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문화
Home >  문화  >  영화

실시간 영화 기사

  • [영화] 상처 입은 자의 치유자를 목격하다
    배우에서 신앙인 감독으로의 변신 추상미 감독의 예술 인생을 논할 때 뗄 수 없는 사람은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충무로 연극계를 주름잡았던 그의 아버지 추송웅(1941~1985)이다.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모노드라마를 통해 원숭이가 바라본 인간세상의 부조리를 낱낱이 고발하는 연극은 대학가의 큰 화제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원작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를 각색하여 올린 무대에서 추송웅은 원숭이 분장을 하며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과 연기를 통해 예술에 허기진 한국의 청년들을 사로잡았었다. 실제로 이 모노드라마는 1977년 8월 20일, 객석이 130석도 안되는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첫 무대에 올라간 이래로 무려 482회나 지속된 공연을 통해 15만 2천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사상최대의 관객을 끌어 모은 무대 역사를 갖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연기와 연출 그리고 기획의 다채로운 재능은 고스란히 딸 추상미에게 이어졌다. 아버지 추송웅이 <빨간 피터의 고백>에서 기획, 제작, 연출, 미술, 연기 등 1인 5역을 해낸 것처럼 딸 추상미 또한 기획과 연기 그리고 연출에 직접 나서는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아버지의 유전자를 작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추상미의 예술 인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을 향한 시선은 방향을 바꿔 북녘 땅 하늘 아래서 고통 받는 어린 아이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나타났다는 북한의 ‘꽃제비들’. 국가의 돌봄은커녕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며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죽어버린 꽃제비들의 모습을 TV에서 본 추상미는 자신의 신앙과 예술이 가야할 방향을 깨닫기 시작했다. 깨달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신앙의 깊이가 더해지면 하나의 또렷한 실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남북 청년 모임인 ‘모자이크 공동체’를 이끌며 탈북청년들과 주일 오후 마다 예배를 드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아버지로 물려받은 예술 유전자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동력으로 신앙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유명 배우가 신앙을 갖게 된 뒤 사회를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무도 몰랐던 그 아이들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재주의를 택하여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갑자기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바람에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깊은 감정의 우물로부터 눈물을 솟구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며 마침내 과거의 사진을 들춰내는 등의 일련의 작업은 일반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따랐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있다면 감독은 연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사건의 관찰자이며 또한 참여자로 등장한다. 즉 사건을 소개하고 편집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겪었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행위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관객을 위한 영화인 동시에 자신을 위한 영화가 되도록 만들었다.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1천5백 명에 이르는 전쟁고아들이 북한으로부터 소련을 거쳐 동유럽 폴란드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몸과 마음에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은 채 폴란드 바르샤바 외곽의 프와코비치에 도착한 아이들은 학교를 겸한 수용시설에서 1959년 북한으로 송환될 때까지 세상이 알지 못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추상미 감독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시작과 더불어 핵심이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전해주었다. “영화에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이 등장해요. 코모로프스키 전 대통령은 2013월 10월 방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국과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북한 전쟁고아의 교사들 중 한 명이 자신의 어머니였고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쳤다고 해요. 폴란드 교사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살폈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답니다. 정이 많이 들었대요. 그래서 북한 아이들은 폴란드를 떠난 뒤에도 편지를 보내 왔답니다. 그런데 폴란드 교사들도 아픔이 있었어요. 북한 고아들 나이 즈음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거든요. 교사 중엔 전쟁고아도 있었고요.”(국민일보 2018.3.31) 결혼 후 아기를 낳고 키우며 산후우울증도 겪었고 엄마로서의 삶을 사는 감독의 시선은 북한의 전쟁고아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뜻밖에도 관심의 시선을 전쟁고아가 아닌 이들을 돌보았던 폴란드 선생님에게로 향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몰랐던 역사의 슬픈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비극과 슬픔을 위로했던 역사적 존재들을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것은 기독교영화가 추구해야할 가치를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까닭이다. 고통과 비극의 문제 많은 과거 역사를 들추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통해 인간의 만행과 죄성을 낱낱이 드러내어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극 가운데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삶의 희망을 전해주는 존재를 보여주는 일은 쉽지 않다. 대중문화에 있어서 인간의 관심은 빛 보다는 어둠의 과거를 들춰내는데 눈길이 더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내레이션을 통해 직접 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담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희망과 위로가 따뜻하게 빛을 비춰주고 있는 까닭이다. 영화의 두 가지 미덕-치유와 통일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아름다운 것은 두 가지의 현실을 성경적 이해 가운데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상처 입은 자가 어떻게 또 다른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남북의 두 여자가 동행하면서 통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에 적잖은 울림을 준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전쟁고아들(북한이 보내온 아이들이지만 영화는 당시 전선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있었던 점을 생각하여 남한의 아이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을 사랑으로 돌보는 폴란드 선생님에게 초점을 맞춘다. 지금 생존해 있는 전쟁고아들이 있다면 그들을 인터뷰했겠지만 그들의 행적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단지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본 폴란드 선생님들만이 남아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독이 관객을 대신해서 제기한 가장 큰 질문은 생생한 답변으로 돌아온다. 왜 기생충을 한가득 몸속에 지닌 채 전쟁의 상흔으로 뒤범벅이 된 동양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을까? 아이들에게 원장님,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엄마와 아빠로 부르게 하며 먹이고 가르치며 사랑으로 돌보는 폴란드 선생님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의 책 제목이기도 한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에게서 찾을 수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죄악의 상처로부터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자신이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깊이 상처 입은 사람들임을 숨기지 않는다. 북한의 전쟁고아들이 도착하기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폴란드 사람들은 히틀러의 잔혹한 살육으로부터 몸과 마음에 큰 흉터를 갖게 되었었다. 그 깊은 상처들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왜곡되지 않고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기 때문이리라. 또 한가지 영화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뒤쫓는 여정에 추감독 혼자가 아닌 탈북소녀이자 배우를 꿈꾸는 이송을 동행시킨 사실에 우리는 이 영화의 미덕을 얘기할 수 있다. 차마 영화에서 말하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송은 영화를 통해 내면의 상처에 조금씩 새살이 돋는 것을 느낀다. 남한으로 넘어 오기까지 얼마나 큰 시련이 있었는지를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희망이 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통일에 대한 발걸음 바빠진 오늘날 남북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상처가 분노와 적개심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해와 용납을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처 입은 자의 치유가 필요함을 말이다. 탈북자들의 역할이 주목받는 시대가 곧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문화
