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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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기간 중 부산에서 시작된 두 가지 사역은 회개와 자숙을 포함한 거 교회적 구국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대한민국을 공산지배로부터 보호하며 전쟁의 승리와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하는 구국운동이었다. 또 이 시기 시작된 군목 활동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지 부산에서 거 교회적 기도운동 그리고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긴 후 후퇴를 거듭하여, 대전(1950. 6. 27), 대구(7. 16)를 거쳐 8월 18일부터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대구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가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가자 부산에는 각처로부터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피난민들의 도시가 되었다. 1951년 8월 당시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은 380만 명, 가옥과 재산을 잃은 전재민은 402만 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피난처가 부산이었다. 부산은 피난민들의 도피처였고 신자들에게는 이른바 ‘의의 피난처’였다.

 그런데 부산의 초량교회와 중앙교회 등에서 기도회가 개최되고 회개운동이 전개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는 한상동 목사와 친분 있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해방 후 교회 쇄신운동을 지지하던 이들이 주로 회집했고, 부산중앙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그 외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회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서 회개와 자성이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기도회 혹은 구국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때는 서울이 함락된 후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부산과 그 인근지역만이 적의 수중에 놓이지 않았던 위난한 때였다.

 이때의 기도회를 혹은 ‘회개기도회’ ‘회개운동’ 혹은 ‘구국기도회’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피난 해 온 성도들, 그리고 피난교역자들이 포함된 회개집회 및 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이름 그대로 전란(戰亂)에서 나라를 구해 달라는 ‘구국기도회’였다. 전자의 경우 중심지역이 초량교회였고, 후자의 중심교회가 부산중앙교회였다. 물론 이 두 기도운동을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전시 하에서의 기도회가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한 기도가 제외될 수 없었고, 구국기도회에서도 회개와 자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초량교회 양성봉(梁聖奉) 경남도지사가 부산 초량교회 장로였으므로 초량교회에는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기도회는 1950년 8월 말 시작되었는데, 집회시간은 일주일로 하되 새벽기도, 낮 성경공부, 저녁 집회로 진행되었다. 김치선, 박윤선, 박형룡, 한상동 목사가 강사였다. 오종덕 이학인 목사 등도 설교자로 동참했다. 이 집회의 모든 경비는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가 부담했다.

 이 비상기도회에서 특히 박윤선 목사가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설명하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해방 후의 교회 분열과 대립, 그리고 신자답게 살지 못한 일에 대한 회개와 통회 운동이 일어났다.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날 새벽기도회 담당이었던 나는 설교도중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대해, 즉 그가 총회석상에서, 만주에서, 옥중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사실을 증거 하였다. 그 시간에 나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직접 들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였다.” 이 때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교역자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회개하는 기도로 이어져서 그 집회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설교하는 나 자신부터 내 죄를 회개하면서 증거 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즉 나도 단 한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이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적으로 고백하였던 것이다.” 원래 기도회는 1주일간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집회의 연장을 원했다. 그래서 집회는 일주일 연장되었다. 이때는 부산만이 아니라 울산과 온산 지방 교역자들도 합류한 가운데 계속되었다. 부산중앙교회에서의 기도회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고, 박형룡은 이곳에서도 강사로 활동했다. 초량교회에서의 약 2주간에 걸친 기도회가 끝나는 날 신문 호외가 배포되었는데, 인천 상륙작전 성공을 알리는 호외였다.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성공률 5천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라고 믿었다. 1.4 후퇴 이후에도 부산에서는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초량교회에서의 나라를 위한 기도회는 수일간 계속되었다.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 이승만 대통령이 초량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기독교인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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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기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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