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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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바다를 보았습니다. 총회 남전도회가 주최하는 전도대회 첫날 밤 저녁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부안 격포를 갔던 것입니다. 격포 해변의 바다는 옥구슬처럼 맑았습니다. 물결도 잔잔했습니다. 저는 푸른 바다를 낀 산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걸어가면서 자세히 보니까 산딸기가 많이 열렸습니다. 어린 시절 따 먹던 산딸기의 추억에 매료되어 손이 가시에 찔리도록 산딸기를 따 먹었습니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추억을 먹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바로 인접한 나무들 가운데 유독 소나무가 지치게 보였습니다. 얼마나 바람을 많이 맞았는지 잎사귀 뿐만 아니라 가지도 상한 곳이 많았습니다. 그런 소나무 가지에는 유달리 솔방울이 많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덜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같이 길을 걷는 서광수 장로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장로님, 왜 저 소나무만 저렇게 솔방울을 많이 달고 있을까요?” 그랬더니 서장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나무도 자기 죽을 날을 알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저렇게 솔방울을 많이 맺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서장로님의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같은 지역에 있는 소나무도 바람을 좀 덜 맞거나 지쳐 있지 않는 소나무는 솔방울을 그리 많이 달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풍을 직접적으로 맞고 잎사귀와 가지가 상해 있는 소나무는 솔방울을 많이 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그래. 우리 교계도 마찬가지다. 반기독교적 사상의 바람, 교회 생태계를 공격하는 해풍을 느끼면 느낄수록 저 소나무처럼 활동을 많이 하며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많이 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소나무가 더 기특하게 보이고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해풍을 전면에서 맞으며 행여라도 자신이 너무 힘들어 지쳐 죽게 되면 솔방울을 통해서 다음세대를 이어가도록 하고 그리고 그 자리에 떨어져서 다시 태어난 솔방울은 어미 소나무의 자리를 대신해서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또 소나무가 지치고 힘들게 되면 많은 솔방울을 맺어서 또 그 자리에 소나무 숲을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 순간 제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그 순간은 제 자신이 그 소나무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누구보다 반기독교적인 해풍과 교회 생태계를 공격하는 폭풍을 많이 겪은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판소리의 고장인 남원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풍류의 즐거움과 문학적 감성, 예술적 멋을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도 이 바람을 직접 느끼지 않았으면 제 목회만 성실히 하고 또 개인적으로 문학적 감성과 고고한 예술적 향취를 깊이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저 바다와 제법 떨어져 해풍을 적절하게 맞으며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바다의 정치를 느끼며 지내는 나무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전면에 서 있는 소나무들은 얼마나 바닷바람에 시달렸겠습니까? 가지와 잎사귀는 잔뜩 지쳐 있고 솔방울만 가득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 삶과 목회 사역에 솔방울을 더 많이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솔방울을 맺는 사역 캠페인을 할 것을 다짐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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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솔방울을 맺는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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