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 문제에 유엔이 처음 관심을 표명한 것은 개전 한 달이 지난 7월 31일이었다. 유엔은 지원을 결의했고, 그로부터 한 달 후인 9월 1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서한을 보내 비상식량, 의복, 임시거처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지원이 시급한 현실에서 다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계의 외원 단체나 구호 단체의 기여가 큰 역할을 감당했다. 배귀희 교수는 『옥호열』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이 무렵 미국 선교사들의 존재는 한국인들의 삶과 기독교도 피난민들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비록 미국선교사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피난민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자원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차량을 가지고 있었고, 외부의 지원 수단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지역교회들과 관계를 통해 구호 인력을 조직할 수 있었고, 미군 내에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시 활동에 대한 특별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잠시 쉬면서 전쟁기 일화 한편. 부산에서의 구호활동 과정에서 생겨난 말이 ‘개판 5분전’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개(犬)들이 뒤엉켜 혼잡한 사태를 말하거나, 상태, 행동 따위가 무질서하고 난잡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쟁의 아픔이 서려 있는 피난지 부산에서 생겨난 말이다. 구호 단체는 밀크 스테이션을 설치하고 영양 결핍으로 고통당하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공급한 일도 있지만, 중앙동에서 보수동으로 이어지는 난민촌 주변에 큰 솥을 걸어놓고 때로는 죽을, 때로는 밥을 해서 무료 급식했다. 굶주림에 지친 피난민들은 아침 일직부터 그 주변에 죽 치고 앉아 급식시간을 기다렸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난투가 벌이저기도 했다. 그런데 급식소에서 조리가 다 되어 음식을 급식할 대가 다 되면, 급식소장은 “개판 5분전”이라고 외친다. 여기서 개판이란 밥솥의 뚜껑을 열기(開板) 5분전이라는 뜻이다. 곧 급식이 시작되니 줄을 서라는 신호였다. 이쯤 되면 지루하게 기다리던 주린 피난민들은 서로 먼저 밥을 타려고 아우성치며 혼잡한 무질서가 아비규환에 가까운 난장판을 이루었다. 이런 혼란이 개판 5분전부터 시작된다.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던 피난지 부산에서의 일이었다.
부산에서 구호활동에 매진했던 대표적인 선교사들이 아담스(Edward Adams, 1895-1965), 켐벨(Archibald Campbell, 1890-1977), 그리고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 선교사였다. 한국이름이 차례대로 안두화, 감부열, 권세열이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이었고, 전쟁기 구화활동을 전개했던 중심 인물이었다. 안전을 위해 가족은 모두 일본 후쿠오카로 보내고 본인들은 한국에 남아 구호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들은 긴급구호 프로그램을 만들고 실행했다. 이제 이들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