으로 진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충실한 로마 군인 출신으로 처음에는 바울을 학대하며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과 그의 편지를 적어 나르는 누가와의 만남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관객은 갈래스 교도소장의 등장으로 인해 긴장감과 더불어 마침내 신앙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거룩한 상상력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재미를 부여하는 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난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다 앤드류 아이엇(Andrew Hyatt) 감독의 영화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현실과 회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는 일은 성서 영화에서는 흔한 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잔혹한 죽음이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매우 특별하다. 특히 복수가 스크린에 가득 찬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대사회에서 힘으로 응징하지 않고 용서와 사랑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일은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서기 67년 로마는 예수를 믿는 추종자들이 로마의 불을 질렀다는 소문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거리에서 화형을 당하거나 몰래 숨어 살아야 하는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인다. 신실한 믿음을 지닌 브리스길라(조앤 월리)와 아굴라(존 린치)는 예수 믿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지만 사람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로마를 탈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고 만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사도 바울(제임스 펄크너)의 의견을 구하고 그의 편지를 기대하고 있다. 이 때 의사 누가(제임스 카비젤)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에 숨어 지내는 그리스도인과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사이를 왕래하며 서로의 뜻을 전달하는 한편으로 바울의 신앙여정에 대한 구술을 받아 적음으로 인해 ‘사도행전’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관객은 목격할 수 있다. 영화가 제공하는 세 가지 미덕 영화 <바울>에서 관객이 지켜 본 가장 큰 미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고난 받는 로마 그리스도인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바울의 ‘성경적 방식’이며, 둘째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이고, 셋째는 누가의 의료행위에 나타난 신앙과 지성의 통합적 이해 방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들은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는 ‘인간 촛대’의 순교현장을 접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 56?~120?)는 14년에서 68년 사이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Annals〉)에서 네로가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연대기> 속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순교 장면 가운데는 십자가의 처형뿐만 아니라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겨 죽기도하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해가 진 후 로마의 거리 곳곳 마다 화형에 처해져서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나오는 믿음을 지키는 신앙인이 겪었을 시련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로마의 골목 곳곳 마다 나무에 매달려 산 채로 화형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고난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로마의 어둠을 밝힌 것은 그리스도인들 이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사실이며 또한 진실된 신앙의 결과였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촛대’라는 순교방식을 통해 거리의 어둠을 밝혔고, 사랑과 봉사를 통해 부패하고 잔인한 로마인의 마음에서 어둠을 내쫓았다. 로마에 대한 복수와 저항의 의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솟구쳐 올랐을 때 영화 속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고 누가에게 전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율법에 미쳐서 예수를 따르는 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과거가 있었고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사랑으로 변화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누가에게 구술한 바울의 회상장면은 사도 바울을 생애를 연대기로 처리한 과거의 영화와 달리 매우 생동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빛낸 공로는 누가가 바울이 갇힌 교도소 소장의 병든 딸을 고치는 장면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로마의 제3군단 사령관 출신으로 마멀틴 감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올리비에 마르티네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바울과 누가를 지켜보는 사람이다. 바울이 결코 로마에 불을 지를 사람이 아니며 누가 또한 참된 신앙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병든 딸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에게 기적을 행해줄 것을 바라지만 바울은 누가를 존경받는 의사로 갈래스 교도소장에게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이 생존해 있던 시절에 병 고침의 기적은 어쩌면 로마인의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그 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의사 누가를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감독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교도소장의 딸이 병중에서 회복되는 장면과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의 구경꺼리가 되기 위해 순교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정면을 교차 편집함으로써 신앙이 일으키는 기적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즉 인간 촛대로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어둠을 밝혔듯이, 또 다른 순교자들의 믿음으로 인해 로마의 어린 아이는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 문화
    • 영화
    2018-12-12
  • [영화] 북한을 다룬 영화들이 달라졌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영화 속 북한을 보다 남과 북의 대통령이 벌써 두 번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미간의 핵협상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남북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를 진행 중에 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화기와 초소를 모두 철수하고 나면 다음 달 중에는 민간인 관광객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작된 지 꼭 18년 만의 일이다. 남북의 군인들이 만나서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고 닭싸움을 하는 장면은 진짜 현실이 될 것인가! 