    • 영화
    2018-10-15
  • [영화] 아파트와 살인 목격자의 침묵을 통한 한국사회 비판
    범죄스릴러물의 역동적 구조 일상생활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가진 조규장 감독이 <그날의 분위기>(2015)와 같은 로맨스장르에서 이번에는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첫 장편영화인 <낙타는 말했다>(2008)를 통해 사회적 성공과는 거리 먼 비루한 인간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았다면 이번에는 한국사회의 집단 이기주의와 보신주의(保身主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평범한 직장인 상훈(이성민)은 새벽에 살려달라는 비명소리를 듣고 다가간 아파트 창문 너머로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범죄현장의 목격자로서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 같은 단순한 일은 그만 살인자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서 어렵게 꼬이기 시작한다. 살인자와 목격자가 서로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게 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영화는 이때 살인자 보다는 목격자의 위치에서 심리를 전개시킨다. 정의로운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살인자의 표적이 되어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 상훈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단순 범죄물이 범죄 심리극으로서 발전하는 과정에 중요한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주체가 겪는 갈등의 성격에 달려있다. 일반적으로 범죄물은 범인과 수사관 그리고 피해자 혹은 피해관계자라는 삼각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의 입장이라면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을 전개시켜서 심리적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 승진에 목을 걸고 있거나 집안의 어려움이 있는 수사관이 범죄자 혹은 범죄자와 연관된 사람들과 모종의 거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이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범죄자의 입장이라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 겪었던 개인적 고통이나 인격모독을 당한 일, 혹은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 등의 과거사를 전개시키면서 범죄자의 심리적 갈등을 표출시킨다. 범죄 피해자를 사건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경우는 가해자의 밀도 있는 관계를 조명시키면서 피해자가 되기까지의 과거사가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피해자는 죽음을 통해 가해자와의 갈등을 해소시키면서 문제를 마무리 하곤 한다. 그런데 목격자가 사건의 주체로 등장하게 될 경우 영화는 철저히 다층적인 심리극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자신과 가족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범죄자나 수사관과의 관계를 저울질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범죄 목격자가 흔히 겪는 심리적 갈등은 거래관계 대상자와의 불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경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경찰이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에서도 오직 한사람의 수사관(김상호)을 제외한 다른 경찰들은 엉뚱한 수사를 하고 있거나 심지어 범죄자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범죄자의 암묵적인 거래 역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범죄자가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범죄자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일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목격자>의 주인공 상훈이 택한 것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이나 범죄자 모두를 불신한 상태에서 스스로 가족을 지키는 쪽이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개인의 신념은 사회에 대한 불신이 클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아파트는 어쩌다 이기적인 공간이 되었을까? 범죄현장 목격자의 심리를 다룬 <목격자>가 관객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이유는 범죄현장이 한국인의 생활공간인 아파트 단지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늘 사람이 다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살인마가 잔인하게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는 영화 속 설정은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관객들 사이에서는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흔히 단절된 공간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관심도 없다. 이사 온 날 떡을 돌리는 풍속이 사라진지 오래고 앞집의 사정이란 다만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엘리베이터나 복도 게시판에 공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쪽지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이웃이 직접 작성하기 보다는 인테리어 업체에서 붙이는 경우가 이제는 태반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소통이 결여되고 이웃공동체로서의 의식이 결여된 생활공간인 아파트가 한국인의 가장 일반화된 생활공간이란 사실이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60.6%인 1038만호에 이른다. 가히 아파트는 한국의 대표하는 주거공간인 셈이다. 일상적인 삶의 중심이자 가족의 거처 공간인 아파트는 성냥갑 혹은 닭장으로 비유되는 독특한 건축구조와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즉 산장이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보트에서 살인사건을 다룰 경우 일상의 공간과는 유리되어 있는 까닭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현실감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일어난 범죄일 경우 현실감은 살아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파트가 범죄를 일으키는 환경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도무지 자기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지독한 개인주의가 팽배해있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는 살인범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관객을 더욱 흥분시키는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기 보다는 아파트값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부녀회장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TV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것이 걱정스럽고 경찰의 탐문수사에 협조를 거부하는 주민들의 행동 속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독한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파트 값을 올려 받기 위해서 부동산중개소와 주민들이 담합을 하는 현실에서 사람의 목숨 보다 중요한 것이 아파트 집값인 것이다. 침묵과 응징 범죄에 침묵했을 때 오히려 범죄자에 쫒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는 영화 <목격자>의 이야기는 이미 사회심리학에서 연구한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 흔히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 불리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은 집단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분산되는 바람에 일에 개입하기 보다는 상관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을 해설해주고 있다. 즉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란 생각으로 방관상태에 머무르고 만다는 얘기다. 영화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방관자들을 응징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폭우가 쏟아지며 아파트 인근에 있는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토사가 아파트 앞으로 밀려오는 장면은 감독이 이웃의 고통에 대해 방관자로 사는 현대인들을 향해 내던지는 일종의 경고장 같은 것이다. 이미 영화 전반부에 주인공을 통해 아파트 축대가 산사태로 무너질 것이 언급되었지만 부녀회장은 집값 외에는 관심이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인공과 범인과의 격투가 벌어진 아파트 뒷산이 연쇄살인범이 사체를 묻어 놓은 장소임이 드러나는 일이다. 아파트로 밀려오는 흙더미 속에 유골들이 드러나는 일은 마치 방관자들을 향해 침묵의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는 ‘내 이웃이 누군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맞아서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진 피해자를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방관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마리아인은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를 나타낸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 문화
    • 영화
    2018-09-10
