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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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교회는 근대 역사에서 독일국가와 함께 많은 잘못과 시행착오를 범했다. 한편으로는 국가의 일에 무관심하면서 그릇된 정치를 방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독교신앙과 동일시하면서 교회를 정치화시켜 정권의 도구로 만들고 말았다. 1차 대전에서는 당대 독일 신학계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대거 황제의 전쟁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의 원흉인 히틀러가 1933년 반자유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표방하며 집권하자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독일그리스도인’이라는 교단까지 만들어 히틀러의 유대인말살과 전쟁정책의 후견인이 되었다.

패전 이후 독일교회는 불의한 전쟁들에 앞장섰던 자신들의 과오를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평화를 교회가 지향해야할 가장 소중한 사회윤리적인 방향키로 삼았다. 교인들에게 평화를 설교하고 자녀들에게 평화를 교육하며, 국가에는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요구했다. 이런 독일교회의 단호한 평화주의적 태도가 독일통일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독일은 전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된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고,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장벽은 이 냉전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이런 가운데 평화를 앞세웠던 독일교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냉전논리에 일방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도리어 동서화해와 이념갈등의 극복을 위해 힘썼다.

1945년 동서독 분단에도 불구하고 양쪽 교회들은 1969년까지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라는 하나의 조직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서로 간에 많은 만남과 교류를 추진하였고, 하나 됨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들의 노력은 자연스레 통일을 갈망하게 했다.

이것을 경계한 동독정권은 1969년 동독교회를 EKD와 분리시켜 동독개신교연맹(BEK)이라는 이름으로 묶으면서 서독교회와의 교류를 단절시켰다. 아울러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원이 되지 못하게 하는 등 무언의 압력을 통해서 동독교회를 고사(枯死)시키는 정책을 펼쳐갔다. 수많은 교인들이 이탈하는 가운데 교회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의 교회들은 자신들을 소위 ‘사회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 칭하면서 사회주의와 공존과 비판을 겸하여 갖는 교회로 조심스럽게 자리매김을 했다.

이때 서독의 교회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다. 얼마든지 색깔론을 뒤집어씌워 동독교회를 빨갱이교회로 매도하면서 교류를 단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냉전시대에는 그렇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독교회는 그리하지 않았다. 동독교회를 비난하거나 매도하기보다는 사회주의 독재정권 아래서 취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동서독 교회의 관계를 ‘특수한 공동체’(Die besondere Gemeinschaft)라 부르면서, 주어진 상황에서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했다.

이것은 서독교회가 자신을 ‘자본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계를 절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정치이념을 뛰어넘어 서있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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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야기]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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