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noname01.jpg▲ 땅따먹기 그림
 
어린 시절 땅위에 줄을 그으며 땅따먹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가급적이면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경쟁을 했었지만, “병학아, 저녁밥 먹어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땅에 그어졌던 금들은 하루를 보낸 따스한 태양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땅 위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이고 주변 환경은 오염되고 인간들의 욕심으로 지구는 몸살을 앓게 되었다. 땅은, 어머니 대지는 어느샌가 소중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 다 쓰고 남은 똥이 되어 버렸다.
 
1. “신문이나 우유 배달하는 사람들은 승강기 이용을 금합니다”
 
위 제목은 몇 년 전 서울 강남 대치동의 한 고가 아파트의 승강기 앞에 붙어 있던 경고문이다. 층마다 승강기를 멈추는 바람에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러한 고가 아파트 소유자들은 누굴까? 다주택자를 정조준 한 ‘8·2부동산 대책’이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 국무총리실, 중앙부처 등 1급 이상 정부 고위 공직자 가운데 42%가 다주택 보유자라고 한다. 66%가 투기과열지구에 있고, 투기과열지구와 투기지역으로 중복 지정된 서울 강남 4구에 위치한 주택도 28%가 된다고 한다. 땅이 돈이 되고, 돈이 되는 땅에 지은 아파트는 금값이 된다.
 
폴 리쾨르는 “하나의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텍스트 앞에서 자기 이해’를 얻는 것이며, 그것은 텍스트를 향해 자신의 고유하고 한정된 이해 능력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 겸허히 나서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에서 더 넓어진 자기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텍스트 앞에 겸손할 때 우리의 시야는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성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의 땅에 관한 내용 가운데, 여호수아서는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성서 해석에 따라 여호수아서를 읽게 되면, 가나안 땅 정복의 ‘폭력과 전쟁의 역사’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대신 땅 없는 민족(히브리 민족)에게 땅을 주시리라 약속한 ‘땅(대지)의 소중함’과 ‘하나님 약속의 신실함’으로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여호수아서를 ‘땅 정복과 분배’로 읽어낸 기독교 역사가 십자군 전쟁에서 식민지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오류의 역사, 그 발생사적 연원이었다면, 여호수아서라는 텍스트를 겸손한 자세로 읽게되면 땅 없는 민족에게 땅을 주신 하나님의 ‘정의와 평등의 사건’이며, 땅이야말로 저 하늘의 피안을 사모하는 종교사의 역사에 역설적인 반역의 사건이며 동시에 땅을 소중히 여기고 보전하라는 생태학적 명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땅에 관한 인류의 욕심은 끝이 없다. 어머니 대지, 모신(母神)인 땅의 핍박, 영화 <마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2. 영화 <마더!>, 모신 학대사
 
숲 속 외딴 곳에 집이 한 채 있다. 이곳에 아내(제니퍼 로렌스 분)와 남편(하비에르 바르뎀 분)이 산다. 글 쓰는 작가인 남편은 창작에 몰두하지만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진흙으로 집 벽을 칠하는 아내는 도와줄 방법이 없다. 어느 날 이 집에 한 사람(에드 해리스 분)이 찾아온다. 그는 옆구리에 상처가 있다. 그리고 다음날 그의 부인(미셸 파이퍼 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그들의 두 아들이 찾아오고 형은 동생을 죽인다. 조문객들이 집을 찾아온다. 그리고 집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마더는 이들 일가족과 조문객 모두를 내쫓아버린다. 평화로운 시간이 찾아온다. 마더는 임신을 하고, 남편의 작품은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 평안은 짧게 끝나고, 남편의 작품을 추앙하는 팬들이 집으로 몰려오자, 마더는 환대가 아닌, 환멸을 느낀다. 마침내 태어난 아기마저 이방인 팬들에게 빼앗겨 죽게 되고 분노로 인해 마더는 집을 폭파시킨다. 모든 이방인(타자)들을 불로 태워 죽인 것이다. 성경이나 신화적인 전이해가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마더!(Mother!, 2017)>는 봉준호의 <마더(Mother, 2009)>와 같이 어머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영화이자, 봉준호의 영화와 달리 신화적인 확장성을 지니고 있고(특히 모신의 경우), 환대와 용서, 상처받을 가능성에 관한 담론들을 펼쳐 보인다.
 
