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6(화)
 

서임중 목사.jpg

 제 8대 6.1 지방선거가 끝났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거도 희비의 쌍곡선을 긋는다. 이즈음이면 먼저 떠오르는 사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있다. 승패야 선거의 결과지만 과정을 지켜보면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이기기 위하여 분수를 잊고 도를 넘어 난장판이 되는 경우는 이젠 식상하기까지 하다. 8대 지방선거의 선거운동도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추태는 여전했다. 그러기에 역대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고 언론은 ‘정치무관심증의 국민정서’라고 평했다.

 4년전 지방선거결과의 지형은 한반도가 ‘파란색’으로 뒤덮였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오늘에는 붉은색으로 그 지형의 색상이 바뀌었다. 그냥 모든 것이 헛웃음만 나오는 한국정치의 단면도를 보면서 마음이 슬프다. 여러 평론 가운데 패자에 대한 언론보도의 머리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명분 없는 출마, 이변 없는 패배, 빛바랜 희생론, 반성 없는 사과>라는 내용의 제목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부분의 내용은 <내 탓이오>는 보이지 않고 <네 탓이오>였다. 선거 결과는 승패를 따라 희비가 이어지겠지만 승자가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가 승자를 축복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은 아직도 피지 않음에 국민은 아파한다.

 ‘명분(名分)’이란 ‘신분이나 이름에 걸맞게 도덕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명분을 거꾸로 읽으면 분명이다. 분명이란 틀림없이 반듯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정시(正視), 정사(正思), 정언(正言), 정도(正道), 정행(正行)이 일상이 된다.

 사람마다 삶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이 좌우될 수도 있다. 곧 흥망성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시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촌음(寸陰)을 아껴 쓴다. 신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범사가 힘들어도 신의(信義)를 생명처럼 여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팔아먹는다는 속언(俗言)이 있다. 사랑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죽는 것 또한 행복으로 여긴다. 권력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당연시한다. 명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대의(大義)를 생명처럼 여긴다. <명분 없는 출마, 이변 없는 패배, 빛바랜 희생론, 반성 없는 사과>를 읽으며 가슴 아픈 싸한 통증을 쓸어내린다. 어느 때보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즉사생(必死卽生 必卽死生)>의 명언이 생각난다.

 공자보다 약 100여년쯤 후의 인물로서 맹자처럼 전국시대에 활약한 사상가 장자는 호방자재(豪放自在)한 명문(名文)으로 장자 33편을 남겼다. 각의편에서 장자는 이렇게 깨우쳤다. ‘衆人重利 廉士重名 賢士尙志 聖人貴精, 즉 대중들은 이익을 중시하고, 청렴한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존중하여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명예와 염직(廉直)을 중시하며, 현인들은 높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중시하며, 성인들은 정(精) 곧 정신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며 깨끗하고 맑고 참되고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을 뜻하는 문장으로써 이를 중시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가?

 

 무슨 일에든지 유혹이 있다.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명분을 중시함으로 유혹을 극복하지만 명분을 중시하지 않으면 온갖 유혹에 스스로의 삶을 무너뜨리게 된다. 가인은 장자의 명분보다 팥죽 한 그릇을 중시했고, 엘리는 제사장의 명분보다 패역한 아들들을 중시했다. 삼손은 사사의 명분보다 들릴라의 악한 꾐에 넘어갔고, 발람은 발락의 물질에 현혹되어 넘어졌으며, 웃시야는 직분의 명분보다 분향에 유혹 되었고, 가룟 유다는 제자도의 명분보다 은 30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넘어졌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명분을 중시했던 노아는 세상즐거움을 거절했고,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으며, 다니엘은 고량진미(膏粱珍味)의 유혹을 거절했고,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거절했다. 무엇을 중히 여기는가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판가름 난 역사의 교훈이다.

 은퇴 후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자비량집회를 인도하면서 후배들의 목회현장 아픈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 즉 명분 없는 논쟁에 지치고 사사로운 감정에 대의를 접어야 하는 일들을 겪을 때는 성의(聖衣)를 벗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십일조라면서 매월 1천원을 하면서 목회걸림돌 역할을 하다가 항존직분 피택 조건에 교인의 의무조항에서 십일조를 했다는 경우, 설교하고 강단을 내려오는데 국문학적으로 볼 때 어순도 맞지 않아 듣기 힘들었다는 경우, 봉고승합차를 운행할 때는 열차의 운임은 거리의 함수를 이야기하면서 매월 주행거리와 주유금액을 계산하는 경우, 교인들 가정 심방이나 길흉사를 집례한 후 사례비를 받은 것은 목자가 아니라는 경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명분 없는 논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이 없다는 아픈 이야기들이다. 소리 없는 한숨과 젖어드는 눈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동일한 한 마디로 권고해 준다. “그래도 목사는 채찍질 당하면서, 얼굴에 침 뱉음의 수모를 당하면서,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도 또 일어나서 골고다를 향해 한 걸음씩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목사의 명분입니다.” 듣는 목사님들 대부분은 흑- 하면서 엎어지기도 하고 유구무언이 되어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그렇다. 세상적인 모든 것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기 義가 기준이 되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명분을 깨닫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만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았던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잠깐 후면 아무것도 아닌 좁쌀만 한 작은 무엇 하나를 갖고 안하무인, 오만불손, 경거망동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가르침을 중히 여겨야 한다. 이해하고 관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복음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명분을 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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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무엇을 중히 여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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