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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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에는 당시 수상이었던 헬무트 콜의 역할이 컸다. 그의 정치적인 판단력과 추진력 그리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소련으로부터 통일의 동의를 받아낸 외교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분명 1989~90년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독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결국은 통일을 이끌어낸 보수당(기민 기사 연합) 콜 수상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기반은 이미 1969~74년 서독의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빌리 브란트에 의해서 닦여졌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20년간 장기 집권한 보수당은 동서독의 관계에 있어서는 초대수상 아데나워의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힘의 우위로 동독을 고립시키려는 정책이었고, 그 밑바닥에는 동독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이념대결을 펼치려고 하는 냉전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좌파정권인 사민당의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이런 대결정책은 평화공존의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브란트는 좌파였지만, 소련의 체코 침략과 베를린 봉쇄에 대해 강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반공주의자라고 자처했다. 집권 후 그는 소위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로 냉전과 분단을 극복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동독의 공산정권과 대결하고 힘의 우위로 눌러서는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동독뿐 아니라, 동유럽과도 수교하고 정상외교를 가졌는데 폴란드 방문 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사죄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참회뿐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위한 의지를 드러낸 행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서베를린 시장이었을 때부터 공산정권의 경직된 속성을 잘 아는 브란트는 동서독의 관계에서 통일보다는 ‘분단의 평화적인 관리’를 앞세웠다. 동서독의 분단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체제와 국가를 인정하면서 둘 사이에 평화적인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자는 것이다. 그가 통일을 앞세우지 않은 것은, 이미 서독의 경제력과 국력이 동독을 월등히 앞지른 가운데서 서독이 말하는 통일은 자칫 동독정권의 붕괴를 전제하는 공격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2년 동서독간 기본조약을 맺었고, 이것은 이후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양독간에 화해와 협력의 제도적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 기본조약 하에서 동서독은 서독주민의 동독방문, 서신교류와 경제협력, 문화 교류, 동독주민의 서독방송 시청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를 증진시켜나갔다.

이러한 동방정책은 브란트 이후 중단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같은 당의 슈미트 수상은 브란트의 좌클릭에 대해 서유럽국가들이 의구심을 갖자 약간 우클릭하면서 서방진영을 아우르며 이 정책을 이어갔다. 그 이후에 들어선 헬무트 콜의 우파정권도 동방정책을 중단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동구권과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신뢰를 쌓더니 마침내 독일통일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념대결에서 평화공존으로 전환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훗날 독일통일의 기초가 되었고, 통일정책을 정쟁의 도구로 악용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이어간 독일의 성숙한 정치가 통일을 향한 대로를 닦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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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야기]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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