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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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950년 10월 25일 첫 중공군 포로가 생겼다. 10월 28일에는 평양에 2개의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인천 수용소도 11월 말까지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확장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후퇴하게 되자 평양에 수용되었던 2만4천여 명의 포로가 인천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다시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래서 1950년 12월 3일 기준으로 부산에 집결된 포로 수는 14만6천135명에 달했다.

 포로 관리 문제는 심각한 현안이 되었다.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1951년 1월 6일자 편지에서 전장(戰場)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14만 명의 포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적과 싸우기도 모자라는 병력을 포로경비와 관리에 투입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점, 그리고 수송과 물자의 이동과 관리 등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결국 증가하는 포로들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또 분산하여 관리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어 처음에는 제주도로 이전을 검토하였으나 거제도가 적합한 포로수용지로 부상했다. 거제도가 섬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가 용이하다는 점과 부산으로부터 이동거리가 멀지 않다는 점, 급수 및 식량재배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그래서 거제도 고현을 중심으로 22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수용소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수용소(Camp)의 하부구조는 ‘구역’(Enclosure), ‘동’(棟, Compound)으로 나눠지는데, 60, 70, 80, 90으로 나누어지는 ‘구역’과 그 휘하에 28개 ‘동’으로 구성되었는데, 1개 ‘구역’에 약 6천명을 수용할 수 있게 했다. 부산에 있던 포로들은 이 거제 수용소로 이송되기 시작하여 1951년 2월 말에 5만 명의 포로가 이곳으로 이송되었다.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부대도 거제도로 이동하였고, 3월말까지 거제도에 이송된 포로는 10만 명에 달했다. 5월 말에는 11만 5천명, 6월 말에는 수용 포로 수가 14만 명을 넘었다. 영등포 수원 원주 재천 대전 하양 등지에 분산되어 있는 포로들은 부산으로 집결되었고, 다시 거제도로 수송된 것이다. 결국 부산에는 병원수용소만 남고 나머지 포로들은 거제도로 이송된 것이다. 제1포로 수용소라는 이름도 거제도 수용소로 넘어갔고, 이곳이 최대 수용소가 되었다. 이곳에 가장 많이 수용된 인원은 17만 명에 달했다. 포로경비대대도 거제도로 이동하였는데, 3개의 경비대대(31, 32, 33대대)를 통합하여 포로경비연대를 창설했다. 당시 거제도 인구는 약 10만 명 정도였는데, 포로 수까지 합하면 3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거제도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이런 포로들을 위해 전도했던 선교사가 해롤드 보켈 목사였다.

 보켈 선교사는 부산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이들에게 설교하고 전도했다. 보켈이 처음 거제도로 간 때는 1950년 성탄절 직후였다. 그 이전에 포로로 잡혀왔던 임한상(任漢祥) 목사가 포로들을 위해 신앙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1950년 성탄절에는 비기독교인들을 포함한 4천 명의 포로들과 함께 성탄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보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50년 크리스마스 직후 임한상 목사가 속해 있는 포로수용소 켐프를 처음 방문했다. 그 때 이미 임 목사는 미군을 설득하여 텐트를 준비해 예배처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는 한편 불신자를 초청해 모임을 가졌다. 대화 중에 나는 임 목사가 크리스마스에 4천명의 포로를 모아놓고 야외에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경책과 찬송가들이 임 목사에게 제공되었고, 임 목사의 사역은 계속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후에 임 목사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수많은 포로들이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 임 목사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6개월 동안 포로수용소 병원에서의 사역을 통해 특별하게 열매 맺는 전도를 하였다. 그의 신실하고도 도전적인 리더십 때문에 모임에 참석해 복음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포로들의 숫자가 점차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보켈 선교사와 임목사의 활동에 고무된 유엔 당국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에서의 종교활동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수용소는 일종 또 다른 전쟁터였다.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때로 폭력을 동반하였고 살인에 이르기까지 험악한 단계로 발전하기 때문에 적절한 종교교육은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보켈의 역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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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포로선교사 해롤드 보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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