  • [영화] 최고의 기독교 변증은 용서와 사랑이다
    기독교 변증 영화의 전성기 최근 미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기독교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간증이 아닌 변증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를 둘러싼 세속적 사회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고 기독교영화는 이에 대해서 논리적이며 또한 신앙적으로 방어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즉 기독교 변증영화는 현 시대의 교회를 향한 무신론적이며 세속적인 사회의 공격적 태도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그래도 <신은 죽지 않았다1,2>(2014, 2016)와 <예수는 역사다>(2017)는 기독교변증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1편에서 대학 신입생 조쉬 휘튼(쉐인 하퍼)은 무신론 교수의 철학수업시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라는 교수의 요구에 대해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면서도 또한 지성적인 대응을 함으로써 서구 대학세계에 만연한 무신론적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고, 한편으로 대학캠퍼스에서 크리스천 대학생들이 순교자적 신앙을 요구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모든 권력을 소유한 무신론 교수와 이제 갓 들어온 크리스천 신입생의 대결 구도는 오늘날 기독교가 서구 지성인 사회에서 처해 있는 어려운 형국을 압축해서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신은 죽지 않았다> 2편은 공교육 현장에서 기독교신앙이 처한 위기와 위협적인 상황을 매우 밀도 높게 보여주었다. 공립학교 역사수업시간에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 예수의 사상이 영향을 주었는지를 묻는 학생의 질문에 크리스천 역사교사 그레이스(멜리사 조앤 하트)는 예수가 역사적인 인물, 다시 말해서 기독교 믿음의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성을 근거로 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를 스마트폰으로 녹음한 학생이 공교육의 현장에서 특정 종교를 선전한다는 이유를 들어 학교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크리스천 교사는 실직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통해 영화는 기독교신앙과 공교육과의 갈등 상황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영화 <예수는 역사다>는 언론계에 만연한 무신론적이며 비기독교적 정서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무신론자이며 미국 중부 최대 일간신문인 시카고 트리뷴지의 인정받는 기자 리 스트로벨(마이클 보겔)은 자신의 아내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을 지켜보며 불만을 품게 된다. 객관적 사실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기자생활에 익숙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내가 믿는 기독교는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구시대적 유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트로벨 기자는 특종을 내겠다는 직업정신과 교회에 빼앗긴 아내를 되찾겠다는 사적인 감정이 결합된 가운데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기 위해 예수의 부활이 거짓임을 밝혀내는 일에 착수한다.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다시 <신은 죽지 않았다> 시리즈의 차례가 돌아왔다. 마이클 메이슨 감독의 최신작 <신은 죽지 않았다3:어둠 속의 빛>(God's Not Dead: A Light in Darkness, 2018)은 반기독교적인 미국사회의 정서에 대해 충실한 신앙적 답변을 보여주며 기독교 변증영화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다. <신은 죽지 않았다1,2>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데이브 목사(데이비드 A. R. 화이트)는 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한 150년 전통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담임목사로 등장한다. 전편에서와 달리 이번 영화에서 데이브 목사는 심각한 고난과 갈등에 직면하고 만다. 무신론 분위기가 팽배한 대학의 학생들은 예배당이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것에 불만을 갖고 퇴출되기를 강하게 희망한다. 더군다나 교회에 불만을 가진 대학생 아담 리처드슨(마이크 매닝)은 우발적이긴 하지만 교회에 벽돌을 집어 던져버리는 바람에 지하실에 있던 가스파이프가 터지고 이를 알지 못한 채 지하실에서 전등을 켜던 데이브 목사의 절친 주드(벤자민 오치엥) 목사는 가스 폭발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가슴 아픈 사건을 맞이하고 만다. 불타버린 교회를 바라보는 대학생들은 이 기회에 교회가 대학에서 떠나기를 바라지만 데이브 목사와 크리스천 학생들은 어떻게든 교회를 지키기 위해 격앙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영화는 사회적 갈등이 있다면 이를 법정에서 푸는 일반적인 미국사회의 풍속으로부터 시작한다. 누가 교회에 불을 냈는지 알지 못한 채 데이브 목사와 학교 당국 그리고 학생들 간의 대결은 사뭇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데이브 목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변호사인 자신의 동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지 신앙적 갈등 또한 겪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갈등을 푸는 방법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교회와 학생 그리고 학교당국과의 대치 국면을 해결하는 방안은 교회를 내쫓으려는 학생들 머리 위로 천둥벼락이 내리기를 기도하는데 있지 않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렇다고 타락한 학교당국의 처사에 낙담만 하는 것으로 끝내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제 해결방안은 캠퍼스 내 교회가 있다면 학생들이 교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학생들을 위한 교회의 존재목적을 다시 한 번 정립하는 일이다. 무신론자는 기독교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신론자들이 원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무신론자로 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 즉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가치관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교회에 벽돌을 던진 리처드슨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데이브 목사의 휴대폰에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리처드슨이 기대했던 것은 데이브 목사를 통해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용서의 모습이 실현되는 것이었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친구가 죽고 예배당이 불타 버린 현실에서도 과연 목사는 문제 많은 자신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의 예배당이 세속적인 사회에서 그 가치를 존중받을 수는 없음을 영화는 은연중 보여준다. 교회의 가치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교회가 세상과 똑 같이 자신의 이권만을 주장하고 전도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무시해 버린다면 교회의 본래 역할을 감당하기란 결코 쉬울 수 없는 일이다. 데이브 목사는 불타버린 예배당을 포기하는 대신 대학 당국의 지원을 받아 외곽에 새로운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 약속을 받는다. 예배당이 있던 자리에는 학생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는 학생회관이 들어서게 되고 그 안에 학생들의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센터 설립 또한 약속을 받는다.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학생들과 대학당국의 요구에 교회가 무릎 꿇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이 원하고 필요에 응답하며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은 오히려 학생들을 감동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왜냐하면 세상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자신들처럼 스스로의 주장과 이익을 싸우고 상대방을 뭉개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과는 뭔가 다른 행동을 원하는 기대감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현장에서는 세상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교회는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기독교 변증적 성격을 지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메시지는 세상 가치에 대한 예수님의 역설에 있다. 현대의 크리스천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서 그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을 대어주고, 고소당해서 속옷을 빼앗길 때 겉옷까지도 내어주고,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강요받을 때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해주는 일(마5:39-41)을 요구받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 위하여 기도할 것(마5:44)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일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문화
    • 영화
    2018-08-13
  • [영화] 할리우드의 공룡사랑에 감춰진 인간복제
