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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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거제리에서 포로들을 대상으로 구호 및 선교활동을 전개한 또 한 사람이 윌리엄 치솜(William H. Chisholm, 1885-1951), 곧 최의손 선교사였다. 미국 미시간주 에머슨(Emerson)에서 1894년 2월 1일 출생한 최의손은 치과의사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해군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의료선교사를 자원하였고, 1923년 10월 9일 부인 베르타(Bertha Cowell)와 함께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평북 선천지부로 배속된 그는 미동병원(美東病院, In His Name Hospital) 제3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1940년 3월 한국에서 떠나기까지 16년간 활동했다. 미국에서 1920년대 이후 신학논쟁이 일어나고 그 결과 북장로교에서 분리하여 1936년 6월 ‘정통장로교’(OPC)가 조직되었는데, 최의손은 1940년 3월 북장로교를 탈퇴하고 정통장로교로 이적하면서 병원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는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던 의사였고, 직접적인 복음전도에 관심을 가졌던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선천과 그 주변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운이 감도는 시기, 출국을 권고 받고 1940년 3월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동병원에서 일하는 기간 동안의 자신의 의료 활동 경험을 나누기 위해 뉴욕에서 발행되던 주일학교신문(Sunday School Times)에 한국에서의 의료 활동에 대한 연재를 한 바 있는데, 이 원고는 1938년 한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그 이후 이 책은 여러 판본으로 거듭 출간되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의 생생한 경험’ Vivid Experiences in Korea이란 책이다. 이 책은 2006년 『청진기와 상경에 담긴 새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역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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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한국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그는 1947년 다시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고 부산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고려신학교와 부민동의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부산에서 포로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구제활동은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는 미약했다. 도리어 의료지원이 그의 중심 사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들을 진정한 형제애로 대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체워 주고자 노력했다. 그의 포로전도에 대해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약 측의 서울 신촌 창광교회의 이병규 목사의 증언이 남아있다. 창광교회의 ‘빛의 소리’ 1996년 5호에 게재된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부산에 체류할 때 최의손 선교사와 더불어 포로들을 위해 전도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6.25 사변 때 포로수용소가 두 곳 있었는데 거제도 거제리라는 곳에 하나 있었고 또 부산 동래 거제리라고 하는 곳에 하나 있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최의손 선교사와 목사님 몇 분이 약 2년간 전도 했다. 그중에 처음에는 다 인민군으로 나왔으니까 믿는다고 하지 못하고 나왔지만 우리가 전도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또 성경책도 많이 배부를 했고 수용소 안에 들어가서 성경공부도 시켰다. 그래서 그분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 석방할 때 한국에 많이 석방돼서 신학교 하고 목사 된 사람도 많다. 포로수용소에서 전도한 보람을 느끼고 있고 여자들도 포로가 있었는데 그분들도 석방이 되어서 전도부인(전도사)으로 일하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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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 7, 최의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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