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기현 목사.JPG
 매주 수요일이면 저를 찾아오는 형제가 있습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저랑 일대일로 잠시 만나 책을 소개해주고, 읽은 것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를 해 줍니다. 그 중간에 이런저런 신앙적 의문을 묻기도 하지요. 이번에는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라고 물어옵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났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이 지탄하는 이들, 명백히 부정한 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고민이 된 게지요.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구원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엡 2:8)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만의 고유한 결정입니다. 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다르며, 하늘의 시각과 땅의 관점이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멀며, 순간과 영원이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지성과 영성으로 성서를 근거로 미루어 짐작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 틀리지 않는다는 것도 맞습니다. 인간이 다 틀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비하하는 위험한 반대편 오류에 봉착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타인의 구원을 가늠할 위치에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셋째, 불건전한 질문입니다. 누군가 성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뭘 하고 계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지.” 실제로 지옥 간다는 악담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정신 차리라는 깨우침의 말입니다. 그런 물음은 백해무익입니다. 알 수도 없고,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하나 없고, 간절히 대답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넷째, 건강한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건강한 일이란,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 곧 우리 각자에게는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남을 돕기 위해서 그가 어떤지를 물을 일입니다. 타인의 구원 운운에 몰두하는 것은 높아지고자 하는 심리로, 보이지 않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탓이라면 지나친 걸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 나를 두고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다른 이를 보면서, 저런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냐, 어떻게 저렇게 행하고, 살면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며 혀를 끌끌 찰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느 곳에서는 그런 나를 두고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구원받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는 날, 혹은 그분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는 묻지도 않을 것이고, 알려줄 필요도 없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딴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나 같은 놈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도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예서 멈추면 안 되지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주 은혜 놀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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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목사]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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