    할리우드 영화는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 영화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의 결합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들이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부터 영화는 돈과 컴퓨터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의 경연장이 되었다. 요즘 한창 제작 붐을 타고 있는 ‘어벤져스 시리즈’와 같은 SF액션물의 경우 평균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높은 제작비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천정부지로 오른 스타들의 몸값도 크게 한몫 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최신작 <스카이 스크래퍼>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은 6,450만 달러(한화 약 720억 원)의 출연료를 받아 화제가 되었지만, 이내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어벤저스3> 출연료로 1억 달러(약 1,120억 원)를 받은 것이 밝혀지면서 2위로 물러나야 했다. <어벤저스3>의 총예산은 약 3억 4000만 달러로 할리우드가 스타에 지불하는 비용만큼이나 엄청난 돈을 실제작비에 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든 영화는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2011)로 3백억 원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와 더불어 컴퓨터 그래픽은 할리우드의 제작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다름 아니다.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대형 스타가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추정 제작비만 약 1억7천만 달러에 달한다. 고생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제작된 공룡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가상의 공룡들은 모두 컴퓨터 그래픽이 탄생시킨 값비싼 상상의 결과물들이다. 공룡의 피부조직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묘사되는 영상을 만드는 일과 공룡 특유의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들이는 인건비와 시스템사용 비용은 할리우드가 대형 영화를 제작하는데 감수해야할 내역인 것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강점은 또 있다. 최신 과학 정보들을 재빠르게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할리우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매우 민감하다. 즉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이 최신 과학정보를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개연성은 당장 실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 아무리 멋진 화면을 전개시키더라도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관객을 설득할 만한 논리구조를 갖지 못한 저급한 영화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전편에 이어서 유전자 합성을 통해 탄생한 인도미누스 렉스(Indominus rex)와 벨로시랩터(Velociraptor)의 유전자를 재교배하여 탄생한 인도랩터(Indorapto)라는 새로운 종을 보여주며 관객 설득에 나서고 있다. 전편인 <쥬라기 월드>(2015)에서 인도미누스 렉스는 가장 거대한 공룡으로 알려진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를 기본으로 갖가지 공룡들의 장점을 결합시켜 만든 무서운 공룡으로 탄생했었는데, 후속편에서는 여기에 가장 잔혹하고 교활한 공룡인 벨로시렙터의 유전자를 결합시켜서 더욱 공격적인 공룡을 만들어냈다. 특정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상품성 있는 공룡을 만드는 일이 관객에게 그럴 듯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현시대의 유전자공학 기술의 발전을 재빨리 흡수했기 때문이다. 2013년 미국의 생화학자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가 발견하여 유전공학의 혁명으로 불리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CRISPR/Cas9)’는 <쥬라기 월드>에서 보여준 유전자 조작을 통한 보다 강력한 공룡을 만들 수 있는 과학적 개연성으로 작용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특정 유전자만을 정밀하게 조준해서 편집함으로써 유전병이나 난치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의료기술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얼음에 오랜 시간 갇혀있었던 매머드 (mammoth)의 온전한 사체를 가지고 멸종된 매머드를 복원시키는 일을 진행하는데 이 유전자가위를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현재 상용화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벌레에 강하면서도 맛도 좋고 빛깔도 좋은 과일품종을 개량하는 일로부터 크고 맛있고 빨리 성장하는 돼지(영화 ‘옥자’에 나오는 유전자 변형 돼지처럼)를 생산해 내는 일 등에 손쉽게 적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최첨단 기술이다. 그런 까닭에 공룡의 유전자를 편집하여 새로운 공룡을 만든다는 <쥬라기 월드>의 설정은 공룡의 피를 빨아 먹은 채 호박 속에 갇힌 모기로부터 공룡의 유전자를 채득하여 공룡을 복원시킨다는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서 제시된 설정보다 훨씬 개연성이 높은 편이다. 인간복제의 문제를 감추는 방법 할리우드 영화가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메시지를 다루는 방법은 이름 하여 ‘소매치기 수법(The method of pickpockets)’이다. 관객들이 관심을 둘 만한 사항을 부각시키면서 은근슬쩍 관객의 저항이 따를 만한 메시지를 슬쩍 집어넣는 방식을 말한다. 소매치기가 지하철에 탄 승객의 안쪽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몰래 빼내려할 때 그는 절대 혼자 행동하는 법이 없다. 바람잡이를 동원하여 승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순간 다른 쪽에 있던 동료 소매치기가 지갑을 터는 방식이다. 정말 중요한 것으로부터 생각을 빼앗아 다른 것에 시선을 모으도록 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매치기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채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지갑을 털린 사람의 후회는 이미 때가 늦을 수밖에 없다. <쥬라기 월드:폴른 킹덤>은 ‘인간 복제’라는 사회의 안주머니에 깊이 들어가 있는 지갑이 털려도 관객들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게 만드는 바람에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비껴간 영화다. 이 영화에서 소매치기 수법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의 탐욕을 부각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보호 차원에서 공룡의 생명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사나운 공룡들에 대한 책임은 모두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돈에 대한 탐욕은 보다 사나운 공룡을 만들어 전투에 참가시키려는 군사용 공룡제작에까지 눈을 돌리게 만든다. 관객들의 마음에 세상에서 사라져야할 대상은 공룡이 아니라 돈이 된다면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요하게 공룡에 몰입하는 탐욕에 물든 자본가들인 셈이다. 또 한 가지는 생명이 있는 애완동물을 아끼듯 공룡에 대한 애정을 부각시킴으로서 인간복제의 위험성에 눈을 감고 만다. <쥬라기 월드>를 만든 투자자의 손녀는 공룡복제기술로 탄생한 복제인간 소녀 메이지(이사벨라 서먼)다. 영화에서는 어린 나이에 죽은 손녀딸이 복제된 인간임을 직접 공표하기 보다는 그녀를 키운 보모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사실과 그녀의 젊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비춰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복제인간 메이지는 자신과 같이 유전자 기술을 통해 탄생한 공룡들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난동을 부리는 사나운 공룡들을 가스로 죽이려는 순간에 메이지는 그 공룡들을 인간세계에 풀어 놓았다. “다 살아있는 생명이잖아요.” 그녀의 멘트는 생명의 귀중함을 뜻하는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리지만 그로 인해 복제생명체도 생명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즉 인간의 탐욕에 따라 이미 모든 것을 저질로 놓고서는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유전자복제와 변형이 가져올 수 있는 비윤리적인 문제부터 먼저 얘기를 해야 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세계관 제니퍼 다우드나는 그녀의 동료 새뮤얼 스턴버그와 함께 쓴 책 <크리스퍼가 온다:진화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서 유전자 편집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가 가져올 희망적인 미래를 낙관하기 보다는 두려운 미래를 생각하며 의료윤리 혹은 기술윤리의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그리고 생각한 대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생명체라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퍼 유전가위 기술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드는 신체부위만을 조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자신 만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맞춤형 태아를 출산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가 시도했던 우생학적 인간 실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창3:3-5)에 도전하고 있음을 감추고 있다. 기술의 혁신적인 진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세계관이다. 어떠한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인간 사회의 현실화된 재앙의 예고편일 수도 있고, 잠깐의 즐거움을 주는 여흥으로 남을 수도 있다. 영화의 태도는 애매하다. 말콤 박사를 통해 유전자 변형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복제기술이야말로 앞으로 할리우드가 애용해야 할 영화의 소재이자 다가오는 현실임을 긍정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전자변형기술을 통한 인간조작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그리스도인 태도가 더욱 더 중요한 이유이다.
