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0-3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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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생명의 도’(행 7:38, 개역성경)라 불리는 기독교를 믿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인가, 아니면 ‘십자군의 길’(The way of the crusade)인가?

 

  요즘 기독교인들끼리 나누는 대화나 SNS(카카오톡, 페이스 북) 등을 통해 주고받는 글들과 유튜브 영상을 보며 안타까운 때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십자군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시대 때 일어난 ‘십자군 전쟁’(The Crusades)을 보자.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의 “성지(聖地)인 예루살렘을 어찌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들에게 허락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교황의 말로 시작된 이 전쟁은 무려 198년간(A.D. 1095~1291)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부끄럽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치러진 전쟁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당시 로마교회의 권력은 막강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를 눈이 날리는 카노사의 겨울 성문 앞에서 얇은 옷과 맨발 상태로 3일 동안 꼬박 세워 눈물로 용서를 빌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성지를 수복하자는 교황의 말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멋진 명분과 종교심에 불타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지 수복을 향해 나아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당황한 로마교회는 이 전쟁에 참여하여 순교하면 천국이 보장된다는 약속도 하였다. 더 나아가 어린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에서 수만 명의 소년들을 조직한 ‘소년 십자군’(Children's Crusade)까지 조직하여 전쟁에 참여케 했다. 이 전쟁의 참상은 너무 끔찍하여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분명 그들이 주장하는 명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명분을 이루는 방식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길인 ‘십자군의 길’(The way of the crusade)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라고 외치며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 그 열정과 헌신은 분명 귀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인 ‘숫자’와 ‘힘’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사람을 규합하고, 그 힘으로 세상과 싸우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의 길’이다.

 

  우리 주님은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을 선택하셨다. 주님의 선택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는 낮아짐이셨다. 스승으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셨다. 5병 2어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아 로마를 뒤집으려고 할 때 홀로 산으로 가셨다(요 6:15). 유대 종교권력자들과 로마군병들에게 잡히셨을 때 그들이 가진 검과 몽치보다 더욱 강력한 하늘의 12군단의 천사를 동원하지 않으셨다(마 26:53).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십자군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사회학자인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인 스타크는 불신자이다. 그런 그가 로마제국에서 신흥종교와 같았던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300여 년 만에 그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로마를 정복하고, 지금까지 2천 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결국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을 점령한 것은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역병 때문이었다. 1차가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전 제국의 1/3 정도가 천연두로 사망했고, 2차로 251년 알렉산드리아 인구 2/3가 사망할 정도로 엄청난 전염병이 있었다. 로마 사회나 기성 종교가 좌절하고 역병 앞에서 종교인들이 먼저 도망갔을 때, 쌓여있던 시체들이 방치돼 쥐들이 병을 더 옮길 때,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를 다 정리하고 장례를 치렀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의료가 발달한 때가 아니었다. 지금의 코로나 19와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은 이교도를 믿는 로마 사람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크리스천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이때 종교지도자와 돈 많은 제국의 사람들은 전염병이 제국에 돌자 안전지대를 찾아 달아났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도망갈 힘도, 돈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경계의식을 풀지 못했다. 전염병에 걸린 감염자와의 접촉을 극도로 피했다.

 

  이때 초대교회의 교부인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이 외쳤다.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인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풉시다. 원수도 사랑합시다.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것이 오늘 이 땅과 교회 안에 드리워진 수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군의 길’을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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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십자군의 길’을 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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