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2-03(목)
 

서임중 목사.jpg

 가을 향기가 짙다. 계절의 변화를 보면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얼마나 놀라운지 신묘막측(神妙莫測)이라는 한마디 말로는 부족하다. 부쩍 많아지는 생각 속에 오늘을 살면서 나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자괴감이 일어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속리산엘 다녀왔다. 국보 915호로 지정된 법주사 대웅보전 석축에 잠시 앉아 목사와 승려에 대하여 묵상을 해 보았다. 소위 종교계 지도자인 목사와 승려들은 지금 이 나라 이 국민들에게 어떤 위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을까? 시류에 합류하고, 이기적 주판을 굴리며 야합에 발 빠르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은 입안으로 삼켜버리는, 걸어야 할 걸음은 취보(醉步)처럼 뒤뚱거리며 역사가 혼돈할 때 희망적인 메시지 하나 내 놓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를 그 어찌 시대의 마지막 보루인 참된 종교 지도자라 할 수 있겠는가.

 목사로서 성직의 시무를 다하고 은퇴를 하였지만 목사의 성의(聖衣)를 벗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신명(身命)을 다해 주님이 맡겨 주신 성도들을 사랑하며 그야말로 평행감축으로 목양하고 은퇴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룟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을 당한 것처럼 사랑한 사람들의 배반의 잔을 받아들고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당할 때는 심파(心波)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들고 영파(靈破)까지 느끼는 혼돈에 허덕일 때는 정말 성의를 벗고 싶었다.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 세상이 혼돈하고 백성들이 지치고 방황할 때 희망 메시지를 내 놓지 못하는 부평초 같은 현실 앞에서 성직수행의 한계를 느끼며 자괴감에 성의를 벗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입고 싶어 입은 옷이 아니라 주님이 입혀 주신 옷이기에 스스로 벗을 수가 없다. 그런 자괴감과 복잡함으로 서재를 벗어나 산행에 올랐던 것이다.

 울창한 삼림을 걷다가 도토리 하나를 주웠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정도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서로 다툼을 이르는 말’이 도토리 키 재기다. 대동소이(大同小異), 막상막하(莫上莫下), 반근팔량(半斤八两)이 같은 의미로 상용된다. 은퇴 후 말씀사역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이 소위 자칭 교회를 위한다는 교인들의 다툼의 언행들이다. 그것은 도토리 키재기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의도 1번지 선량(選良)들의 쏟아내는 위정(爲政)의 언행을 보고 들으면서 도토리 키 재기가 생각났다. 가수 나훈아 씨가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僞政者)들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국민들이 쾌감을 느끼는 것은 작금의 정치지도자들은 爲政者가 아니라 나훈아 씨가 일갈한 僞政者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자리는 좋아하면서 그에 합당한 직무는 수행되지 않는 것이다.

 나훈아 콘서트가 방송된 후 온 나라가 나훈아 신드롬(syndrome)에 빠진 듯하다. 모든 방송과 SNS는 <테스형>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마치 가을단풍 물들 듯 딱히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물들이고 있다. 모든 음원사이트에는 나훈아 노래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74세의 노당익장(老當益壯)에 젊은이들도 열광한다. 식당, 카페, 저잣거리에서도 대화의 화제는 나훈아, 테스형이다. 구태여 시청율은 접어두고라도 74세의 가수가 콘서트 막간에 한 말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나훈아 씨가 한 말의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僞政者들이 생길 수가 없다” “역사책에서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못 봤다. 바로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지켰다.” “KBS가 여기저기 눈치 보지 않는,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됐으면 좋겠다. KBS가 거듭 날거라 믿는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우회적 메시지였다. 바로 여기에 전 국민들이 공감하면서 나훈아 신드롬이 일어나는 것이다. 묘할 정도로 수위가 조절된 시국비판과 언행의 진정한 자유함의 포효에 시청자들은 열광했으리라. 그리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테스형>이 존재가치를 회복하는 희망메시지가 되어 국민들의 아프고 지친 현실을 바로 보게 한다. 전곡에 흐르는 음색의 애잔함과 그에 내재된 슬픔이 베어 나와 그냥 저절로 눈시울이 젖어드는 것이 테스형이다. 그것이 지금의 국민정서다.

 사랑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안 인사를 한 후 망설이듯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나훈아 콘서트 보셨는가?” “생방송은 못보고 유튜브를 통해 부분 부분 보았네.” “2시간동안 시청하면서 내내 나는 그 아픈 세월 다 감내하면서 여전히 고난의 행보를 하면서도 기쁨으로 말씀사역 하시는 서목사 자네를 생각했네.”

 전화를 끊고 산행 길에 주워들었던 도토리 생각이 났다. 인생여정의 모든 이들의 삶의 몸부림은 도토리 키 재기인 것을... 그리고 나훈아 씨가 부른 <테스형> 첫 소절이 생각나서 흥얼거려 본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래 맞다. 그것이 인생이다. 나훈아 씨가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꿈이 고갈되면 노래를 접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목사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고갈되면 꿈을 심어줄 수 없는 삯군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친구의 과분한 격려가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로 다시 들렸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목사로서 가치개념이 부서질 때 聖衣를 벗고도 싶었지만 목사로서 Calling과 Mission을 생각하며 다시금 聖衣를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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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聖衣를 벗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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