    • 문화
    • 영화
    2018-07-06
  • [영화]아버지를 용서하니 찬양이 됩니다 -어윈 형제 감독의 ‘아이 캔 온리 이매진’-
    신앙과 음악을 하나로 엮다 인기 높은 가수의 명곡을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며 그 노래에 담긴 사연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비앙 로즈>(2007)는 프랑스의 샹송 가수 에디트 삐아프(Edith Piaf)가 당신 신인이었던 이탈리아의 배우 이브 몽탕과 사랑에 빠져있을 때 불렀던 노래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곡은 불과 15분 만에 만들어져서 에디트 삐아프의 열정 넘치는 노래의 이유가 사랑에 있음을 엿보게 한다. 영화 <라밤바>(La Bamba, 1988) 또한 18세 나이로 요절한 가수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의 명곡 ‘라밤바’를 제목으로 삼아 가수의 짧은 삶과 사랑을 묘사했다. 한국 영화 <사의 찬미>(1991)는 일제 강점기 하에서 한국 최초 여성 성악가로 활약한 윤심덕과 그의 애인 김우진의 사랑을 토대로 만든 작품으로 윤심덕의 애절한 노래인 ‘사의 찬미’를 제목으로 사용한 영화다. 이번에는 기독교 신앙을 노래하는 가수의 차례다. 미국의 유명 크리스천 록 밴드인 ‘머시미(MercyMe)’의 리드 보컬인 바트 밀라드(Bart Millard)의 삶과 신앙을 다룬 영화 <아이 캔 온리 이매진>(I can only imagine, 2018)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기성세대에게는 다소 낯선 노래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은 1999년 ‘워십 프로젝트(The Worship Project)’ 앨범에 처음 수록된 이후로 머시미의 다양한 음반을 통해 거듭 발매되면서 2003년과 2004년에는 기독교 계통의 방송뿐만 아니라 ‘Top 40’같은 일반 방송의 인기 차트에서도 오랜 기간 수위를 기록하면서 미국에서는 라디오를 켜면 이 노래가 나온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많이 방송을 탄 노래로 기록되고 있다. 기독교음반으로는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250만장의 음반 판매기록을 달성하면서 2002년에는 기독교 최고의 음악상이라 할 수 있는 ‘도브 어워드(Dove Award)’의 ‘올해의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을 노래한 바트 밀라드의 숨은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미국 크리스천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 3월 16일 미국에서 첫 개봉 당시부터 박스 오피스 3위에 올라 첫 주에만 1천7백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함으로써 7백만 달러로 추정되는 제작비를 불과 한주 만에 회수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6월 첫째 주말까지의 총수익이 8천 3백만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기독교영화 사상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이후로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로 남게 되었다. 크리스천 가수의 찬양곡에 얽힌 사연을 영화화 한 만큼 제작 또한 기독교영화의 단골 출연 배우가 세운 ‘케빈 다우니스 프로덕션(Kevin Downes Production)이 맡았다. 내용에서부터 감독 및 제작자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크리스천에 의한 크리스천을 위한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케빈 다우니스는 우리나라에는 DVD로만 출시됐지만 미국 크리스천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받은 영화 <우드론>(Woodlawn, 2015)이나 <커레이져스:용기와 구원>(Courageous, 2011)등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중견 배우이다. 그러나 유명 크리스천 가수의 노래제목이 영화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지 노래가 유명세를 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에 담긴 사연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신앙적 감동과 결합되어 있을 때 기독교 관객을 극장으로 모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은 신앙과 음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기독교 영화의 순수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의 구원 이 영화는 바트 밀라드의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의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는 바트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버지의 폭력이 일으키는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찬양사역자로서 성공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에 있음을 보여준다. 바트의 아버지 아서(데니스 퀘이드)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잦다.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이유만으로 권위적이며 자신의 뜻대로 가족을 움직이려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폭력을 행사한다. 바트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게 되고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된 바트는 오갈 데 없는 상황 가운데서 아버지와의 불편한 동거가운데 성장하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이 받게 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 이미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부정적 자아나 부정적 대인관계의 경향을 보일 수 있으며, 결혼 후 낳은 자녀에 대해서 심지어 자신이 과거 아버지에게 당한 것과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흔히 말하는 폭력의 대물림 현상을 빚기도 한다. 특히 역사가들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자란 사람이 인류 역사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예로 히틀러와 스탈린을 들기도 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무공무원이었지만 술꾼에다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며 흉폭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는 구두 제화공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을 이루었지만 술에 취하면 아내와 자식들을 구타하는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술주정뱅이였던 그는 스탈린이 열한 살 때 남과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비록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지만 폭력적인 아버지의 독재에 대한 반감을 가지며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의 신앙적 가치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바트가 어떻게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데 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기 전 바트를 교회가 주관하는 캠프에 맡기고 그곳에서 바트는 청소년 목회자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배우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 가운데서 불태우면서 그의 영혼은 하나님 손에 붙들린바 된 인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부재 혹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어린 학생들이 받게 될 부정적 영향을 신앙교육이 어떻게 바로잡아주며 건강한 성장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당장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린 청소년시기에 예수님의 사랑의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만지게 돕는 일은 장래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까닭이다. 마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슬그머니 옷 가에 손을 댔을 때 일어나는 놀라운 결과(눅8:43-44)처럼 말이다. 노래보다 용서가 먼저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의 가장 흥미 있는 요소는 찬양사역자로서의 음악적 성공이 바트의 재능이나 기술의 향상을 통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아버지와의 내적 갈등이 해결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바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 본 유명 프로듀서인 브리켈(트레이스 애드킨스)로부터 자신이 노래가 가진 결정적인 문제점을 지적받는다. 브리켈:가끔 자넨 무대 위에서 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애. 흉내 내는 거지. 그럼 믿음이 안 생겨. 근데 가끔은 진짜가 보여. 근데 그게 나타나면 (자네는) 겁을 먹는데 그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지. 그래서 자넨 알다가도 모르겠네. 하나 묻지 자네는 뭘 피해 도망가는 건가? 바트:아버지요. 저를... 브리켈:때리셨군. 그런 속내는 못 감춰. 바트:그걸 안고서 감내하며 살아야 해요. 언제까지나 브리켈:그럼 그걸 곡으로 써. 도망치는 건 관두고. 그 고통을 영감으로 승화시키라구. 그럼 사람들이 믿어줄 뭔가가 탄생하겠지. 헌데 그러려면 두려움에 맞서야 해.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상처와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영감있는 노래를 부르기란 쉽지 않았다. 바트는 췌장암에 걸려 죽어 가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는 찬양사역자의 길을 가는 아들을 응원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밴드에 복귀하는 버스 안에서 순식간에 써내려간 찬양이 바로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파를 탄 노래는 상처를 준 아버지를 용서한 후 창작되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어렵다면 사람들과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일은 없는지 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삶을 실현시켜보자.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인생이라는 명곡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 문화
    • 영화
    2018-06-08
  • [영화] 선교의 야성을 회복하라
    정글 속 아버지 같은 선교사 금년에도 선교다큐멘터리 영화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2009년과 2017년 사이에 국내에서 개봉된 기독교 극영화는 단지 4편에 불과했지만, 같은 시기에 무려 26편의 기독교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되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16편은 선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선교사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들의 선교사역이 스크린 위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개봉한 이성관 감독의 영화 <파파 오랑후탄>(Papa Oranghutan)은 선교 다큐멘터리의 역사적인 흐름의 한끝을 잇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파파 오랑후탄>은 말레이지아의 밀림 속 우루깜바 마을의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박철현 선교사의 행적을 여러 모양으로 담은 헌신적인 사랑의 얘기다. 말레이시아어로 ‘파파’는 아버지, ‘오랑’은 사람, ‘후탄’은 정글 숲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어서 합치면 ‘정글의 아버지’라는 뜻이 된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원시성과 원주민의 인간애이며, 아울러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선교사의 신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야성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현대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야생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한편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선교현장으로 달려가는 박철현 선교사의 모습에는 초대교회로부터 비롯된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인의 야성적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오직 뜨거운 가슴을 안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마침내 사랑의 고지를 점령하는 신앙의 전사(戰士)의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부분은 박철현 선교사의 말레이시아 밀림 속의 선교사역현장의 과거와 현재로 이루어져있고, 뒷부분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박철현 선교사의 고뇌와 다시 선교현장으로 돌아가 죽기를 다짐하는 신앙의 결단이 펼쳐진다. <파파 오랑후탄>은 지금까지 제작된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의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원시적 이미지나 경제적으로 낙후된 환경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열정과 고통을 드러내며, 결정적으로 믿음 안에서 갖게 되는 희망의 메시지로 결론을 맺는 방식이다. 선교현장의 기적을 지켜보다 <파파 오랑후탄>은 기존의 선교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외형적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에 재연 드라마를 삽입하는 복합 구성 양식을 갖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박철현 선교사의 선교현장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함께 사역하는 현지 목회자의 인터뷰와 교회 개척 상황이 펼쳐지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후 주술적 신앙으로부터 벗어난 현지인들의 생활과 예배 모습이 담는 것은 여느 선교다큐멘터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과거 박철현 선교사가 원주민으로 부터 당했던 핍박의 상황과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일은 인터뷰나 내레이션이 아닌 연기자를 통한 재연 드라마로 묘사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속에 재연 드라마를 삽입하는 방식은 영화는 시각적 매체의 특성을 살린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과거의 사실을 보다 깊이 그리고 사실적으로 인식시키는 한편으로 정서적인 면에서 보다 강한 울림을 일으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현재는 과거의 사실이나 현장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연기자와 극본 그리고 드라마 전문 연출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제작비와 시간이 요구되는 까닭에 선교 다큐멘터리 감독이 선뜻 선호하는 제작 방법은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목격하도록 돕고 있는 점이다. 