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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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홈쇼핑에서 (코로나가 끝나면 사용할 수 있는)베트남 여행 패키지를 판매했는데 매진되었습니다”

뉴스에서 들리는 홈쇼핑 여행 완판 소식은 코로나 때 문에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소비로 나타난 대표적인 예시이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1-2 시간 줄을 서는 풍경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이는 맛집 소식은 코로나로 인해 마음껏 외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외부로 나가며 거리낌 없이 식당을 이용하는 음식 소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위드 코로나로 인해 2년 만에 단계적으로 일상을 회복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보복소비’이다.

보복소비란 외부요인에 의해 억눌렸던 소비가 보상심리에 따라 한꺼번에 분출되는 현상으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소비가 급감했다가 위드 코로나가 되면서 갑자기 확 느는 것을 말한다. 이커머스 업체가 발표한 11월 행사 기간 판매 증감률에 따르면, 현재 우리 사회는 보복소비로 인해 11월 매출이 올 초에 비해 적게는 40배 많게는 70배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었던 소비욕구가 완화된 코로나 단계에 맞춰 한꺼번에 터졌다고 볼 수 있다.

약 2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하고 싶었던 것을 절제하던 삶에서 위드 코로나 전환으로 인해 자유로워 진 것은 좋지만, 무분별한 보복소비의 형태를 비롯한 지금 나타나는 현상들이 바람직한 것인지 방향은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보복심리 현상으로 코로나19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자발적’이었는지, 아니면 ‘수동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자발적 참여의 특징 중 하나는 억눌리는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기쁨과 헌신의 자세로 섬기기에 마음에 눌림이 없는데, 수동적이거나 타의로 섬기는 사람들은 불만과 불평이 마음의 씨앗으로 남아 있다. 이런 현상은 처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일이 끝나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 도출되는 법이다.

우리가 2년 동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거리두기’ ‘집합금지’ 등 방역 조치들에 기꺼이 협조했지만, 이 협조가 ‘자발적’이었는지 ‘수동적’이었는지 보복소비 현상으로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 마음에 억눌러져 있는 감정들, 억압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의식 속에 소비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코로나19로 인한 눌림이 이번 현상을 시작으로 조금씩 발생할 텐데 이를 사회는,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보듬어줄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둘째, 절제의 이유는 근본적으로 나를 살리기 위함이다. 보복소비 현상을 보며 우리는 역설적으로 절제의 필요성을 느낀다. 한쪽으로 쏠린 생각, 행동 등에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이 절제이다. 보복소비 현상이 오래 가면 이 또한경제에 또 다른 문제점들을 야기 시킬 것이다. 소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절제가 필요한 원인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셋째, 지금 예수님이라면 이런 시대적 변화 앞에 어떻게 행동했을까? 예수님 시대에도 사회적 흐름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주도하기도 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 행위를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으셨다. 변함없는 복음을 가지고 변하는 세상 속에 스스로 기준이 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관심이 오직 세상의 흔들림에 집중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믿음을 붙들고 진리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아 방향에 맞게 걸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보복소비와 함께 ‘현재 우리의 자세’ ‘절제의 필요성’ ‘예수님의 기준’을 잘 생각해 위드 코로나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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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보복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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