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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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25 전쟁과 귀국, 경남구제회 설립  

그는 1951. 1. 9일 미국 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렸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지부 구제위원회를 만들어야 했다.

이미 미국의 교회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영창을 한국으로 보내면서 전란중인 한국에 구호물자를 조직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서둘러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미국의 지부격인 대한민국 경남지역 총무직에 임명하였다.(김은식, ‘장기려-우리 곁을 살다간 성자’ 봄나무 2006, 60쪽)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지부 총무로서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을 만나 지속적인 구호품 획득과 분배를 위해서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 내 구제위원회 설치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개설함과 동시에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만든 이유는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미국교계의 요청 때문이었다. 귀국당시 미국교계는 한국 원조를 위한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한국지부 총무(한국 대표자)로 이미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던 것은 6.25전쟁으로 공산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었고 남은 지역이 경남(부산시와 분리하기 전)뿐이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미국지부였던 셈이다.

 

5) 복음진료소 설립(초대원장 차봉덕)

도착하자마자 불과 1주일 만에 경남구제회를 만들고 동시에 복음진료소를 개설했다는 것은 전영창이 얼마나 그 당시 상황을 엄중하게 보았고 바쁘게 일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서 모금해 온 구호기금 5,000불로 처음에는 항생제를 구입하여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부산에 상주하고 있던 노르웨이 구호담당 책임자인 넬슨을 만났다. 그런데 넬슨은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조그마한 의원이라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즉시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며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난 의사가 차봉덕이었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대표: 전영창, 34세)는 미국교회의 요청으로 설립했고, ‘복음진료소’(원장 차봉덕)는 한국의 필요 때문에 개원한 것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는 의료복지사업을 하기위한 사회복지법인체와 같은 것이고, ‘복음진료소’는 그 사회복지법인체의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의료기관인 셈이었다.

전영창은 귀국 후 단 1주일여 만에 경남구제회와 복음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하고 복지기관과 의료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전영창이 내걸었던 복음병원 원훈은 <1. 치료하는 병원, 2. 전도하는 병원, 3. 교육하는 병원>이었다. 이는 훗날 지금의 고신의료원(치료), 원목실(전도), 의과대학(교육)으로 잘 발전해 왔음을 볼 때 전영창의 설립비전과 꿈이 얼마나 크고 정확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6) 장기려 박사 초빙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시작된 복음진료소는 밀려드는 환자들로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로는 외상환자들 치료나 수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를 만나 외과의사의 필요성을 의논했고, 마침 제3육군병원에 외과과장으로 부임해 와 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받았다.

1951. 6. 21일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님을 모시고 김상도(복음의원 원목, 경남구제회 회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장기려를 찾아가 복음진료소 사정을 말씀 드리고 병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장기려는 흔쾌히 수락했고 6월 30일 사직을 하고 1941. 7. 3일 복음진료소로 부임 했다. 이때부터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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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고신대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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