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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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교회가 동독교회와 ‘특수공동체’로서의 동역관계를 유지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동독교회는 인동초와 같이 외적인 억압을 이겨내며 서서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독교회들은 동독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목회자들이 인권과 민주를 앞세우면서 반정부집회와 사회개혁의 리더가 되었다. 2017년까지 독일대통령직을 맡았던 가우크(Gauck) 역시 과거 동독의 개신교 목회자이며 인권운동가였다.

 

특별히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이교회에서 1982년부터 매주 평화를 위한 기도모임이 열렸다. 당시 이 기도모임을 주도했고 2015년 내한했던 보네베르거 목사에 의하면, 1982년에 시작한 월요기도회에서는 반전운동을 비롯해 인권, 여성, 환경 문제 등에 대한 기도가 드려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니콜라이교회 월요기도회에서는 기도만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은 ‘교회’라는 지붕 아래서 동독 독재 정치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냈고, 정치적 이슈를 놓고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니콜라이교회를 비롯한 동독의 개신교회는 동독의 민주주의를 키워가는 중요한 모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집회는 1989년부터는 무언의 촛불시위로 발전해 갔고, 그 수가 점차로 늘더니 마침내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는 당시 동독 수상인 호네커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니콜라이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촛불시위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공산정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결과를 기대하면서 선거일정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동독 국민 다수가 서독과의 즉각적인 통일을 앞세운 정당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새로운 동독정권은 서독의 콜정권과 통일을 위한 합의과정에서 서독 마르크와에 비해 1/4가치 밖에 되지 않았던 동독 마르크화를 1:1로 교환하기로 하고, 동독주민을 서독의 사회복지제도에 편입시키는 등 동독에 유리한 결과를 도출해 내었고, 결국 1990년 합법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동서독의 통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동독 정권이 와해되고 그래서 서독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흡수된 그런 흡수통일이 아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약 1년 후에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동독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즉각적인 통일을 선택했고, 그러한 민의를 바탕으로 양쪽 정권이 합의하며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동독의 민의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동독의 개신교회였고, 그것을 또한 가능하도록 도와준 것이 서독의 개신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 통일에 있어서 서독교회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고, 그것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서독교회는 인내와 포용의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한다. 당시 동서독의 상황과 현재 남북한의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서로가 이념에 의해서 너무도 다르게 변해버렸다는 것은 공통된 것이다. 그 서로 다른 국가가 다시 하나로 합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자칫 경직된 정치이념에 물들어버린 교회는 통일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서독교회의 역할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한국교회가 통일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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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야기]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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