식인종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부족이 한 사람의 선교사의 헌신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일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지만, 영화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치유과정을 보여주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는 우르깜바 마을에서 박철현 선교사를 가장 핍박했던 까심에게 임한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이다. 그는 박선교사를 죽이려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사람이지만 폐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박선교사의 기도와 간구를 통해 살아났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함한 까심은 놀랍게도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박철현 선교사와 함께 현지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또 다른 기적의 사건은 박철현 선교사 자신에게서 일어났다. 한국에서 대장암 말기를 진단받고 병원에 누워있던 그가 선택한 곳은 말레이시아의 밀림 속 이었다. 원주민 곁으로 돌아간 그는 뜻밖에도 이제는 신앙인으로 변한 원주민들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서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기도와 사랑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은 선교현장에서 기적을 일상적인 일처럼 만들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사실적 표현을 중심으로 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목격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 신앙전파에 영화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아닐 수 없다. 가성비 높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나라의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메시지를 담아왔다. 교회와 선교회 그리고 아는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제작비는 현지제작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부족하고, 유명 기독교 연예인을 출연시켜 진행하는 내레이션은 재능기부로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일반 상업영화들이 기획사(대형 영화사는 자체 기획과 제작을 함께 맡기도 한다)를 중심으로 투자자들을 끌어 모아 상영 후 얻게 된 이익을 나누는 구조와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기획의 단계부터 흥행에 따른 결과로 이익을 낼 것을 기대하고 제작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수익과 상관없이 될 수 있는 한 많은 관객들이 볼 수 있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상업영화 제작자들의 희망사항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일반영화 제작자들에게 많은 관객은 곧 흥행수익을 뜻하지만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들에게 많은 관객은 하나님 말씀과 기독교 신앙이 보다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파파 오랑후탄>은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 빛을 본 다른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과 같은 제작 이력을 갖고 있다.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로 향할 때 출발한 제작진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이성관 감독과 주인공 박철현 선교사의 대역을 연기한 배우 염광호 이렇게 두 사람이다. 산 속을 헤치고 강물을 건너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카메라와 삼각대 등의 촬영 장비를 직접 손에 들고 현지 촬영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상업영화 제작자들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어려운 여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진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일이다. 마침 현지에서 단기사역을 하고 있던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백방으로 돕는 바람에 분장과 의상, 섭외 심지어 오디오 담당 스탭을 꾸릴 수 있었다. 현지를 잘 아는 선교사들은 섭외를 맡았고, 대역 연기를 담당할 현지 연기자들을 찾는 일도 현지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한 과제 <파파 오랑후탄>은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독립영화의 성격을 갖는다. 즉 흥행성 높은 대중영화와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상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 한다는 점에서 선교 다큐멘터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관객으로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상을 통한 복음증거의 현장에 함께 하는 것, 즉 기독교 영화를 꾸준히 소비하는 일이다. 기독교 영화가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경제논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즉 소비가 되는 곳에 생산이 있기 마련이다.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기독교인들이 몰리면 극장주들은 자발적으로 이 영화들을 수용할 것이다. 극장은 많은 관객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에 일차적 관심이 있음을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복음전파라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 영화를 만드는데만 열정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극장이 추구하는 경제논리를 염두해 두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기독교 다큐멘터리를 보기 위해 극장에 달려가는 수고와 기쁨이 있어야 한다.
    • 문화
    • 영화
    2018-05-08
  • [영화]삼손, 신앙의 영웅이 가야할 길을 묻다
    기름기를 뺀 영화 ‘삼손’ <십계>와 <벤허>를 기독교영화의 진수로 여기는 기성세대에게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이미지들은 모두 세실 드밀(Cecil B. DeMille)감독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1949)로부터 나왔다. 드밀 감독은 근육질을 뽐내는 괴력의 사나이 삼손(빅터 마추어)을 히브리민족의 신앙과 전통을 어기고 이방인 블레셋족의 아름다운 처녀 데릴라(헤디 라마)와 사랑에 빠져 몰락하고 마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미국 개봉 연도 흥행순위 1위를 기록할 만큼 크게 성공했고 그 영향력은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손이 그리는 사랑과 모험을 거대한 화면에 담았으니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신분을 초월한 남녀 간의 사랑과 사자를 찢어죽이고 블레셋 사람을 몰살하는 액션장면은 자칫 선정성과 폭력성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인간이 저지른 죄와 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란 성경의 기본 배경덕분에 윤리적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은 한마디로 대중이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대중영화로서 충실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과 데릴라>의 힘이 너무 큰 것인지 지금까지 그에 필적할 만한 ‘삼손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일부 교회 교육용으로 나온 DVD나 TV용 드라마로 연출된 작품들이 있었지만 1949년작 <삼손과 데릴라>에 필적할 만한 영화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영화 <삼손>이 2018년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했다. 나름 그 이유가 있다. 최신 영화 <삼손>이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 점은 제목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러난다. 성경이 주목한 인물은 어디까지나 ‘삼손’이지 ‘데릴라’가 아니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세실 드밀 감독 이후 삼손은 항상 데릴라와 짝지은 캐릭터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삼손의 타락과 비극적 인생에 데릴라는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사사기에 언급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삼손이다. 드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데릴라를 삼손과 대등한 비중을 부여하며 연출했다. 삼손의 고뇌만큼이나 데릴라의 유혹은 강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온 삼손 관련 영화들 가운데는 바로 데릴라의 유혹에 연출 역량을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도 있었다.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새로운 영화 <삼손>은 데릴라의 선정적 유혹을 걷어내고 삼손에게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삼손이 놀라운 힘으로 벌이는 살육장면 역시 성경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한도 내에서 폭력이 절제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일반대중이 기대했던 화려하고 스펙터클하며 더 나아가 선정적인 장면은 쏙 빠진 기독교 신앙영화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삼손>은 국내개봉을 앞두고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는 <삼손>을 만든 제작사의 면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삼손>을 제작한 퓨어 플릭스(Pure Flix Entertainment)는 미국에서 기독교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기독교영화전문제작사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4년간 개봉된 퓨어 플릭스의 영화만 해도 <신은 죽지 않았다1,2>를 비롯해서 <예수는 역사다>, <신을 믿습니까> 등 이미 네 편에 달한다. 퓨어 플릭스가 미국에서 제작‧배급한 영화 타이틀이 수십편에 이른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퓨어 플릭스 영화들은 계속 대한민국에 수입 개봉될 가능성이 높다. 퓨어 플릭스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화 사역(MOVIE MINISTRY)’에 대한 사명선언문을 붙여놓고 있다. ‘우리의 열정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영화를 창작하는 것입니다(Our passion is to create films that impact our culture for Christ)’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세속적이며 상업적인 성공과 달리 기독교 신앙영화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퓨어플릭스의 사명선언문은 <삼손>이 왜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삼손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영화 <삼손>은 삼손과 데릴라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드밀 감독의 영화와는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 삼손과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과 그의 패역한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과의 대결 구도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것은 삼손의 정체성을 데릴라와의 관계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성경적 충실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과 적어도 90% 정도는 일치하고 있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삼손과 우상 다곤(Dagon)을 섬기는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묘사되며, 그 내면에는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신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블레셋 왕 발렉이 우상 다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언급을 통해 다곤신이 진정한 신이 아닌 단지 통치의 수단에 불과한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이 영화에는 등장하고 있다.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은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저들에겐 상징이자 평민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지만 우리에겐 통제의 수단이야. 내가 다곤이고 너도 다곤이 될 수 있어.” 우상숭배를 통해 백성을 통제하는 한편으로 스스로가 우상이 되고자 하는 과거 권력자의 속성을 한순간에 알아챌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또한 삼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삼손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나실인으로 지켜야할 약속을 소홀히 여긴데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나실인이란(민6:1-21) 구별된 자의 의미로 삼손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이 약속들을 모두 어기는 죄에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는 흔히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카락이 잘렸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만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일로써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삼손이 힘도 쓰지 못하고 블레셋에 붙잡혀간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 채 죄의 구렁텅이 속으로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삼손이 긴 머리카락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운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감동되어 있을 때 그 힘이 나타났을 뿐이다. 