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1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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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안의와와 부인 넬리 딕(Nellie Dick Adams, 1866-1909)의 주된 사역지는 대구지부였지만 내한하여 첫 2년 4개월간 부산에서 사역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부사에서의 사역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넬리는 남편과 생후 3개월 된 아들 에드워드(Edward A. Adams, 1895-11965)를 데리고 1895년 5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는데, 이때부터 1897년 11월 1일 새롭게 개척된 선교지부인 대구로 가기까지 부산에서 활동했는데 이 시기는 한국 적응과 선교훈련, 특히 언어공부에 주력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어린 아이를 양육해야했기에 뚜렷한 활동은 못했지만 이 기간이 그와 그 남편에게는 소중한 준비의 날들이었다.
넬리 딕은 1866년 9월 15일 캔사스 주 토페카(Topeka)에서 출생했다. 신앙적인 가정에서 출생한 넬리는 교회학교 학생에 불과했을 때 기네스 박사(Dr H. Grattan Guinness)의 ‘선교사가 되려는 이의 이상’(The Idea of becoming a missionary)라는 제목의 강연을 듣고 처음으로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신앙생활에 정진하였고, 그 후에는 여자청년선교회(Young Ladies’ Missionary Society), 기독청년 면려회(Christian Endeavour), 그리고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등에 가담하면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준비하게 되었다. 기네스 박사의 강연을 같이 들었던 그의 언니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었고 넬리 또한 해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넬리의 학교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없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나 생활 방식은 주변의 증언과 그 이후의 삶의 여정 소에 간간이 드러나 있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성격이었고, 천성적으로 착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책임감이 강한 여성으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학창 시절에서부터 자신보다 두 살 위인 애니 베어드(Annie Baird), 곧 윌리엄 베어드의 부인을 알고 있었는데, 이들이 위에서 언급한 선교단체에서 7년간 같이 동참하며 일했다. 이런 관계에서 애니는 자기의 동생 아담스에게 넬리를 소개하여 넬리는 아담스, 곧 안의와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선교의 이상을 가졌던 넬리 부부가 에니와 윌리엄 베어드가 일하는 한국 부산으로 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산에 도착한 넬리와 남편은 일단 언어공부에 주력했다. 연차별로 시행되는 언어시험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강좌 혹은 성경반을 열게 되면 이를 도와주고 때로는 부산과 그 인근을 순화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사역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익히는 준비였다. 어느 정도 준가 되었다고 판단한 윌리엄 베어드는 넬리 부부를 새로 개척된 대구 지부로 보내기로 하여 넬리와 그 남편은 1897년 11월 1일 대구지부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달 뒤인 우드브릿지 존슨(Dr Woodbridge O. Johnson, 1877-1949) 곧 장인차(張仁車) 의사가 대구로 와 선교사역에 합류하였고, 남성로(南城路)에 위치한 대구제일교회 구네에서 작은 제중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진료소를 열었는데 이것이 대구 동산병원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대구로 이전해 간 넬리는 12년 후인 1909년 10월 31일 4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어드워드(Edward,1895.2.6) 벤자민(Benjamin, 1898.1.14.) 도로시(Dorothy, 1899.11.2.) 조지(George, 1907.8.6)에 이어 5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나 유산을 하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과로가 원인이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장례식 때 대구경북지방에서 모여든 추모객은 2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대구제일교회 옆의 은혜의 정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She is Not Dead But Sleepth라고 적혀 있다. 부산에서 선교사로의 삶을 시작했으나 남편과 함께 대구지부를 개척한 대구선교의 어머니였기에 그의 선구적인 그리고 자애로운 모습이 대구경북지방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에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을 뿐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베의 묘지를 묘지가 아니라 잠자는 곳(a sleeping place)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다. 죽음이 인생이 종착점이 아니라는 점에서 단지 잠자고 있을 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장남 에드워드(安斗華)는 1921년 아버지를 이어 제2대 한국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지부에서 일했고, 대구에서 자란 차남 벤자민(安邊巖) 또한 1923년 내한하여 안동선교부에서 일했다. 딸 도로시 또한 교육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외국인학교 교사로 일했다. 막내인 조지(安斗照)는 1932년 내한하여 안동과 대구선교부에서 활동했다. 정리하면 4남매 전부가 북장로교 한국선교사로 제2대 선교사의 길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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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서 일한 북장로교 선교사들, 넬리 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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