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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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총신대학교가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6.25 전쟁기에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배경에서 설립되었는가를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비록 총회신학교가 대구에서 개교했지만, 전쟁기였고 한국교회와 부산 지역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총회신학교 설립과 신학교육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 기록했지만 1946년 6월 조직된 남부총회는 1940년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총회 인준 직영신교로 결의했고, 1948년 6월 설립된 장로회신학교도 1949년 4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35회 장로교총회에서 총회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결국 총회 안에 두 직영 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양 학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을 둘러싼 대립이나 경쟁은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경직 목사의 제안으로 총회에 ‘신학교합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35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합동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합동이 성사되지 못했다. 특히 조선신학교 측의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1951년 5월 부산중앙교회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속회)에서는 조선신학교측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 신학교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는 53:3이라는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제36회 속회 총회기간인 5월 30일 부산 중구 보수동에 위치한 광복교회에서 권연호 목사를 이사장으로, 노진현 목사를 서기로, 김광현 목사를 회계로 하는 이사회를 구성하고 신학교 설립을 협의하였고, 그해 7월 25일 대구고등성경학교에서 모인 제2차 이사회는 총회신학교를 대구에서 개교하기로 결의하였다. 교장과 교수 선임에 대하여는 장시간 논의하였는데, 조선 신학교의 반발을 고려하여 박형룡 대신 감부열 선교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였다. 교수로는 박형룡, 권세열, 김치선, 계일승, 한경직, 명신홍 목사, 그리고 인톤(William Linton), 조하파(Joseph Hooper) 선교사를 선임했다. 이런 준비를 갖추고 1951년 9월 18일 화요일 ‘총회신학교’가 대구 대신동의 서문교회당 하층에서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가 합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실제적으로는 박형룡이 교장으로 있던 장로교신학교가 이름만 바뀌어 재 개교한 것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총회 결의에 따라 장로회신학교를 해체하고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자 부산진교회에서 수업하던 신학생들은 다시 대구로 몰려들었다. 강계찬, 손영섭 같은 이들도 부산에서 한 학기 마치고 대구로 갔다. 결국 부산진교회에서 시행된 신학교육은 한 학기로 끝나고 만 것이다.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개교할 당시 신학생 수는 200-300명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500여명에 가까운 많은 학생들이 몰려 왔다. 감부열 교장의 지적처럼 ‘총회신학교는 나면서부터 성인이었다.’ 교사가 부족하여 대구 대신동에 있는 안두화 선교사 쓰던 집을 기숙사와 사무실로 사용하고, 서문교회 외에도 남산교회 건물을 교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개학 당시 상황에 대해 권세열 선교사(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가 대구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과 함께 개교하였다. 그 학생들 중 반수 이상의 학생들의 아버지나 형제들은 순교당하였거나 가족이 이산(離散)된 이들이며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다. 학생들은 교회 건물을 임시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며 공부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과 공부 외에도 교수의 지도하에서 노방전도, 개인전도, 교회심방, 병원과 교도소 방문 등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 교회를 개척하고 성경구락부에서 아동들을 가르치고 있다.”

총회신학교가 1952년 5월 개학했을 당시 재학생은 494명에 달했는데, 이중 여학생이 74명이었다. 이를 보면 반 조신(反 朝鮮神學校)의 범 보수적 환경이 압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김재준 목사가 신학적인 문제로 총회에서 제명되자, 결국 조선신학교 측은 1953년 기독교장로회로 분립하게 된다. 대구에서 시작된 총회신학교는 서울 수복 후 서울 남산의 옛 조선신궁 터의 남산교사로 이동했고, 1953년 8월에는 감부열에 이어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당면과제는 교육부로부터의 인가와 교사의 건축이었다. 그래서 1954년부터 이를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박내승을 총무과장으로 임용했다. 그러나 그가 신학교 건축기금으로 모아 둔 3천만 환을 사기한 사건이 발생하여 총회는 내분에 휩싸였고, 결국 1959년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물론 다른 원인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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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에서의 신학교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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