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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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 설립된 또 하나의 의료기관이 복음병원이다. 처음에는 고신교회와 무관하게 전영창 선생에 의해 부산시 영도의 전차종점 인근의 제2영도교회 창고에서 시작되었으나 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총회로 편입되었고, 1957년에 현재 위치인 송도 암남동 34번지로 이전하였다. 1977년에는 종합병원으로 인가를 받았고, 1980년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이 설치되면서 대학병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음병원은 전쟁이 발발한지 6개월가량 지난 1951년 1월 15일 ‘복음진료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그해 말 곧 12월 23일 ‘복음의원’으로 개칭되었고. 꼭 1년 후인 1961년 8월 7일부터 ‘복음병원’으로 불리게 된다.

 이 병원은 전영창 선생의 ‘경남구제호’로부터 시작된다. 전라도 무주 출신인 전영창(全永昌, 1916-1976)은 미국남장로교의 보이어(Elmer Boyer, 保伊烈, 1893-1976)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신흥학교에서 수학하고 그 학교 교장이던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1891-1960)의 주선으로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해방 후 주한미국 군종실에서 근무하던 중 미 군목의 도움으로 1947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 학교에서 1년간 수학 한 다음 미시간 홀란드에 위치한 웨스턴신학교로 옮겨가 신학을 공부했다. 이 학교는 미국개혁교회(RCA: Reformed Church in America)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졸업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있을 때 조국의 전쟁 발발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학교는 졸업한 후 귀국토록 종용하였으나 전영창은 전화의 고통 속에 있는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며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마치 라인홀드 니버 집에 체류하며 공부하던 중 전운이 감도는 독일로 돌아갔던 본훼퍼의 경우와 같다. 전영창의 애국심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웨스턴신학교는 그의 졸업을 인정해 주고 필요한 곳이 사용하라며 5,000불을 모금해 주었다. 전영창은 주변을 정리하고 미국을 떠나 1951년 1월 9일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1월 15일 ‘경남구제회’를 조직하고 부산 제3영도교회에서 구호활동을 시작했는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가난한 피난민을 목격하고 병원설립을 결심했다. 이 때 전영창은 노르웨이의료지원단장인 넬슨 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충고가 병원 설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넬슨 의사는 5,000불로 항생제를 사서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못가서 재정이 바닥이 나고 더 이상 일할 수 없으니 그 기금으로 병원을 설립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충고하고, 그럴 경우 매일 50인분의 약을 원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대형 군용 천막 3개를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전영창은 1월 15일 부산시 남항동 2가 46 제3영도교회 구내에 작은 진료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때 의사로 초빙된 이가 초량교회 출석하던 여의사 차봉덕 여사였다. 사실상 그가 첫 원장인 샘이다. 평남 평원군 출신인 차봉덕(車鳳德, 1921-?)은 평양 정의여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경성의전(서울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수련의로 훈련을 받고 1948년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일한 바 있다. 1950년 초에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다음 해 1월이 1.4후퇴로 엄청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어 닥치게 되자 전영창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복음진료소에 가담하게 된다. 전영창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유엔군과 미군을 찾아 다니며 의약품과 각종 의료용품들을 조달하였고, 또 옥수수와 밀가루, 분유 등 구호품을 얻어 와서 텐트 밖에 솥을 걸고 끓여서 전재민들을 구제했다.

 차봉덕 여사는 후에 역시 의사인 황영갑을 만나 혼인하고 진주로 이거하여 의료활동을 계속했고, 황영갑은 진주교회 장로가 되어 활동하던 중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황영갑은 ‘작은 불꽃’이라는 자신의 회고기가에서 부산 차봉덕이 전영창과 더불어 복음진료소에서 일한 첫 의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울산의 고명길 목사는 이런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복음병원의 역사를 재검토하여 잊혀진 사실을 바르게 정리한 바 있다. 전영창은 경남구제회 활동과 더불어 복음병원 설립자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나 모종의 고신교회의 지도적 인사와의 모종의 불화로 1953년 여름 복음의원을 떠나 거창으로 갔고 거창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일하면 사회적 신망을 얻는 명문학교로 육성하였다. 필자는 1988년 멜버른의 장로교신학대학에서 유학할 당시 초빙교수로 왔던 웨스턴신학교 은퇴교수 유진 오스터하벤(Eugene Osterhaven) 교수를 만났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알게 되자 그의 첫 마디가 “영창전을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의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가 어떤 학생이었느냐고 물었더니 특히 스피치를 잘 했다고 대답했다. 37년이 지났지만 그는 한국인 제자 전영창을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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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영창과 복음병원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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