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으로 유럽이나 미국에 살다보면 누구나 크건 작건 인종차별을 겪게 된다. 인종차별을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기에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게는 못하지만, 일상 속에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차별의 태도를 드러낸다. 하는 사람은 의식하지 못해도 당하는 사람은 그것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는데, 나 역시 독일에 살면서 종종 그런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또 교민이나 학생들 중에는 직장이나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인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인들에게는 자신들의 탁월한 문화가 세계를 주도해왔다는 자만심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고, 그런 우월감은 다른 인종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게 만든다. 2009년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깊은 감회를 말하면서도 미국 사회에서 진정한 인종차별의 치유는 앞으로 100년 안에는 불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그만큼 아직도 인종차별의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종차별은 서양의 백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도처에 인종차별의 흑역사들이 있고, 우리민족도 과거 일본에 의해 심한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 아니 우리들 역시 오늘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에서 자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과거 역사를 보면 이 차별의 선두에 기독교회나 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주의를 앞세우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큰 죄를 범했지만, 이것은 그들만의 죄가 아니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인들 속에 뿌리 깊이 내린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였다.
초대교회 시대에 기독교를 박해했던 유대교인들은, 밀라노칙령 이후부터는 기독교인들의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 중심의 단일사회였던 중세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끝까지 개종을 거부하고 자신들끼리 모여 게토를 이루며 살았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조소와 증오는 문학작품들에도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글에도 담겨있다. 이후 유럽이 근대화되고 다원화사회로 변모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게토에서 나와 사회로 진출했고, 과학과 학문, 예술과 경제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또 다시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천년을 이어온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폭발한 것이 인류사에 가장 커다란 오점으로 남겨질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그것이 독일의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은, 당시 이 나라가 시민정치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해서 선동정치가 가능한 정치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과거 유대인뿐 아니라 흑인이나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그에 따른 증오와 폭력에 앞장선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차별의 근거를 성경 속에서 찾으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자신의 신앙 속에는 그런 그릇된 면이 없는가를 돌아보도록 가르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