지금까지 북한을 다룬 영화의 원형적 요소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이영진 영화평론가가 말한 대로 ‘역사의 비극을 불러와 희극으로 치장하고, 결국엔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하며 현재의 비극을 환기하는 플롯’의 반복이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우정을 쌓아가던 남북의 네 명의 젊은 군인들이 등장하고, 제대를 앞두고 인사차 찾아간 북한 초소에 갑자기 들이닥친 북한군 간부로 인해 이 우정 어린 상황이 총격전으로 이어지며, 조사 중 주인공은 자살로 끝을 맺는 줄거리는 역사의 비극이 회상되고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 짓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남북화해 무드가 한창인 오늘날 우리가 북한을 다룬 영화들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비극의 중간에 자리한 익살과 유머 그리고 이념을 넘어서는 인간애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를 필두로 중간 중간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와 주인공의 익살스런 연기는 긴장감으로 일관된 상황을 이완시키는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만일 이 영화를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데 치중한 추리물로 갔었더라면 틀림없이 지금과 같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포장방법은 휴머니즘인데 인간미의 결정적 요소는 분노나 복수에 있지 않고 웃음과 울음에 있는 까닭이다. 주인공 이병헌이 지뢰를 밟았을 때 이를 북한군 오경필이 제거해주는 상황은 웃음과 울음이 교차되는 이 영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 온 인류를 웃기는 한편 내적으로 울렸던 찰리 채플린의 휴머니즘이 주는 희비극의 가치를 재현한 것이다. 웃음만이 줄 수 있는 가벼움을 극복하면서도 울음이 던져주는 무거운 상황을 이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교차시킴으로서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맞아 젊은이들의 가벼움을 추구하는 감각적 성향과 의미를 추구하는 기성세대의 성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남북의 갈등에서 부패와의 전쟁으로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남북의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은 계속됐고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 공격에 대한 의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는 달랐다. 반공을 앞세운 영화가 나올법한 상황이지만 한국영화는 북한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아울러 남북 간의 협력모드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영화 <공조>와 <브아이피> 그리고 <공작>이 있다. 김성훈 감독의 <공조>는 위조지폐 동판을 훔쳐서 남한으로 잠적한 북한의 전직 특수부대 장교 차기성(김주혁)을 잡기 위해 남한에 온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과 그의 파트너가 되어 북한이 감추고 있는 수사의 진실을 캐내려는 남한의 어리바리한 형사 강진태(유해진)가 벌이는 공조수사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남북 갈등이 아닌 공조 수사를 통한 남북의 믿음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비밀을 알아내고 감시하기 위해 서로의 휴대폰에 도청장치를 심어놓고 심지어 남한사정을 잘 모르는 림철영에게 수사관의 명패인양 성폭력전과자에게 채우는 전자발찌를 채우는 불신의 상황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적 요소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남북의 상황에 대한 은유로도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코미디와 액션 장르를 오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불신의 관계가 어떻게 믿음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남한 형사의 집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림철령은 남쪽 파트너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높이를 쌓아간다. 마치 평양냉면이 남북의 공조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예측이라도 한 듯 함께 숙식을 같이 하는 가운데 신뢰가 형성이 되고 마침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의 백미는 북한 요원으로 잘 생긴 현빈을 기용하고 남한 수사관으로 개성 있는 유해진을 앞세운 점이다. 이 같은 캐릭터의 반전을 이룬 영화를 즐기게 된 것은 분명 남한이 북한에 대해 갖는 높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V,I.P.) 또한 남북의 갈등이 아닌 부패한 북한 권력자를 향한 정의를 묻고 국제관계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 새로운 유형의 북한관련 영화다. 북한 권력자의 외아들 김광일(이종석)을 기획탈북 시켜서 북한의 중국내 비밀계좌정보를 얻고자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김광일이 한국과 홍콩에서 저지른 여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남한 경찰 채이도(김명민)와 북한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의 집요한 추적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 암흑가의 정서와 액션을 화면 가득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두 축이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며 갈등을 양산해내는 가운데 전개된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남한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긴 영화다. 1990년대 활동했던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간첩사건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남북경협에 대한 북한의 관심과 호의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정권교체를 막기 위해 북한에 도발을 요청하는 남한 정부의 어이없는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이것은 반공영화나 부패한 북한 정권을 문제를 소재로 삼는 지금까지의 영화는 장르를 달리하는 일이다. 그동안 숨겨 온 대북공작의 비화를 서슴없이 드러낼 만큼 남한은 선이고 북한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어 이상 영화에는 통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북한 주민이 아닌 권력을 문제 삼다 <공조>나 <브아이피>를 본 관객들은 영화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여러 구조들 사이에서 뜻밖에도 공통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북한 문제의 핵심은 권력 중심부의 문제란 사실이다. “북한이 나쁘다 혹은 북한이 문제다” 라고 말 할 때 ‘북한’이란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심 권력집단을 의미할 뿐 북한 주민 대부분은 이와 관계없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브아이피>에서 봤듯이 일반 주민들은 권력집단의 희생자이거나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둘째, 남북은 공통의 목표 안에서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리대범(박희순)의 원래 소속은 35호실 해외사업팀이다. 북한의 35호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으로 리대범은 간첩교육을 받고 공작원 임무를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김광일 사건을 조사하다 함경북도 비료공장으로 좌천된 이후 남한에 와서 채이도 경감과 협력하는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까칠하게 대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남북의 문제에는 항상 미국이 깊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대부분 한국의 공권력은 미국 정보요원 앞에서 무기력하며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정상회담에 달려있음이 자명한 현실에서 영화는 솔직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이 보고 싶은 환상을 담아내며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발현하는 도구이다. 남북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고 공동의 선을 위해 남북이 손을 잡는 영화 속 장면은 비록 당장의 현실은 아니지만 간절히 원하는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사2:4) 장면은 얼마든지 영화에 등장해도 좋다. SF영화가 보여주듯 영화는 미래를 내다보는 기능이 있지 아니한가? 영화를 통해서라도 좋은 꿈을 계속 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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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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