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6:4-9)
 
1. 추억의 소환과 기억의 귀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같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핵심은 추억의 소환이자, 기억의 귀환이다. 지난 2015년 말 개봉된 영화 <히말라야> 역시 죽은 후배와의 추억을 소환하여 그의 시신을 가지러 히말라야의 그 험준한 산을 오른 것이며, 영화 <대호>도 기억의 귀환에 다름 아니다. 호랑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새끼시절 자기를 살려주었던 포수를 기억하고, 포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환에 그 모든 기억을 끝내기 위해 망각의 길로 호랑이와 함께 떠난다.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 꽃을 꽃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나무와 꽃에 대한 원초적 기억인 산과 바다의 이데아(idea)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지식을 얻는 학습 과정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이데아가 밝혀지기 때문이고 지식은 순수한 영혼이 과거에 보았던 것을 우리 몸이 기억해내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기억 이론인 상기론(anamnesis)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 추억을 소환하며 기억의 귀환을 당연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진리 개념인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마찬가지이다. 망각(lethe)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의 어머니는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고 있는 마르셀에게 따뜻한 차와 ‘마들렌’이라는 조그만 케이크 하나를 권한다.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을 차에 담갔다가 차를 마셨는데,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매혹적인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어린 시절 아침 인사를 하러 레오니 숙모에게 갔을 때 숙모가 따뜻한 보리수꽃차에 마들렌 한 조각을 담가 준 일과 그 당시 콩브레(Combray;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서의 기억들을 연이어 떠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마르셀의 고백이다.
 “이윽고, 침울했던 그 날 하루와 내일도 서글플 것이라는 예측으로 심란해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한 조각이 녹아들고 있던 차를 한 숟가락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던 그 한 모금의 차가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곤 소스라쳐 놀랐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매혹적인 쾌감은 사랑이 작용할 때처럼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면서, 즉시 나를 인생의 변전 따위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고, 인생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했으며, 인생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초라하고 우발적이며 죽어야만 할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회상을 ‘무의지적 기억(me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불렀다. 마르셀을 매혹적인 쾌감에 빠뜨린 것은 무엇일까? 프루스트는 그 답을 3,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장편소설(7부작)로 제시하고 있다. 곧, 소설이 진행되면서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 마르셀은 결국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된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된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위안부 소녀상.jpg▲ 위안부 소녀상
  따라서 기억은 이 시대의 화두인 동시에 영원한 실존적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기억의 귀환(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이러할진대 사회적 기억은 어떨까?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전직 대통령들의 기념관 등)¹를 세우고, 기록보관소를 만들고(세월호 관련 저 엄청난 SNS상의 담론들을 보라) 기억의 조형물(위안부 소녀상처럼)들을 세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이러한 기억의 연구(사회적 기억)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고(나치 치하 아래에서 유대인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 홀로코스트의 영향과 제3세계 권위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영향, 그리고 1990년 전후 세계적 탈냉전이 1945년 이전 식민주의나 1945년 이후 냉전하의 사회적 기억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 치열한 ‘과거청산’ 논쟁과 함께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기억 연구는 5·18민주화 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운동이다. 여기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동학농민혁명 등도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기억담론(나아가 기억혁명)은 공식적인 역사가 민중의 경험을 다루지 못할수록 강력하게 요청되며, 이후 체계화된 기억은 다시 역사 영역으로 편입이 된다.²

2.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
야드 바셈.jpg▲ 야드바셈
 나치 정권에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기억하는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이름을 기억하라) 홀로코스트 기념비에는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야드 바셈은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는 이사야 56:5절 말씀에서 인용되었다. 이스라엘 안의 이방인들(특히 이사야 본문에 의하면 ‘고자’로 배척받는 이들로 이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배제당한 사람들, 분배의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국가적 횡포가 막아 더 큰 아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어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주며 ‘기억’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자 하나님의 기억의 귀환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든 절차는 기억의 귀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반복적 상기는 공통된 기억의 반복이며 이를 통해 신앙적 전통이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귀환은 신앙의 본질적 토대가 된다.
 또한 대표적인 그리스도교의 성례인 성찬에서 포도주와 떡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진대, 그렇다면 기억은 단순히 의지적인 머릿속 작용만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되는 대상 사이를 연결시킨다. ‘참여적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이들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 밀양과 강정 마을, 세월호,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에 대한 공권력의 과도한 물대포 살수 등 최근의 사건들도 잊혀져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기억의 길이는 가슴으로 느낀 아픔의 길이와 비례하건만, 아직도 아픔은 기억으로 소환되어 망각의 강으로 떠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3. 애도와 우울증: 망각의 강으로
 사람은 아픈 상처를 잊지 못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한다(그러나 망각과 동시에 ‘앞서의 이야기와 같이’ 기억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도 못한다). 오직 인권과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하다 갖은 고초를 겪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만이 계속되는 삶을 위해 망각을 불러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트라우마(外傷, trauma, 전쟁, 성폭력, 재난, 사고와 같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외적인 사건의 영향으로 이 사건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정신적 충격) 증후는 사건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다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억을 통제하려면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망각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함으로 기억을 통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국가가 일괄적으로 집행할 아무런 권한도 의무도 없다.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는 역사적 외상에 있어 국가의 과도한 망각 집착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상처와 고통에 대한 망각은 어떻게 가능할까?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 모두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지만 몇 가지의 차이가 발견하며 이렇게 말한다. “애도의 경우 빈곤해지는 것은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 자아가 빈곤해진다.” 애도(Trauer, 슬픔)의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데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어서 아무리 격심하다 해도 치료를 요하진 않는다.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아픔은 가라앉고 다시 일상이 열린다. 그러나 우울증에 빠지면 상실로 인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 능력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자애심, 곧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슬픔은 세상을 텅 비게 하고, 우울증은 내 안을 텅비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과 우울증의 원인을 밝혀, 자신이든 타자든 합당한 결과를 수용하거나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나갈 때, 슬픔은 위로받고, 우울증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망각은 자연스레 따라와 지나가버린다.
 
4. 망각
 인간의 내면적인 삶과 관련된 트라우마와는 달리 인간의 외면적인 삶과 관련되어 국가 혹은 정치 권력이 개입해서 망각하는 행위가 있다. 역사적 사면(赦免, Amnesty)이 바로 그것이다. 1946년 9월 19일 처칠 영국 수상의 취리히 연설은 이제까지 적대적이었던 국가들 사이의 과거를 잊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쓰자는 ‘망각의 신성한 행위’를 호소한다. 하나님은 역사적 사면을 우리 인간 전체를 향하여 펼쳐 보이셨다. ‘기억의 귀환인 동시에 죄에 대한 망각 대선언’인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할지라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이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43:25)”,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49:14-15).”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억의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선조들의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고난을 후손이 기억하고자 한다. 따라서 유월절 식탁에서 자녀들은 쓴나물을 먹으며 부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왜 우리가 이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까?” 부모는 이렇게 답한다. “조상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기 위해서!”
 
각주)-----------------
1) 문자적인 의미로는 기억(記憶)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내는 것’이며 기념(紀念)은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념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재현하지만 그 속에 기억이라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 제의와 축제에 불과할 것이다.
2) 그러나 이러한 기억혁명이 항상 인권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국가주의적 기억을 해체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사회적 기억의 전환은 주로 민주화 국면(또는 ‘민주정부 10년’ 기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반기억 혁명’의 맥락에서 국가주의적 기억을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새로운 기억의 터를 조성하려고 한다(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나 박정희 기념도서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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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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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⑫ 기억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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