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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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오관을 통하여 일상생활을 한다. 오관(五官)이란 시각(視覺), 청각(聽覺), 미각(味覺), 후각(嗅覺), 촉각(觸覺)을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 시각(視覺)은 더욱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국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신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님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세계적인 인물로 선정된 분이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들보다 모든 면면에 뛰어난 대한민국이 낳은 거목(巨木)이시다. 그분은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보다 한 가지 더 볼 수 있는 은총을 늘 감사하는 분이시다. 그것이 무엇인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다른 곳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대화를 하면서 마음 중심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 그 말이 진심과 건성이라는 것,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야기다. 목사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 또한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약점이 된 것이 보이는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저기 불편스러운 일들이 주님의 교회 안을 어지럽히게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진정 신령한 은혜의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니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생활이 일상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어 교회가 행복하고 평안했다.
  사람은 두 종류의 눈을 갖고 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하나는 영의 눈이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는 세상의 것을 보고 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를 본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올바르게 보는 것(正觀), 조용하게 보는 것(靜觀), 대강 보는 것(槪觀), 꿰뚫어 보는 것(洞觀), 전체를 훑어보는 것(通觀), 크게 보는 것(大觀),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直觀), 외모를 보는 것(外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달관(達觀)이라 한다. 그뿐 아니다. 주관(主觀), 객관(客觀), 참관(參觀), 비관(悲觀), 낙관(樂觀), 방관(傍觀) 등, 이와 같은 숙어를 말하자면 끝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만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무엇을 보면서 살아가는가? 무엇을 보기 위해 교회에 왔는가? 무엇을 보면서 오늘 예배를 드리는가? 무엇을 보아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무엇을 보면서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가?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롯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너무 많은 가족과 재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분가(分家)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주었고 롯은 보기에 좋은 요단지역 소알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선택했다. 결과는 보이는 곳은 멸망이었고 보이지 않았던 곳은 축복이었다. 중요한 것은 롯의 눈에는 요단 지역, 소알까지 물이 넉넉한 것만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은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즉 역사의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역사의 들러리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 성장에도 부흥의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교회 부흥의 들러리가 있다.  가문에도 가문의 번영에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가문의 번영에 들러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사울왕과 다윗이 본 골리앗은 달랐다. 육신의 눈으로 본 사울왕은 골리앗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본 소년 다윗은 골리앗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허수아비와 같이 보였고 그렇기에 그를 향해 물맷돌 다섯 개와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12명의 정탐꾼의 사건도 같은 의미를 시사한다.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았던 가룟유다, 고라, 발람, 웃시야, 아합, 가인, 데마 같은 사람들의 결과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승자 같았으나 실패와 영원한 저주의 대명사들이었다.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늘 사용하는 이야기가 있다. 노란넥타이를 메고 강단에서 이 칼라 어떻습니까? 물으면 “믿음색깔 황금색이네요.” 라고 대부분 대답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고많은 칼라 가운데 왜 하필 똥색입니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색깔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냐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믿음의 눈으로 감사의 눈으로 가능성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부정적, 비판적, 절망적으로 보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와트는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고 증기 기관차를 발명했다. 프랭클린은 번개 치는 것을 보고 전기를 발명했다. 로댕은 화강암을 보고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했다. 월트 디즈니는 쥐를 보고 미키 마우스를 창안했다. 청교도들은 바다의 풍랑을 보고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하신다.
 “네가 보는 것을 내가 네게 주리라.(창1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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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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