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남한산성.jpg▲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은 보름달의 이야기이다. 보름달이 뜰 때까지 산성 문을 열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당하는 이야기, 초생달이 반달이 되고, 반달이 보름달이 되어 마침내 산성문은 열렸고, 이제 보름달은 깨어진다. 그 보름달이 비춰주는 조선의 길과 청의 길은 너무도 다르고, 그 길을 글로 예비하는 조선의 길과 청의 글 또한 다르다. 글은 ‘말의 씀’이고, 종교개혁은 ‘오직 성서(오직 말씀)’로 시작되었다. 조선의 글과 길이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 교회의 방향성이 되기를 소원한다.

1. 최명길의 글과 칸의 글

남한산성을 포위한 칸은 문한관(文翰官)들에게 산성 안으로 들여보낼 문서를 작성하라 명한다. 문서는 대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내리는 조유(詔諭,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의 형식을 갖추고, 조선 국왕을 ‘너’라고 칭하라했다. 칸은 붓을 들어 문장을 쓰지는 않았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고사를 끌어대거나, 전적(戰績)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이렇게 말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문한관들은 다음 날 아침 문서를 올렸다.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다다랐다. (중략)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김훈: 남한산성, 308-310).”
칸이 말했다. “뻗쳐서 씩씩하다. 국새를 찍어라.” 문서는 남한산성을 넘었고, 인조(박해일 분)는 천천히 말했다. “칸이 여러 가지를 묻더구나.……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 최명길(이병헌 분)이 먹을 갈았다. 젖은 붓을 종이 위로 가져갔다.
“소방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시문과 담론에 스스로 눈이 멀어 천명의 순환에 닿지 못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명을 아비로 섬겨왔는데, 그 섬김의 지극함은 황제께서 망월봉에 오르시어 친히 보신 바와 같습니다.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皇極)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중략) 황제의 깃발 아래 만물이 소생하고 스스로 자라서 아름다워지는 것일진대, 황제의 품에 들고자 하는 소방이 황제의 깃발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이 돌담 안에서 말라 죽는다면 그 또한 황제의 근심이 아니겠나이까. 하늘과 사람이 함께 귀의하는 곳에 소방 또한 의지하려 하오니 길을 열어주시옵소서……(336-337).”
올곧은 명분의 사람, 곧 예조 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의 말대로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 최명길의 문서는 떳떳하게 살자는 문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최명길의 말대로 ‘상헌은 백이(伯夷)’이지만 자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어도 좋으니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끝내 글은 길을 요청하러 남한산성을 넘는다.
“글을 곧게 써라, 그래야 저들이 알아듣는다.” 칸은 조선의 국서를 접수한 문한관 두 명을 처형한 뒤, 남한산성으로 들여보낼 문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일렀다. 문한관이 글을 지어 올렸다.
“네가 사특한 입질과 기름진 붓질로 몽롱한 문장을 지어서 나를 속이려 하니 나를 따르겠다는 너의 기쁨이 대체 무엇이냐. 너의 문서는 돌려보낸다. …… 너의 신하들 중에서 나를 적대하고 능멸해서 결국 너를 그 돌구멍 속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너의 눈으로 찾아내고, 너의 손으로 묶고, 너의 군사에게 끌리게 해서 나에게 보내라. 죽여서 그 머리를 높이 걸어 너희 나라의 후세 만대를 가르치려 한다. 만일 보내지 않으면 내가 너의 성을 깨뜨리는 날에 나는 내 손으로 너의 성을 뒤져 그자들을 찾지는 않겠다. 그날, 나는 너의 성 안에 살아 있는 모든 자들에게 나를 능멸한 죄를 묻게 될 것이다(351).”
젊은 당하관인 교리 윤집과 부교리 오달제가 스스로 척화신을 자처했다. 금군위장이 그들을 묶었고, 최명길이 앞장서서 임금의 대열은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일제 식민지의 치욕 이전 가장 치욕스러운 한반도의 운명은 이렇게 남한산성을 떠났다. 글이 길을 만들었는지, 길이 글밖에 없었는지, 글과 길은 같은지, 다른지? 청의 글과 조선의 글은 무슨 차이인지, 또한 조선의 길과 청의 길은 무엇인지? 최명길은 이렇게 말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 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 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2. 주름과 실선: 바로크와 고전주의

