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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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에 유대인 군목이 부산에 왔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그가 밀턴 로젠(Milton J. Rosen)이라는 랍비였다. 그는 부산에 온 최초의 유대인 군목이었는데, 1906년 러시아가 통치하던 리투아니아(Lithuania)의 빌라(Vilna)에서 6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하여 시카고에 정착했다. 철저한 정통 유대교도였던 아버지는 큰 아들이 미국문화에 쉽게 적응하자 자녀들이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막내인 밀턴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밀턴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면서 토라와 탈무드를 배웠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는 폐렴으로 어머니도 건강을 잃고 사망하게 되자 밀턴은 예루살렘의 디스킨(Diskin) 고아원에서 양육을 받았고, 제1차 대전 후에는 주임 랍비였던 쿡(Kook)과 가족의 도움으로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밀턴이 14살 때였다. 유대인으로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거주한 관계로 그는 히브리어와 이디쉬(Yiddish)어, 아람어와 영어를 알게 되었다. ‘이디쉬어는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사용되던 유대인들의 언어였다. 이런 지역에 살던 흩어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이디쉬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뉴욕에서는 이디쉬어 일간 신문이 발행될 정도였다. 밀턴은 시카고의 해리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였고, 1925년부터 29년까지는 시카고의 히브리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9년 랍비가 되었다. 후에는 메디슨의 위스칸신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학사학위(BA)를 받기도 했다. 곧 사라(Sarah)와 결혼했고, 이후 19년간 정통유대교 랍비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47년 아무런 훈련도 없이 비공식적인 요청으로 미육군 군목이 되었다. 밀턴의 아들 스탠리 로젠의 증언에 의하면 약 10분 정도의 군대식 경례법을 배웠을 뿐이라고 한다. 군목으로서의 첫 임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브래그(Fort Bragg)였다. 이곳에서 장교이자 군목으로 활동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받고 유대인 성직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본에 주둔한 미군 군목으로 배속되어 1948년 1월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에는 러시아와 나치독일을 피해 일본에 온 유대인들이 있어 이들과 접촉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예배당(chapel)을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의 최초의 유대인 집회소(Jewish Chapel)였다. 그는 일본어를 익히면서 유대교를 알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에게도 설교하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하나의 조직체를 구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일유회(日猶會, Japan-Israel Society)였다. 이렇듯 일본에서 군목으로 활동하면서도 이스라엘과 유대교를 소개하던 밀턴은 2년 5개월가량 일본에서 근무를 마치고 1950년 여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의 친구들과 군인들 민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전역에서 38도 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한 것이다. 밀턴 로젠 군목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태평양 선상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 귀국선이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밀턴 로젠의 고국에서의 안식은 길지 못했다. 그는 곧 한국으로 돌아왔고, 앞서 소개 한 바처럼 한국 땅을 밟은 첫 유대인 군목이 되었다.

유대인 군목의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유대인 군목 이야기가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밀턴 로젠은 자신의 일에 대해 과묵했고 자식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사망한 이후 가족들은 밀턴은 정통 유대인의 관점에서 일기를 썼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군목으로 일하는 동안 뉴욕에서 발간되던 이디쉬(Yiddish) 일간지인 Der Morgen Zhornal (Jewish Morning Herald)에 기고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밀턴은 몇 번이나 연제했는지도, 그리고 기고문을 모아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신문은 보관되지 않았으나 이 신문이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되어 미국 유대인 정기간행물 센터(American Jewish Periodical Center)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센터의 도움을 받아 신문을 열람하는 가운데 밀턴은 1950년 11월 10일 한국전쟁에 대한 첫 원고를 기고하였고, 1951년 3월 11일까지 19회 분의 원고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밀턴의 아들 스탠리 로젠은 한권의 책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한국에 온 미국인 랍비’(An American Rabb in Korea)라는 책이다. 필자는 미국 미시간 앤아버를 방문했던 2014년 9월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접하게 되어 약간 비싼 책이었으나 이 책을 샀고, 전쟁기 유대인 군목이 부산에 왔다는 사실을 알 게 된 것이다. 밀턴의 아들 스탠리 또한 정보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했고, 후일 내과의사가 되어 일리노이와 위스칸신주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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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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