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0-0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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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목제도의 시작

6.25전쟁은 한국군 내의 군목(軍牧) 병과를 설치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시작된 군목 제도는 이후 한국교회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의 군목 제도는 전적으로 미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전쟁으로 미군과 함께 군목이 복무하게 됨으로서 한국군에도 군목 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군 선교를 제일 처음 고려한 이는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손원일(孫元一, 1909-1989) 제독이었다. 감리교 손정도(孫貞道, 1882-1931) 목사의 아들이기도 한 손 제독은 전쟁 전인 1948년 해군에서 정훈 장교 형식으로 착수하게 한 바 있으나 공식적인 병과를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발하여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교회지도자들의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이 기도운동과 함께 군에서의 목회 혹은 정훈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 손원일 제독과 교회 지도자들은 군목제도를 청원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군목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상의한 견해가 있지만, 전쟁 기간 중 군목제도에 대한 복수의 청원이 결국 군목 병과를 시작하는 배경이 된다. 군목 제도는 1950년 11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훈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이전인 1950년 8월 피난지 부산에서 교계 대표들, 곧 한경직 박종율 박치순 유형기 목사 등이 모여 군목 임명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이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언하였다. 1950년 9월에는 선교사 신분으로 미군 군종부 문관으로 임명된 캐럴(George Carroll) 신부와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쇼(서위렴, William Show)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종 제도 창설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미군 극동사령부 군종과장 이븐 베넷(Ivan L. Bennett) 목사는 미군과 한국정부 사이의 가교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50년 8월 1일부터 미군 군종부 문관으로 활동한 이들은 신성모 국방장관, 그리고 국무총리를 방문하여 군종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적극적인 협력을 얻었고 9월 5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군종제도 창설에 대해 청원하였다. 9월 18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대표들로 ‘군종제도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천주교의 캐럴 신부와 장로교의 한경직, 감리교의 유영기 목사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들 대표들은 19일 대통령을 면담하고 6.25 전쟁은 사상전이므로 정훈활동이 필요하고 미군이나 유엔군과 같은 군종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회 지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그 필요성을 공감하고 1950년 11월 21일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에게 군목제도 설치 훈시를 내렸다고 한다.

대통령의 훈시에 따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군목제도를 창설하게 했고, 결국 1951년 2월 7일 군목제도가 시작되었다. 당시 군 예산이 부족하여 피복 식량 등 병참 관계는 군에서 담당하되 군종활동 경비는 파송하는 각 교단이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첫 군목이 박대선, 전종옥, 박치순, 김형도, 윤창덕, 김윤승 등 39명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사와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이들은 4주간의 교육을 받고 1951년 4월부터 각 일선부대와 병원 등에 배치되었다. 제1기 군목인 박치순은 제주 훈련소에서 일했는데, 그가 여기서 처음으로 군인교회를 세우고 군인들의 정신생활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1951년 2월부터 군목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독립된 병과로서의 군종 병과라기보다는 민간인 목사 신분으로 전쟁 중 군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군종의 신분은 현역 군인보다는 문관이 더 바람직하다는 이 대통령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김영환(金英煥), 지송암(池松岩) 두 목사는 전쟁이 발발하자 광주에 있던 제3육군병원을 방문하여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병원장인 장희섭(鄭熙燮) 대령은 이들에게 ‘종군 목사’라는 직함을 주었다고 한다. 정희섭 대령은 목사의 아들로서 군선교 활동을 가능하게 했는데, 김인서는 이것이 군목 활동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그 후 장로교의 권연호(權連鎬) 목사와 각 교파 지도자들과 주한 외국 선교부 관계자가 연합하여 외국에서와 같은 군목 제도 창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진언하였고,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여 육군 안에 문관의 자격으로 군목 업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전쟁이 발발하자 복수의 교계 인사들에 의해 군선교를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교회 지도자들과 외국 선교부 관계자들이 군 선교차원에서 군목 활동을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민간 차원의 문관 신분의 군목 제도가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처음에는 무보수 문관 신분으로 군목 활동을 시작했으나 1952년 6월에는 유급 문관으로 격상되었고, 1954년 1월 12일에는 군종을 독립된 병과(兵科)로 인정함으로서 군종감실이 설치되었고, 12월 13일에는 육군에서 군목을 현역 장교로 임관하여 이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2년 초까지 80명의 군목이 각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이중 51.9%가 예수교 장로회 소속 목사였다. 1954년 4월 당시 군목 수는 199명으로 증가했고, 1955년 8월에는 352명을 증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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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군목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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