사실 평론가 이동진이 훌륭하게 썼듯이 영화는 성경의 이야기를 잔뜩 차용하고 있다. 인용해보자.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캐릭터를 신으로 본다면, 그 집에 처음 찾아온 커플은 아담과 이브 같다. 창조의 날들이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창세기 구절처럼, 신은 이 영화의 아담이 좀 수상한데도 보자마자 호의를 표한다. 아담이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할 때 엿보이는 그의 옆구리 상처는 이브를 만들 갈비뼈를 떼어낸 흔적이다. 그렇게 창조된 이브는 그 다음날 집으로 찾아온다. 그 둘은 결코 만지면 안 되는 귀중한 크리스털을 깨뜨린 후 서재에서 추방된다. 금기의 선악과를 따먹어서 에덴 밖으로 내쫓긴 구약의 상황 그대로다. 몸이 아픈 아담은 실락원의 결과로 필멸의 존재가 된 인간의 운명을 드러낸다. 서재에서 쫓겨난 둘은 방에서 섹스를 한다. 그러니 이제 그 결과로 자식들이 등장할 차례다. 들어서자마자 싸움판을 벌이는 형제는 가인과 아벨처럼 보이는데, 신이 멱살을 잡는 것은 역시 차남이 아니라 장남이다. (성경에서 신은 형 가인보다 동생 아벨을 더 흡족해한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그 집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 남는다.”
 
길지만 좀 더 인용해 보겠다. “후반부에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캐릭터(이후 ‘마더’로 지칭)가 낳는 아기는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보인다. 마더가 후미진 공간을 간신히 찾아 아이를 낳은 뒤엔 성경의 동방박사들이 그랬듯 선물이 답지한다. 광기에 들뜬 군중은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팔을 뻗은 아기를 옮긴 끝에 살해한다. 이후 사람들이 아기의 몸을 뜯어먹는 끔찍한 모습은 ‘이것은 내 살이다’라며 예수가 상징적으로 떼어 준 떡을 제자들이 먹었던 성찬식을 글자 그대로 그려낸 난폭한 유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이동진의 분석처럼 영화가 끌어들이는 것은 기독교적인 맥락만이 아니다. 산 채로 희생자의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것은 잉카제국의 제의이며, 파괴의 순간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으로 바뀌는 순환의 사이클은 힌두교 신화이다. 첫 방문자(아담)가 사용했던 라이터(매우 중요한 상징인데)는 의미를 곁에 명확히 새겨놓았듯이, 북유럽 신화 속 여신 프레야(Freyja)이다.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남편은 오딘(Odin)이다. 아무튼 영화는 마더를 대지의 여신 가이야(신통기), 미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북유럽 신화), 곧 태초의 어머니 모신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 모신에 대한 학대의 역사였다. 땅(지구 전체라고 해도 무방할 듯)으로 대표되는 영화는 ‘모신 학대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의 문명도 현재 그러하다. 이러한 모신의 분노, 혹은 땅의 분노는 어떻게 해결이 될까?
 
3. 에덴의 동쪽과 ‘팀셸’
 
존 스타인벡의 또 다른 소설인 『에덴의 동쪽』은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가인과 아벨의 갈등 구조를 20세기 초 캘리포니아의 아론과 칼 형제에게 투영함으로써 인간의 원죄 의식, 선악 사이에서의 갈등, 죄의 극복을 보여 준다. 줄거리는 이렇다. 아론은 잘생긴 외모에 선한 성품을 갖고 있으며, 동생 칼(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제임스 딘이 칼 역을 맡았다)은 질투심이 강하고 다소 사악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의 어머니인 캐시는 아론과 칼 쌍둥이를 낳은 후 아버지 애덤(성서의 아담으로 보아도 된다)을 총으로 쏘고 도망쳐 시내에서 유곽을 운영하고 있으며(하와의 선악과 사건으로 보아도 된다), 아버지 애덤은 이 사실을 숨기고 중국인 하인, 리와 함께 아이들을 키워 왔다.
 
