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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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해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느냐>를 두고 논할 때 사람에 따라 차이가 많아 보입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안나스, 로마 총독인 빌라도, 백성의 장로들과 기타 지도급 인사들은 가장 책임이 많아 보입니다. 가룟 유다도 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죄가 무겁다고 생각됩니다. 이들 중에서도 빌라도는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했노라고 발뺌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군중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군중심리에 흥분되어 별 생각 없이 소리 질렀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에는 십자가 사건에 구경꾼이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소리를 지른 일도 없고 단지 구경만 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어떨까요? 아홉 명의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도망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명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두 명중 한 명은 베드로요, 다른 한 명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요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익명의 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잠시 후 베드로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그 둘은 일찍 도망한 아홉 명에 비하면 훌륭한 제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평소에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와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결심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뜰 안에까지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싸고 청문회라도 열린다면 베드로는 그래도 제일 나아 보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뜰 안에까지 갔으니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들 보다는 낫지....>라고 자부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런 상대적 만족감에 도취되어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맛에 삽니다.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본문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었습니다만, 다른 복음서는 이 장면을 다루면서 마지막에 닭 울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베드로의 통곡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사람의 통곡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감만큼이나 큰 자괴감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즐기던 상대적 우수성이 볼품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뜰 밖의 아홉 제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결과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아홉 제자보다 더 간사하고  악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뜰 안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뜰 안과 뜰 밖이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뜰 안에 있었다고 자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특정인들을 거명하기도 하고, 특정 교회를 들먹거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자신은 무죄임을 은근히 주장하는 것 같아 보기 민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오늘의 어려움에 대해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본문의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이라고 추측을 해 보지만, 그런 추측은 무익합니다. 차라리 익명의 그 한 제자가 우리 자신이라고 고백합시다. 우리 자신도 상대적 만족감에 심취해 왔으며, 교만했으며, 실제로는 조금도 나을 게 없었음을 자인합시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다른 이를 향해 돌을 던지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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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뜰 안과 뜰 밖(요 18: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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