즉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을 때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었고(삿14:6),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아스굴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일 수 있었다(삿14:19). 삼손의 힘의 근원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 삼손은 말한다. “벌써 두 개를 어겼는데 머리마저 자르면 내 힘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 2018년 영화 <삼손>은 예술적이거나 대중적 의미보다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에게 신앙적 영웅의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근본적으로 사사기의 문화적 상황은 지금의 포스트모던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이를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이 보다 더 사사기의 주제를 압축할 수 있는 구절은 없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같은 이방 족속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도움을 호소하며 울부짖으면 그 때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늘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 잡아주고 인도할 지도자가 부재했던 까닭이다. 예술과 패션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맞으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익숙하다. 지나친 상대주의는 진리마저도 개인의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재단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신앙과 전통 그리고 도덕적 규범은 무시당하기 쉽다. 현대인들은 삼손의 힘이 넘치는 외모에는 눈길을 주지만 그 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며 관심조차 없다. 누군가 삼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도 그것은 개인의 사소한 의견으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영화 <삼손>의 한국어 포스터에는 ‘주여 당신의 힘을 주소서!’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삼손이 힘이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간구했던 표현이다. 어벤져스와 같은 만화적 영웅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영화들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영웅의 일갈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
    • 문화
    • 영화
    2018-04-09
  • [영화] 막달라 마리아를 새롭게 조명하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포스터 막달라 마리아를 왜곡시킨 역사와 영화 2018년 부활절을 앞두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막달라 마리아-부활 의 증 인 >(Mary Magdalene, 2017)이 개봉예정이다. 영화 <라이언>(Lion, 2016)을 통해 인도출신 입양아가 동생을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미국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한 가스 데이비스 감독이 연출을 맡아 작품에 대한 완성도를 높였다. 거기다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 역에 연기파 배우인 루니 마라, 예수 역에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 역을 맡아 유명해진 호아킨 피닉스를 등용시켜서 잔뜩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과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의 조합이 성경의 인물과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TV가아닌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된 성서영화(Bible Cinema, 기독교신앙의 증진이나 전파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다룬 영화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영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된 성서영화들은 모세의 출애굽사건(엑소더스:신들과 왕들, 2014)이나 노아의 홍수 사건(노아, 2014)과 같이 일반대중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건들을 다루거나, 예수의 극적인 삶을(부활, 2016) 보여준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과거 성서영화의 전통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일로서 무성영화 시대에 할리우드를 주도했던 세신 데 밀(CecilB. DeMille) 감독의 영화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즉 성서영화의 세계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지금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시킨 영화들의 핵심문제는 사실 소외에 있지 않고 왜곡에 있다고 보아야한다. 성경과 다른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이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영화는 잘 못 반영했거나, 교회가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영화는 그대로 실어 날랐다고 볼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과는 다른 세 가지의 모습으로 비춰졌었다. 첫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등장시킨 잘못을 저질렀다.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을 마틴 스콜세지감독이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출신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성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나 ‘죄인’으로 언급된 일은 없다. 누가복음 8장 2절과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는단지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 내준여성’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되게 한결정적 원인은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40~604)의 실언 때문이다. 그는 591년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무명의 죄 많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고 동시에 그녀를 창녀로 설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가톨릭은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이르기 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하게 되었다. 1969년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철회했다. 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은 여성과(마26:6-7) 동일시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그레고리우스1세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은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이를 참회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현재 한국의 개신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에서 조차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여성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가장 파격적인 표현으로 예수의 연인 혹은 예수의 부인으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론 하워드 감독의 <다빈치 코드>(2006)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속에서 예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제자로 해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와 결혼한 후 낳은 자녀의 후손이 프랑스로 건너가 메로빙거왕조를 이루었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쏟아냈었다.기독교 역사와 현대문화 할 것 없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호기심은 교회 안팎으로 늘 있어왔지만 성경의 시각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제자의 위치로 복권시킨 영화<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증인>은 성경에언급된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세 가지의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첫째는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 배경과 예수님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주는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에 인접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미혼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눅8:2)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정혼을 거부한 가운데 미친 상태에 놓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에는 일곱 귀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들렸는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다. 일곱 귀신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당시 사회 정황으로 봤을 때 딸이 부모의 정혼을 거부하는 일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인식될 가능성은 없지 않다는 점에서 감독의 묘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혀 근거없는 연출이라고 볼 수는 없다.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 및 열두 제자들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적의 현장을 경험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던 유일한 여성이 아니라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했고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눅8:3) 역할을 수행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남성 제자들과 대비시키기 시작한다.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견제하며, 남성 제자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긴다.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혁명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의 죄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거듭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비록 여성이지만 예수님을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와 달리 진정한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일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셋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목격자이며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영화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본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 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덤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킨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발견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친밀성이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무덤에 온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된 반면에 부활한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단독으로 만난 여성제자로서의 면모는 매우 강조된다. 그것은 주변에 발각될 경우 큰 화를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제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자를 강조하다 일으킨 실수 복음주의 기독교권에서 성서영화는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곤했다. 하나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를 보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상상력의 개입여부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면서 비성경적이거나 반성경적인 묘사나 언급은 아무리 뛰어난 주제의식과 연출력을 보여주더라도 교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경의 문구를 단지 시각적으로만 펼치는 태도 역시 기독교문화가 지니는 예술적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기독교 영화 제작의 어려움은 여기서 드러난다. 성경과도 부합하면서 이 시대를 사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시각적 연출력을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연출은 마치 한편의 시를 쓰듯 축약과 상징을 쓰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핵심적인 대사와 장면을 통해 참사랑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고통 앞에 선 인간의 면모를 잘 묘사하고 있다.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 장면이다. 이 성만찬은 12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한 자리로서(마26:20) 그 인원이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성찬식 장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인원구성을 감독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막달라 마리아를 성찬식 장면에 집어넣은 것은 결국 한 가지 이유 밖에는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여성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시각에 달려있는 듯하다.