칼은 1차 세계 대전 때 콩 값이 오르는 것을 이용해 콩 장사로 돈을 벌고 이 돈을 아버지 애덤에게 드리지만, 애덤은 전쟁의 혼란을 이용해 부당하게 돈을 벌었다고 생각해 칼이 주는 돈을 거절한다. 자신의 성의가 아버지에게 거절당하자 그간 느끼던 아론에 대한 질투심이 폭발해, 칼은 우연히 알게 된, 어머니가 자기들을 버리고 유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론에게 알린다. 순수하고 이상적인 성격의 아론은 큰 충격을 받아 그 길로 군에 입대하여 결국 전사하고 만다. 애덤은 아론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쓰러져 버리고, 자기가 아론을 죽인 것과 다름없다고 고백하는 칼에게 “팀셸(timshel)”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성경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현대판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론(Aron), 칼(Caleb)의 머리글자는 아벨(Abel), 가인(Cain)과 같고, 신이 가인의 제사물을 거절한 것과 애덤이 칼의 돈을 거절한 것, 가인이 아벨을 죽였듯 칼이 아론을 죽게 만든 것, 신이 가인을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하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낙인을 찍은 것처럼 애덤은 칼에게 ‘팀셸’이라는 말을 남긴다. 성경과 다른 점은 가인은 형이지만, 칼은 동생이다.
 
아무튼 팀셸이란 단어가 중요한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너는 할 수도 있을 것이다(Thou mayest)’로, 선택의 기회를 주는 단어이다. 선택의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과의 관계에서 책임은커녕, 인간 사이의 책임도 전무하다. 그리고 거기에 땅의 문제가 차별과 불평등으로 존재하고 있다.
 
『에덴의 동쪽』에 나오는 대화이다. 주인공 ‘아담’에게 중국인 하인 ‘리’가 이렇게 말한다.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은, 미국 서부의 철도를 놓을 때 땅을 고르고 침목을 놓고 레일을 까는 고된 일을 중국인들이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노임이 싸고 열심히 일하는데다가 혹시 죽더라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광동에서 모집해 왔는데 광동(Guangdong, 廣東)인들은 체구가 작지만 힘이 세고 끈덕지면서도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 철도 회사의 노무자 모집원은 계약을 맺고,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해 주었지요. 그래서 빚더미에 않은 많은 사람들을 모은 것입니다. … 남자들은 동물처럼 떼를 지어 컴컴한 배 밑바닥에 실려 6주를 향해한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요. … 5년 동안 중노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살과 뼈만 가진 인간들이 홍수처럼 가축 화차에 실려 산 위로 올라왔어요. 그리고는 시에라 산맥의 작은 언덕을 깎아 내고 산 밑에 터널을 파는 일을 했습니다.” 땅에서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똥을 눈다. 땅을 똥으로 만들어버린 인류의 모신 학대는 똥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 앞에서의 자기 이해를 이끈다.
 
4. 똥의 연대: 한반도가 똥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2차적인 환경오염을 걱정할 정도로 유기성 폐기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반면 북한은 유기성 자원의 부족에 따른 토양의 황폐화로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식량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의 넘쳐나는 유기성 자원을 퇴비로 만들어 북한 땅을 살린다면 남북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순환적인 자원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북한 서로의 문제점을 상생의 기반으로 만드는 반전의 계기가 된다.
 
사실 지난 2013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런던협약 96의정서’에 의해 우리나라는 모든 유기성 폐기물의 해양투기가 전면적으로 금지됐다. 그동안 우리는 분뇨와 음식물쓰레기, 가축분뇨, 하수처리 등 유기성 폐기물을 푸른 바다에 아무 거리낌 없이 버려왔다. 지구상에 살아있는 생물체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저지르고 있는 반환경적, 반생태적 행위이다. 그러나 2014년부터 유기성 폐기물을 바다에 투기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더 이상 반문명적 행위는 할 수 없게 됐다. 한국유기질비료산업협동조합 김선일 이사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유기성 자원 재활용의 시야를 전 한반도적 차원으로 확대하면 남한은 음식물쓰레기 및 축분(畜糞) 처리와 씨름하는 일반 시민과 (그것을 재활용하여) 요식업자, 축산농가에 간접적인 지원을 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은 북한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유기성 자원을 퇴비 형태로 확보하게 됨으로써 지력회복을 통한 농업생산성 증가로 식량난 해소의 커다란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반도가 ‘똥으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과 북이 똥으로 하나 되어 땅으로도 하나가 되면 좋겠다. 여호수아서처럼 정복 정쟁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분쟁이 아니라, 분노의 포도가 아니라, 후회 없는 팀셸로. 그때 어머니 모신은 똥으로 하나 되는 땅에서 웃을 것이다.
 

최병학 목사.JPG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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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3 : 땅,‘ 분노의 포도’를 거쳐‘ 사랑의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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