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서임중 목사.jpg

 불혹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고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무엇부터 담임사역을 시작할까 생각하면서 첫 심방을 교회 성도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영세민 아파트 거주 가정부터 심방을 시작했다. 그 시간들 가운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10평이 안 되는 방 한 칸에 대여섯 식구가 사는데 가장(家長)이 지체장애인이라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한 가정을 심방할 때면 으레 준비한 찬송가와 성경본문으로 시작을 하지만 이 심방은 형식을 깨고 먼저 그 한 가정 한 가정을 통해 30 여분 가량 이야기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들의 아픔을 듣고 나누며 함께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돌아온 날이면 늦은 밤까지 기도실에서 침묵으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작한 목회 사역 1호가 사랑의 주일이었다. 1년 중 다섯 번째 주일이 있는 주일을 ‘사랑의 주일’로 명명하고 특별헌금을 하여 소외계층을 돕는 사역으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2호 사역이 장애인 초청주일이었다. 포항시내 여러 장애인단체와 연결하여 매년 4월 셋째주일에 1천여 명의 장애인을 초청하여 함께 하는 위로와 희망의 날이었다. 이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함께’라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역 중 하나다. 이어서 세계선교위원회를 발족하여 44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16개 국가에 협력선교를 하며, 국내 선교의 일환으로 9개 교회를 개척설립하고, 택시 타기 주일, 천사운동, 합동결혼식, 동호인선교회, 사랑의 순교현장, 목회자 세미나, 장학위원회, 노인대학, 여성대학, 100여 곳 미자립교회 후원, 중앙장터, 재활용센터, 만나의 집, 중앙도서관, 월간목회 보내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영세가정 후원, 다문화가정 후원, 청소년 공부방, 선한이웃 진료소, 엘림복지재단 설립 운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회 문화선교 연구소를 건립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던 중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업의 중심은 ‘작은 자’였다. ‘작은 자’란 누구인가?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작은 자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비교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곧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성경은 어디서도 비교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그 존재로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창세기 1:1절의 창조가 ‘빠라’ 곧 무에서 유의 개념이고, 창1:21절의 창조가 개조창조이며, 창1:27절의 인간 창조가 모방창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과 무진장의 가치성과 유일한 독특성이 인간 창조, 곧 ‘야차르’의 내용이다. 곧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유일한 독특성을 지닌 것이다. 높고 낮음, 잘나고 못남은 나의 상(想)이 상(像)을 만들어 낸 인식의 차이다. 즉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내 인식이 상대방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물은 흰색인데 파란 안경으로 보면 파랗고 빨간 안경으로 보면 빨간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이다. 여기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개념이 성립되고 그리할 때 인간관계가 원만해지는 것이다. 즉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삶이 연주되는 것이다.

 

 4월을 보내면서 포항중앙교회 장애인 주일 설교를 하고 귀가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장애인 초청 주일’ 행사는 하지 못했지만 성도님들에게 장애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사랑의 관계는 잊어도 잃어도 안 됨을 역설했다. 아직도 곳곳에서 장애인들을 비교법으로 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정신적 장애인이 되는 것인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상이 누구이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3가지 비유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셨다. 첫째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 자세를 열 처녀 비유로 깨우쳤고, 둘째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로 달란트 비유를 하셨으며, 셋째는 심판에 대한 비유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셨다. 그 말씀의 절정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구체적인 표현을 하면서 ‘작은 자’를 사랑하고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교훈하셨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와 불순종하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양으로, 불순종한 사람을 염소로 비유했다. 그리고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분류를 하고 오른쪽에 축복을 왼쪽에 저주를 선언하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주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내가 주릴 때에, 내가 목마를 때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내가 벗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함께 해준 사람들과 외면한 사람들을 분류하고 축복하고 저주하셨다. 오른편 사람들이나 왼편 사람들이 공히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결정적인 말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하지 아니한 것이, 나에게 한 것,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작은 자는 누구이며 나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현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현재 내가 만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다.” 그 사람이 작은 자다. ‘헤밍웨이’는 선에 대하여 “뒷맛이 좋은 것”이라고 갈파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뒷맛 좋은 삶을 사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작은 자가 누구인가?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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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작은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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