바로크(Baroque)를 찬양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G. Deleuze)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1988)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로크는 무한한 주름의 작업을 발명하였다. 문제는 주름을 어떻게 유한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무한하게 이어나갈 것인가이다. 즉 주름을 어떻게 무한히 실어 나를 것인가가 문제다.” 주름은 사람의 피부에 있는 것으로, 손금의 경우 하나의 큰 선으로 보이지만, 사실 미세한 주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름의 모양이 사람마다 다르듯, 사람들의 표정이나 움직임도 다르다. 바로크 시대의 예술은 이러한 무수히 많은 주름을 표현한 것이다.
자화상.jpg▲렘브란트 자화상(1659)
가령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자인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자화상>(1659)은 얼굴에 내재한 삶의 굴곡을 주름으로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는 기쁨과 분노, 환희와 절망, 공포와 용맹과 같은 ‘세계의 모든 속성’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무한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있어서 바로크의 주름은 ‘내재적인 무한성’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실선으로 환원 될 수 없는 무수한 주름들의 발견, 그리고 이것이 곧 바로크의 실체이다. 반면 고전주의는 주름보다는 실선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데생이 강조된다. 주름과 실선의 차이가 바로크와 고전주의의 차이이며, 이것은 ‘변화/획일성’, ‘차이/동일성/’의 대립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은 통주저음(through bass, 숫자 붙은 베이스)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저음(basso continuo)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베이스(저음)를 끊임없이 이어주는 것이다. 심장박동처럼 잘 들리지는 않지만 긴장감을 유발한다. 동시에 시작도 끝도 없이 저음이 반복되면서 곡의 서사적 완결성을 방해한다. 이러한 바로크 음악과 달리 고전주의 음악은 ‘제시부-발전부-재현부’라는 체계적이고 완결적인 소나타 형식을 통해 화음과 선율의 형식을 강조한다. 따라서 비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저음의 소리, 곧 정서적 강도(intensity)를 유발하는 바로크식 음의 긴장감은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서양 근대음악이 자기완결적이며 거시적 체계와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다.
게다가 고전주의 음악에서 악보는 항상 동일한 의미를 전달해야하는 언어의 개념과도 같기 때문에 같은 곡은 다시 연주하더라도 같은 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크와 고전주의의 이러한 차이에서 들뢰즈는 개념의 동일성에 깔려 죽은 차이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의 부활은 차이의 부활이 된다.
통주저음.jpg▲<그림2>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1043












3. 조선과 청의 글과 길

조선의 길과 청의 길은 차이와 동일성의 대립이며, 조선의 글과 청의 글은 ‘변화(칸의 말대로,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와 ‘획일성(칸의 말대로,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의 대조이다.
최명길의 글은 바로크적이다. 그리고 칸의 글은 고전주의적이다. 명길의 글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내재한 삶의 굴곡이 깃들어 있다. 이 굴곡은 다름 아닌 주름이여 이 주름은 하나의 뚜렷한 실선이 아닌 무수히 많은 미세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삶의 무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무게에 짓눌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흔적을 글은 담고 있다. 기쁨과 분노, 환희와 절망, 공포와 용맹이 주름져 놓여있기에, 어느 한 글이라도 근접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무한한 주름으로 이루어진 명길의 글은 초월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으로 무한한 글(존재)’이라고 할 수 있다.
명길의 글 바닥은 바로크 음악의 시작도 끝도없이 계속 진행되는 통주저음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비극적 운명을 드러낸다. 동시에 명길의 글은 길을 찾고자 하는 글이다. 이 글에 조선의 길이 있는 것이다. 반면 칸의 글은 고전주의 음악처럼 조선에 항복을 제시하고(제시부), 이를 직선적으로 발전시킨다(발전부). 마침내 다시한번 재현하며(재현부) 체계적이고 완결적인 ‘소나타 형식’의 자기 완결적이며 거시적 체계와 형식을 완성한다. 길을 제시하나, 그 길은 주름을 곧게 펴는 직선의 길로 무수한 주름들이 쓰러져가고, 죽어가는 처참한 흔적을 그 뒷 배경으로 남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명나라는 지금의 미국이고, 청나라는 북한과 중국일까? 명나라 더하기 청나라가 미국이 아닐까? 영화에 보면 병자호란 시기에 “명은 천자의 나라이고, 청은 오랑캐”라고 주장하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할 위기에서 구해준 은혜)’을 떠받드는데, 6·25전쟁 때 남한을 구해줬으니 과거의 미국은 명나라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과는 전쟁을 하겠다고 으름장 놓고, 남한과는 ‘한-미 FTA 폐지, 주한미군 철수’ 등의 위협으로 FTA재협상 시도를, 사드 조기 배치를 밀어붙일 뿐, 동맹을 존중하는 태도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미국은 청나라에 해당될 것이다. 중국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듯 미국도 ‘아름다울 미(美)’에서, 지구촌의 ‘곰팡이 미(黴)’로 바뀌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요구하는 핵심사항은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의 종식’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제네바 합의나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의 ‘핵무기 불위협, 불사용’이나 ‘불공격, 불침공’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과거 협상에서 수세적으로 ‘현상 유지’를 요구했다면 이제는 공세적으로 ‘현상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한 협박성 멘트를 앞세워 동맹국들에 값비싼 첨단무기 구매를 압박하여 미국 군수산업체들의 배를 불리고 있고, 무역협상에서 미국에 유리하도록 만드는 장사꾼에 다름없다.
지금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조선의 길은 남한의 길로, 명, 청의 길은 미국과 중국의 길로. 보름달은 지금 다시 떠오르고 있건만. 500년 종교개혁의 음성이 들리건만, 아, 남한산성이여! 아, 한국의 교회여!!


최병학 목사.JPG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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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2 : 조선의 글과 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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