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2-0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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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호 목사

처음에는 이 글이 과연 정근두목사님의 글인지 그 이름을 빙자한 다른 누군가의 글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 정목사님이 제게 보내신 장문의 카톡을 다시 훑어보니 논조가 거의 같습니다. 답할 건 별로 없지만 소감이라도 적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동네마다 빚 때문에 일어났던 어머니들의 싸움 소리를 기억합니다. 빌려간 돈 돌려달라고 찾아갑니다. 지금 없으니 다음에 드리겠다. 벌써 몇 번째냐? 오늘은 받아가야겠다. 이런 식으로 싸움이 전개됩니다. 그러다 보면 흥분하게 되고, 험한 소리가 오가게 됩니다. 그러면 빚 문제는 어디 가고 당신이 욕하지 않았냐, 내가 언제 욕했냐.. 이런 식의 싸움이 됩니다. 빚만 제때 갚았으면 될 일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욕이 아니라 빚입니다.

 

정치권에서 그런 방식을 따라 합니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다른 더 시끄러운 문제로 주의를 호도하는 방식 말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빚에서 욕으로 살짝 바꿔 버리는.. 교회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비껴가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코닷의 천목사의 글, 기독교보의 저의 시론, 총회재판국의 글 어디에도 불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들 극히 조심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불륜프레임을 가지고 다룬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의 그 반응이 자연스럽긴 합니다. 이건 불륜프레임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프레임 없이 그냥 사실로만 보면 이렇게 쓸 수 있겠죠. “50대 유부남이 미혼의 여성과 주차장에서 12회, 자기 아내가 없을 때 여성의 집에서 3회 만났다.” 이걸 놓고 일반인들이 뭐라 볼지는 명약관화할 겁니다.

 

그런데 이때의 유부남이 목사고 미혼 여성이 그가 데리고 있는 여전도사가 되면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기준을 더 엄격하게 해서 보아야 합니까? 기준을 더 관대하게 해서 보아야 합니까? 그리고 어떤 프레임으로 보아야 합니까? 목회적인 프레임으로? 교육적인 프레임으로? 사역적인 프레임으로?

 

목사님은 박목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이 사안에 접근하고 있습니다만 열두 번, 세 번이 적은 건가요? 아니면 독신 여성 집에 가서 일대일로 함께 하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건가요? 여성을 일대일로 만날 때는 방문을 열어놓으라는 말은 저만 아는 건가요? 다른 사람이 선입견을 가진 게 아니라 목사님이 (좋은 의미에서의) 선입견-박목사는 아니다-으로 접근하시는 거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혹시 목사님은 박목사님을 만나서 교제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최근의 설교 1편이라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읽으면서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상이 떠올랐습니다.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비틀거리면서 옵니다. 누가 봐도 음주운전입니다. 경찰관이 그 차를 세웁니다. 창문을 내리니 술 냄새가 확 풍깁니다. 경찰은 음주 측정기를 들이댑니다. 기사는 측정을 거부하면서 술 안 마셨다고 말합니다. 경찰은 불어만 주시라고 말합니다. (경찰은 음주운전이라는 프레임으로 기사를 대하고 있습니다!) 실랑이가 계속되니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내가 툭 끼어들어 한 마디 합니다. 경관님은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아세요? 우리 목사님 설교 들어보셨어요?

 

이건 그야말로 상상하기 어려운 상상입니다.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거죠. 경찰관이 사모님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이 생겼을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지금의 경우와 백 프로 맞아떨어지는 비유는 아니지만 목사님의 그 질문을 읽으면서 어이가 없어서 그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정목사님의 말씀은 설교를 잘하면 열두 번 세 번 정도는 괜찮다는 말로 들립니다. 사람이 훌륭하면 그런 행동도 괜찮다는 말로 드립니다. 그의 설교나 목회 능력이 그런 행동을 덮을 수 있다고 들립니다. 저는 목사님과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의 설교는 듣지 말라고 해야 옳다고 봅니다. 설교보다는 자숙을 권해야 옳다고 봅니다.

 

저는 노회나 총회임원회나 총회재판국의 처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왈가왈부할 만큼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고요? 시론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열두 번 세 번이면 벌써 사임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재판거리나 됩니까? 서로 피곤한 일 아닌가요?

 

여기서 삐딱한 소리 한 마디 끼워 넣겠습니다. (이건 목사님께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앞으로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갈 거라는 소문도 들립니다. (이미 갔나요?) 요즘 교회들의 풍토가 그러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아예 세상 법정으로 가면 될 것을 뭐하러 그렇게 힘 빼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절차 논쟁 그만하고 그리로 갖고 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끼리 싸우지 않아도 되고 노회나 총회 경비도 아낄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교회 재판도 3심제로 해야 된다고 말하는데, 이미 우리나라 교회들은 5심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두 번, 세상 세 번이죠. 서글픈 현실입니다. 하여튼 다들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데 재판 받고 나면, 교회 재판이든 세상 재판이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에는 “재판장님께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면서 재판정을 나오더군요. 불리할 경우에는 정치적 판결이니 뭐니 하면서 거의 욕에 가까운 말을 하고요. 재판에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거겠죠.

 

다시 돌아와서, 앞으로 이 사건은 전례가 될 것입니다. 고신의 총회장을 역임하시고 현직 신학교 총장으로서 여전히 목사를 양성하시는 정목사님은 그 전례 만들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열두 번, 세 번은 일종의 기준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예닐곱 번 만나고 치리 받는 사람은 억울해할 겁니다. 그런 희한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모여서 고신의 역사를 만들 것이고, 그게 다시 한국교회의 역사를 만들겠죠. 그게 자랑스러운 것이 될지 부끄러운 것이 될지는 훗날 알게 되겠죠.

 

이제 글을 끝내겠습니다.

사안에 대해 말하다가 사람을 비판하는 것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거룩하게 살지도 못하는 주제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글을 쓰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 거룩은 선택이 아니라고 큰소리로 외치긴 하지만 저 자신이 기준에 너무 미달하기에 앞으로도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이런 글은 쓰지 않겠습니다.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전원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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