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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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교회들이 동독개신교연맹(BEK)으로 분리된 후, 서독교회는 주어진 상황에서 동독교회와의 협력과 연합을 위해 노력했다. 먼저 동독교회와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같은 예전을 지키면서 비정치적인 분야에서의 연합을 통해 한 교회로의 동질성을 유지해가려고 힘썼다.

아울러 성경적 가치를 앞세워 평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여기에 동독교회의 동참을 유도했다. 서독교회는 1958년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 총회에서 핵무장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1970년대를 지나면서 철저한 반전, 반핵의 입장을 취함으로 핵 평화주의를 그리스도인의 평화사역으로 받아들였다. 바르사와 조약국들이 소련의 핵미사일로 무장하자,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1979년 퍼싱 II 중거리 미사일을 독일에 배치하려고 했다. 이때 서독교회는 이러한 핵무기 배치에 단호히 반대하면서 평화운동을 벌렸다. 같은 시기 동독의 교회들 역시 동독내의 핵무기배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서독교회와 함께 반핵평화운동에 동참하였다.

아울러 서독교회들은 동독교회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존립하도록 도와주었다. 분단 이전부터 독일교회는 교회세라는 제도를 통해 교인들로 하여금 헌금하게 했고 이것이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각 교인들의 직장에서 교회세를 징수하여 교회에 보내주는 일은 국가 세무서가 하는 등 이 제도는 국가기관의 협조가 전제되었다.

그런데 동독공산정권은 이 교회세 징수를 거부했고, 그러다보니 동독교회는 구조적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교인은 공산당원이 될 수 없고, 공산당원은 교인에 가입할 수 없는 등의 제도 하에서 교인 수가 급감한 것도 동독교회 재정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동독교회를 위해 서독교회들이 재정지원에 나섰는데, 대략 세 개의 서독교회가 한 개의 동독교회 목회자 생활비와 교회운영비를 지원했다. 그 결과 교회가 문 닫기를 바랐던 사회주의정권 아래서 동독교회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훗날에는 이 동독교회들이 동독정권에게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서독개신교회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시간이 가면서 서독과 동독 양정권의 신뢰를 얻어갔다. 그러는 가운데 서독정권이 동독주민의 인권을 위해 전개한 프라이카우프(Freikauf)의 다리 역할을 요청받게 되었다. 이 프라이카우프는 동독이 자신의 감옥에 수감 중인 반체제인사 즉 정치범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서독으로 보내는 것이었고, 서독은 이에 상응하는 돈을 동독에 지불하는 거래였다. 실제로 이 프라이카우프를 통해 1962년부터 1988년까지 정치범 3만 3천여명과 그 가족 25만여명을 서독으로 데려왔고 이를 위해 서독은 약 1조 8천억 원 상당의 금품을 동독에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독정부의 대내외적인 입장을 고려해서 아주 비밀리에 진행해야했다. 그러므로 양쪽 정부는 이 일을 서독의 개신교회에 부탁했고, 교회가 그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것은 서독교회가 그만큼 그 사회 속에서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통일의 가교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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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야기]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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