    • 문화
    • 영화
    2018-03-12
  • [영화] 디즈니, 내세를 탐하다
    ▲ 영화 '코코' 포스터 디즈니가 말하는 ‘좋은 죽음’ 디즈니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자회사인 픽사(Pixar Animation Studio)가 만든 애니메이션 <코코>(Coco)는 뮤지션을 꿈꾸는 어린 소년 미구엘이 죽음의 세계에서 조상(고조할아버지)을 만나 음악을 금지한 가족의 내력을 파헤치는 낭만적 모험을 그리고 있다. 온 가족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디즈니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증명되기라도 하듯 <코코>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밝고 부드러우며 노래와 춤이 있는 흥겨운 축제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코코>가 묘사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배경은 멕시코의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로부터 가져왔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망자의 날’은 매년 10월 31일에서 11월 2일 까지 벌어지는 멕시코의 국민축제의 날로써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그들의 묘소를 방문하는 행사를 벌인다. ‘망자의 날’은 고대 아즈텍문명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식과 결합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망자의 날’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나올 만큼 대중화된 데에는 죽은 자들이 ‘망자의 날’에는 저승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의 무덤을 방문한다는 생각과 할로윈 데이를 즐기는 대중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는 가톨릭이 지키는 모든 성인 대축일(Sollemnitas Omnium Sanctorum) 전날로 가톨릭의 중요한 기념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며,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지켜지고 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할로윈 데이와 ‘망자의 날’이 연계되면서 국가적 축제일로 변화한 것은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신자인 멕시코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묘사한 <코코>의 장점은 죽음을 가족의 사랑과 연계시킴으로써 ‘좋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데 있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지낸 최준식 교수가 언급했듯이 한국에서 죽음은 외면되고 있고 부정적이며 회피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며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놀라운 것은 부활과 천국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조차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는 현실에서 <코코>는 가족의 사랑을 연계시키면서 죽음을 삶 가까이 끌어들인다. 특히 가족이 죽은 이를 기억할 수 있어야 저승으로부터 죽은 영혼이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가족의 가치가 점점 퇴색해가는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은 <코코>가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멕시코인들의 전통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죽은 조상과 현실 세계의 가족과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제사를 통해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기억하는 한국의 유교전통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 보는 만화영화 치고는 달리 죽음과 내세를 묘사하는 심도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코>는 한국에서 277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코코>를 의미있게 바라보는 관객이 발견한 것은 ‘좋은 죽음’이다. ‘좋은 죽음’은 살아있을 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죽음’, ‘좋은 죽음’일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디즈니의 내세관에 딴지를 걸다 가족과의 사랑이란 보편적 주제를 죽음을 통해 언급한 <코코>의 놀라운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내세관은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판타지 오락영화인 까닭에 굳이 기독교의 세계관을 대입하는 일이 필요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만큼 허구와 진실을 분별하지 않은 채 영화관 밖을 나선다면 영화가 끼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코코>는 기독교의 내세관이 갖고 있는 핵심 사항인 심판과 지옥에 대한 묘사를 회피하고 있다. <코코>가 보여주는 죽음의 세계는 해골 모양을 한 영혼들이 세상에서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를 독살한 음악가조차도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도록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존재도 그리고 최소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따른 심판도 형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히9:27)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심판과 형벌에 따른 지옥에 대한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 보다 즐겁고 화려한 축제만이 있는 곳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 책임을 일차적으로는 영화 제작에게 물을 수 있지만, 아울러 교회에도 그 책임의 일부를 물을 수 있다. 현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부드러우며 교양이 넘치는 설교는 현대 설교자의 덕목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인식시키기 쉬울 뿐이며 전도가 중요한 현대교회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죽음과 내세에 대해 올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현대인들은 <코코>가 보여주는 내세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이해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40-1742) 기간 중 신명기 32장 35절을 가지고 엔필드지역에서 행한 설교에서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함으로써 회개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제목의 이 설교로 인해 당시 청중들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울부짖으며 회개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지옥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가 그리는 지옥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마가복음 9장 44-45절에서 사용된 지옥의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멸망으로 가는 위태로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성경적 열심히 낳은 모습이었다. 디즈니의 위력을 경계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황이 한창이었던 1959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당제1서기장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흐루시초프가 이 초청을 받아들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측 인사에게 디즈니랜드 관광을 시켜줄 것을 제안했지만 미국 국무성은 경호상의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떠나면서 무엇을 가져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디즈니랜드라고 말할 만큼 그의 마음은 미국 방문 내내 디즈니랜드에 꽂혀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디즈니랜드에 마음을 둔 것은 디즈니의 만화 때문이었다. 레닌에 이은 스탈린의 강권통치 시절 소련은 자국 내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인 할리우드의 영화 상영을 금지시켰다. 미국의 어떤 문화들도 소련에 유입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었다. 그런데 단 예외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디즈니의 만화영화였다. 코흘리개 애들이나 보는 만화에는 미국 자본의주의 이념적 내용이나 색깔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고, 단지 애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반적인 내용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디즈니는 지난 해 12월, 524억 달러(약 57조원)를 들여서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 가운데 하나인 21세기폭스사의 핵심 사업을 인수하는 매머드급 ‘빅딜’을 체결했다. 1996년 ABC 방송을 2백억 달러에 인수한데 이어서 2006년에는 픽사 스튜디오를 그리고 2009년에는 미국의 양대 만화제작사 가운데 하나인 마블을 합병했다. 2012년에 할리우드 최고의 특수효과 제작사인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일은 이미 예상된 바였다. 디즈니가 세상의 문화를 지배할 날이 다가온 듯하다. 만화영화 <코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인이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 문화
    • 영화
    2018-02-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